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요3:16)
오늘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모른 채 죄 속에서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의 면류관”(12절),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좋은 선물”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과 평화, 신뢰와 소망이라는 인생의 깊은 참맛을 맛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선물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 선물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늘 ‘'좋은 선물’로 다가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눈에는 나쁜 선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했는데 중병이 걸린다든가, 하는 일에 실패해서 재산을 잃고 만다든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불행이 우리를 덮치기도 합니다. 괴롭고 슬프고 애틋하고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왜요?’ 라고 따져 묻고 싶어집니다. 그런 시련이 우리 삶에는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시련을 만나면 우리는 종종 인생의 마이너스 방향으로 유혹되기도 합니다. 용기와 희망을 잃어갑니다. 절망이나 체념으로 기울어집니다. 타인에 대한 상냥함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됩니다.
인생의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 왜요?’ 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는 것은 어쩌면 우리로서는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걸핏하면 그 외침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되고 마침내는 ‘이렇게 내 인생으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버림받은 것이다’ 라고 신뢰를 잃게 됩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13절)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사람은 시련을 당하면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초반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나무열매를 먹게 됩니다. 그 죄가 하나님께 들키고 책망 들었을 때 아담은 “여자가 주길래 먹었어요” 라고 하와를 탓합니다. 이어 하와가 추궁당하자 그녀는 “뱀에게 속은 거에요” 라고 뱀을 탓했습니다. 둘 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아담의 변명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라고 명확히 하나님을 탓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이며, 인간의 본질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야곱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절)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다 보면 고통은 반이 된다. 그러나 신앙이 어정쩡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고통은 두 배가 된다고 누군가 말한 사람이 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믿음 없이 “시험을 참는 것” 은 하기 어렵습니다.
야고보는 삶이 마이너스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원인을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4절)
뱀 때문이 아니다. 악마 탓도 아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다시 말해 우리의 ‘자기중심성’이 우리를 포기와 불신뢰, 절망이나 자포자기함과 같은 마이너스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악마 때문이다, 사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악마나 사탄이라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자신의 욕심, 자기 중심성의 상징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자신을 보지 않고 항상 무언가를 탓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6절)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1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17절)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독생자 그리스도를 주실 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기본이고 또 전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 닿습니다. 단지 우리가 기도했던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때로는 시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시련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때로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게 ‘시련’의 때일지도 모릅니다. 바로 ‘어둠의 시간’입니다. 신앙이란 그 어둠의 시간을 빛의 존재를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체라는 빛에는 ‘변함’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변함이 있고 그림자가 있습니다. 기쁨이나 즐거움도 있다면 괴로움이나 슬픔으로 변해갈 때도 있습니다. 그림자 인생, 어둠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를 비춰 주십니다. ‘좋은 선물’을 주려고 움직여 주십니다.
