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 5: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총회의 평화통일주일로서 조국의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자 합니다.
다만 평화에 대해서 생각할 때이기는 하지만 너무 큰 주제이고 저는 별말도 못하니까 조금 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말씀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웃사랑을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은 몸도 마음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평화와는 먼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의해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이나 평화를 생각할 때 필요한 것은 단순히 그것을 위한 방법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평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를 당한 사람을 모른 척했습니다. 그들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랬을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자신의 평화를 생각하며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직업상 피로 더러워진 사람을 돌보아 주는 것은 자신도 더러워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 강도를 당한 사람을 화평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얻은 것’(25절)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의 일에 관여한다는 것은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눈앞에 강도를 당하여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에게는 쓰러진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내버려두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주막 주인에게 간호를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에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사마리아 사람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할까요?
여기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위해 데나리온 둘을 내놓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의 일당이었다고 하니까 이틀의 임금이 됩니다. 지금이라면 2만엔 3만엔 될까요? 생면 부지의 사람을 위해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얼마 안 되는 돈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을 돕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낼 수 있느냐 하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큰돈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폐가 있을 수 있지만 겨우 데나리온 둘입니다. 게다가 그 사람 옆에 계속 붙어 있으면서 간호한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과 계속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거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건 분명 데나리온 둘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데나리온 둘이라도 고귀한 이웃 사랑이 되고 화평하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작은 일이라도 하늘에서는 큰 이웃 사랑으로 축복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나도 함께 있고 너희의 작은 사랑을 통하여 나의 큰 사랑도 실현되는 것이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데나리온 둘과 같은 행함, 이 작은 행함 속에 사실은 확실한 평화가 숨어 있고,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봉사에 세상을 맑게 하는 힘이 깃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웃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이웃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오늘 우리는 결단을 해야 것입니다.
‘이웃이 된다.’ 이에 대해 물론 우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에 이렇게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정성껏 씻겨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당신 곁에 늘 계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인자’가 되시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거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기쁨,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 기쁨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자, 이제 너도 이웃이 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023年8月1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5章 9節
〇讃 頌 讃頌歌 1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44 (詩編100編)
〇讃 頌 讃頌歌 454
〇聖書奉読 ルカによる福音書(누가복음) 10章 25~37節
〇説 教 「あなたも善いサマリア人のようにしなさい
(너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하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8月 1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あなたも善いサマリア人のようにしなさい」 ルカによる福音書 10章 25~37節
イエスさまは、山上の説教の中で「平和を実現する人は幸いである。その人は神の子と呼ばれる」(マタイ5:9)と語られました。今日は、総会の平和統一主日として、祖国の平和統一と世界の平和を求めて、神さまに祈りをささげたいと思います。
ただ、平和について考える時ではありますが、余りにも大きなテーマであり、私自身、大した話しも出来ませんので、もう少し、身近な話しをして、平和を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
さて、今日の御言葉は、有名な「善きサマリア人」の譬え話です。善きサマリア人は、追いはぎ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りました。まさに隣人愛を示しました。それは同時に平和を実践する者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追いはぎの襲われた人は、体も心もボロボロになっています。平和とはほど遠いところにいます。しかし、この善きサマリア人によって平和を取り戻すことが出来たのです。
私たちが隣人愛や平和を考える時に必要なことは、隣人愛や平和を造り出すためのその方法を頭の中で考えることではなくて、自分にできる隣人愛を実践し、平和への道を歩んで行くことだということです。祭司もレビ人も追いはぎに襲われた人に対して見ぬ振りをしました。彼らの中の平和を守るためにそうしたんでしょう。頭の中で自らの平和を考えると、その人に関わらないという選択をしたのです。祭司もレビ人もその職業上、血で汚れた人を介抱することは自ら、汚れることにつながりますから、仕方のないことだったのかも知れません。でも、それは自分の中の平和を守るためのことであって、追いはぎの襲われた人に平和を与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平和を実現する者になれなかったのです。でも、それは「永遠の命を受け継ぐこと」(25節)が出来ない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サマリア人がユダヤ人に関わるということは通常ではあり得ないことでした。このサマリア人は目の前に、追いはぎに襲われて倒れているユダヤ人を見かけたのです。その時、彼にとってその人が何人だとかは関係なかったのです。ほっとけば死んでしまうかもしれないと思い、助けました。そればかりか、デナリオン銀貨二枚を宿屋の主人に託し、介抱するように願います。
イエスさまはこの譬え話をして、「行って、あなたも同じようにしなさい」と言われます。皆さんは、それにどのように応えるでしょうか。サマリア人のようにはなれないと考えるでしょうか。
