사도들을 비롯한 초대 교회의 사람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자 교인이 빠르게 늘어 갔습니다. 교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만, 한편으로 새로운 문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새롭게 일곱 명의 사람들이 뽑혔습니다. 그 첫 번째로 내세워진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교회에는 열두 제자 이외에 이미 훌륭한 인재를 양성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스데반이 박해의 표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9절)
이전에 유대가 로마제국군에 의해 멸망되었을 때 노예로서 외국에 연행되어 고향인 유다를 떠나가야만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몇 세대나 외국 땅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자 일부러 각국으로부터 유대로 돌아와, 귀국한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의 회당을 성지인 예루살렘에 조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의미로 보면, 그들은 유대에 있는 그 어떤 유대 교도들 보다 더 열심이고 보수적인 그룹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기독교 교회의 발전이라는 것은 위험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 나름의 정의감과 사회 개혁 운동 같은 생각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논쟁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0절에 나와 있듯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으니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들이나 장로와 서기관들의 권력자들을 충동시켜 스데반을 잡아 최고 법원인 공회에 넘긴다는 실력 행사로 나왔습니다.
13절,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라거나 14절,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라거나 거짓 증언까지 시켜서 스데반을 테러리스트 취급을 해서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미 무서울만큼 이 공회의 분위기는 거의 스데반의 처형으로 결정되어 가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참으로 얄궂은 이야기입니다. 교회 가운데 문제가 일어나서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사람으로서 스데반이 일곱 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힌 것이고,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유다에 귀국한 사람들의 불평에 대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귀국한 사람들에 대한 전도가 스데반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오직 충실히 섬긴 것입니다.그런데 그게 교회 외부의 사람들이라고는 해도 같이 귀국한 사람들에 의해 위기적 상황에 빠뜨려지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스데반은 살해 당하고 맙니다. 최초의 순교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원인이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스데반이 일곱 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지 않았더라면 여기서 순교하지는 않았을테지요. 더 말하자면, 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나 요한처럼 스데반을 구해 주시지 않으셨을가요? 의문이 듭니다. 그 때, 스데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15절을 보십시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절)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 지켜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의 상황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자기가 그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이미 사형은 결정된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스데반은 말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스데반이 사람이나 사회에 좌우되기보다도 하나님께 좌우되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어 자기를 살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가는 자기의 길이 있고, 거기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변이 모두 다 적이라는 어둠과도 같은 상황 속에서도 스데반의 얼굴은 빛을 띠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까 “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나 요한처럼 구해주시지 않았을까?” 라고 말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은 그 당시의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후의 역사를 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교회의 탄압이 격심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 결과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루살렘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흩어진 그리스도인이 도망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의해 교회의 해외 전도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아마 교회의 지도자들도 교인들도 그 당시 교회에 일어난 문제를 통해서 스데반이 뽑히고, 그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일어난 박해로 인하여 해외에 흩어지게 된 그리스도인이 해외 전도의 길에 착수하게 될 줄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 이후에 이어받은 바울들의 전도로 인하여 교회가 온 세계로 퍼지게 될 줄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이 당시의 그들에게 확실히 알 수는 없었어도,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생각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오로지 충실히 행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에 일어난 문제와 같이 우리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이 생깁니다. 또 외부로부터 초대 교회로 향한 박해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사회 사이에 알력은 생깁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하여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걸맞는 것인지를 생각하여 행동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직무에 충실히 살아 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쓰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실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하여 우리의 신앙의 걸음을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스데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바라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자기에게는 너무 눈부시다고 생각하거나, 여기서 부끄러워하거나, 여기에 와서 사양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의 얼굴이 어두워져 있다면 더욱더 다른 빛으로는 밝아지지 못하는 어둠을 하나님의 얼굴의 빛으로 비추어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장 6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마음을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오는 빛으로 비춰 채워지게 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처럼 힘든 장면이나 상황이 우리에게는 닥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때마다 여러 가지의 레벨에서 우리는 질문 받습니다. 우리의 생애를 마감 할 때, 유언을 남겨야 하는 장면도 언젠가는 각자 인생의 결말에 찾아 옵니다. 그러한 장면이 찾아 왔을 때 우리의 얼굴을 향하는 방향은 이미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보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번 한주도 걸어 갑시다.
