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어드벤트(강림절)에 들어갔습니다. 어드벤트라는 것은 “도래”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온 말이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래하신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4주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와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어드벤트는 이 세상의 종말에 예수님께서 다시 우리 곁으로 오실 것, 이 세상에 구원이 올 것을 상기하며 그리스도의 래임을 고대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기에 자신이 정말 “구원”을 고대하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래임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요? 크리스마스에 특별한 “구원” 사건을 기대한다기보다는 이날만큼은 일과 여러 문제를 잊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기려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다양한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심각한 고민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질병이나 빈곤과 같은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에서의 전쟁도 있습니다. 그 해결은 모두 어렵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또, 자신의 장래에 대해 큰 기대나 희망을 가지지 못하게 된 젊은이도 있습니다. 아이들조차 누구나 자유롭게 가질 수 있어야 할 꿈을 성장해 가면서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눈앞에 있는 큰 문제로부터의 해방이나 해결을 원하고 서로 격려하는 것보다 “해결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다” “이상한 기대는 갖지 않는 것이 좋다”고 체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상이 변화하는 것보다 현상에 되도록 만족함으로써 마음의 “구원”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우리를 지탱하는 소망일까요?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이란 이 세상의 여러 권력과 불합리한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지배가 완성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 낭독한 누가복음 21장 27절의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온다”는 말씀으로 상징되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찾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날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자신이 죽고 나서 찾아오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예수님과 만나는 것은 사후세계,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무관한 곳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에서 들어왔던 메시지는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살아있는 동안은 보상을 받지 못해도 죽고 나면 보상을 받는다고. 그런 안이한 결론만 들려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래 성경은 구원을 현실에서 멀어진 미래나 사후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날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15절) 이 예레미야에 기록된 말씀은 먼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시대에 나온 것이며 정당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혼란과 고난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제 국가 지도자에게 기대할 수 없고 정의와 공정은 바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말 그대로 “어서 구해달라”는 상황입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가지”, 새로운 왕을 주겠다고 사람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괴뢰정권이었던 시드기야 왕이 반기를 들고 예루살렘은 쳐들어와 나라가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왕이 주어진다는 약속은 성취하지 못한 채 예레미야는 끝납니다. 약속의 실현은 그려지지 않습니다. “어서 구원하소서” 라고 기도하고 기대하는 것이 바보스러워집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수의 백성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공의로운 왕이 온다고 말합니다.
에레미야 자신은 불길한 말만 하는 자로 잡혀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누구보다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구체적인 구원을 계속 가졌던 것입니다. “그 날에 유다가 구원를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16절)
원래대로라면 구원 따위는 기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죽은 후 보통이라면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어리석은 환상에 불과했다고 해서 잊혀질 것이었습니다. “어서 구원하소서” 라고 외치던 사람들도 “바보같다” “이제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을 그만둔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릴 수 없는 구원을 기다리는 일이 수세기에 걸쳐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말씀이 생각날 때 반복해서 자신들을 격려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아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자라서 성인이 된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구체적인 경험을 해왔습니다.
가난하거나 미움받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아무도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병자가 예수님을 만져서 치유됩니다. 죄인이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영입됩니다. 그것들은 지금 그 자리에서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풀어주는 구체적인 역사였습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우리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이것이 나의 구원의 일입니다, 라고 바로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에게도 이 구원의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닥친 불행 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누군가의 한마디로 목적과 소망을 주었다든가, 또 어떤 사람은 몸도 마음도 약하고 항상 지쳐 있는 자신의 나약함을 한탄하고 있을 때 “네가 약하든 피곤하든 함께 있어서 즐겁구나”라고 말해주는 존재를 만났다든가 여러 가지 구원의 일이 있었겠지요. 이 “구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통되는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구체적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하나님의 개입, 예수님과의 만남을 느끼는 사건들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우리가 죽은 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있을 때부터 약속되고, 주어지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이에 생기는 여러 문제들은 굉장히 복잡해서 “이런 문제들은 언제 해결될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언제까지나 현상은 변하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확신이 되어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을 갖는 것은 물론 “어서 구하소서” 라고 바라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으로 나타나신 현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어둠 속에 있어야 할 자신이 빛에 비춰져 온 사건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시는 날, 기다릴 수 없는 구원을 기다릴 힘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어드벤트인 것입니다.
