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 전, 신약성서가 쓰여질 무렵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는 오해를 받았고 기독교 성도들과 교회는 악행한다고 비방당했습니다. (12절) 예를 들어 기독교는 사람의 피를 마시고 인육을 먹는 종교이다, 숨어서 그걸 행하고 있다고 오해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찬식이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를 받는 의식으로 실제로 인간의 피와 몸을 먹는 의식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기독교의 가르침이 당시 사회제도와 대립하는 가르침이 있어서 로마제국을 뒤흔들고 있다며 문제시되었고, 로마에서 큰불이 났을 때 이 화재소동을 일으켜 사회를 전복시키려 한 것은 기독교인들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그 소문으로 인해 그들은 오해를 받고 처형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오해를 받고 비방당하며 사회 속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베드로는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12절)고 권했습니다. 썩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선한 행실을 하다 보면, 머지않아 사회 사람들은 기독교를 재인식하여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타일렀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로서의 통치자인 '황제'와 '총독'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선행”이라고 베드로는 간주합니다. 왕과 총독이라는 인간이 세운 정치제도를 따르는 선을 행하는 것이 기독교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말”(15절)을 막게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하자면 “일시적인 원칙”입니다. 얕은 생각으로 쓸데없이 제도를 깨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세운 제도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경우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로마 황제가 신이라고 자칭하여 자신에 대한 예배를 강요하는 경우라면 크리스천은 완강히 이에 저항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판단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요?
크리스천 생활의 판단 기준, 그것은 현대의 크리스천인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 판단 기준이란 크리스천은 “나그네”(11절)이며, “자유로운 사람”(16절)이며, “하나님의 종”(16절)이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나그네”라는 것은 우리의 거점, 국적이 하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믿으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아 세례를 받고 하나님과 구원의 계약을 맺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등록되어 그곳에 국적을 갖게 된 자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천국에서 이 세상으로 온 나그네라고 자기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여행 행선지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속박”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제도나 관습, 인간관계의 연줄이나 역학관계에 얽매여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 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물론 현실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굳게 믿고 우리 자신을 나쁜 의미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준다면 우리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자유는 “무질서”라는 뜻은 아닙니다.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욕망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천국에는 천국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천국의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아 어떠한가 하는 것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아 이 세상 제도를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가치관으로 볼 때 지금 있는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길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와 같이 하라”(16절)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종와 같이 하라.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면 될까요?
그 판단 기준은 “사랑”입니다. 만약 망설여진다면 자신의 행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인지,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인지로 판단하면 됩니다. 가끔 자신의 행동, 말, 생활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에 적합한지 다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지 뭐라고 하실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행동할 경우 구체적으로 “정답”이라는 절대적인 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2천 년 전이라면 노예제도는 있었을 것이지만 현대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은 시대나 장소, 나라마다 다릅니다. 사람 마다 다릅니다. 바로 인간이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하고 기도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또 함께 생각해 갑니다. 헌법 개정, 기지 및 군사력 문제, 원전 문제 등 정치적 행동은 도저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또, 일본이라는 이교 사회 속에서 예를 들면, 불교 장례식 때는 어떻게 합니까? 불단은요? 신단은요? 첫 참배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나요? 이것도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제 생각이 궁금하신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하나, 구체적인 판단과 행동 예를 든다면, 예를 들어 저는 불교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는 분향을 합니다. 물론 불교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은 기독교라고 분향을 사퇴하는 것도 하나의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속에 있는 유족에게 다가가 슬픔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모양만으로도 마음과 나름의 신앙을 담아 행하는 것이 사랑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은 틀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고 있다 해도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걸로 된 겁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랑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유의하는 것,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랑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때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더라도 우리 사랑의 행동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헛되이 하지 않으시고 좋게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싶습니다.
