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성경 구절에 이어 야고보는 자신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행함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적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4절)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행함이란 믿음에 의해 구원받은 자가 그 삶에서 어떻게 걸어갈 것인지 그 행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은 자에 대한 새 계명으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라는 것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주님의 계명은 율법으로서의 구원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사는 길이요, 삶의 지침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사람들 중에는 신앙과 행함을 떼어놓고 주님 계명을 소홀히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구체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15절부터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5-17절)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본래 행함이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예수께서는 주님이시다’ 라는 신앙고백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이시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나는 예수님의 종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주종관계라면 당연히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이란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과 우리의 주종관계는 단순히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입에 발린 사랑이 아니라 행함을 따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또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와 신앙으로 말미암아,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연결되어 있는 자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다”(18절)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라고 반박하고 심지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믿기만 한다면 그것은 귀신들과 같다’고까지 말합니다. (19절 참조)
그리고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행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렸다는 것은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자 축복의 원천이 되는 아이였습니다. 그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번제로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이삭을 잡으려 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8)
이처럼 아브라함은 행함으로써 의로 여겨졌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신앙과 분리된 행함이 아닙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22절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2-23절)
야고보는 신앙과 행함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신앙과 행함이 대립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제단 위에 바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이 행함과 함께 작용하고, 신앙이 행함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에는 이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24절에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4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야고보의 말은 언뜻 보면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적을 때, 그 ‘행함’은 신앙과 함께 움직여 신앙을 완성하는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를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넘쳐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한번 자신의 신앙을 음미하고 정말로 구원의 신앙을 갖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행함이 없으면 그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행함이 따른다면 우리의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며, 확실히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2023年7月30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Ⅱコリント(고린도후서) 13章 4~5節
〇讃 頌 讃頌歌 14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9 (詩編95編)
〇讃 頌 讃頌歌 460
〇聖書奉読 ヤコブの手紙(야고보서) 2章 14~26節
〇説 教 「行いを欠く信仰は死んだもの(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2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7月 3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行いを欠く信仰は死んだもの」ヤコブの手紙 2章 1~13節
先週の聖書箇所に続き、ヤコブは、自分は信仰を持っていると言いながら、行いが伴わない人たちに、今日の御言葉を記しています。
14節です。「わたしの兄弟たち、自分は信仰を持っていると言う者がいても、行いが伴わなければ、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か。そのような信仰が、彼を救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ここで、ヤコブが語っている行いというのは、信仰によって救われたものが、その人生においてどのように歩んで行くのか、その行いということなのです。
主イエス・キリストは、救われた者に対する新しい掟として、「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と、「心を尽くし、精神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しなさい」(マタイ22:37)という掟を与えられました。
この主の掟が、律法としての救いの基準ではなく、私たち救われた者、信仰者にとっての生きる道であり、人生の指針なのです。
それなのに、教会の人々の中には、信仰と行いを切り離し、主の掟をないがしろにしていた人がおりました。ヤコブはここで具体例を示しています。15節からです。「もし、兄弟あるいは姉妹が、着る物もなく、その日の食べ物にも事欠いているとき、あなたがたのだれかが、彼らに、『安心して行きなさい。温まりなさい。満腹するまで食べなさい』と言うだけで、体に必要なものを何一つ与えないなら、何の役に立つでしょう。信仰もこれと同じです。行いが伴わないなら、信仰はそれだけでは死んだものです。」(15-17節)
信仰があるとか、ないとかを言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信仰が生きているか、死んでいるかということです。
そもそも、行いの伴わない信仰は、本来、あり得ないのです。なぜなら、私たちの信仰は、「イエスは主である」という信仰告白から始まっているからです。
「イエスは主である」と告白するということは、「わたしはイエスの僕です」と告白することと同じです。イエスさまと私たちの関係は、主人と僕の関係です。主従関係にあるのです。ということは、私たちは主であるイエスさまに従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信仰とは信じて従うことなのです。
そして、このイエスさまとわたしたちの主従関係は、単に主人と僕の関係ではありません。何よりも、イエスさまの愛に基づいているものです。