2023年12月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ルカ(누가복음) 21章 26~28節
〇讃 頌 讃頌歌 36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15 (待降節[1])
〇讃 頌 讃頌歌 101
〇聖書奉読 エレミヤ書(옐레미야) 33章 14~16節
〇説 教 「早く救ってください (어서 구하소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9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12月 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早く救ってください」エレミヤ書 33章 14~16節
今日からアドベント(待降節)に入りました。アドヴェントというのは「到来」という意味のラテン語から来た言葉で、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の到来したクリスマスを楽しみに待つ4週間です。クリスマスは救い主である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元へ来て下さったことを記念する日です。同時に、アドベントは、この世の終わりに、イエスさまが再び私たちの元へ来られること、この世に救いが訪れることを思い起こし、キリストの来臨を待ち望む時期でもあります。
しかし、私たちはこの時期、自分が本当に「救い」を待ち望んでいるのでしょうか。キリストの来臨を期待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クリスマスに特別な「救い」の出来事を期待しているというよりは、この日だけは、仕事や様々な問題を忘れて、にぎやかな雰囲気を楽しもうとしているように思います。
今の私たちは、様々な苦しみからの「救い」、深刻な悩みからの「解放」を期待することが、困難になっているのかもしれません。実際、私たちの間では、病気や貧困といった複雑な問題がたくさんあります。ウクライナやパレスチナでの戦争もあります。それらの解決はどれも困難で、不可能のようにさえ思えます。
また、自分の将来に対して、大きな期待や希望を持てなくなっている若者もいます。子どもたちでさえ、誰もが自由に持てるはずの「夢」を、成長していくにつれ、口に出せなくなっています。そんな時代に生きている私たちは、目の前にある大きな問題からの解放や解決を望み、お互いに励まし合うことよりも、「解決困難だから仕方ない」「変な期待は持たない方が良い」と諦め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現状が変化することよりも、現状になるべく満足することで、心の「救い」を得ようとします。しかし、それは本当に、私たちを支える希望なのでしょうか。
クリスチャンにとって「救い」というのは、この世の様々な権力や、理不尽な支配から解放され、神さまの支配が完成すること、神の国が訪れることです。今日の招きの言葉として朗読したルカによる福音書21章27節の「人の子が大いなる力と栄光を帯びて雲に乗って来る」という言葉に象徴さ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がこの世に再び訪れ、神の国が実現する日のことが預言されています。
しかし、ほとんどの人は「神の国」、すなわち天国は、自分が死んでから訪れる場所と思っています。教会に通っている人であっても、自分がイエスさまと出会うのは死後の世界、天国で起きることだと考え、今生きているこの世界と、関係ない場所で起きると思っています。
今まで、私たちが教会で聞いてきたメッセージは、この世ではなく、天国で救われることを暗に強調していたのかもしれません。神さまを信じていれば、生きている間は報われなくても、死んでから報われる、と。そんな安易な結論ばかり、言い聞かせてきたの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本来聖書は、「救い」を現実から遠のいた未来や、死後の出来事としてではなく、神さまが歴史の中に、決定的に介入する日として語っています。「その日、その時、わたしはダビデのために正義の若枝を生え出でさせる。彼は公正と正義をもってこの国を治める。」(エレミヤ33:15) このエレミヤ書に記された言葉は、どこか遠い世界の話ではなく、私たちに起こる具体的な出来事として語られました。
この言葉は、南ユダ王国最後の王ゼデキヤの時代に語られたもので、真っ当な政治が行われず、人々が混乱と苦難を味わっていた時でした。もはや、国の指導者に期待はできず、正義と公正なんて望めない時代でした。文字通り、「早く救ってくれ」という状況です。そんな中、神さまは「正義の若枝」、新しい王を与えると、人々に約束されました。
けれども、この約束はなかなか実現しません。バビロニアの傀儡政権であったゼデキヤ王が反旗を翻し、エルサレムは攻め込まれ、国が滅亡するからです。「新しい王が与えられる」という約束は、成就しないままエレミヤ書は終わります。約束の実現は描かれません。「早く救ってください」と祈り、期待する方が馬鹿らしくなってきます。
エレミヤ自身も、イスラエルが滅ぼされ、捕囚の民となってしまうことを知っていました。エレミヤは国が滅亡するのを知っ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正義の王がやって来る」と語ります。
エレミヤ自身、不吉なことばかり言う者として捕えられ、牢につながれてしまいます。誰よりも、救いを期待できない状況で、問題の解決が困難だと分かっている状況の中で、彼は具体的な救いを持ち続けたのです。「その日には、ユダは救われ、エルサレムは安らかに人の住まう都となる。その名は、『主は我らの救い』と呼ばれるであろう。」(16節)
本来なら、救いなんて待てないはずでした。エレミヤが死んだ後、普通なら、彼の言葉は嘘だった、愚かな幻に過ぎなかったと言われ、忘れ去られるはずでした。「早く救ってください」と叫んでいた人たちも、「馬鹿らしい」「もう諦めよう」と考えるはずでした。実際、そう思って、期待するのを止めた人もいたでしょう。
けれども、待てないはずの救いを待つことが、何世紀にもわたって続けられてきたのです。それは、預言者の言葉が思い出される時、繰り返し、自分たちを励ます神さまとの出会いがあったからです。
そして、やがて、神の子であるキリストが、人間として、赤ん坊の姿で現れるという具体的な出来事が起きました。成長し、成人したイエスさまと出会った人も、具体的な経験をしてきました。
貧しい人や嫌われた人が、イエスさまと一緒に食事をする。誰にも触れてもらえないような病人が、イエスさまに触れられて癒される。罪人と言われる人々が、イエスさまの弟子に迎え入れられる……それらは今、その場で苦しみに捕われている人々を解放する、具体的な業でした。それは、今現在、私たちの間でも起きているのです。
普段、私たちはそのようなことを深く考えませんので、人前でこれが私の救いの出来事です、とすぐには答えられ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皆さんにも、この救いの出来事があったはずです。
