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1절)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생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선생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는 말로 가르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교사가 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심판을 받느냐고 하면 사람은 말에 많은 실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2절)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만, 동시에 8절에서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8절)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혀를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말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야고보는 말하는 것입니다. 책임이 큰 것입니다.
현재 시대, “선생”이란 주로 목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목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말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한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 악의가 있어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기는커녕 어째서 그런 것으로 화를 내느냐고 상대방을 비판마저 합니다.
우리가 말로 죄를 범하는 것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5절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큰 것을 자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큰 것, 할 수도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 큰 것을 자랑할 생각은 없지요. 그러나 일상에 있어서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가 없을까요? 말로는 던지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는 것, 없습니까?
야고보는 1장에서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1:22)고 말했습니다. 2장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2:26)고 했습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고 말하는 것, 그것을 큰 것을 자랑한다고 야고보는 말하는 것입니다. 말의 실수입니다. 그것이 신앙과 구원의 위대함을 가리키는 간증이 되지 않고, 가족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신앙이 위선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실수가 되는 것입니다.
말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인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후회한 적이 지금까지 얼마나 있었을까요? 흔히 ‘입은 화의 근원’이라고 하지만 무심코 말한 한 마디로 실수하거나 사람에게 상처 입히거나 상대방과의 관계 그 자체를 단절했거나...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요.
게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일도 적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간과해 버립니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태연히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한다”고 써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를 찬송과 기도에 담아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입으로 타인에게 욕을 하고 비난하거나 심지어 저주하기도 합니다. “독이 가득한”(8절) 말을 하는 것으로 상대방도 자기도 죽이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1장에 써 있는 천지 창조의 말씀은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은 모두 다 ‘작은 하나님’ 을 내포하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상대방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때가 있지요. 그러나 그런 상대방 속에도 ‘작은 하나님’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욕이나 비난이나 저주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 속에 “하나님”을 보지 못해서 저주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아, 이 모순, 이 실수,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야고보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가르치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너그러이 보아주고, 인내해 주고, 용서하면서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용서받으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존재, 용서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우리들입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말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게 아니라, 말하게 해주시는 것, 살게 해주시는 것, 그 겸허한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마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으면서 살아 있다는 것을 찬송하고, 남을 칭찬하여 사랑하는 말을 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을 사람에게 욕을 하기 위해 만드신 게 아닙니다. 사람을 칭찬하며 사랑의 말을 하기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의 입은 찬양의 근원인 것입니다.
2023年7月30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ルカによる福音書(누가복음) 6章 43~45節
〇讃 頌 讃頌歌 2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45 (詩編103編)
〇讃 頌 讃頌歌 489
〇聖書奉読 ヤコブの手紙(야고보서) 3章 1~12節
〇説 教 「口は讃美の元(입은 찬양의 근원)」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25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8月 2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口は賛美の元」 ヤコブの手紙 3章 1~12節
ヤコブは、「多くの人が教師になってはならない」(1節)と言っています。どうしてかと言いますと、教師がほかの人たちより厳しい裁きを受けることになるからと言います。 教師は、言葉で教える立場にあります。その教師がなぜ他の人たちより厳しい裁きを受けるのかと言いますと、人は「言葉で過ちを」犯すからです。
2節を見て下さい。「わたしたちは皆、度々過ちを犯すからです。言葉で過ちを犯さないなら、それは自分の全身を制御できる完全な人です。」(2節)
ヤコブはこのように語っておりますが、同時に8節で、「舌を制御できる人は一人もいません」(8節)と断言しています。
舌を制御できる人はいない。言葉で過ちを犯さない人はいない。だからこそ、やがて天において神さまとまみえる時、ほかの人たちより厳しい裁きを受けることになる「教師」には、多くの人がなってはならない、とヤコブは言うのです。責任が大きいのです。
今の時代、「教師」は主に牧師のことを指していると思いますが、牧師だけの問題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一人一人が、言葉で過ちを犯すのです。
私たちが何気なく発した言葉が、相手を不快にさせ、傷つけているのです。大概、悪気なんてありません。ですから、私たちは自分では気づきません。それどころか、どうしてそんなことで怒るのか?と相手を批判さえしていまいます。
私たちが言葉で過ちを犯すのは、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5節に、「同じように、舌は小さな器官ですが、大言壮語するのです」とあります。「大言壮語」とは何でしょう? 辞書を調べると、“実力以上に大きなことを言うこと”と出てきます。自分の力以上のことを言う、つまり、できもしないことを言う、ということです。
私たちは普段、大言壮語など、していないつもりでいるでしょう。けれども、日常において、自分ができもしないことを言うこと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いわゆる“大言”ではなくて、“口では言うけれど、実際にはやっていない”ということ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ヤコブは、1章で「御言葉を行う人になりなさい」(22節)と言いました。2章では、「行いの伴わない信仰は死んだものです」(26節)と語りました。行いが伴わずに語ること、それを「大言壮語」とヤコブは言うのです。言葉の過ちです。それが、信仰を神の救いのすばらしさと示す証しにならず、家族や周りの人々に、信仰なんて偽善だと思わせる「過ち」になるのです。
