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 아기들”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생명을 살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1절에 있는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징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쓰여 있듯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갓난 아기들”인 그리스도인은 이들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도 할 만한 것을 목표로 새롭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2절) 라고 합니다. “신령한 젖”이란 1장 마지막에 있듯이 “주의 말씀”(25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23절)을 말합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이 “주님의 말씀”을 계속 음용함으로써 우리는 성장하고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갓난 아기들”은 엄마에게 젖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가 엄마의 젖을 “응애! 응애!” 울며 구하듯이 “신령의 젖”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열심히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의 젖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계속 듣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 안에 태어난 하나님의 영은 죽어 버리고 신앙이라는 등불은 꺼져 버립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베드로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권하는 동시에 “예수께 나아가라”(4절)고 명하고 있습니다. “주께 나아가라” 라는 곳에는 어디일까요?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신령한 젖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신앙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서로 사랑하며 성장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란 영적인 아이들인 우리에게 영적인 어린이집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란 우리에게 “기성의 장소”는 아닙니다. 준비되고 이미 완성된 시설 같은 곳을 저희가 손님으로 와서 이용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일원으로서, 스태프로서 협력해서 같이 교회를 만들어간다는 그런 면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신령한 집”(5절)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라고 베드로는 명령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석조의 멋을 모은 훌륭한 건물인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리며 교회를 만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있는 돌이 되어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신령한 집, 영적인 성전을 만들어낸다. 베드로는 그런 이미지를 품은 것 같습니다.
석조 건물의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퉁이의 머릿돌”(7절)입니다. 그것은 건물의 기초가 되는 돌이며 모퉁이의 머릿돌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비유되고 있습니다. 신령한 집, 교회를 만들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모퉁이의 머릿돌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당연히 건물은 기울고 마침내 쓰러집니다. 신령한 집,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우리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지 않았다면 교회가 기울어져 버립니다. 쓰러집니다.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대립하고, 싸우고, 분열하고, 해산하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의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신령한 집을 짓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자기 본위의 교회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해를 위해서는 자기 본위의 욕망, 소망을 위해 힘들게 사랑과 평화와 성실한 길을 걷기보다 악독과 기만의 길을 걷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길을 언제든지 기꺼이 선택하고 걸어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길을 싫어합니다. 경원합니다. 그러니까 모퉁이의 머릿돌이 버려지는 일이 생기는 거죠.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실족하여 그리스도를 방해자라며 십자가에 걸어 죽이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에 있어서도 형태를 바꾸어 일어나고 있고, 그리고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날림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건히 교회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물론 신령한 집이라는 것은 교회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간의 교제, 교류 관계를 말합니다. 신앙의 교제를 함께 만들어 가는 운영을 말합니다. 그 교류관계, 영위의 기초에 있는 것이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라면 교회가 설 리가 없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서로 관계의 기초로 삼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만들어집니다. 베드로는 그런 교회를 추구하여 목표로 하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로 돌아가려는 죄가 있습니다. 그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 우리 자신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건 어려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우리는 신령한 집(그리스도의 사랑의 교회)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 집에서 구원받기 위해 함께 기도하며 걸어갑시 다.
