ですから、今、私たちは、御父と御子イエス・キリストとの交わりを分かち合い、持っているのです。韓国語聖書には、「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とあります。「私たちの交わりは、御父と御子イエス・キリストと共に楽しむのだ」ということです。「누림이라」とありますように楽しむのです。楽しむ、これは人間的な楽しさということではなく、復活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の命を楽しむ、すなわち、キリストの命を私たちが分かち合って持つに至り、喜びにあふれるということです。
사도 요한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전하는 것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증명하고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 곁에서 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아픔도 슬픔도 우리와 똑같이 맛보셨던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우리 인간이 결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 주셔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분이 되셨다고 여기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람이 되시기 전의 외아들이신 하나님을 말씀(로고스)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이렇게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또 요한복음 1장 17~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 1:17-18)
요한은 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그 몸을 만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손과 다리를 봐라. 바로 나다. 만져보고 잘 보라”고. (요한복음 20장 참조)
그 예수님의 목소리를 사도 요한은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흉터가 있는 예수님을 잘 바라보며 손으로 만졌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요한은 다시 당신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함이나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3절) 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우리와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교제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친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하신 하나님의 교제 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을 위한 교제가 교회의 교제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말씀드리자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 그 지체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교제입니다.
이 “교제”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코이노니아” 라는 말입니다. 또, 그 “교제”라고 하는 것은 “공유한다” “서로 나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의 은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공유에 의해서 우리의 교제는 성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즐기는 것이랍니다. “누림이라” 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즐기는 것입니다. 즐긴다, 이것은 인간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즐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가 나누어 갖기에 이르며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교제를 이 영원한 생명을 당신들도 공유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요한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공유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요12:50 아버지의 명령은 영생이다. 참조)
우리는 죄를 가진 그대로의 인간입니다. 마음에 흉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성도라고 불리는 데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공유한다는 것도 실제로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각자 지금의 처지가 다르고 신앙관도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흉터를 남긴 채 상처 입은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입은 채로도 영원한 생명에 접할 수 있다. 부활의 생명에 접할 수 있는 교제를 저희에게 준비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좋은 소식”, “기쁨의 소식” 입니다. 그 복음을 전할 때, 전하는 우리 자신이 기쁨으로 가득 차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함으로써 복음을 받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나누면서 기쁨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 갑시다.
2023年1月2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1章 14, 17-18節
〇讃 頌 讃頌歌 12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7 (詩編13編)
〇讃 頌 讃頌歌 221
〇聖書奉読 ヨハネの手紙一(요한 1서) 1章 1~4節
〇説 教 「聖徒の交わり(성도의 교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27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1月 2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聖徒の交わり」 ヨハネの手紙一 1章 1~4節
使徒ヨハネは、私たちが命をかけて伝えているものは「初めからあったもの」であり、「私たちが聞いたもの、目で見たもの、よく見て、手で触れたもの」であると言います。そのようなものを、私たちは証しして伝えているのだと主張しているのです。
ヨハネはいつもイエスさまの側で仕えておりました。イエスさまが語られた言葉を直接聞きました。痛みも、悲しみも、私たちと同じように味われたイエスさまに触れました。その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死なれ、三日後によみがえり、私たちの前に現れてくださったのを私は見たのだと言います。
ヨハネはイエスさまのことを「初めからあったもの」「命の言葉」と表現しています。永遠のうちに神さまと共におられ、私たち人間が決して見ることも触れることも出来ない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ところに現れてくださって、私たちが「触れることのできる」お方となられた、とここに告白しているのです。
ヨハネは、人となられる前の独り子なる神さまを、言(ロゴス)と言っています。ヨハネによる福音書1章14節にこうあります。「言は肉となって、わたしたちの間に宿られた。わたしたちはその栄光を見た。それは父の独り子としての栄光であった、恵みと真理とに満ちていた。」(ヨハネ1:14)
また、ヨハネによる福音書1章17~18節ではこう言っています。「律法はモーセを通して与えられたが、恵みと真理は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現れたからである。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いない。父のふところにいる独り子である神、この方が神を示されたのである。」(ヨハネ1:17-18)
ヨハネはこのイエス・キリストから教えを聞き、イエス・キリストのお姿を見、そのお体に触れたのです。
復活されたイエスさまは、疑う弟子たちに言われました。「わたしの手と足を見なさい。まさしくわたしだ。触ってよく見なさい」と。(ヨハネ20章参照)