2023年11月1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7編 6~7節
〇讃 頌 讃頌歌 35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71 (イザヤ55章)
〇讃 頌 讃頌歌 274
〇聖書奉読 ペトロの手紙一(베드로전서) 2章 11~17節
〇説 教 「自由な人として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25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11月 1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自由な人として」 ペトロの手紙一 2章 11~17節
2千年前、新約聖書が書かれた頃、ローマ帝国において、キリスト教は誤解され、クリスチャンと教会は「悪人呼ばわり」(12節)されていたようです。たとえば、“キリスト教は人の血を飲み、人肉を食する宗教だ。隠れてそれを行っている”と思われていたようです。それは、聖餐式が、キリストの体、キリストの血を頂く儀式として、実際に人間の血と肉を食べる儀式として、根も葉もない噂が広がり、忌み嫌われていたようですね。
また、キリスト教の教えが、当時の社会制度と対立する教えがあり、ローマ帝国を揺るがすものとして、問題視され、ローマの都で大火事が起こった時に、この火事騒動を起こして社会を転覆させようとしたのはクリスチャンだと吹聴され、その噂によって、彼らは誤解され、処刑されたようです。
そのように、当時のクリスチャンは誤解され、悪人呼ばわりされ、社会の中で苦しい立場にありました。
けれども、主イエス・キリストの一番弟子であり、教会の中心人物であったペトロは、「異教徒の間で立派に生活しなさい」(12節)と勧めました。腐らず、焦らず、やけにならず、立派な生活をしていれば、やがて社会の人々は、キリスト教を見直し、神をあがめるようになるから、と諭したのです。
ペトロは、「人間の立てた制度」(13節)としての統治者である「皇帝」と「総督」に「服従しなさい」(14節)と命じています。そうすることが「善」(15節)だとペトロは見なしています。皇帝と総督という、人間の立てた政治制度に従うという善を行うことが、キリスト教を悪人呼ばわりする「愚かな者たちの無知な発言を封じる」(15節)ことになり、そうすることが「神の御心」(15節)だとペトロは言うのです。
けれども、これは言わば“仮の原則”です。浅はかな考えで、いたずらに制度を破るな、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人間の立てた制度が神の御心に反する場合は別です。例えば、ローマ皇帝が神を名乗り、自分に対する礼拝を強要するような場合は、クリスチャンは頑(がん)として、これに抵抗したのです。その違いはどこにあるのでしょうか?その判断基準はどこにあるのでしょうか?
クリスチャンの生活の判断基準、それは現代のクリスチャンである私たちにも当てはまるものです。その判断基準とは、クリスチャンは「旅人」(11節)であり、「自由な人」(16節)であり、「神の僕(しもべ)」(16節)である、ということにあります。
私たちクリスチャンが「旅人」であるということは、私たちの拠点、国籍が天の国にあるからです。イエス・キリストを救い主と信じ、父なる神の愛によって救われ、洗礼を受けて、神さまと救いの契約を結んだ者は、神の国、天国に登録され、そこに国籍を持つようになった者です。だから、クリスチャンというのは、天国からこの世にやって来た旅人だと自己理解をするのです。今、私たちはこの世で、旅人として旅行先で生活しているのです。だから、“この世の縛り”がない。この世の制度や慣習、人間関係のコネや力関係に縛られ、こだわる必要がない。だから、「自由な人」とペトロは言うのです。もちろん、現実はそんなに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けれども、私たちは強く信じて、自分を悪い意味でのしがらみから解放すれば、まさに何にも縛られない自由な人としての生き方ができるのです。
けれども、私たちクリスチャンの自由は“無秩序”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何でも自分の思いのまま、欲望のままに振る舞って良い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は天国に属する者となりました。天国には、天国の価値観があります。判断基準があります。それは、「神の御心」(15節)です。その神の御心から見て、どうかということを判断する。神の御心から見て、この世の制度に従うこともあれば、従わないこともある。天の価値観から見て、今ある人間関係を大事にすることもあれば、離れることもある。この世に対しては自由、しかしそれは、私たちが神の御心に従うから、すなわち「神の僕」だからです。
「神の僕として行動しなさい」(16節)とペトロは言います。神の御心に従って行動する。じゃ、神の御心とは何でしょうか?
私は、“愛”だと思います。もし迷ったら、自分の行動は、神を愛し、畏れ敬うものになっているか、人を愛し、大切にするものになっているかで判断したら良い。時々、自分の行動、言葉、生活を、神を愛し、人を愛することに適っているかどうか、見直してみたら良いかと思います。イエスさまだったらどうするか、何と言われるのかと考えてみたら良いかと思います。それが、神の僕として行動するということです。
とは言え、神の御心に従って行動する場合、具体的には“正解”という絶対的な答え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例えば、2千年前なら奴隷制度はありだったわけですが、現代なら、それはあり得ません。具体的な行動は、時代や場所、国によって違います。人によっても違います。まさに「人間が立てた」ものです。だから、神の御心は何かと祈り求めながら、自分で考え、また一緒に考えていく。憲法の改正、基地や軍事力の問題、原発の問題など、政治的な行動は、とても判断が難しい。また、日本という異教社会の中で、例えば、仏式の葬儀の際はどうするか?仏壇は?神棚は?初詣は?クリスチャンとしてどのように振る舞っていくか。これも正解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もし私の考えがお聞きになりたい方はいましたら、いつでもお尋ねください。
一つ、具体的な判断と行動例を挙げるとすれば、例えば、私は仏式の葬儀に参列した際は、お焼香(しょうこう)をします。もちろん仏教を信じ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自分の信仰はキリスト教だからと、お焼香を辞退するのも一つの判断だとは思います。しかし、私の中では、愛する人を失った悲しみの内にあるご遺族に寄り添い、悲しみを共にするためには、形だけでも心と自分なりの信仰を込めて行うことが、愛に適うものと考えています。
私たちの具体的な行動は、間違うこともあるでしょう。分かっていても完全になんてできないこともあるでしょう。それで良いのです。大事なことは、神の僕として、愛に基づいて考え、行動するように心がけること、それを大切にしていきたいと思うのです。
教会においても、家庭においても、社会においても、神の僕として、愛に基づいて考え、行動することが、神さまの御旨に合うものだと思います。もし、その時、他にもっと良い方法があったとしても、私たちの愛の行動を、神さまは決して無駄にすることはなく、良いように導いて下さることを信じたいと思います。
【2023년 11월 19일 주일예배(요약판)】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베드로전서 2장 11~17절“
2천년 전, 신약성서가 쓰여질 무렵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는 오해를 받았고 기독교 성도들과 교회는 악행한다고 비방당했습니다. (12절) 예를 들어 기독교는 사람의 피를 마시고 인육을 먹는 종교이다, 숨어서 그걸 행하고 있다고 오해받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찬식이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를 받는 의식으로 실제로 인간의 피와 몸을 먹는 의식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또 기독교의 가르침이 당시 사회제도와 대립하는 가르침이 있어서 로마제국을 뒤흔들고 있다며 문제시되었고, 로마에서 큰불이 났을 때 이 화재소동을 일으켜 사회를 전복시키려 한 것은 기독교인들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그 소문으로 인해 그들은 오해를 받고 처형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오해를 받고 비방당하며 사회 속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베드로는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라”(12절)고 권했습니다. 