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본문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7절)
여기서 농부라는 것은 보리(밀)을 만드는 농부입니다. 보리는 기울의 비로 싹이 나고 봄의 비로 크게 성장합니다. 수확은 날씨에 좌우됩니다. 노부는 바로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윽고 찾아오는 수확 때를 기대하면서 비가 오지 않는 시기를 인내하는 것입니다. 수확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른 비가 오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는 것 같은 불모의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7절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농부처럼 인내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에 있어서 농부라는 것은 거의 지주에게서 밭을 빌려 갈아 수확하는 소작인이었습니다. 밭의 주인에게 수확을 내고 주인에게서 임금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에게 임금을 정당히 지불하지 않고 착취하는 지주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농부로 보면 참을 수 없습니다. 애 쓰고 일했는데 수확의 보수를 얻지 못했으면 인내할 의미가 없습니다. 인내할 수 없습니다. 분노가 폭발하는지 절망에 풀이 죽는지 어느 쪽입니다. 지주에게 저항하지 못해서 굶주림으로 죽은 농보도 그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과연 용서할 수 있겠었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느끼는 것은 이럴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정과 괴로움을 간과하지는 않으십니다. 오늘의 성경말씀 직전, 5장의 모두에 부한 지주들에 대한 심판이 쓰여져 있습니다. 5장 4절입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4절)
그리고 지주들에 대한 심판과는 반대로 농부들에게는 소망을 말합니다. 너희들의 괴로움은 이 세상에서 보답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망하지 말라. 인내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악인들을 심판하여 너희들을 구원해 주실 “말세”까지 인내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7절의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라느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소망과 격려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우리에게도 인내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크리스챤에게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에 또 슬픔에 당합니다. 그것이 현실에 해결되어 사라질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그 때를 기대하면서 인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결을 기대하지 못해서 일생 짊어져야 하는 것같은 괴로움이나 병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는 부조리한 괴로움도 슬픔도 있습니다. 그것을 인내하는 것에 의미와 소망을 찾아낼 수 없으면 우리에게는 그런 괴로움이나 슬픔을 인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괴로움을 인내할 수 없습니다. 소망이 있으니까 괴로움에 의미를 찾아내서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괴로움이나 슬픔에 소망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소망의 빛을 찾아내지 못해서 마치 끝이 없는 것같은 절망적인 괴로움이나 슬픔에도 소망을 고합니다. 너희 인생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다. 말세가 올 것이다. 그 때, 너희의 괴로움도 슬픔도 끝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물이 닦여 웃음에 바뀐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너희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간과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믿고 인내해라.
바로, 그것이 신앙으로 말미암은 소망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이 세상의 일이나 인생의 괴로움과 슬픔을 눈에 보이는 현실만으로 판단하지 않는 보는 방법이며 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려고 하니까 괴로움이나 슬픔 속에게도 플러스의 의미나 소망을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도 그것이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했으면 인생의 괴로움에 절망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으로 천국으로 계속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 신앙의 시점에서 괴로움이나 슬픔을 다시 볼 때에 자신의 생명이 이 세상의 괴로움이나 슬픔으로 끝나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고 용기와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인내한 모범으로서 “선지자들”(10절)과 “욥”(11절)의 인내를 들고 있습니다. 특히 욥이라는 사람은 인생의 절망을 겪으면서도 신앙으로 고난을 극복하여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인물입니다. 구약성서의 욥기를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욥은 하나니께서 하시는 일을 끝까지 믿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게 아닙니다. 너무나 괴로워서 “왜 내가 이런 지독한 꼴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나님을 의심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성내어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그 심한 갈등이나 마음의 괴로움 속에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욥의 인내란, 모범적인 우등생적인 인내가 아니지만, 심한 갈등 가운데도 신앙만은 잃지 않았다, 버리지 않았다는 인내인 것입니다.
우리도 결코 “신앙의 우등생”이 아닙니다. 의심도 있습니다. 불평도 나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싶게 됩니다. 신앙을 버리고 싶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갈등과 연약함을 하나님께서는 잘 아셔서 노하지도 않으시고 지켜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마음에 성령을 보내어 도와 주십니다.
