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13절) 이렇게 야고보는 당시의 유대인 크리스찬들에게 그리고 지금 이 편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기도하라”고 권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16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이 간질로 심히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나중에 오신 예수님께서 고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17:20)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작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산이 움직일 리가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믿음이 작다 크다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상식으로 생각하면 그렇지요. 산이 움직일 리가 없습니다. 기도로 비가 내리거나 그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것을 생각하라고 요구하시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상식이나 경험, 자신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떠나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도록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부정하지 않는다. 먼저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한다. 이런 자세로부터 말씀의 깊은 의미와 기도의 “큰 힘”이 점점 보이게 되며 깨닫게 됩니다. 기도의 은혜를 맛보면 그 힘과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의 조건 같은 것이 있습니다. 16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의인의 간구”로서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큰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무심코 “나 같은 건 의인이 아니니까 기도해도 안되겠다”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인이라는 말로 이미지화하고 있는 것과 성경이 보여주는 의인은 좀 다릅니다.
본문 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의인의 간구”라는 것은 이 “믿음의 기도”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즉 “의인의 간구”란 “믿음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기도란 어떤 것일까요? 야고보서 4장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4장 2-3절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야 4:2-3)
여기에는 뭔가를 얻고자 간구하는 기도에 대해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도의 “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힘이 없느냐? 잘못된 동기로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욕으로 쓰려고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쓰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밖에 안 하는 것으로 동기가 자기중심인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기도를 요구하고 계신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도”가 아닌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기도”란 어떤 기도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때, 기도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입다.
오늘의 본문에서 비추어 보면 13절 말씀이 신앙에 근거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3절) 괴로움을 당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여 구원을 구하고 그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도가 단순히 “힘들 때의 신에 대한 부탁”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힘들 때는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합니다. 이윽고 괴로움이 지나가고 평안의 때가 찾아옵니다. 괴로움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도를 잊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자기 본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찾아왔을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라, 어떨 때라도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그것이 “믿음의 기도”라는 것이며 “의인의 간구”라는 성경적, 신앙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믿음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듣고 “내가” 원하는 소원을 제쳐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귀 기울이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 스스로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기도 자체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마음을 따를 수 있기를”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둔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는 “큰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기도로 괴로움이 완화됩니다. 평안이 생기며 고치심과 용서가 일어납니다. 물론 현실에서 언제나 그렇게 역사가 일어나지는 않지요. 기도는 신불의 영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신앙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기도라면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소원을 구하는 것과는 달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변해갑니다. 그런 기도를 하는 가운데 평안과 고치심, 용서의 깊은 의미가 조금씩 보이게 됩니다. “믿음의 기도”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생각해 보면 “뭐 뭐 해 주세요, 주세요, 주세요” 라는 기도가 대부분이 아닐까요? 여러분,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로 조금씩 바꿔갑시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큰 힘”이 퍼지는 것입니다.