言葉で過ちを犯さない人はいない、「舌を制御できる人は一人もいない」のです。これは私たち一人一人の問題なのです。
“どうしてあんなことを言ったのだろう。言わなければよかった”。そう後悔したことが、今までどれほどあったでしょうか。俗に“口は災いの元”と申しますが、うっかり口にした一言で失敗したり、人を傷つけたり、相手との関係そのものを壊してしまった‥‥そういった過ちのない人は一人もいないでしょう。
しかも、自分で「過ち」と気付くことは少ないのです。大半は見過ごしております。「過ち」と思わず、平気で語っていることも少なくないのです。9節に、「わたしたちは舌で、父である主を賛美し、また、舌で、神にかたどって造られた人間を呪います。同じ口から賛美と呪いが出て来るのです」と記されています。
確かに、私たちはこうして、日曜日の礼拝で神さまを賛美します。神さまに救われた喜び、感謝を、賛美に込め、祈りに込めて言い表します。けれども、その口で、私たちは人の悪口を言い、非難し、呪うことがあるのです。「毒に満ちた」(8節)言葉を語り、相手の心に「死をもたらし」(8節)、また自分の魂にも「死をもたらす」ことがあるのです。そして、その過ちに気付いていないことが少なからずあるのです。
人は神にかたどって造られた。旧約聖書・創世記1章に描かれている天地創造の御言葉は、人間の本質をそのように語ります。言わば、人は皆、“小さな神さま”を内に宿して生きているのです。現実には、相手に対してそんなふうに思えないことがしばしばあるでしょう。けれども、そんな相手の内にも“小さな神さま”を見つける努力をしなさい。その心で相手に接しなさい。そうすれば、悪口や非難や呪いは出て来ない。ところが、私たちは相手の内に“神”を見ることができず、呪ってしまうのです。ああ、この矛盾! この過ち! それが私たちの姿です。
私たちはどうしたら良いのでしょう? 語らなければ良い、話さなければ良い。ヤコブはそう教えようと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そうではありません。
私たちは実際、自分の言葉を、多くの人に大目に見てもらい、忍耐してもらい、赦されながら語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究極的には天の父である神さまに赦されながら語っているのです。赦されなければ語れない存在、赦されなければ生きられない存在、それが私たちです。そのことを忘れるな、ということだと思います。自分の力で語っている、生きているのではなく、語らせていただいている、生かされている。その謙虚な信仰を忘れるな、ということです。「打ち砕かれ悔いる」悔い改めの心を大切に、ということでしょう。
その心で、私たちは、神さまに赦され、生かされていることを賛美し、人をほめ、愛し、向上させる言葉を心掛けたいものです。“口は賛美の元”です。
【2023년 8월 20일 주일예배(요약판)】
“입은 찬양의 근원” 야고보서 3장 1~12절
야고보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1절)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생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선생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는 말로 가르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교사가 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심판을 받느냐고 하면 사람은 말에 많은 실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2절)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만, 동시에 8절에서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8절)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혀를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말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되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야고보는 말하는 것입니다. 책임이 큰 것입니다.
현재 시대, “선생”이란 주로 목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목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말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한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 악의가 있어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기는커녕 어째서 그런 것으로 화를 내느냐고 상대방을 비판마저 합니다.
우리가 말로 죄를 범하는 것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5절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큰 것을 자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큰 것, 할 수도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 큰 것을 자랑할 생각은 없지요. 그러나 일상에 있어서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가 없을까요? 말로는 던지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는 것, 없습니까?
야고보는 1장에서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1:22)고 말했습니다. 2장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2:26)고 했습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고 말하는 것, 그것을 큰 것을 자랑한다고 야고보는 말하는 것입니다. 말의 실수입니다. 그것이 신앙과 구원의 위대함을 가리키는 간증이 되지 않고, 가족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신앙이 위선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실수가 되는 것입니다.
말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인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후회한 적이 지금까지 얼마나 있었을까요? 흔히 ‘입은 화의 근원’이라고 하지만 무심코 말한 한 마디로 실수하거나 사람에게 상처 입히거나 상대방과의 관계 그 자체를 단절했거나...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요.
게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일도 적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간과해 버립니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태연히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한다”고 써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기쁨과 감사를 찬송과 기도에 담아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입으로 타인에게 욕을 하고 비난하거나 심지어 저주하기도 합니다. “독이 가득한”(8절) 말을 하는 것으로 상대방도 자기도 죽이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1장에 써 있는 천지 창조의 말씀은 인간의 본질을 이렇게 말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은 모두 다 ‘작은 하나님’ 을 내포하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서는 상대방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때가 있지요. 그러나 그런 상대방 속에도 ‘작은 하나님’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욕이나 비난이나 저주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 속에 “하나님”을 보지 못해서 저주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아, 이 모순, 이 실수,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야고보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가르치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너그러이 보아주고, 인내해 주고, 용서하면서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용서받으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존재, 용서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우리들입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말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게 아니라, 말하게 해주시는 것, 살게 해주시는 것, 그 겸허한 신앙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마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으면서 살아 있다는 것을 찬송하고, 남을 칭찬하여 사랑하는 말을 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을 사람에게 욕을 하기 위해 만드신 게 아닙니다. 사람을 칭찬하며 사랑의 말을 하기 위해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의 입은 찬양의 근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