ここに出て来るサマリア人は、倒れている人のために、デナリオン銀貨二枚を出しました。一デナリオンは、当時の日当と言われておりますから、2日分の給料、一日一万円としたら、2万円です。見ず知らずの人のために差し出したのですから、それをわずかなお金だ、なんて言えません。人助けのために、さっと出せるか、と言えば、容易ではないでしょう。
でも、とんでもない大金でもありません。こう言っては語弊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が、わずかデナリオン二枚です。しかも、その人にずっと付きっきりで介抱し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実際、サマリア人がユダヤ人に関わり続けるというのは、出来なかったでしょう。彼はその時に、自分に出来ることをしたに過ぎない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に出来ることは大したことではないのかも知れません。それは、きっとデナリオン銀貨二枚ぐらいのことです。でも、この譬え話を通して、教えられるのは、その人の持ち合わせのデナリオン銀貨二枚であっても、尊い隣人愛であり、平和を実践することだと言うことです。
私たちの小さな働きも、天では、大きな隣人愛として、祝福されているよ、覚えられているよ、そこに、私も共にいる、あなたの小さな愛を通してこそ、私の大きな愛は、実現していく、と語られているようです。
皆さん、デナリオン銀貨二枚のような働き、この小さな行いの中に、実は、確かな平和がひそんでおり、誰にも知られることのない小さな奉仕に、この世を清める力が宿っているのです。
隣人は誰か、ではなく、「隣人になりなさい」というイエスさまの御言葉に、今日、私たちは押し出されるのです。
「隣人になる」。もちろん、私たちには限界があります。それでも、心を込めて、隣人になることを追い求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2章6~8節にこのようにあります。「キリストは、神の身分でありながら、神と等しい者であることに固執しようとは思わず、かえって自分を無にして、僕の身分になり、人間と同じ者になられました。人間の姿で現れ、へりくだって、死に至る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至るまで従順でした。」(フィリピ2:6-8)
また、イエスさまは、最後の晩餐の席で、弟子たちの足を、ていねいに洗ってくださいました。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私たち)、一人一人に対して、隣人になられ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の愛は、あなたに注がれています。何があっても、あなたを一人にしない、あなたの隣に来て、いつもそばにいる。その愛のゆえに、イエスさまは、神の子でありながら、人の子となり、僕のようになってくださいました。そこに福音があります。この主の愛によって、わたしたちは救われる。その喜び、神に愛されている、喜びが、また私たちに力を与えます。さあ、今度は、あなたも隣人になりなさい、とイエスさまは言われるのです。
【2023년 8월 13일 주일예배(요약판)】
“너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하라” 누가복음 10장 25~37절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 5: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총회의 평화통일주일로서 조국의 평화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자 합니다.
다만 평화에 대해서 생각할 때이기는 하지만 너무 큰 주제이고 저는 별말도 못하니까 조금 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말씀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웃사랑을 나타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은 몸도 마음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평화와는 먼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의해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사랑이나 평화를 생각할 때 필요한 것은 단순히 그것을 위한 방법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평화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를 당한 사람을 모른 척했습니다. 그들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그랬을 것입니다. 머릿속으로 자신의 평화를 생각하며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직업상 피로 더러워진 사람을 돌보아 주는 것은 자신도 더러워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 강도를 당한 사람을 화평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얻은 것’(25절)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의 일에 관여한다는 것은 보통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눈앞에 강도를 당하여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보았습니다. 그때 그에게는 쓰러진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내버려두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주막 주인에게 간호를 맡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에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사마리아 사람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할까요?
여기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위해 데나리온 둘을 내놓았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의 일당이었다고 하니까 이틀의 임금이 됩니다. 지금이라면 2만엔 3만엔 될까요? 생면 부지의 사람을 위해 내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얼마 안 되는 돈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을 돕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낼 수 있느냐 하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큰돈도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폐가 있을 수 있지만 겨우 데나리온 둘입니다. 게다가 그 사람 옆에 계속 붙어 있으면서 간호한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과 계속 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거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건 분명 데나리온 둘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데나리온 둘이라도 고귀한 이웃 사랑이 되고 화평하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작은 일이라도 하늘에서는 큰 이웃 사랑으로 축복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나도 함께 있고 너희의 작은 사랑을 통하여 나의 큰 사랑도 실현되는 것이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데나리온 둘과 같은 행함, 이 작은 행함 속에 사실은 확실한 평화가 숨어 있고,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봉사에 세상을 맑게 하는 힘이 깃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웃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이웃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오늘 우리는 결단을 해야 것입니다.
‘이웃이 된다.’ 이에 대해 물론 우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누군가의 이웃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에 이렇게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정성껏 씻겨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당신에게 부어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혼자 두지 않으십니다. 당신 곁에 늘 계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인자’가 되시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거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기쁨,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 기쁨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자, 이제 너도 이웃이 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