2023年10月1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による福音書(요한복음) 14章 13~14節
〇讃 頌 讃頌歌 28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57 (詩編130編)
〇讃 頌 讃頌歌 250
〇聖書奉読 ヤコブの手紙(야고보서) 5章 13~18節
〇説 教 「祈りの大きな力 (기도의 큰 힘)」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43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10月 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祈りの大きな力」 ヤコブ 5章13~18節
「あなたがたの中で苦しんでいる人は、祈りなさい」(13節)。
ヤコブは、当時のユダヤ人クリスチャンに、そして今、この手紙を通して御言葉を聴こうとしている私たちに、「祈りなさい」と勧め、教えております。
なぜなら、「正しい人の祈りは、大きな力があり、効果をもたらす」(16節)からです。
マタイによる福音書17章において、弟子たちがてんかんを患う子供を癒すことが出来ず、後から来たイエスさまが癒しをなさって、弟子たちにこう言われました。「もし、からし種一粒ほどの信仰があれば、この山に向かって、『ここから、あそこに移れ』と命じても、そのとおりになる。あなたがたにできないことは何一つない」(マタイ17:20)。そして、それができないのは「信仰が薄いからだ」と言われたのです。
でも、私たちは“そうは言ってもなあ?”と思ってしまうところがあります。山が動くはずないよ、と思ってしまう。信仰の薄い厚いの問題ではないよ、と思ってしまいます。そりゃあ、常識で考えれば、そうですよね。山が動くはずがありません。雨がやんだり降ったりするわけがありません。
けれども、御言葉を通して、神さまは私たちに、そんなことを考えるように求めておられるのでしょうか? そう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は私たちに、まず御言葉を聞くことを求めておられます。常識とか経験、自分の好みや価値観から離れて、神さまの御心が何であるかを思いながら、神さまの御心と一つになれるように、まず御言葉を聞いて、受け止めることが求められています。そうでなければ、信仰も祈りも始まりません。御言葉を拒否しない。否定しない。まず聞いて受け止める。肯定する。その姿勢から、御言葉の深い意味が、祈りの「大きな力」が次第に見えて来ます。分かって来ます。祈りの恵みを味わえば、その力と効果が分かって来るようです。
けれども、そこには一つ、条件のようなものがあります。16節に「正しい人の祈りは‥」と書かれています。「正しい人」として祈る時、その祈りは大きな力を生むのです。
「正しい人」とは、どんな人のことでしょう。つい、“自分なんか、正しくないから祈ってもだめだ”という気持になってしまいます。
けれども、私たちが「正しい人」という言葉でイメージしていることと、聖書が示す「正しい人」とは、ちょっと違うのです。
今日の15節に、「信仰に基づく祈りは、病人を救い、主がその人を起き上がらせてくださいます」とあります。「正しい人の祈り」というのは、この「信仰に基づく祈り」と重なり合う、同じ意味だと考えて良いでしょう。つまり、“正しい”とは“信仰に基づい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では、信仰に基づいている、とは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一つ前の4章に、そのヒントがあります。4章2~3節にかけて、次のような御言葉がありました。
「得られないのは願い求めないからで、願い求めても、与えられないのは、自分の楽しみのために使おうと、間違った動機で願い求めるからです」。
ここには、何かを得ようと願う祈りについて記されています。けれども、それは与えられない。祈りに「大きな力」がないからです。なぜ力がないのか。間違った動機で願い求めているからです。
自分の楽しみのために使おうとは考えても、神さまのために、人のためにとは考えていない。自分のことしか考えていない。つまり、動機が自己中心なのです。神さまは自分に何を求めておられるか、その御心を考えていないのです。これが、“信仰に基づかない祈り”だと言って良いでしょう。
ならば、信仰に基づいているとは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それは神さまの御心が何であるかを考え、御心に沿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時、祈りは力を生むのです。
今日の御言葉に照らして言えば、13節に、信仰に基づくということが示されています。「あなたがたの中で苦しんでいる人は祈りなさい。喜んでいる人は、賛美の歌を歌いなさい」。苦しみに遭い、自分の力ではどうにもならない行き詰まりの中で、神さまに祈る。神さまの力に頼り、救いを願い求め、その手におゆだねする。
けれども、その祈りが単に“苦しい時の神頼み”に終わってはなりません。苦しい時は一生懸命、熱心に神さまに祈る。やがて苦しみが過ぎ去り、平安の時が訪れる。苦しみが取り去られ、喜びに満たされる。その時、ともすれば私たちはコロッと祈りを忘れるのです。ケロッとして神さまを忘れるのです。なぜか。私たちが自己中心だからです。祈りが自分本位だからです。そうならないように、「喜んでいる人は、賛美の歌を歌いなさい」と言われているのです。苦しい時だけ神さまに祈るのではなく、苦しみが去り、喜びが訪れた時にも、神さまに感謝しなさい。どんな時にも神さまに心を向けなさい。どんな時にも神さまの御心が何であるかを思いなさい。それが「信仰に基づく」ということであり、「正しい」ということの聖書的、信仰的な意味です。
それでは、そのように「信仰に基づく祈り」をするためには、どうすればよいのでしょう。
それは、御言葉に聴くことです。まず御言葉に聴いて、“私が”という願いを脇へ置いて、“神さまが”自分に何を求めておられるかを受け止めて祈ることが大事です。それによって、自分の願いもまた、“これは神さまの御心にそぐわない”ということに気づかされ、祈りが修正されていくのです。そこに、“神さまの御心に従う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という祈りが、御言葉に応答する祈りが生まれて来ます。そして、その祈りには「大きな力」がある。なぜなら、神さまの御心に沿っているからです。
「正しい人の祈りは、大きな力があり、効果をもたらします」。
祈りによって、苦しみは和らぎます。平安が生まれます。癒しが生じます。赦しが起こります。もちろん、いつもいつも文字通り、その通りにはならないでしょう。そう容易く「効果」は現れないでしょう。祈りは御利益ではないからです。
けれども、祈りが信仰に基づいたものであるならば、御言葉に聴き、御心を求める祈りであるならば、神さまの“答え”を待つ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す。自分の願い求めたこととは違っていても、それが神さまの御心と受け止められるように変えられていきます。そのような祈りの中で、平安とは、癒しとは、赦しとは、ということの深い意味が少しずつ見えて来ます。信仰に基づく祈りが、私たちをそのように導くのです。
私たちの祈りは、考えてみると“何々して下さい。下さい、下さい”の祈りが大半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祈りを、御言葉に聴き、御心を受け取り、“御言葉を受け取りました。恵みを受け取りました。感謝します”と言う祈りに少しずつ変えていきましょう。それによって、私たちの内に「大きな力」が広がります。
【2023년 10월 1일 주일예배(요약판)】