썩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선한 행실을 하다 보면, 머지않아 사회 사람들은 기독교를 재인식하여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타일렀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의 모든 제도”로서의 통치자인 '황제'와 '총독'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선행”이라고 베드로는 간주합니다. 왕과 총독이라는 인간이 세운 정치제도를 따르는 선을 행하는 것이 기독교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말”(15절)을 막게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하자면 “일시적인 원칙”입니다. 얕은 생각으로 쓸데없이 제도를 깨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세운 제도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경우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로마 황제가 신이라고 자칭하여 자신에 대한 예배를 강요하는 경우라면 크리스천은 완강히 이에 저항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 판단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요?
크리스천 생활의 판단 기준, 그것은 현대의 크리스천인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 판단 기준이란 크리스천은 “나그네”(11절)이며, “자유로운 사람”(16절)이며, “하나님의 종”(16절)이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나그네”라는 것은 우리의 거점, 국적이 하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서 믿으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아 세례를 받고 하나님과 구원의 계약을 맺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등록되어 그곳에 국적을 갖게 된 자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는 것은 천국에서 이 세상으로 온 나그네라고 자기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서 여행 행선지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속박”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제도나 관습, 인간관계의 연줄이나 역학관계에 얽매여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사람” 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물론 현실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굳게 믿고 우리 자신을 나쁜 의미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준다면 우리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자유는 “무질서”라는 뜻은 아닙니다.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욕망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천국에는 천국의 가치관이 있습니다. 천국의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아 어떠한가 하는 것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아 이 세상 제도를 따를 수도 있고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가치관으로 볼 때 지금 있는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길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와 같이 하라”(16절)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종와 같이 하라.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하면 될까요?
그 판단 기준은 “사랑”입니다. 만약 망설여진다면 자신의 행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인지,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인지로 판단하면 됩니다. 가끔 자신의 행동, 말, 생활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에 적합한지 다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지 뭐라고 하실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행동할 경우 구체적으로 “정답”이라는 절대적인 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2천 년 전이라면 노예제도는 있었을 것이지만 현대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은 시대나 장소, 나라마다 다릅니다. 사람 마다 다릅니다. 바로 인간이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하고 기도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또 함께 생각해 갑니다. 헌법 개정, 기지 및 군사력 문제, 원전 문제 등 정치적 행동은 도저히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또, 일본이라는 이교 사회 속에서 예를 들면, 불교 장례식 때는 어떻게 합니까? 불단은요? 신단은요? 첫 참배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나요? 이것도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제 생각이 궁금하신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하나, 구체적인 판단과 행동 예를 든다면, 예를 들어 저는 불교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는 분향을 합니다. 물론 불교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은 기독교라고 분향을 사퇴하는 것도 하나의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속에 있는 유족에게 다가가 슬픔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모양만으로도 마음과 나름의 신앙을 담아 행하는 것이 사랑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은 틀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알고 있다 해도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걸로 된 겁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랑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유의하는 것,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랑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때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더라도 우리 사랑의 행동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헛되이 하지 않으시고 좋게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