そのイエスさまの声を使徒ヨハネは聞きました。そのお姿を見たのです。復活した傷跡のあるイエスさまをよく見つめ、手で触れたと証言し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使徒ヨハネを通して語られます。「わたしは復活であり、命である。 わたしを信じるものは死んでも生きる。生きていてわたしを信じる者はだれも、決して死ぬことはない。このことを信じるか」(ヨハネ11:25-26)と、私たちに語りかけています。
皆さん、使徒ヨハネは、改めてあなたがたにこのことを伝えるのは、「あなたがたもわたしたちとの交わりを持つようになるためです。私たちの交わりは、御父と御子イエス・キリストとの交わりです」(3節)と言っています。
父なる神さまと子なるイエス・キリストとの交わりを、私たちとの交わりを通して、自分のものにして欲しいということですね。教会での交わりというのは、単に人間の親しい交わりを意味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のとの交わりです。父・子・聖霊なる神さまの交わりの中に、私たちが入れられる。そのための交わりが教会の交わりです。それが「聖徒の交わり」ということです。
「聖徒の交わり」については、先週もお話しましたが、今日の御言葉からお話するならば、聖霊の導きによって、イエス・キリストを頭とする教会にその肢体としてつながっている者たちの交わりです。
この「交わり」訳されているギリシャ語は「コイノーニア」という言葉です。また、その「交わり」というのは、「共有する」「分かち合う」という意味です。私たちは、今、時間と場所を共有しています。また、御言葉の恵みを共有しています。そのような共有によって、私たちの交わりは成り立っ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今、私たちは、御父と御子イエス・キリストとの交わりを分かち合い、持っているのです。韓国語聖書には、「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とあります。「私たちの交わりは、御父と御子イエス・キリストと共に楽しむのだ」ということです。「누림이라」とありますように楽しむのです。楽しむ、これは人間的な楽しさということではなく、復活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の命を楽しむ、すなわち、キリストの命を私たちが分かち合って持つに至り、喜びにあふれるということです。
ヨハネは、この交わりを、この永遠の命をあなたがたも共有してほしいとヨハネは願っているのです。ヨハネだけではありません。御父と御子イエス・キリストは、一人でも多くの人が福音を聞いて、信じて、永遠の命を共有してほしいを願っているのです。(ヨハネ12:50「父の命令は永遠の命である参照)
私たちは罪を持ったままの人間です。心に傷跡が沢山あります。このような私たちが聖徒と呼ばれるのには抵抗があります。イエスの愛を共有するということも実際は難しいものがあります。それぞれ今の境遇が違い、信仰観も違うものがあります。そんな私たちだからこそ、復活されたイエスさまは傷跡を残したまま、傷を負った姿で弟子たちの前に現れたのです。傷を負ったままでもよみがえりの命に触れることが出来る。よみがえりの命に触れる「交わり」を私たちに用意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
だから「福音」、「良い知らせ」「喜びの知らせ」なのです。その福音を宣べ伝えるとき、宣べ伝えている私たち自身が、喜びに満ちあふれるのです。私たちは福音を宣べ伝えることによって、福音にあずかる者となるからです。私たちは、御父と御子イエス・キリストとの交わりを分かち合いながら、喜びに満ちあふれて、イエス・キリストの福音を宣べ伝えていきたいと願います。
【2023년 1월 29일 주일예배(요약판)】
“성도의 교제” 요한 1서 1장 1~4절
사도 요한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전하는 것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증명하고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 곁에서 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아픔도 슬픔도 우리와 똑같이 맛보셨던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시며 우리 인간이 결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 주셔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분이 되셨다고 여기에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람이 되시기 전의 외아들이신 하나님을 말씀(로고스)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이렇게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또 요한복음 1장 17~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 1:17-18)
요한은 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그 몸을 만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손과 다리를 봐라. 바로 나다. 만져보고 잘 보라”고. (요한복음 20장 참조)
그 예수님의 목소리를 사도 요한은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흉터가 있는 예수님을 잘 바라보며 손으로 만졌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요한은 다시 당신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것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함이나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3절) 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우리와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교제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친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하신 하나님의 교제 속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을 위한 교제가 교회의 교제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에 대해서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말씀드리자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 그 지체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교제입니다.
이 “교제”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코이노니아” 라는 말입니다. 또, 그 “교제”라고 하는 것은 “공유한다” “서로 나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의 은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공유에 의해서 우리의 교제는 성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즐기는 것이랍니다. “누림이라” 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즐기는 것입니다. 즐긴다, 이것은 인간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즐긴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가 나누어 갖기에 이르며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교제를 이 영원한 생명을 당신들도 공유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요한뿐만이 아닙니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공유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요12:50 아버지의 명령은 영생이다. 참조)
우리는 죄를 가진 그대로의 인간입니다. 마음에 흉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성도라고 불리는 데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공유한다는 것도 실제로는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각자 지금의 처지가 다르고 신앙관도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흉터를 남긴 채 상처 입은 모습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입은 채로도 영원한 생명에 접할 수 있다. 부활의 생명에 접할 수 있는 교제를 저희에게 준비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좋은 소식”, “기쁨의 소식” 입니다. 그 복음을 전할 때, 전하는 우리 자신이 기쁨으로 가득 차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함으로써 복음을 받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나누면서 기쁨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