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은 저희에게 두 가지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19절입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9절)
그리고 22절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22절)
19절도 22절도 이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그 의미하는 내용이 우리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것임을 금방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19절의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라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주의 깊게 이야기하고, 성급히 화내지 말고 남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보다 제가 먼저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성질이 급한 편이라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금방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근데 그래서는 안 되지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라고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자비하심을 비추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죄인인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실패나 잘못에 하나님께서 화가 나 계시면 우리 인간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관대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참으시고 견디시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죄를 완전히 용서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인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자신의 올바른 태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고 긍휼하시는데 우리가 성을 냈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긍휼하심을 비추는 ‘긍휼의 그릇’이 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개 성내고 말하거나 행한다고 해서 제대로 일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에 이쪽의 분노만이 강하게 인상에 남아 정말 중요한 것은 오히려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성내는 것과 꾸짖는 것은 좀 다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남의 실수나 잘못에 인내심을 가지는 것, 긍휼이 깊은 것, 그런 올바른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태도나 행동은 19절 말씀과 반대가 아닐까요? 듣기를 더디 하고 말하기는 속히 하며 성을 내는 것도 속히 합니다. 남의 말을 듣는 것보다 내가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고, 내 말을 들려주고 싶고, 또 내 뜻대로 관철되지 않으면 성이 나서 화를 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는 한 마디로 ‘자기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분노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는 태도”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곧 “하나님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태도에 하나님의 마음이 비춰져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그럼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를 위해 야고보는 21절에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라는 것은 단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듣기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말씀을 실제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22절에서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는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고 말합니다.
자신을 속인다는 것은 자신을 기만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좋은 일이다, 옳은 일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상황이 유리한 곳에서만 말씀을 듣고 있고, 상황이 안 좋은 곳에서는 귀에 마개를 덮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자기 변호, 자기 정당화에 급급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에 대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행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는 변명이나 자기 변호를 늘어 놓지 말고 순순히 ‘하나님, 죄송합니다. 죄인인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눅18:13) 라고 회개하면 됩니다. 그 진심어린 회개가 우리를 언젠가는 말씀을 행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오늘 말씀의 마지막에서도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27절) 라고 말씀을 행하는 구체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버린 부자가 있지만, 말씀을 행하지 못해서 늘 빌미를 찾는 우리이기에 그 부자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마19장 참조)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도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23절),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25절)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듣기만 하면 말씀을 잊어버립니다. 잊지 않으려면 행해야 합니다. 들은 것은 이해할 수는 있어도 몸에 익숙해지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해보고 몸에 익혀야 합니다. 뭐든지 그렇지만 훈련해서 익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행하는 바에 우리 영혼의 ‘구원’이, ‘행복’이 있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주 예수님도 그러셨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27)
이 양자는 겉보기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폭풍을 만났을 때 그 차이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바위 위에 우리의 삶을 지어 나갑시다. 그것이 인생의 구원이자 행복이라는 것을 언젠가 알 때가 반드시 올 겁니다.
