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23절에서는 “썩지 않는 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썩지 않는 씨”가 우리 안에 심어져 썩지 않는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그것이 23절의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라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면 22절에 있는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순종한다”,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진리”란 18절 이하의 내용으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추구하며 자기 본위적인 삶을 살아온 우리 죄인들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깨끗해지고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며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는 것 (22절)”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진리를 내 안에 받아들이고 새롭게 산다는 것입니다.
순종한다,받아들인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의 지혜로 이해하고 자신의 힘으로 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신앙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르는 것은 “하나님,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맡기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결단을 내릴 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사는 인생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살게 해 주시는 인생, 하나님께 맡기는 인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믿음과 소망”(21절)과 함께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는 것 (22절)”입니다. 22절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는 점입니다.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들은 이미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의 어디에 그런 형제에 대한 사랑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에게는 그런 사랑은 없다고 느끼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 안에 이미 형제애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고 바꿔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깃들여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 힘이라든가 인간성이라든가를 생각하니까 자기에게는 형제애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깃들여 계시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힘을 발휘해 주십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는 게 아닌 것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이 우리는 자기중심이라는 마음의 벽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막아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막지 않도록 자기 중심이라는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썩지 않습니다.
24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24-25절)
주님의 말씀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의한 구원의 진리가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의 구원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전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썩는 것, 말라가는 것, 변해가는 것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찾았을 때 우리는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는 우리는 충실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헛된 행실”(18절)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청년 시절에 아이덴티티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했습니다. 재일교포의 아이덴티티란? 이라든가, 제 경우라면 재일교포 안에 있는 일본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란? 이라든가 하는 것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모종의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뭔가 의미를 느끼거나 남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는 존재 의의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공허함이라는 어둠이 스며듭니다.
우리 인간은 풀처럼 말라가고 꽃처럼 시들어져 갑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우리가 가진 것들도...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미모도, 건강도, 가족이나 친구도, 옮겨가고 잃어갑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잃습니다. 그 공허함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자포 자기에 빠질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허무함에, 절망에, 자포자기에 빠질 뻔한 인생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미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절망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고, 하나님께 사랑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진리를 가슴 깊이 간직하며 살아 갑시다.
2023年10月2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47章 11~12節
〇讃 頌 讃頌歌 3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65 (詩編149編)
〇讃 頌 讃頌歌 285
〇聖書奉読 ペトロの手紙一(베드로전서) 1章 17~25節
〇説 教 「永遠に変わらないもの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3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10月 2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永遠に変わらないもの」 ペトロの手紙一 1章 17~25節
今日の説教題を「永遠に変わらないもの」と付けました。「永遠に変わらないもの」、それは「主の言葉」「神の言葉」です。この「主の言葉」を、23節では「朽ちない種」にたとえております。「朽ちない種」が私たちの中に植えられて、朽ちることのない実を結ぶのだ、と。それが、23節の「神の変わることのない生きた言葉によって新たに生まれた」と言うことです。私たちは、神さまの言葉によって、新しい命として生きていくのです。新たな生き方を始めるのです。
では、私たちが「新たに生まれる」ためには、何が必要なのかと言いますと、22節にある「真理を受け入れる」ということです。「真理を受け入れる」、この「真理」とは、18節以下の内容で言えば、私たちが「むなしい生活」から「キリストの尊い血」によって「贖われる」、ということです。「金や銀のような朽ち果てるもの」に価値を置き、それを追い求めて自己本位な生き方をして来た私たち罪人が、十字架に架けられたキリストの尊い血によって清められ、赦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神さまの御心を尋ね求めながら、「偽りのない兄弟愛」(22節)を宿して、深く愛し合いながら生きる生き方へと方向転換させていただくことです。それが、救いの真理を自分の内に受け入れ、新たに生きると、いうことです。
受け入れるというのは、理解することとは違います。自分の知恵で理解し、自分の力で達成するものではないのです。聖書のことも、信仰のことも、分からないことが多くあります。それでも、分からないことは、「神さまに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とお任せして、受け入れるのです。
神さまが皆さんを呼んでいます。ある意味、私たちは決断するだけです。自分で生きる人生から、神さまに生かされ、神さまにゆだねる人生を信じて受け入れるのです。
私たちは、真理を受け入れて、新たに生まれます。すると、私たちの内に、「信仰と希望」(21節)と共に、「偽りのない兄弟愛」(22節)が宿ります。22節で注意すべきことは、「兄弟愛を抱くようになった」と書かれている点です。今はないけれど、これから兄弟愛を身につけて行くというの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は、もう既に兄弟愛を抱いている、兄弟愛を持っている、という表現なのです。
でも、私たちは自分の内の、どこにそんな兄弟愛があるのだろうか?と考えてしまいます。何かにつけ“自分には愛がないなぁ”と感じずにはいられないことがあります。けれども、そんな私たちにも兄弟愛がある、と聖書は言うのです。なぜなら、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内に住んでおられるからです。
真理を受け入れるというのは、イエス・キリストを受け入れると言い換えてもよいことです。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内に宿ったのです。聖霊となって私たちの心の内に住んでおられるのです。それはまた、兄弟愛が私たちの内に宿っていることなのです。それなのに、私たちは自分の力とか人間性とか考えるから、自分には兄弟愛がない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そうではなくて、愛そのものであるキリストが私たちの内に宿るのです。そのキリストに愛の力を発揮していただく。自分の力で、ではないのです。