2023年11月12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コロサイ(골로새서) 2章 6~7節
〇讃 頌 讃頌歌 34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69 (イザヤ40章)
〇讃 頌 讃頌歌 210
〇聖書奉読 ペトロの手紙一(베드로전서) 2章 1~10節
〇説 教 「霊的な家を建てる (신령한 집을 짓는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1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11月 1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霊的な家を建てる」 ペトロの手紙一 2章 1~10節
ペトロは、今日の御言葉の中で、「生まれたばかりの乳飲み子のように」(2節)と私たちに語りかけて来ます。
「生まれたばかりの乳飲み子」と言うのは、私たちが、イエスさまと出会って、新たな命を生き始めるという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そして、それは、1節にある「悪意、偽り、偽善、ねたみ、悪口」を捨て去り、イエス・キリストが象徴するものを目指して生きていく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5章22節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愛‥‥、喜び、平和、寛容、親切、善意、誠実、柔和、節制」です。「生まれたばかりの乳飲み子」であるクリスチャンは、これら“キリストの心”とも言うべきものを目指して、新たに歩み始めるのです。
そのために、「混じりけのない霊の乳を慕い求めなさい」(2節)と言われています。「霊の乳」とは、1章の終りにあるように、「主の言葉」(25節)、「神の変わることのない生きた言葉」(23節)のことです。この「主の言葉」を聞いて受け入れることで、私たちはクリスチャンとして新たに生まれ、この「主の言葉」を飲み続けることで、私たちは成長し、救われるようになるのです。
「生まれたばかりの乳飲み子」は、母親からお乳をもらわなければ生きていけません。だから私たちは、赤ちゃんが母親のお乳を“オギャー、オギャー!”と泣いて求めるように、「霊の乳」である主イエス・キリストの言葉を熱心に求める必要があります。
私たちは、霊の乳である主イエス・キリストの言葉を聞き続け、取り入れ続けなければ、私たちの内に生まれた神の霊は死んでしまう、信仰という灯は消えてしまうのです。
私たちが成長し、救われるようになるために、必要不可欠なものがもう一つあります。それは“教会”です。ペトロは、「霊の乳を慕い求めなさい」と勧めると共に、「この主のもとに来なさい」(4節)とも命じています。「主のもと」とはどこでしょうか? 端的に言えば、それは教会です。教会において、霊の乳である主イエス・キリストの言葉をいただき、そして、信仰の仲間と共に、主の言葉を実践し、互いに愛し合いながら成長していく。その意味で、教会とは、霊的な乳飲み子である私たちにとって、“霊的な保育園”であると言っても良いでしょう。
けれども、教会とは、私たちにとって“既成の場所”ではありません。用意され、既にでき上がった施設のような場所を、私たちが“お客さん”として来て、利用す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て、私たちは“一員”として、“スタッフ”として、協力して一緒に教会を造り上げていく、教会にはそういう一面があります。
そういう意味で、教会は「霊的な家」(5節)と言われます。そして、「あなたがた自身も生きた石として用いられ、霊的な家に造り上げられるようにしなさい」とペトロは命じるのです。
ペトロは、石造りの粋を集めた立派な建物であるエルサレム神殿を思い浮かべながら、教会を造り上げるということを考えたのでしょう。信徒一人ひとりが「生きた石」となって、神が宿る「霊的な家」、霊的な神殿を造り上げる。ペトロはそんなイメージを抱いたようです。
石造りの建物の建築で、最も重要な部分があります。それは、「隅(すみ)の親石(おやいし)」(7節)でした。それは、建物の基礎となる石のことで、この「隅の親石」に、主イエス・キリストがたとえられています。霊的な家、教会を造り上げていく上で、最も重要な礎石、隅の親石は、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
この基礎がしっかりしていなければ当然、建物は傾き、やがて倒れます。霊的な家、教会も同じことです。イエス・キリストをしっかりと私たち教会の「隅の親石」に据えていなかったら、教会が傾いてしまいます。倒れます。悪意、偽り、偽善、ねたみ、悪口が人の心を支配し、対立し、争い、分裂し、解散することになります。
それは教会が、「悪意、偽り、偽善、ねたみ、悪口」の家を建て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が気を付け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霊的な家を建てていると思いながら、実は、自分本位の教会を望んでしまうのです。私たちは、自分の利害のためには、自己本位な欲望、願望のために、苦労して愛、平和、誠実の道を歩むよりも、悪意と偽りの道を歩きたがるのです。
私たちは、「愛、喜び、平和‥‥」の道をいつでも喜んで選び、歩こうす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はその道を嫌うのです。煙たがります。だから、隅の親石が捨てられるということが起こるのです。隅の親石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につまずき、キリストを邪魔者だと言って、十字架に架けて殺すのです。2千年前の話ではありません。現代においても形を変えて起こっている出来事、そして私たちの内でも起こり得る出来事なのです。
ですから、私たちも、“手抜き信仰生活”をせずに、「愛、喜び、平和、柔和、誠実‥‥」そのもの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を、しっかりと教会の基礎に据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
もちろん、霊的な家というのは、教会の建物のことではなく、私たちクリスチャン同士の交わり、交流関係のことです。信仰の交わりを共に造り上げていく営みのことです。その交流関係、営みの基礎にあるものが、悪意、偽り、偽善、ねたみ、悪口だとしたら、教会が建つわけがありません。愛、喜び、平和、寛容、親切、善意、誠実、柔和、節制を、お互いの関係の基礎に据えてこそ、イエス・キリストが喜ばれる、しっかりとした教会が造り上げられていきます。ペトロは、そういう教会を求め、目指して行けと、私たちに力強く勧め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の内には、悪意、偽り、偽善、ねたみ、悪口に戻ろうとする罪があります。その罪と闘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私たち自身の罪をイエス・キリストの前に悔い改め、赦しを願い、祈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は困難な道かもしれません。
けれども、私たちは、躓くごとに、主の十字架のもとで悔い改め、主の愛によって赦されるのです。皆さん、これからも私たちは、霊的な家(キリストの愛の教会)を造り上げるために、そして、その家で救われるために、共に祈りつつ歩んでいきましょう。
【2023년 11월 12일 주일예배(요약판)】
“신령한 집을 짓는다” 베드로전서 12장 1~10절
