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신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이 ‘미문’이라고 부르는 문 앞에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불편한 남자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오가는 사람들로부터의 적은 돈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그는 평소처럼 베풀어 달라고 구걸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4절) 라고 말했습니다.
4절에 “주목하여”와 “우리를 보라” 고 “보다”가 두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보다” 라는 말은 잘 본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오랜 구걸 생활 속에서 ‘주목받는다’나 ‘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을까요? 그가 바라보며 적선해 주길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두 사람은 뜻밖의 말을 그에게 던졌습니다. 6절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그는 ‘내가 서지를 못해요. 그런데 걸으라구요? 그럴리가 없잖아요’ 라며 평소 같으면 거절했을 것입니다. ‘장사 방해할 거면 저리 가세요’ 라고 어쩌면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베드로가 요구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진지하고 자애로운 눈빛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고 일어서게 했을 때 그에게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나 요한의 신앙도 아니고, 그의 신앙의 힘에 의해 일어난 기적도 아닙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밀미암아 초래된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항상 듣는 우리에게 실행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요?
하지만 히로시마 교회의 발자취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은혜가 여러 번 이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현실적으로는 힘든 상황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그때마다 주어진 은혜와 격려에 힘 입어 우리 히로시마 교회는 75년간 걸어온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금이나 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앙은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주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고 우리가 가진 신앙을 전해 나갑시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그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를 보라.” 교회에서는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고 자주 말합니다. 또 ‘저런 사람이 있다면 교회에 가지 않겠다’거나 ‘너처럼 된다면 나는 절대 크리스천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보라”,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우리 따위를 볼 게 아니라 주 예수님만 보라’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를 보라”였습니다.
베드로는 “나를 보라” 라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알았을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실 때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도망친 염치없는 인간입니다. 믿음의 패배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자신, ‘나를 보지 마’라고 말하는 것이 누구보다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보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창립기념을 축하하는 지금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후 권사로 취임하는 박선미 집사님께 보내는 메시지로도 적합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모습을 본다면 아무리 후회해도 부족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오직 주님의 풍요로운 은혜입니다. 이런 나이기에 더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베드로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신한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비참함 속에서 겨우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상 선물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은혜다’ 라고 진심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였기에 그는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저를 보세요. 그러면 이런 저도 용서하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제 모든 허물과 부끄러움까지도 다 있는 그대로 드러낼 거예요’ 라고 말한 것입니다.
박선미 집사님은 공동의회에서 선출되어 오늘 정식 권사님으로 취임합니다. 저희로서는 매우 기쁘고 감사합니다만, 정작 본인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것 같아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런 나라도 괜찮은 걸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근데 베드로의 “우리를 보라” 라는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쓰신 것처럼 박선미 권사님을 풍부하게 써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 맡기고 말씀을 따른다면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박선미 권사님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훌륭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무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희 교회에 금이나 은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아름다운 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서서 걷게 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히로시마 교회가 바로 이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가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2023年7月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3章 16節