ただ、残念なのが、私たちは自己中心という心の壁で、キリストの愛をふさいでしまっていると言うこと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キリストの愛をふさがないように、自己中心という心の壁を壊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また、そのために、主の言葉を聞き、祈る信仰生活を続け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を新たに生まれさせる「主の言葉」は、永遠に変わることがありません。朽ちることがありません。
24節、「人は皆、草のようだ。草は枯れ、花は散る。しかし、主の言葉は永遠に変わることがない」(24~25節)
主の言葉が永遠に変わることがないと言われるのは、主なる神さまが永遠に変わらない方だからです。主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が変わらない方だからです。主による救いの真理が永遠に変わらないからです。主なる神さまは永遠に、私たちの救いを願い続けておられる。それを伝える言葉だから、「主の言葉は永遠に変わることがない」と言われるのです。
私たちは、この世界で、朽ちるもの、枯れて散りゆくもの、変わっていくものに囲まれながら生きています。永遠なるものを探し当てた時、私たちは新たに生まれます。それを見つけるまでは、私たちは、充実しているようで、根本的には「むなしい生活」(18節)を営んで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は青年時代に、アイデンティティについて良く話しをしました。在日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は?とか、私ですと、在日の中にいる日本人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は?とかいうものを良く考えました。それは、ある種の自分の存在意義を求めてのことでした。
私たちは、自分が何か意味を感じる、あるいは人の役に立つような行動をしていないと、自分には存在意義がないかのように感じてしまうことがあります。そこに、虚しさという闇が入り込んで来ます。
私たち人間は、草のように枯れ、花のように散っていきます。私たちの周りにあるもの、私たちが持っているものも‥‥財産も、地位も名誉も、美貌も健康も、家族や親友も、移り行き、失っていきます。最後には自分の命を失います。その空しさに気づかされた時、私たちは絶望的な気持になるでしょう。自分の存在意義を見失い、投げやりな思いになることもあるでしょう。
しかし、むなしさに、絶望に、自暴自棄に陥りそうになる人生において、信じられるものがある、というのは本当に幸いなことなのです。永遠に変わることがないものを信じられるのは、とても幸いなことです。
皆さん、「永遠に変わらないもの」を知っている私たちは、キリストの愛を宿しているのです。兄弟愛を持っております。また、「永遠に変わらないもの」を知っている人は、憎しみに駆(おいたて)られず、絶望に支配されません。
私たちキリスト者は、永遠に変わらないキリストの愛を信じています。主イエス・キリストとその父なる神さまによって生かされ、愛されて生きている。皆さん、この永遠に変わることがない真理を、胸にしっかりと抱きしめて生きていきましょう。
【2023년 10월 29일 주일예배(요약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베드로전서 1장 17~25절
오늘은 설교 제목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붙였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23절에서는 “썩지 않는 씨”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썩지 않는 씨”가 우리 안에 심어져 썩지 않는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그것이 23절의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라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면 22절에 있는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순종한다”, 진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진리”란 18절 이하의 내용으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추구하며 자기 본위적인 삶을 살아온 우리 죄인들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깨끗해지고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며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는 것 (22절)”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진리를 내 안에 받아들이고 새롭게 산다는 것입니다.
순종한다,받아들인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의 지혜로 이해하고 자신의 힘으로 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신앙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모르는 것은 “하나님,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맡기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결단을 내릴 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사는 인생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살게 해 주시는 인생, 하나님께 맡기는 인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믿음과 소망”(21절)과 함께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는 것 (22절)”입니다. 22절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는 점입니다.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 거짓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들은 이미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다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의 어디에 그런 형제에 대한 사랑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에게는 그런 사랑은 없다고 느끼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 안에 이미 형제애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고 바꿔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깃들여 계신 것입니다. 성령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 힘이라든가 인간성이라든가를 생각하니까 자기에게는 형제애가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깃들여 계시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힘을 발휘해 주십니다. 내 힘으로 사랑하는 게 아닌 것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이 우리는 자기중심이라는 마음의 벽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막아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막지 않도록 자기 중심이라는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또한 그러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썩지 않습니다.
24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24-25절)
주님의 말씀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의한 구원의 진리가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의 구원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전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썩는 것, 말라가는 것, 변해가는 것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찾았을 때 우리는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는 우리는 충실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헛된 행실”(18절)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청년 시절에 아이덴티티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했습니다. 재일교포의 아이덴티티란? 이라든가, 제 경우라면 재일교포 안에 있는 일본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란? 이라든가 하는 것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모종의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뭔가 의미를 느끼거나 남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는 존재 의의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공허함이라는 어둠이 스며듭니다.
우리 인간은 풀처럼 말라가고 꽃처럼 시들어져 갑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우리가 가진 것들도...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미모도, 건강도, 가족이나 친구도, 옮겨가고 잃어갑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을 잃습니다. 그 공허함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자포 자기에 빠질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허무함에, 절망에, 자포자기에 빠질 뻔한 인생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미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절망에 지배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고, 하나님께 사랑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진리를 가슴 깊이 간직하며 살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