2023年7月1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7章 24~25節
〇讃 頌 讃頌歌 1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5 (詩編84編)
〇讃 頌 讃頌歌 379
〇聖書奉読 ヤコブの手紙(야고보서) 1章 19~27節
〇説 教 「御言葉を行う人になりなさい(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65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7月 1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御言葉を行う人になりなさい」 ヤコブの手紙 1章 19~27節
今日の御言葉には、私たちに二つのことが勧められています。まず、19節です。「だれでも、聞くのに早く、話すのに遅く、また怒るのに遅いようにしなさい。」(19節)
そして、22節です。「御言葉を行う人になりなさい。」(22節)
19節の御言葉も22節の御言葉も、この御言葉を聞くだけで、その意味する内容も、私たちクリスチャンにとって必要なことであることを、すぐに理解出来るかと思います。
まず、19節の「聞くのに早く、話すのに遅く、また怒るのに遅いようにし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が、人の話をじっくり聞いて、注意深く話しをし、短気に怒ることなく、人を愛し受け入れると言うことですね。
この御言葉は、皆さんより、まず私が心に刻まなければならない御言葉かと思います。私は短気なので、人の話を最後まで聞かずに話しをしようとし、間違いだと思うことに対してすぐにイライラしてしまいます。でも、それでは駄目なんですね。
「人の怒りは神の義を実現しないからです」と、20節にあります。私たちの怒りは神さまの忍耐と憐れみを映し出すことに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神の義」とは、神さまの目から見れば罪人である私たち人間を、神さまが憐れみ、愛することに他なりません。
私たちの失敗や過ちに神さまが怒っておられたら、私たち人間は誰も救われないのです。だから、神さまは寛大な心で私たちの罪を耐え忍ぼうと心に決められました。そればかりか、私たちの罪を完全に赦すために、独り子イエスさまをこの世に送り、贖罪の供え物として十字架にお付けになったのです。このように罪人である私たちを憐れみ、愛することを、御自分の正しい態度となさったのです。それが「神の義」です。
そのように神さまが忍耐し、憐れんでくださっているのに、当の私たちが怒っていたらどうでしょう? それは、神さまの御心が全く分かっておらず、神の忍耐と憐れみを映し出す「憐れみの器」となっておらず、「神の義」を実現していない、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す。
大体、怒って言ったり、やったりしても、ろくなことにはなりません。コミュニケーションはうまく行かず、相手の心にもこちらの怒りが強く印象に残り、肝心なことが伝わりません。怒ることと叱ることとは、ちょっと違うのです。自分が神さまからそうしていただいたように、人の失敗や過ちに忍耐強くあること、憐れみ深くあること。そのような正しい態度を、神さまは私たちに望んでおられるのです。
考えてみれば、私たちの態度、行動というのは、19節の御言葉と反対ではないでしょうか。聞くのに遅く、話すのに早く、怒るのに早い。人の言葉を聞くよりも、自分がたくさん話したい。自分の言葉を聞かせたい。また自分の思い通りにいかないと腹立たしく感じ、怒りたくなるのです。
このような態度は、一言で言えば、“自己中心”ということです。自己中心的な態度は周りの人に怒りをもたらすのです。
それでは、「聞くのに早く、話すのに遅く、また怒るのに遅い」態度とは何でしょう。これはすなわち“神中心”だということです。自分の態度に神さまの御心が映し出され、「神の義」が実現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こには憐れみがあります。愛があります。
では、自己中心から神中心へと変わっていくためには、どうしたら良いのでしょう。そのためにヤコブは21節で「だから、あらゆる汚れやあふれるほどの悪を素直に捨て去り、心に植え付けられた御言葉を受け入れなさい」(21節)と言います。
「御言葉を受け入る」というのは、ただ単に御言葉を“聞く”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聞くだけで終わるのではなくて、御言葉を実際に行うということです。そのためヤコブは22節で「御言葉を行う人になりなさい」と言い直しています。
そして、続けてヤコブは「自分を欺いて、聞くだけで終わる者になってはいけません」(22節)と、言っています。
自分を欺(あざむ)くというのは、自分を騙(だま)すということです。御言葉を聞いて、善いことだ、正しいことだ、大切なことだと思いますけども、それを行わない。自分にとって都合の良いところでだけ御言葉を聞いている。そして、都合の悪いところでは耳にふたをして行わない。そして、ああだ、こうだと言い訳し、自己弁護、自己正当化をする。そうやって、御言葉に対して自分を騙しているのです。もちろん、現実に行えない時もあるでしょう。それならば、言い訳や自己弁護をせず、素直に「神さま、ごめんなさい。罪人のわたしをおゆるしください」(ルカ18:13)と、悔い改めれば良いわけです。その心からの悔い改めが、私たちをいつの日か御言葉を行う人へと変えてくれるのです。
御言葉を行うというのは、自分の生活の中で具体化することです。聞くのに早く、話すのに遅く、怒るのに遅くなることです。そして、ヤコブは今日の御言葉の最後でも、「みなしごや、やもめが困っている時に世話をし」(27節)と、御言葉を行う具体例を示しています。
「財産のすべてを献げ、施して、‥‥ そして、自分に従いなさい」と言われたイエスさまの言葉の前に悲しみながら立ち去った金持ちの人がいますが、御言葉を行わないことに口実を設ける私たちには、その人の気持がよく分かるような気がします。(マタイ19章参照) それが私たちの現実なのです。
それでもなお、“御言葉を行う人になりたい”と祈り求めることを、私たちは神さまから期待され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聞くだけで終わる者」(23節)、「聞いて忘れてしまう人」(25節)ではなく、御言葉を行う人にな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皆さん、聞いただけでは、御言葉を忘れてしまうのです。忘れないためには、行うことです。聞いたことは理解できても、身には付きません。実際にやってみて、体に覚えさせなければなりません。何でもそうですが、訓練して身に付けていくのです。
そして、御言葉を行うところに、私たちの「魂の救い」が、「幸せ」があるとヤコブは言います。主イエスさまも言われました。「わたしのこれらの言葉を聞いて行う者は皆、岩の上に自分の家を建てた賢い人に似ている。‥‥ 聞くだけで行わない者は皆、砂の上に家を建てた愚かな人に似ている。」(マタイ7:24-27)
この両者は、見た目には分かりません。でも、人生の嵐に遭った時に、その違いが現れます。皆さん、私たちも砂の上に家を建てるのではなく、御言葉を行うという岩の上に、私たちの人生を建てていきましょう。それが、人生の救いであり、幸せであると、いつか分かる時がきっと来ます。
【2023년 7월 16일 주일예배(요약판)】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야고보서 1장 19~27절
오늘의 말씀은 저희에게 두 가지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19절입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9절)
그리고 22절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라”(22절)