의심과 갈등, 저주가 있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만은 버리지 않고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하실 때까지 믿고 인내하여 걸어갑시다. 인내가 끝날 때를, 기쁨으로 바뀔 때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신앙이야말로 우리의 사는 힘입니다.
2023年9月24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コリントの信徒への手紙一(고린도전서) 1章 23~25節
〇讃 頌 讃頌歌 27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55 (詩編127編)
〇讃 頌 讃頌歌 488
〇聖書奉読 ヤコブの手紙(야고보서) 5章 1~11節
〇説 教 「希望があるから耐えられる(소망이 있으니 인내할 수 있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84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9月 2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希望があるから耐えられる」 ヤコブの手紙 5章1~11節
今日の御言葉の7節をご覧下さい。「農夫は、秋の雨と春の雨が降るまで忍耐しながら、大地の尊い実りを待つのです。」(7節)
ここで農夫というのは、たぶん小麦を作る農夫です。小麦は秋の雨で芽を出し、春の雨で大きく成長します。実りは天候の大きく左右されます。農夫はまさに「忍耐しながら、大地の尊い実りを待つ」のです。やがて訪れる実りの時を期待して、雨の降らない時期を忍耐します。実りが期待できるから、忍耐できるのです。
人生にも、恵みの雨が降らず、神の救いの恵みに潤されないような、不毛の時があります。そのような時、私たちは「忍耐」を求められます。
「兄弟たち、主が来られる時まで忍耐しなさい」(7節)。
聖書は、そのように語りかけて来ます。農夫のように忍耐することが求められます。
でも、当時のユダヤにおいて、「農夫」というのは、地主から畑を借りて耕し、収穫する小作人がほとんでした。畑の主人に収穫を納め、主人から賃金をもらうのです。
けれども、農夫に賃金を正当に支払わず、搾取する地主も少なからずいたようです。貧しい生活をしている農夫にしてみれば、たまったものではありません。せっかくがんばって働いたのに、大地の実りの報酬をもらえなかったら、賃金をもらえなかったら、忍耐する意味がないのです。忍耐できません。怒りが爆発するか、絶望に打ちひしがれるか、どちらかです。けれども、地主に抵抗できず、飢えに死んだ農夫とその家族もおりました。
そんなことがはたしてゆるされていいのか? 神も仏もあるものかと感じるのは、こういう時です。
けれども、神さまは、そのような不正と苦しみを見逃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今日の箇所の直前、5章のはじめに、金持ちの地主たちに対する裁きが語られています。
4節、「御覧なさい。畑を借り入れた労働者にあなたがたが支払わなかった賃金が、叫び声をあげています。刈り入れをした人々の叫びは万軍の主の耳に達しました。」(4節)
金持ちの地主たちよ、あなたがたが苦しめた農夫たちの悲しみと怒りの叫び声は、わたしの耳に届いている。あなたがたは裁かれ、財産は朽ち果て、火に食い尽くされる「終わりの時」(3節)が来る。神さまは、そのように警告されています。
そして、地主たちに対する裁きの裏返しで、農夫たちには希望が語られます。あなたがたの苦しみは、この世では報われないかも知れない。しかし、絶望しないでいなさい。忍耐しなさい。主イエス・キリストが再びやって来て、悪人を裁き、あなたがたを救ってくださる「終わりの時」まで忍耐しなさい、と励ましが語られます。それが、7節の「兄弟たち、主が来られる時まで忍耐しなさい」という御言葉の意味です。
この希望と励ましの御言葉は、今の私たちにも、語りかけられております。「兄弟たち、主が来られるときまで忍耐しなさい」。
私たちにも、忍耐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少なからずあるでしょう。神さまを信じたからと言って、クリスチャンには他の人たちよりも特別、良いこと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人間として同じように、苦しみに、悲しみに出会います。それが現実に解決され、取り除かれる希望があるならば、私たちはその時を期待して忍耐することもできます。けれども、なかなか解決を期待できず、長く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一生背負わねばならないような苦しみや病もあります。そして、なぜそうなったのか分からないような不条理な苦しみ、悲しみもあります。それを忍耐することに、意味と希望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なければ、私たちには、そのような苦しみ、悲しみが耐え難いのです。
希望がなければ、苦しみに耐えられない。その通りだと思います。希望があるから、苦しみに意味を見いだし、忍耐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聖書は、私たちの苦しみ、悲しみに、希望を語ります。普通に考えれば希望の光を見つけられず、まるで“終わり”のないかのような絶望的な苦しみ、悲しみにも、希望を告げます。あなたの人生に、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がやって来るのだ。「終わりの時」が来るのだ。その時、あなたの苦しみも、悲しみも終わる。キリストによって涙がぬぐわれて、笑いに変わる。神さまは決して、あなたの苦しみ、悲しみを見過ごしておられるのではない。だから、信じて忍耐しなさい。それが、信仰による希望です。