〇讃 頌 讃頌歌 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4 (詩編81編)
〇讃 頌 讃頌歌 446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야고보서) 3章 1~10節
〇説 教 「私たちを見なさい(좋은 선물이 내려온다)」
〇祈 祷
〇式 典 朴善美 勧士就任式・秋勝美 勧士隠退式
〇讃 頌 讃頌歌 595
〇奉献祈祷
〇献 金 特別讃美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勧士就任式 》
〇紹 介 司 式 者
〇誓 約 就任者・教会員
〇祈 祷 司 式 者
〇宣 言 司 式 者
〇祝 辞 祝電披露
〇記念品贈呈 教会・就任者
〇花束贈呈 教会・女性会・教会女性連合会
〇答 辞 就 任 者
《 勧士隠退式 》
〇紹 介 司 式 者
〇感謝辞 担任牧師
〇祈 祷 司 式 者
〇花束贈呈 教会・女性会
【 2023年 7月 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私たちを見なさい」 使徒言行録 3章 1~6節
ある日、ペトロとヨハネが、午後3時の祈りを献げにエルサレム神殿に上って行きました。人々から「美しい門」と呼ばれる門の前に、生まれつき足の不自由な男の人が物乞いをしていました。この人が求めるのは、行き交う人々からのわずかな金銭でありました。
ペトロとヨハネが境内に入ろうとするのを見て、彼はいつものように施しを乞いました。すると「ペトロはヨハネと一緒に彼をじっと見て、『わたしたちを見なさい』と言った」(4節)のです。
4節に「彼をじっと見て」、「わたしたちを見なさい」と、「見る」ことが二度繰り返されています。この「見る」という言葉は、しっかりと見るという言葉です。彼らは互いに、しっかりと見つめ合ったのです。
彼は、長い物乞いの生活の中で、「じっと見られ」たり「見なさい」と言われたことがあったでしょうか。彼が見つめ、施しを期待して待っていると、二人は思いがけない言葉を彼に投げかけました。6節です。「わたしには金や銀はないが、持っているものをあげよう。ナザレ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立ち上がり、歩きなさい。」(6節)
彼は、「いや、わたしは立てない。できるわけないじゃないですか」と、普段だったら断ったはずですね。「商売の邪魔をするんだったら、あっちに行ってくれ」と怒ったかもそれません。それが彼はペトロが求めるままに従いました。ペトロとヨハネの真剣な、そして、慈愛に満ちた眼差しが彼の心を動かしました。「ナザレ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立ち上がり、歩きなさい。」ペトロが、彼の右手を取って立ち上がらせたとき、彼にとって全く別の人生が始まりました。
これはペトロやヨハネの信仰や彼の信仰の力によって起こった奇跡ではありません。復活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奇跡であるのです。
「イエス・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というのは、直接的には「イエス・キリストの命令によって」という事です。でも、「イエス・キリストの命令」はいつも、聴く私たちにとって、実行不可能に思えることが多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でも、広島教会の歩みを考えて見て下さい。私たちの思いを越えた恵みが、何度も教会にもたらされました。現実的には苦しい状況もあるわけですが、それでもその時に与えられた恵みに励まされ、私たち広島教会は75年間歩んで来たわけですね。
皆さん、これからも、何かあるごとに、「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立ち上がり、歩いて」いきたいと願います。私たちには金や銀はない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信仰を持っています。この信仰は、人の人生を変える力があります。ですから、主イエスさまの御業を信じて、私たちが持つ信仰を伝えて行きましょう。
それから、今日の御言葉でもう一つ大切なことがあります。それはペトロが彼に「わたしたちを見なさい」と語ったことです。
「わたしたちを見なさい。」教会では人を見るのではなく、神さまを見なさいとよく言います。また、「あんな人がいるなら教会には行かない」とか「あなたのようになるんだったら、私は絶対にクリスチャンになりたくない」と言われることもあります。ですので、私たちは「私たちを見て」なんて言えません。それで「貧しい私たちなんかを見るのではなく、主イエスさまだけを見てほしい」としか言えません。それなのに、ペトロの口から出た言葉は「私たちを見なさい」でした。
ペトロは「私を見て」なんて言ったら、どう思われるか、分かっていたはずです。ペトロはイエスさまが十字架で殺される時、我が身可愛さに逃げ出した恥知らずの人間です。信じることの敗北者です。ですから、ペトロ自身、「私を見ないで」と言うのが誰よりも相応しいと分かっていたのです。それなのに彼は「私を見て」と言ったのです。
ここには、創立記念を祝う私たちが、もう一度思い出すべき福音が語られていると思います。また、この後、勧士に就任される朴善美執事任に贈るメッセージとしてもふさわしいかと思います。
ペトロは聖霊によって気付かさ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それは「自分の姿を見るなら悔いても悔い足りない。でもだからこそ、全てのことが、ただただ主の豊かな恵みなのだ。こんな私だからよく分かる」と。
ペトロには、誇れるものが何もありません。むしろ、イエスさまを裏切った者でしかありません。でも、その惨めさの中で、やっと気付かされたのです。「救いとは、無償の贈り物。神さまの一方的な愛。だから恵みなのだ」と心底分かったのです。
そんなペトロだったからこそ、彼は、「不甲斐ない私を見て下さい。そうしたら、こんな私をも赦し愛してくださる神さまの御手が見えます。そのために私は、自分の恥も、裸のままさらします」と、そう語ったのです。
朴善美執事任は、公同議会で選ばれて、今日、正式に勧士任に就任されます。私たちにとっては大変喜ばしく感謝なんですが、当の本人にとっては、重い荷物を背負わされるようで喜ばしく思えないかも知れません。もしかしたら「こんな私で良いのだろうか」と不安な気持ちになるかも知れません。でも、ペトロの「私たちを見て下さい」という言葉を思い出してください。
神さまはペトロを用いられたように朴善美勧士任を豊かに用いてくださいます。ペトロがそうであったように、主に委ね、御言葉に従うならば、そこに奇跡が起こるのです。
それは、朴善美勧士任だけではありません。ここにいる私たち全員にも言えます。皆さん、私たちは皆、立派でないがゆえに、救いがただただ神さまの恵みであると分かる群れなのです。だから、「その私を見て」と告げるのです。「私をさえ救ったキリストが、あなたを救わないはずはない」と告げ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の教会に金や銀がなくても構いません。美しい門でなくても良いのです。しかし、人を立って歩ませるナザレ人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が私たちにはあるのです。この御名によって歩きなさいと言える、そういう教会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
【2023년 7월 9일 주일예배(요약판)】
“우리를 보라” 사도행전 3장 1~10절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신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이 ‘미문’이라고 부르는 문 앞에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불편한 남자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오가는 사람들로부터의 적은 돈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그는 평소처럼 베풀어 달라고 구걸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4절) 라고 말했습니다.