19절도 22절도 이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그 의미하는 내용이 우리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것임을 금방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19절의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라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주의 깊게 이야기하고, 성급히 화내지 말고 남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보다 제가 먼저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성질이 급한 편이라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금방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근데 그래서는 안 되지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라고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자비하심을 비추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죄인인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실패나 잘못에 하나님께서 화가 나 계시면 우리 인간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관대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참으시고 견디시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죄를 완전히 용서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이처럼 죄인인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자신의 올바른 태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고 긍휼하시는데 우리가 성을 냈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긍휼하심을 비추는 ‘긍휼의 그릇’이 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개 성내고 말하거나 행한다고 해서 제대로 일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에 이쪽의 분노만이 강하게 인상에 남아 정말 중요한 것은 오히려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성내는 것과 꾸짖는 것은 좀 다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남의 실수나 잘못에 인내심을 가지는 것, 긍휼이 깊은 것, 그런 올바른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태도나 행동은 19절 말씀과 반대가 아닐까요? 듣기를 더디 하고 말하기는 속히 하며 성을 내는 것도 속히 합니다. 남의 말을 듣는 것보다 내가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고, 내 말을 들려주고 싶고, 또 내 뜻대로 관철되지 않으면 성이 나서 화를 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는 한 마디로 ‘자기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분노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는 태도”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곧 “하나님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태도에 하나님의 마음이 비춰져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그럼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를 위해 야고보는 21절에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21절) 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라는 것은 단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듣기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말씀을 실제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22절에서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야고보는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고 말합니다.
자신을 속인다는 것은 자신을 기만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좋은 일이다, 옳은 일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상황이 유리한 곳에서만 말씀을 듣고 있고, 상황이 안 좋은 곳에서는 귀에 마개를 덮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자기 변호, 자기 정당화에 급급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에 대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행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는 변명이나 자기 변호를 늘어 놓지 말고 순순히 ‘하나님, 죄송합니다. 죄인인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눅18:13) 라고 회개하면 됩니다. 그 진심어린 회개가 우리를 언젠가는 말씀을 행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오늘 말씀의 마지막에서도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27절) 라고 말씀을 행하는 구체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가버린 부자가 있지만, 말씀을 행하지 못해서 늘 빌미를 찾는 우리이기에 그 부자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마19장 참조)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도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23절),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25절)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듣기만 하면 말씀을 잊어버립니다. 잊지 않으려면 행해야 합니다. 들은 것은 이해할 수는 있어도 몸에 익숙해지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해보고 몸에 익혀야 합니다. 뭐든지 그렇지만 훈련해서 익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행하는 바에 우리 영혼의 ‘구원’이, ‘행복’이 있다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주 예수님도 그러셨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27)
이 양자는 겉보기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생의 폭풍을 만났을 때 그 차이가 나타납니다. 여러분, 우리도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바위 위에 우리의 삶을 지어 나갑시다. 그것이 인생의 구원이자 행복이라는 것을 언젠가 알 때가 반드시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