【 2020年 6月 2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主の栄光の光を帯びて」 使徒言行録 6章 8~15節
8節、「さて、ステファノは恵みと力に満ち、すばらしい不思議な業としるしを民衆の間に行っていた。」
使徒たちをはじめ初代教会の人々は迫害を受けながらも福音を宣べ伝えました。すると、どんどん人が増えて行きました。教会に人が増えるというのは、大きな力となりますが、一方で新たな問題も生じるわけですね。その問題に対応するために、新たに7人の人々が選ばれました。その筆頭に挙げられるのがステファノです。ステファノは「霊と知恵に満ちた評判の良い人」であったわけですが、教会には十二弟子以外にすでに素晴らしい人材が育ってきておりました。
しかし、そのステファノが迫害のターゲットにされてしまいます。9節をご覧下さい。「キレネとアレクサンドリアの出身者で、いわゆるキリキア州とアジア州出身の人々などのある者たちが立ち上がり、ステファノと議論した。」
かつてユダヤがローマ帝国軍に滅ぼされた時、奴隷として外国に連行され、故郷ユダヤを追われた人々が多くおりました。何世代も外国の地で生活をした人々が奴隷状態から解放されたことでわざわざ各地からユダヤに戻ってきて、帰国組のユダヤ人として、ユダヤ教の会堂(教会)を聖地エルサレムで組織しておりました。そういう意味では彼らは、ユダヤにいるユダヤ教徒たちよりもさらに熱心で、保守的なグループでした。そんな彼らには教会の発展というのは危険視せざる終えませんでした。彼らなりの正義感と世直し運動のような思いがあったのだと思いますが、彼らはステファノに議論を吹っ掛けたのです。しかし、10節にありますように、ステファノが知恵と、霊とによって語りましたので、歯が立ちません。そこで彼らは、デマを流し、民衆、長老たち、律法学者たちなどの権力者たちを扇動して、ステファノを襲って捕らえ、最高法院に突き出すという実力行使に出ました。
13節「この男は、この聖なる場所と律法をけなして、一向にやめようとしない」とか、14節「あのナザレの人イエスは、この場所を破壊し、モーセが我々に伝えた慣習を変えるだろう」とか、嘘の証言までさせて、ステファノをテロリスト扱いし、放ってはおけないと主張したのです。もう恐ろしいことに、この場の最高法院の空気は、ほとんどステファノの処刑ということで決定してしまっている様子です。
それにしても皮肉な話しです。教会の中で問題が起こり、それに対応するための人としてステファノが7人の中の一人に選ばれたわけですが、それは、先程言いました帰国組の人たちの不平に対応するためでした。帰国組の人々への伝道がステファノに与えられた使命だったのです。ステファノは、自分に与えられた職務にひたすら忠実に仕えたのです。それなのに、それが教会外部の人間とはいえ、同じ帰国組の人たちによって危機的状況に陥れられたのです。結果的なことを言いますと、ステファノは殺されてしまいます。最初の殉教者となってしまうのです。その原因が教会にあったのです。もし、ステファノが7人の一人に選ばれなかったのなら、ここで殉教することはなかったでしょう。もっと言いますと、なぜ、神さまはペトロやヨハネのように助けて下さらなかったのか、疑問に思えます。この時、ステファノはどう思っていたのでしょうか?