4절에 “주목하여”와 “우리를 보라” 고 “보다”가 두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보다” 라는 말은 잘 본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오랜 구걸 생활 속에서 ‘주목받는다’나 ‘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을까요? 그가 바라보며 적선해 주길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두 사람은 뜻밖의 말을 그에게 던졌습니다. 6절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그는 ‘내가 서지를 못해요. 그런데 걸으라구요? 그럴리가 없잖아요’ 라며 평소 같으면 거절했을 것입니다. ‘장사 방해할 거면 저리 가세요’ 라고 어쩌면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베드로가 요구하는 대로 따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진지하고 자애로운 눈빛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고 일어서게 했을 때 그에게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나 요한의 신앙도 아니고, 그의 신앙의 힘에 의해 일어난 기적도 아닙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밀미암아 초래된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항상 듣는 우리에게 실행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요?
하지만 히로시마 교회의 발자취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은혜가 여러 번 이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현실적으로는 힘든 상황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그때마다 주어진 은혜와 격려에 힘 입어 우리 히로시마 교회는 75년간 걸어온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금이나 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신앙은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주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고 우리가 가진 신앙을 전해 나갑시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그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를 보라.” 교회에서는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고 자주 말합니다. 또 ‘저런 사람이 있다면 교회에 가지 않겠다’거나 ‘너처럼 된다면 나는 절대 크리스천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보라”,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우리 따위를 볼 게 아니라 주 예수님만 보라’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를 보라”였습니다.
베드로는 “나를 보라” 라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알았을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실 때 자기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도망친 염치없는 인간입니다. 믿음의 패배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자신, ‘나를 보지 마’라고 말하는 것이 누구보다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를 보라’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창립기념을 축하하는 지금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후 권사로 취임하는 박선미 집사님께 보내는 메시지로도 적합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모습을 본다면 아무리 후회해도 부족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오직 주님의 풍요로운 은혜입니다. 이런 나이기에 더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베드로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배신한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비참함 속에서 겨우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상 선물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은혜다’ 라고 진심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였기에 그는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저를 보세요. 그러면 이런 저도 용서하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보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제 모든 허물과 부끄러움까지도 다 있는 그대로 드러낼 거예요’ 라고 말한 것입니다.
박선미 집사님은 공동의회에서 선출되어 오늘 정식 권사님으로 취임합니다. 저희로서는 매우 기쁘고 감사합니다만, 정작 본인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것 같아 마냥 기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런 나라도 괜찮은 걸까’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근데 베드로의 “우리를 보라” 라는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쓰신 것처럼 박선미 권사님을 풍부하게 써 주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 맡기고 말씀을 따른다면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박선미 권사님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훌륭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무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지 않으실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희 교회에 금이나 은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아름다운 문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서서 걷게 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히로시마 교회가 바로 이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가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