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을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었던 사람, 세상의 친구라고 부릅니다. “세상”이란 인간의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벗”이라면 “하나님의 원수”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싸우지 않고 “온유함으로 행하”(3장13절)여 “화평하게 하”(3장18절)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렿게 “세상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질투하시는 거죠. 우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이 세상”을 시기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친구”나 혹은 “세상” 따위에 빼앗기지 않겠다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라고 5절에 쓰여져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기하신다, 질투하신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야고보서 3장 14절에서 시기하면 안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시기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시기”라는 것에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에 있듯이 이기적인 시기는 안됩니다. 상대와 싸워 빼앗는 것 같은 시기는 안됩니다. 그러나 더 한 가지, 시기에도 “정당한 시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자기 것인데 그것이 빼앗겨 떨어져 갈 때에 느끼는 시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기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첫머리를 읽으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천지를,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쓰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로서 이 세계의, 우리 인간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 있듯이 인간은 “욕망”이라는 “마귀 (창세기에서는 뱀이지만)” 이 마귀로 죄에 빠졌습니다. 죄에 빠진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힘들게 고생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시고 “나의 사랑 안으로 돌아오라”고 되찾으려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걸면서까지 자신의 사랑이 강하고 깊음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되찾으려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알아 믿고 우리는 하나님 밑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것과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크리스천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한 “신부”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부부” 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또다시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 “세상의 친구”가 되었다면 또 이 세상과 바람을 피웠다면 하나님께서 시기하시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원래, 우리가 “세상의 친구”가 되어도 질투하지도 않고 “그냥 괜찮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셨더라면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남편은 안 믿고 아내만 믿는 집에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심방을 갔더니 안 믿는 남편이 목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가 교회에 가게 되면서 나에게 대해서 쌀쌀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어요.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그 마음을 전하려고 “만약 내가 바람 피우고 떠난다면 당신은 어떤 마음이겠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아내는 “그것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요. 할 수 없지요 뭐.”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것을 들은 남편은 엉겁결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야” 라고 소리쳤답니다.
그 남편은 아내가 성내는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아내가 질투하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아내가 자기 쪽으로 돌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억울한지 아내가 알아줬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구실로 한 냉담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몰론 남편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으면 아내도 자존심이나 고집이 있기 때문에 순진하게 답할 수 없는 부분도 있겠죠. 그걸 생각하지 않는 남편도 좀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남편은 아내가 고집도 자존심도 버리고 화를 내길 원했습니다. 질투하길 바랐죠? 근데 그게 “사랑”이라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신의 고집도 자존심도 버리셨습니다. 고집이나 자존심으로 자신의 체면을 유지할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경우를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고집이나 자존심을 넘어 심지어 생명까지 버리셨습니다. “나의 생명도 너희에게 주겠어. 그러니까 내 사랑을 믿어줘. 부탁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신을 버린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이며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바로 자신을 버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집도 자존심도 생명 마저도 내팽개치고 시기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질투할 정도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때로는 역겹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좀 떠나고 싶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느낄 때는 아직 내 안에 “욕망”이 살아 움직이고 있을 때입니다. “욕망”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있을 때입니다. “나 스스로” 라는 자신의 생각, 자신의 힘이 강할 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게 해 주심을 아직 모를 때, 잊어버릴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말합니다. 9절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9-10절)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라고 들으면 “뭐라고”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웃음”이나 “즐거움”이란 이기적인 욕망으로 만족하고 있는 웃음이고 즐거움입니다. 그 죄를 깨닫지 못하는 웃음이자 즐거움입니다.