15節をご覧下さい。「最高法院の席に着いていた者は皆、ステファノに注目したが、その顔は、さながら天使の顔のように見えた。」
ステファノの顔は、さながら天使の顔のように見えたのです。ステファノの顔には、恐れがありませんでした。なぜなら、神さまが共にいて、自分のことを守ってくださるという確信があったからです。ですから、周りの状況に左右されません。ここで自分が何かを話しても、もう自分の死刑は決まったようなものでした。では、なぜステファノは語るのを止めなかったのか? それは、ステファノが人や社会に左右されるよりも、神さまに左右されて生きているからです。人を変え、社会を変え、自分を生かすということよりも、もっと大切な、神さまを信じ、神さまを愛するということがありました。神さまに従っていくという自分の道があり、そこに希望があるということを、彼は確信していたからです。
だから、周りすべてが敵であるという、闇の中にいるような状況でも、ステファノの顔は、光を帯びていたのです。
先程、「なぜ、神さまはペトロやヨハネのように助けて下さらなかったのか」と言いましたが、神さまのなさる御業というのは、その時には私たちには分からないのです。後の歴史を見なければ、どうなるのか分からないのです。教会においても同じです。
ステファノがエルサレムで殉教することによって、ユダヤ人の宗教指導者たちからの教会への弾圧が激しくなります。するとその結果、多くのキリスト者がエルサレムを脱出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そしてその散らされたキリスト者が逃亡先でキリストの福音を伝えることによって教会の海外伝道の道が開かれて行ったのです。
恐らく、教会の指導者たちも教会員もこの時、教会に起こった問題を通してステファノが選ばれ、そのステファノの殉教を通して起こった迫害によって海外に散らされたキリスト者が海外伝道の道に歩みだすことになるなんて予想もしていなかったと思います。ましてやその後に続くパウロたちの伝道により、教会が世界へと広がっていくなんて想像も出来なかったことのなのです。
しかし、それでも彼らは自分たちを導く神さまの御心を信頼していたことは確かです。そしてその御心が今は彼らにはっきりとはわからなくても、最善を尽くして神さまのために今何をすべきかを考え、自分に与えられた職務にひたすら忠実であったのです。それが彼らの信仰でした。
これは私たちの教会においても同じだと思います。初代教会に起こった問題のように、私たちの教会でも数々の困難な事情が生まれます。また、外部から初代教会に向けられた迫害と同じように、教会と社会の中にも軋轢は生じます。しかし、そのとき私たちに求められているのは神さまの御心を信頼して、今、私たちが神さまのために、教会のために何をすることがふさわしいことなのかを考え、行動していくことです。そしてそのとき私たち一人一人がステファノのと同じように、神さまから与えられている職務に忠実に生きようとするなら、神さまはその私たちを用いて御心を実現してくださる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もこの神さまの御心に信頼して、私たちの信仰の歩みを続けたいと思います。
その中で、ステファノ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私たちも、神さまの御顔の光を、仰ぎ求めたいと思います。神さまの御顔は、自分には眩しすぎるのではないかと思ったり、ここで恥ずかしがったり、ここにきて遠慮してしまう必要はありません。自分の顔が曇っているならなおさら、ほかの光では明るくできない闇を、神さまの御顔の光によって照らしていただく必要があります。「『闇から光が輝き出よ』と命じられた神さまは、私たちの心の内に輝いて、イエス・キリストの御顔に輝く神の栄光を悟る光を、(この心の内に)与えてくださいました。」第二コリント4章6節の言葉です。
皆さん、この心を、神さまの御顔からくる光によって照らされ、満たされたいと思います。ステファノのような、厳しい場面は私たちには来ないかもしれませんけれども、けれどもその都度、色々なレベルで私たちは問われます。生涯をかけた、遺言を語るような場面も、いずれそれぞれの人生の締めくくりには必ず訪れます。そのような場面がやってきた時、私たちの顔を向ける方向は、既にはっきりしています。神さまを真っ直ぐに見つめるのです。神さまを見つめながら、今週も歩み出したいと思います。
【2020년 6월 21일 주일예배(요약판)】
“주의 영광의 빛을 띠고” 사도행전 6장 8~15절
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 교회의 사람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자 교인이 빠르게 늘어 갔습니다. 교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만, 한편으로 새로운 문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새롭게 일곱 명의 사람들이 뽑혔습니다. 그 첫 번째로 내세워진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교회에는 열두 제자 이외에 이미 훌륭한 인재를 양성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스데반이 박해의 표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9절)
이전에 유대가 로마제국군에 의해 멸망되었을 때 노예로서 외국에 연행되어 고향인 유다를 떠나가야만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몇 세대나 외국 땅에서 생활한 사람들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자 일부러 각국으로부터 유대로 돌아와, 귀국한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의 회당을 성지인 예루살렘에 조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의미로 보면, 그들은 유대에 있는 그 어떤 유대 교도들 보다 더 열심이고 보수적인 그룹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는 기독교 교회의 발전이라는 것은 위험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 나름의 정의감과 사회 개혁 운동 같은 생각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논쟁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0절에 나와 있듯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으니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들이나 장로와 서기관들의 권력자들을 충동시켜 스데반을 잡아 최고 법원인 공회에 넘긴다는 실력 행사로 나왔습니다.