信仰とは、神さま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この世の出来事や人生の苦しみ、悲しみを、目に見える現実だけで判断しないモノの見方であり、生き方です。神さまの目で、神さまの心で見ようとするから、苦しみや悲しみの中にも、プラスの意味や希望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人の命も、それが死で終わると考えたら、人生の苦しみにがっくりします。けれども、私たちの命は永遠の命へと、天国へと続くと信じるから、その信仰の視点から苦しみ、悲しみを見直す時に、自分の命はこの世の苦しみ、悲しみだけで終わってしまう虚しいものではないと、勇気と希望を抱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だからこそ、忍耐が生まれてくるのです。
そのような信仰で忍耐した模範として、「預言者たち」(10節)と「ヨブ」(11節)が挙げられています。特に、ヨブという人は、信仰によって苦難を乗り越え、再び神さまの祝福を受けた人物です。詳しいことは、旧約聖書のヨブ記を読んで下さればと思います。
でも、このヨブは、神さまのなさることを信じ抜いて、一度も疑わなかったというのではありません。あまりの苦しみ、悲しみに、“なぜ自分がこのような目に逢わねばならないのか”と神さまを疑い、神さまに向かって怒り、呪ったのです。
けれども、その激しい葛藤、心の苦しみの中で、ヨブは神さまから離れることだけはしませんでした。信仰を捨てることだけはしませんでした。ヨブの忍耐とは、模範的な、優等生的な忍耐ではなく、激しい葛藤の中で、信仰だけは失わなかった、捨てなかったという忍耐なのです。
私たちとて、決して“信仰の良い子”ではいられません。疑いもあります。不平も出ます。神さまを呪いたくもなるのです。信仰を捨てたくなることだってあるのです。それが、私たちの信仰生活です。
でも、そういう私たちの葛藤と弱さを、神さまもよくご存じで、怒りもせず、見守り抜いてくださいます。祈りに応えて、心に聖霊を送り、助けてくださいます。
疑いと葛藤、呪いがあっても良いのです。けれども、信仰を捨てずに、最後まで、主イエス・キリストが来ると言われる時まで、信じて、忍耐して歩みたいと願います。忍耐が終わる時を、喜びに変わる時を信じましょう。その信仰こそ、生きる力です。
【2023년 9월 24일 주일예배(요약판)】
“소망이 있으니 인내할 수 있다” 야고보서 5장 1~11절
오늘의 본문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7절)
여기서 농부라는 것은 보리(밀)을 만드는 농부입니다. 보리는 기울의 비로 싹이 나고 봄의 비로 크게 성장합니다. 수확은 날씨에 좌우됩니다. 노부는 바로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윽고 찾아오는 수확 때를 기대하면서 비가 오지 않는 시기를 인내하는 것입니다. 수확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른 비가 오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는 것 같은 불모의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7절입니다.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농부처럼 인내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에 있어서 농부라는 것은 거의 지주에게서 밭을 빌려 갈아 수확하는 소작인이었습니다. 밭의 주인에게 수확을 내고 주인에게서 임금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에게 임금을 정당히 지불하지 않고 착취하는 지주도 있었습니다.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농부로 보면 참을 수 없습니다. 애 쓰고 일했는데 수확의 보수를 얻지 못했으면 인내할 의미가 없습니다. 인내할 수 없습니다. 분노가 폭발하는지 절망에 풀이 죽는지 어느 쪽입니다. 지주에게 저항하지 못해서 굶주림으로 죽은 농보도 그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과연 용서할 수 있겠었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느끼는 것은 이럴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부정과 괴로움을 간과하지는 않으십니다. 오늘의 성경말씀 직전, 5장의 모두에 부한 지주들에 대한 심판이 쓰여져 있습니다. 5장 4절입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4절)
부한 지주들아, 너희들이 괴롭힌 농부들의 슬픔과 분노의 외치는 소리는 나의 귀에 들렸다, 너희들은 심판받고 재산이 썩어 버려, 불로 태워질 “말세”가 온다고 하나님께서는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주들에 대한 심판과는 반대로 농부들에게는 소망을 말합니다. 너희들의 괴로움은 이 세상에서 보답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망하지 말라. 인내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악인들을 심판하여 너희들을 구원해 주실 “말세”까지 인내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7절의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라느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소망과 격려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우리에게도 인내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크리스챤에게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에 또 슬픔에 당합니다. 