ある人は、突然襲ってきた不幸の中で苦しんでいるときに、誰かの一言で、目的と希望を与えられたとか、また、ある人は、身体も心も弱く、常に疲れている自分の弱さを嘆いているときに、「お前が弱くても疲れていても、一緒に居て楽しいんだ」と言ってくれる存在に出会ったとか、色々と救いの出来事があったかと思います。この「救い」というのは、誰しもに共通する救い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どれも具体的な苦しみからの解放であり、神さまの介入、イエスさまとの出会いを感じる出来事です。
皆さん、救いは、私たちの死後に訪れるものではなく、この世界で私たちが生きているときから、約束され、与えられ、訪れるものなのです。
今、私たちの間で起きている様々な問題は大変複雑で、「これらの問題はいつ解決するのか?」という問いに対して答えられ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いつまでも現状は変わらず解決し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不安が確信となり、将来への期待や夢を持つことはもちろん、「早く救ってください」と願うことさえ困難な状況です。
しかし聖書は、そんな私たちに、イエス・キリストが救いとして現れた現実を、思い出させてくれます。暗闇の中にいるはずの自分が、光に照らされてきた出来事を、思い出させてくれるの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が再びこの世にやってこられる日、待てないはずの救いを待つ力が、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それがアドベントなのです。
皆さん、これからも共に、神の国と、イエスさまの到来を求めて、祈りを合わせていきましょう。
【2023년 12월 3일 주일예배(요약판)】
“어서 구하소서” 엘레미야 33장 14~16절
오늘부터 어드벤트(강림절)에 들어갔습니다. 어드벤트라는 것은 “도래”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온 말이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래하신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4주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와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어드벤트는 이 세상의 종말에 예수님께서 다시 우리 곁으로 오실 것, 이 세상에 구원이 올 것을 상기하며 그리스도의 래임을 고대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기에 자신이 정말 “구원”을 고대하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래임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요? 크리스마스에 특별한 “구원” 사건을 기대한다기보다는 이날만큼은 일과 여러 문제를 잊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기려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다양한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심각한 고민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질병이나 빈곤과 같은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에서의 전쟁도 있습니다. 그 해결은 모두 어렵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또, 자신의 장래에 대해 큰 기대나 희망을 가지지 못하게 된 젊은이도 있습니다. 아이들조차 누구나 자유롭게 가질 수 있어야 할 꿈을 성장해 가면서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눈앞에 있는 큰 문제로부터의 해방이나 해결을 원하고 서로 격려하는 것보다 “해결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다” “이상한 기대는 갖지 않는 것이 좋다”고 체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상이 변화하는 것보다 현상에 되도록 만족함으로써 마음의 “구원”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우리를 지탱하는 소망일까요?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이란 이 세상의 여러 권력과 불합리한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지배가 완성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 낭독한 누가복음 21장 27절의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온다”는 말씀으로 상징되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찾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날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자신이 죽고 나서 찾아오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예수님과 만나는 것은 사후세계,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무관한 곳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에서 들어왔던 메시지는 이 세상이 아닌 천국에서 구원받을 수 있음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살아있는 동안은 보상을 받지 못해도 죽고 나면 보상을 받는다고. 