13절,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라거나 14절,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라거나 거짓 증언까지 시켜서 스데반을 테러리스트 취급을 해서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하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미 무서울만큼 이 공회의 분위기는 거의 스데반의 처형으로 결정되어 가는 상태였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참으로 얄궂은 이야기입니다. 교회 가운데 문제가 일어나서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사람으로서 스데반이 일곱 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힌 것이고,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유다에 귀국한 사람들의 불평에 대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귀국한 사람들에 대한 전도가 스데반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오직 충실히 섬긴 것입니다.그런데 그게 교회 외부의 사람들이라고는 해도 같이 귀국한 사람들에 의해 위기적 상황에 빠뜨려지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스데반은 살해 당하고 맙니다. 최초의 순교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원인이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스데반이 일곱 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지 않았더라면 여기서 순교하지는 않았을테지요. 더 말하자면, 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나 요한처럼 스데반을 구해 주시지 않으셨을가요? 의문이 듭니다. 그 때, 스데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15절을 보십시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절)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 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 지켜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의 상황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자기가 그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이미 사형은 결정된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스데반은 말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스데반이 사람이나 사회에 좌우되기보다도 하나님께 좌우되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어 자기를 살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가는 자기의 길이 있고, 거기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변이 모두 다 적이라는 어둠과도 같은 상황 속에서도 스데반의 얼굴은 빛을 띠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까 “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나 요한처럼 구해주시지 않았을까?” 라고 말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은 그 당시의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후의 역사를 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하는 것을 시작으로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교회의 탄압이 격심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 결과로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루살렘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흩어진 그리스도인이 도망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의해 교회의 해외 전도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아마 교회의 지도자들도 교인들도 그 당시 교회에 일어난 문제를 통해서 스데반이 뽑히고, 그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일어난 박해로 인하여 해외에 흩어지게 된 그리스도인이 해외 전도의 길에 착수하게 될 줄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 이후에 이어받은 바울들의 전도로 인하여 교회가 온 세계로 퍼지게 될 줄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이 당시의 그들에게 확실히 알 수는 없었어도,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생각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오로지 충실히 행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에 일어난 문제와 같이 우리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이 생깁니다. 또 외부로부터 초대 교회로 향한 박해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사회 사이에 알력은 생깁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하여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걸맞는 것인지를 생각하여 행동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직무에 충실히 살아 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쓰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실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하여 우리의 신앙의 걸음을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 스데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바라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자기에게는 너무 눈부시다고 생각하거나, 여기서 부끄러워하거나, 여기에 와서 사양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의 얼굴이 어두워져 있다면 더욱더 다른 빛으로는 밝아지지 못하는 어둠을 하나님의 얼굴의 빛으로 비추어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장 6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마음을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오는 빛으로 비춰 채워지게 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처럼 힘든 장면이나 상황이 우리에게는 닥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 때마다 여러 가지의 레벨에서 우리는 질문 받습니다. 우리의 생애를 마감 할 때, 유언을 남겨야 하는 장면도 언젠가는 각자 인생의 결말에 찾아 옵니다. 그러한 장면이 찾아 왔을 때 우리의 얼굴을 향하는 방향은 이미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보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이번 한주도 걸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