여러분, 이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시련 속에도 변함없이 좋은 선물이 숨겨져 있음을 믿읍시다. 그때 우리는 ‘한 첫 열매’(18절)가 됩니다. “진리의 말씀”(18절)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2023年7月2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3章 16節
〇讃 頌 讃頌歌 8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1 (詩編68編)
〇讃 頌 讃頌歌 487
〇聖書奉読 ヤコブの手紙(야고보서) 1章 12~18節
〇説 教 「良い贈り物が来る(좋은 선물이 내려온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42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7月 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良い贈り物が来る」 ヤコブの手紙 1章 12~18節
「神は、その独り子をお与えになったほどに、世を愛された。独り子を信じる者が一人も滅びないで、永遠の命を得るためである。」(ヨハネ3:16)
今日の礼拝の招きの言葉としてお読みしたヨハネによる福音書3章16節の御言葉です。
私たちをお造りになった神さまは、私たちを愛しておられます。その愛を知らないまま、罪の中で私たちに滅んでほしくないと、神さまは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を、私たちのもとに、贈り物として贈って下さいました。
神さまは、私たちが「命の冠」(12節)、すなわち「永遠の命」を得るために、「良い贈り物」を与えてくださいます。神さまは私たちが、愛と平和、信頼と希望といった人生の深いコクを味わうことができるように、様々な贈り物をくださいます。
けれども、その贈り物は私たちの目から見て、いつもいつも「良い贈り物」として来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私たちの目には悪い贈り物として感じられることが多くあります。健康だったのに重い病気になってしまった。仕事に失敗し、財産を失ってしまった。他にも様々な不幸が私たちを襲います。苦しくて、悲しくて、切なくて、腹立たしくて仕方がない。思わず“神さま、どうしてですか?”と叫びたくなります。そのような「試練」が私たちの人生には少なからずあるわけです。
そのような試練に遭いますと、私たちはしばしば、人生のマイナス方向へと誘われます。勇気と希望を失いかけます。絶望や諦めへと傾きます。他人への優しさを忘れます。そして何より、神さまに対する信頼を失うのです。
人生の試練に遭って、“神さま、なぜですか”と心の中で叫ぶのは、私たちの当然の人情でしょう。しかし、その叫びは良い方向にも悪い方向にも、どちらにも傾く可能性があります。ともすれば、その叫びは神さまに対する疑いとなり、遂には“このように私の人生をなさったのは神さまだ。神さまは私のことを愛してなどいなかったのだ。見捨てられたのだ”と、信頼を失ってしまうことになります。そのような私たちの気持が、「神に誘惑されている」(13節)という言葉に表されています。
「神に誘惑されている。」人は試練に遭うと、誰かのせいにしたがるということです。
旧約聖書・創世記のはじめに、神さまが天地を創造される物語がありますが、その中で、最初の人アダムとエヴァはエデンの園で、神さまから食べるなと禁じられていた木の実を食べてしまいます。その罪が神さまに見つかり、とがめられた時、アダムは“女がくれたので食べました”とエヴァのせいにします。続いてエヴァが問われると、彼女は“蛇 がだましたのだ”と、蛇のせいにしました。二人とも“ごめんなさい。私が過ちを犯しました”とは言いません。しかも、アダムの言い訳は、「あなたがわたしと共にいるようにしてくださった女が、木から取って与えたので、食べました」(創3:12) と、しっかり神さまのせいにもしています。
これが私たちの罪であり、人間の本質を表していると思います。そんな私たちにヤコブは教えています。13節です。「誘惑に遭うとき、だれも、『神に誘惑されている』と言ってはなりません。神は悪の誘惑を受けるような方ではなく、また、御自分でも人を誘惑したりなさらないからです。」(13節)
「試練に遭う時、神さまを信頼していると、苦しみは半分になる。しかし、信仰が中途半端で信頼していないと、苦しみは2倍になる」と、そのように言った人がいますが、まさにそうだと思います。信頼なしに、「試練を耐え忍ぶ」ことは出来ません。
ヤコブは、人生がマイナス方向へ傾く原因を、私たち自身の内側に見ています。14節です。「人はそれぞれ、自分自身の欲望に引かれ、唆(そそのか)されて、誘惑に陥るのです。」(14節)
蛇のせいではない。悪魔のせいでもない。まして神さまのせい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の内にある「欲望」が、言い換えれば私たちの“自己中心さ”が、私たちを諦めと不信頼、絶望や投げやりといったマイナス方向へと引っ張るのです。「命」の人生ではなく、「罪」と「死」の人生を生み出すのです。
聖書的には悪魔のせいだ、サタンのせいだと言うことが出来るかもしれませんが、その悪魔やサタンというのは、私たちの外にあるものではなく、私たちの内にあるということ、自分の欲望、自己中心さの象徴であることを忘れてはなりません。そういう自分を見つめることなしに、いつも何かのせいにしていたら、私たちは神さまと出会うことは出来ないでしょう。
ヤコブは「思い違いをしてはなりません」(16節)と、注意しています。そしてさらに17節でこう言っています。「良い贈り物、完全な賜物はみな、上から、光の源である御父から来るのです。」(17節)
父なる神さまは、私たちに「良い贈り物」をくださるのです。それが、神さまの御心です。私たちを愛しているからです。独り子キリストを与えてくださるほど愛しているからです。この神さまの御心を信頼することが、信仰の基本であり、また全てな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の祈りは必ず、神さまに届きます。ただ、私たちが願ったことが、そのまま叶えられ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が願うものは、いつも私たちが欲しいもので、神さまがくださるのは、その時、私たちにとって一番必要なものだからです。
その時、私たちに必要なものが、時には試練となるかもしれません。その試練が自分にとって必要なものである、と理解出来るまでには時間がかかります。時には、何年も時間が必要な時もあります。それが「試練」の時かもしれません。まさに「闇の時間」です。信仰というのは、その「闇の時間」を「光」の存在を信じながら生きることなのです。
神さまがお造りになった天体という光には、「移り変わり」や「影」(17節)があり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私たちの人生にも移り変わりがあり、影があります。喜びや楽しみもあれば、苦しみや悲しみへと移り変わって行きます。影の人生、闇の時間が訪れます。
けれども、「光の源」(17節)である父なる神さまは、変わることなく私たちを照らして下さいます。「良い贈り物」を与えようと働いて下さいます。
皆さん、その父なる神さまを信頼して、「試練」の中にも変わることなく「良い贈り物」が隠されていることを信じましょう。その時、私たちは「造られたものの初穂」(18節)とされています。「真理の言葉」(18節)によって新しく創造された神の子となっています。「命の冠」を頂いて生きています。
【2023년 7월 2일 주일예배(요약판)】
“좋은 선물이 냐려온다” 야고보서 1장 12~18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요3:16)