“기도의 큰 힘” 야고보서 5장 13~18절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13절) 이렇게 야고보는 당시의 유대인 크리스찬들에게 그리고 지금 이 편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기도하라”고 권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16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이 간질로 심히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나중에 오신 예수님께서 고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17:20)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작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데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산이 움직일 리가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믿음이 작다 크다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상식으로 생각하면 그렇지요. 산이 움직일 리가 없습니다. 기도로 비가 내리거나 그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것을 생각하라고 요구하시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상식이나 경험, 자신의 취향이나 가치관을 떠나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도록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부정하지 않는다. 먼저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한다. 이런 자세로부터 말씀의 깊은 의미와 기도의 “큰 힘”이 점점 보이게 되며 깨닫게 됩니다. 기도의 은혜를 맛보면 그 힘과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의 조건 같은 것이 있습니다. 16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의인의 간구”로서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큰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무심코 “나 같은 건 의인이 아니니까 기도해도 안되겠다”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인이라는 말로 이미지화하고 있는 것과 성경이 보여주는 의인은 좀 다릅니다.
본문 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의인의 간구”라는 것은 이 “믿음의 기도”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즉 “의인의 간구”란 “믿음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기도란 어떤 것일까요? 야고보서 4장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4장 2-3절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야 4:2-3)
여기에는 뭔가를 얻고자 간구하는 기도에 대해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도의 “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힘이 없느냐? 잘못된 동기로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욕으로 쓰려고 생각하고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쓰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밖에 안 하는 것으로 동기가 자기중심인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기도를 요구하고 계신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도”가 아닌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기도”란 어떤 기도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 때, 기도는 힘을 만들어 내는 것입다.
오늘의 본문에서 비추어 보면 13절 말씀이 신앙에 근거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3절) 괴로움을 당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여 구원을 구하고 그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도가 단순히 “힘들 때의 신에 대한 부탁”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힘들 때는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합니다. 이윽고 괴로움이 지나가고 평안의 때가 찾아옵니다. 괴로움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도를 잊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자기 본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찾아왔을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라, 어떨 때라도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그것이 “믿음의 기도”라는 것이며 “의인의 간구”라는 성경적, 신앙적인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믿음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듣고 “내가” 원하는 소원을 제쳐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귀 기울이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 스스로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기도 자체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마음을 따를 수 있기를”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둔 기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는 “큰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기도로 괴로움이 완화됩니다. 평안이 생기며 고치심과 용서가 일어납니다. 물론 현실에서 언제나 그렇게 역사가 일어나지는 않지요. 기도는 신불의 영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신앙에 의거하는 것이라면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기도라면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소원을 구하는 것과는 달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변해갑니다. 그런 기도를 하는 가운데 평안과 고치심, 용서의 깊은 의미가 조금씩 보이게 됩니다. “믿음의 기도”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생각해 보면 “뭐 뭐 해 주세요, 주세요, 주세요” 라는 기도가 대부분이 아닐까요? 여러분,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로 조금씩 바꿔갑시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큰 힘”이 퍼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