イエスさまによって示された愛は、口先だけの愛ではなく、行いを伴う愛です。イエスさまは、口先だけで、「わたしはあなたを愛している」と言わ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は、十字架の上で、御自分の命を捨てられるほどに、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し、また愛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そのようなイエス・キリストと信仰によって、また聖霊によってつながっている者として、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の掟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それでも、「あなたには信仰があり、わたしには行いがある」(18節)と言う人がいました。これに対してヤコブは「行いの伴わないあなたの信仰を見せなさい。そうすれば、わたしは行いによって、自分の信仰を見せましょう」(18節)と反論し、さらには、『神は唯一だ』と信じるだけならば、それは悪霊と同じである」とまで言います。(19節参照)
そして、ヤコブはアブラハムの信仰と行いを例に挙げて説明しています。
アブラハムが息子イサクを祭壇の上に献げたことは、創世記22章に記されています。アブラハムにとって、イサクは約束の子であり、祝福の源となる子でありました。そのイサクを神さまは焼き尽くす献げ物として献げるようアブラハムに命じられたのです。この主の御言葉にアブラハムは信仰をもって従ったのです。アブラハムが手を伸ばして刃物をとり、イサクを屠ろうとしたとき、主の御使いはこう言いました。「その子に手を下すな。何も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が神を畏れる者であることが、今、分かったからだ。あなたは、自分の独り子である息子すら、わたしにささげることを惜しまなかった。」(創22:12) さらに、主の御使いは次のようにも言いました。「地上の諸国民はすべて、あなたの子孫によって祝福を得る。あなたがわたしの声に聞き従ったからである。」(創22:18)
このように、アブラハムは行いによって、義とされたとヤコブは言うのです。しかし、ここで注意したいことは、ヤコブの言う「行い」は、信仰と切り離された行いではありません。続けてヤコブはこう記しております。22節です。「アブラハムの信仰がその行いと共に働き、信仰が行いによって完成されたことが、これで分かるでしょう。『アブラハムは神を信じた。それが彼の義と認められた』という聖書の言葉が実現し、彼は神の友と呼ばれたのです。」(22-23節)
ヤコブは信仰と行いを切り離して考えてはいません。ましてや信仰と行いが対立すると考えてはいません。アブラハムが約束の子であるイサクを祭壇の上に献げることができたのはなぜか。それは、アブラハムが神さまを信じる者であったからです。その信仰が行いと共に働いて、信仰が行いによって完成されたのだとヤコブは言っているのです。ヘブライ人の手紙11章19節には、このアブラハムの信仰について「アブラハムは、神が人を死者の中から生き返らせることもおできになると信じたのです」と記しています。
24節には「これであなたがたも分かるように、人は行いによって義とされるのであって、信仰だけによるのではありません」(24節)とあります。このヤコブの言葉は一見すると、使徒パウロの教えと矛盾する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ます。けれども、そうではありません。ヤコブが「人は行い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記すとき、その「行い」は信仰と共に働き、信仰を完成させる行いであるからです。
皆さん、私たちは神さまの一方的な恵みによって救われました。本当に神さまの恵みによって救われたのなら、そこには必ず行いが伴うはずです。もっと神さまを愛し、神さまに従い、神さまのみ旨にかなった歩みをしたいという思いが溢れてくるはずです。もしそうでないとしたら、もう一度自分の信仰を吟味し、本当に救いの信仰を持っているのかどうかをよく調べてみる必要があります。
私たちの信仰に行いが伴っていないならば、その信仰は死んでいるのです。しかし、信仰に行いが伴うならば、私たちの信仰は生きて働く信仰であり、確かに、復活された主イエス・キリストに結ばれているのです。
【2023년 7월 30일 주일예배(요약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야고보서 2장 14~26절
지난 주 성경 구절에 이어 야고보는 자신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행함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적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4절)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행함이란 믿음에 의해 구원받은 자가 그 삶에서 어떻게 걸어갈 것인지 그 행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은 자에 대한 새 계명으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라는 것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주님의 계명은 율법으로서의 구원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사는 길이요, 삶의 지침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 사람들 중에는 신앙과 행함을 떼어놓고 주님 계명을 소홀히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구체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15절부터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5-17절)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본래 행함이 없는 신앙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예수께서는 주님이시다’ 라는 신앙고백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이시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나는 예수님의 종이다’ 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주종관계라면 당연히 우리는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이란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과 우리의 주종관계는 단순히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입에 발린 사랑이 아니라 행함을 따르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또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와 신앙으로 말미암아,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연결되어 있는 자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다”(18절)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라고 반박하고 심지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믿기만 한다면 그것은 귀신들과 같다’고까지 말합니다. (19절 참조)
그리고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행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렸다는 것은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약속의 아들이자 축복의 원천이 되는 아이였습니다. 그 이삭을 하나님께서는 번제로 바치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이삭을 잡으려 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8)
이처럼 아브라함은 행함으로써 의로 여겨졌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신앙과 분리된 행함이 아닙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22절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2-23절)
야고보는 신앙과 행함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신앙과 행함이 대립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약속의 아들인 이삭을 제단 위에 바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이 행함과 함께 작용하고, 신앙이 행함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에는 이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24절에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24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야고보의 말은 언뜻 보면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적을 때, 그 ‘행함’은 신앙과 함께 움직여 신앙을 완성하는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를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르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넘쳐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한번 자신의 신앙을 음미하고 정말로 구원의 신앙을 갖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행함이 없으면 그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에 행함이 따른다면 우리의 신앙은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며, 확실히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