오늘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모른 채 죄 속에서 우리가 멸망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의 면류관”(12절),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좋은 선물”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과 평화, 신뢰와 소망이라는 인생의 깊은 참맛을 맛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선물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 선물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늘 ‘'좋은 선물’로 다가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눈에는 나쁜 선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했는데 중병이 걸린다든가, 하는 일에 실패해서 재산을 잃고 만다든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불행이 우리를 덮치기도 합니다. 괴롭고 슬프고 애틋하고 화가 나서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왜요?’ 라고 따져 묻고 싶어집니다. 그런 시련이 우리 삶에는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시련을 만나면 우리는 종종 인생의 마이너스 방향으로 유혹되기도 합니다. 용기와 희망을 잃어갑니다. 절망이나 체념으로 기울어집니다. 타인에 대한 상냥함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됩니다.
인생의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 왜요?’ 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는 것은 어쩌면 우리로서는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걸핏하면 그 외침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되고 마침내는 ‘이렇게 내 인생으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버림받은 것이다’ 라고 신뢰를 잃게 됩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13절)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사람은 시련을 당하면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초반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금지하신 나무열매를 먹게 됩니다. 그 죄가 하나님께 들키고 책망 들었을 때 아담은 “여자가 주길래 먹었어요” 라고 하와를 탓합니다. 이어 하와가 추궁당하자 그녀는 “뱀에게 속은 거에요” 라고 뱀을 탓했습니다. 둘 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아담의 변명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라고 명확히 하나님을 탓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이며, 인간의 본질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야곱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절)
시련을 겪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다 보면 고통은 반이 된다. 그러나 신앙이 어정쩡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고통은 두 배가 된다고 누군가 말한 사람이 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믿음 없이 “시험을 참는 것” 은 하기 어렵습니다.
야고보는 삶이 마이너스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원인을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4절)
뱀 때문이 아니다. 악마 탓도 아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다시 말해 우리의 ‘자기중심성’이 우리를 포기와 불신뢰, 절망이나 자포자기함과 같은 마이너스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삶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는 악마 때문이다, 사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악마나 사탄이라는 것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자신의 욕심, 자기 중심성의 상징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자신을 보지 않고 항상 무언가를 탓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6절)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1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17절)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독생자 그리스도를 주실 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기본이고 또 전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께 닿습니다. 단지 우리가 기도했던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때로는 시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시련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때로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게 ‘시련’의 때일지도 모릅니다. 바로 ‘어둠의 시간’입니다. 신앙이란 그 어둠의 시간을 빛의 존재를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체라는 빛에는 ‘변함’과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변함이 있고 그림자가 있습니다. 기쁨이나 즐거움도 있다면 괴로움이나 슬픔으로 변해갈 때도 있습니다. 그림자 인생, 어둠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를 비춰 주십니다. ‘좋은 선물’을 주려고 움직여 주십니다.
여러분, 이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시련 속에도 변함없이 좋은 선물이 숨겨져 있음을 믿읍시다. 그때 우리는 ‘한 첫 열매’(18절)가 됩니다. “진리의 말씀”(18절)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