그런 안이한 결론만 들려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래 성경은 구원을 현실에서 멀어진 미래나 사후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날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15절) 이 예레미야에 기록된 말씀은 먼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으로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남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시대에 나온 것이며 정당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혼란과 고난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제 국가 지도자에게 기대할 수 없고 정의와 공정은 바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말 그대로 “어서 구해달라”는 상황입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운 가지”, 새로운 왕을 주겠다고 사람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괴뢰정권이었던 시드기야 왕이 반기를 들고 예루살렘은 쳐들어와 나라가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왕이 주어진다는 약속은 성취하지 못한 채 예레미야는 끝납니다. 약속의 실현은 그려지지 않습니다. “어서 구원하소서” 라고 기도하고 기대하는 것이 바보스러워집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수의 백성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공의로운 왕이 온다고 말합니다.
에레미야 자신은 불길한 말만 하는 자로 잡혀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누구보다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구체적인 구원을 계속 가졌던 것입니다. “그 날에 유다가 구원를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16절)
원래대로라면 구원 따위는 기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죽은 후 보통이라면 그의 말은 거짓이었다, 어리석은 환상에 불과했다고 해서 잊혀질 것이었습니다. “어서 구원하소서” 라고 외치던 사람들도 “바보같다” “이제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을 그만둔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다릴 수 없는 구원을 기다리는 일이 수세기에 걸쳐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말씀이 생각날 때 반복해서 자신들을 격려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아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자라서 성인이 된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구체적인 경험을 해왔습니다.
가난하거나 미움받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아무도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병자가 예수님을 만져서 치유됩니다. 죄인이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영입됩니다. 그것들은 지금 그 자리에서 고통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풀어주는 구체적인 역사였습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우리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이것이 나의 구원의 일입니다, 라고 바로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에게도 이 구원의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갑자기 닥친 불행 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누군가의 한마디로 목적과 소망을 주었다든가, 또 어떤 사람은 몸도 마음도 약하고 항상 지쳐 있는 자신의 나약함을 한탄하고 있을 때 “네가 약하든 피곤하든 함께 있어서 즐겁구나”라고 말해주는 존재를 만났다든가 여러 가지 구원의 일이 있었겠지요. 이 “구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통되는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구체적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하나님의 개입, 예수님과의 만남을 느끼는 사건들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우리가 죽은 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있을 때부터 약속되고, 주어지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이에 생기는 여러 문제들은 굉장히 복잡해서 “이런 문제들은 언제 해결될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언제까지나 현상은 변하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확신이 되어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을 갖는 것은 물론 “어서 구하소서” 라고 바라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으로 나타나신 현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어둠 속에 있어야 할 자신이 빛에 비춰져 온 사건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시는 날, 기다릴 수 없는 구원을 기다릴 힘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어드벤트인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도래를 구하며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