베드로는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갓난 아기들 같이”(2절) 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생명을 살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1절에 있는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상징하는 것을 목표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쓰여 있듯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갓난 아기들”인 그리스도인은 이들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도 할 만한 것을 목표로 새롭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2절) 라고 합니다. “신령한 젖”이란 1장 마지막에 있듯이 “주의 말씀”(25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23절)을 말합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이 “주님의 말씀”을 계속 음용함으로써 우리는 성장하고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갓난 아기들”은 엄마에게 젖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기가 엄마의 젖을 “응애! 응애!” 울며 구하듯이 “신령의 젖”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열심히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의 젖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계속 듣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 안에 태어난 하나님의 영은 죽어 버리고 신앙이라는 등불은 꺼져 버립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베드로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권하는 동시에 “예수께 나아가라”(4절)고 명하고 있습니다. “주께 나아가라” 라는 곳에는 어디일까요?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신령한 젖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신앙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서로 사랑하며 성장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란 영적인 아이들인 우리에게 영적인 어린이집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란 우리에게 “기성의 장소”는 아닙니다. 준비되고 이미 완성된 시설 같은 곳을 저희가 손님으로 와서 이용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는 일원으로서, 스태프로서 협력해서 같이 교회를 만들어간다는 그런 면이 교회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신령한 집”(5절)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라고 베드로는 명령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석조의 멋을 모은 훌륭한 건물인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리며 교회를 만든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있는 돌이 되어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신령한 집, 영적인 성전을 만들어낸다. 베드로는 그런 이미지를 품은 것 같습니다.
석조 건물의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퉁이의 머릿돌”(7절)입니다. 그것은 건물의 기초가 되는 돌이며 모퉁이의 머릿돌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비유되고 있습니다. 신령한 집, 교회를 만들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모퉁이의 머릿돌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당연히 건물은 기울고 마침내 쓰러집니다. 신령한 집,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우리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지 않았다면 교회가 기울어져 버립니다. 쓰러집니다.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대립하고, 싸우고, 분열하고, 해산하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의 집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신령한 집을 짓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자기 본위의 교회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해를 위해서는 자기 본위의 욕망, 소망을 위해 힘들게 사랑과 평화와 성실한 길을 걷기보다 악독과 기만의 길을 걷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길을 언제든지 기꺼이 선택하고 걸어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길을 싫어합니다. 경원합니다. 그러니까 모퉁이의 머릿돌이 버려지는 일이 생기는 거죠.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실족하여 그리스도를 방해자라며 십자가에 걸어 죽이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에 있어서도 형태를 바꾸어 일어나고 있고, 그리고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날림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건히 교회의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물론 신령한 집이라는 것은 교회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간의 교제, 교류 관계를 말합니다. 신앙의 교제를 함께 만들어 가는 운영을 말합니다. 그 교류관계, 영위의 기초에 있는 것이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라면 교회가 설 리가 없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서로 관계의 기초로 삼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만들어집니다. 베드로는 그런 교회를 추구하여 목표로 하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로 돌아가려는 죄가 있습니다. 그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런 우리 자신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건 어려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우리는 신령한 집(그리스도의 사랑의 교회)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 집에서 구원받기 위해 함께 기도하며 걸어갑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