그것이 현실에 해결되어 사라질 소망이 있으면 우리는 그 때를 기대하면서 인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결을 기대하지 못해서 일생 짊어져야 하는 것같은 괴로움이나 병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는 부조리한 괴로움도 슬픔도 있습니다. 그것을 인내하는 것에 의미와 소망을 찾아낼 수 없으면 우리에게는 그런 괴로움이나 슬픔을 인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괴로움을 인내할 수 없습니다. 소망이 있으니까 괴로움에 의미를 찾아내서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괴로움이나 슬픔에 소망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소망의 빛을 찾아내지 못해서 마치 끝이 없는 것같은 절망적인 괴로움이나 슬픔에도 소망을 고합니다. 너희 인생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다. 말세가 올 것이다. 그 때, 너희의 괴로움도 슬픔도 끝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물이 닦여 웃음에 바뀐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너희의 괴로움이나 슬픔을 간과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믿고 인내해라.
바로, 그것이 신앙으로 말미암은 소망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이 세상의 일이나 인생의 괴로움과 슬픔을 눈에 보이는 현실만으로 판단하지 않는 보는 방법이며 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려고 하니까 괴로움이나 슬픔 속에게도 플러스의 의미나 소망을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도 그것이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했으면 인생의 괴로움에 절망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으로 천국으로 계속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 신앙의 시점에서 괴로움이나 슬픔을 다시 볼 때에 자신의 생명이 이 세상의 괴로움이나 슬픔으로 끝나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고 용기와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으로 인내한 모범으로서 “선지자들”(10절)과 “욥”(11절)의 인내를 들고 있습니다. 특히 욥이라는 사람은 인생의 절망을 겪으면서도 신앙으로 고난을 극복하여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인물입니다. 구약성서의 욥기를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욥은 하나니께서 하시는 일을 끝까지 믿고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게 아닙니다. 너무나 괴로워서 “왜 내가 이런 지독한 꼴을 당해야 하느냐”고 하나님을 의심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성내어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그 심한 갈등이나 마음의 괴로움 속에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욥의 인내란, 모범적인 우등생적인 인내가 아니지만, 심한 갈등 가운데도 신앙만은 잃지 않았다, 버리지 않았다는 인내인 것입니다.
우리도 결코 “신앙의 우등생”이 아닙니다. 의심도 있습니다. 불평도 나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싶게 됩니다. 신앙을 버리고 싶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갈등과 연약함을 하나님께서는 잘 아셔서 노하지도 않으시고 지켜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마음에 성령을 보내어 도와 주십니다.
의심과 갈등, 저주가 있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만은 버리지 않고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하실 때까지 믿고 인내하여 걸어갑시다. 인내가 끝날 때를, 기쁨으로 바뀔 때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신앙이야말로 우리의 사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