그런 내 삶의 모습, 내 마음의 잘못을 깨닫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슬퍼하며 애통하고 울라고 야고보는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못 들어오게 하는 “욕망”이라는 벽이, 또 “나”라는 벽이 부서질 때,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홍수처럼 밀려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진정한 “웃음”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023年9月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エフェソの信徒への手紙(에베소서) 4章 30~32節
〇讃 頌 讃頌歌 2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49 (詩編108編)
〇讃 頌 讃頌歌 274
〇聖書奉読 ヤコブの手紙(야고보서) 4章 1~10節
〇説 教 「神の友になろう(하나님의 친구가 되자)」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4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9月 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友になろう」 ヤコブの手紙 4章 1~10節
自分の欲望に従って生きる者を、ヤコブは「世の友」(4節)と呼びます。「世」とは、人間の欲望が渦巻く世界です。そして、「世の友」であるならば、「神の敵」(4節)だとヤコブは言います。神の御心に従っていないからです。人と争わず、戦わず、「柔和な行い」(3章13節)で、「平和を実現する」(3章18節)方向に生きていないからです。
そのように、「世の友」となり、「神の敵」として生きている者を、神さまは憎まれるのでしょうか? そうではありません。ねたむのです。私たちを奪おうとする「世」をねたむのです。私たちをねたむのです。「世の友」なんかにしたくない、「世」になんか奪われたくないと、ねたむほどに私たちを愛しておられると、ヤコブは言うのです。5節、「神はわたしたちの内に住まわせた霊を、ねたむほどに深く愛しておられ、もっと豊かな恵みをくださる」(5節)と書かれているとおりです。
けれども、“神さまがねたむ、とは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 3章14節でねたみはだめだとヤコブは言ったではないか、私たちはだめなのに、神さまはねたんでも良いのか?”と思われる方がいらっしゃるかも知れません。
でも、ねたみにも2種類あります。3章14節にあるように、利己的なねたみはだめです。相手と争い、戦い、奪い取るようなねたみはだめです。けれども、もう一つ、変な言い方ですが、ねたみにも“正当なねたみ”と言っても良いものがあります。それは、自分のものなのに、それが自分から奪われ、離れて行く時に感じるねたみです。神さまのねたみは、こっちです。
旧約聖書の始め、創世記の冒頭を読むと、神さまがこの世界を、天地を、そして人間をお造りになったことが描かれています。神さまは、創造者として、この世界の、私たち人間の所有者なのです。しかし、アダムとエヴァの物語によって表わされているように、人間は「欲望」という名の「悪魔」(7節、創世記では“へび”)によって、罪に奪われました。罪に奪われた私たち人間を、神さまは苦労して苦労して、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ご自分が私たちのことをどんなに愛しておられるかをお示しになって、“わたしの愛の下に帰っておいで”と取り戻そうとなさったのです。キリストの命をかけてまでも、ご自分の愛が命がけであるほど強く、深いことをお示しになって、私たちを取り戻そうとなさったのです。その愛を知って、信じて、私たちは神のもとに立ち帰ったのです。再び神のものと、キリストのものとなったのです。それがクリスチャンです。聖書は、クリスチャンとは、主エス・キリストと結婚した“花嫁”であるとさえ語っているので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夫婦”なのです。
その私たちが、またもや神さまの御心から離れて、「世の友」になったら、世に浮気したら、それは神さまがねたむのが当然ではないでしょうか。だいたい、私たちが「世の友」、“世の恋人”になっても、ねたみもせず、“別にいいよ”とか言っている神さまだったら、私たちの救いはないのです。
ある牧師任が、夫は未信者で妻がクリスチャンの家に尋訪に行ったそうです。尋訪に行きますと、未信者の夫が牧師にこのような話をしたそうです。「妻が教会に行くようになって、自分に対してよそよそしくなった。自分がどんなにさびしい気持でいるかを伝えようと思って、“もしおれが、他に女を作ってお前から逃げたらさ、どういう気持になる?”と尋ねたそうです。すると、妻は“それも神さまの決めたこととして受け入れます。仕方ありません”。それを聞いた男性は思わず、“ばか!おれはそんなこと言ってるんじゃない!”と怒鳴っ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その男性は、妻に怒ってほしかったのです。焼きもちを焼いてほしかったのです。妻が自分の方を向いてくれないから、それがどんなに悔しいものか、妻に分かってもらいたかったのです。それなのに、信仰を“だし”にした、冷淡な答えが返ってきました。もちろん、夫にそんなことを言われたら、妻もプライドや意地がありますから、素直になれない部分もあるでしょう。それを考えないこの男性も、ちょっと身勝手かも知れません。それでも、この男性は妻に、意地もプライドも捨てて、怒ってほしかった。ねたんでほしかったんでしょう。でも、それが、“愛”というも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神さまは、私たちを愛するために、ご自分の意地もプライドも捨てておられます。意地やプライドからご自分の体面を保とうなんて考えません。それって、すごいことです。自分たちのことを考えたら、よく分かります。いえ、意地やプライドはおろか、命さえ捨てております。“わたしの命さえも、あなたにあげよう。だから、わたしの愛を信じてくれ。頼む”。そう言っておられるのです。
この神さまの、己を捨てた愛を表しているのが、体現しているのが、主イエス・キリストのご生涯であり、十字架の死です。まさに、己を捨てた神の愛です。意地もプライドも、命さえもかなぐり捨てて、ねたむほどに私たちを愛する神さまの愛が、そこに示されております。
皆さん、ねたむほどの神さまの愛が、私たちには注がれているのです。それは、私たちにとって、時には、うっとうしいと感じることもあるかもしれません。ちょっと離れたくなることもあります。
けれども、そのように感じるときは、まだ自分の内に「欲望」が生きて働いている時です。「欲望」とは言わないまでも、自己中心な思いが働いている時です。“自分が、自分で”と、自分の思い、自分の力が強い時です。自分の力で生きているのではなく、神さまに生かされてあることを、まだ知らない時、忘れている時です。だからこそ、ヤコブは言います。
10節、「悲しみ、嘆き、泣きなさい。笑いを悲しみに変え、喜びを憂いに変えなさい。主の前に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めてくださいます」(10節)。
「笑いを悲しみに」「喜びを憂いに」と言われると、“えっ!?”と思うかも知れません。けれども、ヤコブが語る「笑い」「喜び」とは、利己的な欲望によって得たもので満足している笑いであり、喜びです。その罪に気づかない笑いであり、喜びです。
そういう自分の生きざま、自分の心の間違いに気づいて、これではだめだったと悲しみ、嘆き、泣きなさい、とヤコブは言うのです。つまり、悔い改めなさいと、御言葉によって打ち砕かれ、へりくだりなさいと、ヤコブは言うのです。
神さまをシャット・アウトしている「欲望」という壁が、“自分”という壁が打ち砕かれた時、私たちの心の内に、神さまの愛が洪水のようになだれ込んできます。神さまの愛の下に生きる本物の「笑い」を、「喜び」を味わえるようになるのです。
【2023년 9월 3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친구가 되자” 야고보서 4장 1~10절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을 야고보는 “세상과 벗”이 되었던 사람, 세상의 친구라고 부릅니다. “세상”이란 인간의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벗”이라면 “하나님의 원수”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싸우지 않고 “온유함으로 행하”(3장13절)여 “화평하게 하”(3장18절)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렿게 “세상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질투하시는 거죠. 우리를 빼앗으려고 하는 “이 세상”을 시기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친구”나 혹은 “세상” 따위에 빼앗기지 않겠다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라고 5절에 쓰여져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기하신다, 질투하신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야고보서 3장 14절에서 시기하면 안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시기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시기”라는 것에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 3장 14절에 있듯이 이기적인 시기는 안됩니다. 상대와 싸워 빼앗는 것 같은 시기는 안됩니다. 그러나 더 한 가지, 시기에도 “정당한 시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자기 것인데 그것이 빼앗겨 떨어져 갈 때에 느끼는 시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기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첫머리를 읽으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천지를,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쓰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로서 이 세계의, 우리 인간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 있듯이 인간은 “욕망”이라는 “마귀 (창세기에서는 뱀이지만)” 이 마귀로 죄에 빠졌습니다. 죄에 빠진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힘들게 고생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시고 “나의 사랑 안으로 돌아오라”고 되찾으려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걸면서까지 자신의 사랑이 강하고 깊음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되찾으려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알아 믿고 우리는 하나님 밑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것과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크리스천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한 “신부”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부부” 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또다시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 “세상의 친구”가 되었다면 또 이 세상과 바람을 피웠다면 하나님께서 시기하시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원래, 우리가 “세상의 친구”가 되어도 질투하지도 않고 “그냥 괜찮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셨더라면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남편은 안 믿고 아내만 믿는 집에 심방을 갔다고 합니다. 심방을 갔더니 안 믿는 남편이 목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내가 교회에 가게 되면서 나에게 대해서 쌀쌀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어요.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 그 마음을 전하려고 “만약 내가 바람 피우고 떠난다면 당신은 어떤 마음이겠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아내는 “그것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요. 할 수 없지요 뭐.”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것을 들은 남편은 엉겁결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니야” 라고 소리쳤답니다.
그 남편은 아내가 성내는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아내가 질투하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아내가 자기 쪽으로 돌아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억울한지 아내가 알아줬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구실로 한 냉담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몰론 남편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으면 아내도 자존심이나 고집이 있기 때문에 순진하게 답할 수 없는 부분도 있겠죠. 그걸 생각하지 않는 남편도 좀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 남편은 아내가 고집도 자존심도 버리고 화를 내길 원했습니다. 질투하길 바랐죠? 근데 그게 “사랑”이라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신의 고집도 자존심도 버리셨습니다. 고집이나 자존심으로 자신의 체면을 유지할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경우를 돌아보면 쉽게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고집이나 자존심을 넘어 심지어 생명까지 버리셨습니다. “나의 생명도 너희에게 주겠어. 그러니까 내 사랑을 믿어줘. 부탁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신을 버린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이며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바로 자신을 버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집도 자존심도 생명 마저도 내팽개치고 시기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질투할 정도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때로는 역겹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좀 떠나고 싶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느낄 때는 아직 내 안에 “욕망”이 살아 움직이고 있을 때입니다. “욕망”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있을 때입니다. “나 스스로” 라는 자신의 생각, 자신의 힘이 강할 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게 해 주심을 아직 모를 때, 잊어버릴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는 말합니다. 9절입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9-10절)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라고 들으면 “뭐라고”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웃음”이나 “즐거움”이란 이기적인 욕망으로 만족하고 있는 웃음이고 즐거움입니다. 그 죄를 깨닫지 못하는 웃음이자 즐거움입니다.
그런 내 삶의 모습, 내 마음의 잘못을 깨닫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슬퍼하며 애통하고 울라고 야고보는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못 들어오게 하는 “욕망”이라는 벽이, 또 “나”라는 벽이 부서질 때,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홍수처럼 밀려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진정한 “웃음”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