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무대인 팔레스티나는 비가 오는 시기와 내리지 않는 시기가 명확히 나뉘어져 있습니다. 비가 오면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던 불모의 땅에 싹이 트고 풀이 자라며 온통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합니다. 하지만 비가 끊기고 동남쪽 아라비아 사막 쪽에서 ‘열풍’이 몰아치면 땅을 덮고 있던 화초들이 하룻밤 사이에 시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팔레스티나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도 그 사실을 아는 한 사람으로서 편지 속에 쓰고 있습니다.
11절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11절)
여기서 야고보는 화초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인생, 사람의 삶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부한 자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10절) 그리고 11절입니다.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절)
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그것은 팔레스티나의 화초처럼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고 의지할 것을 잃어버릴 것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건강하든 재산이든 우정이든 가정이든 많은 그런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또 그런 소중한 것들에 의지해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재산(부)에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위나 명예, 건강이나 우정, 가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에게 가치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구하여 살고 있습니다. 구하는 것 자체는 아무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단, 이러한 것들은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잃었을 때, 이러한 것들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가장 의지하며 살았다면 절망하게 됩니다.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잃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리고 좌절해 버린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내 힘으로 산다”는 삶의 방식으로는 길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나는 따르는 자가 된다”라는 삶의 방식으로 이 마음은 길러집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신앙에 의해 길러지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낮아짐을 자랑할지니”(9-10절)
당시 가난하거나 부유한가 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 신분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노예제도 사회였기 때문에 부유한 자라고 하면 귀족이나 시민권을 가진 자유인이었고 낮은 자 즉 가난한 자라고 하면 노예 혹은 노예 상태였던 사람들입니다.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빈부의 현실,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가치관으로 가르쳤습니다.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빈부의 현실에 관계없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서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주 예수님의 형제자매이며 새로 찾아오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멸시당했던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로 높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존경받는 부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낮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같은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노예나 신분이 낮은 자, 가난한 자들이 기쁨을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고, 또 신분이 높고 부유한 사람들이라도 그 가르침에 겸손의 미덕이나 사람으로서의 본래적인 삶의 방식을 느낀 자는 신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실제로 노예이면서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교사가 있고, 그 노예의 주인이 신자로서 그 가르침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의 높음을 자랑한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운 감각일 수도 있습니다.
자랑스럽다는 것은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으로 생각한다, 기뻐한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신분이 낮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높아졌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높이든 낮아지든 인간의 본래적인 가치관을 발견한 것에 대한 깊은 기쁨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한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께 활용되는 인간으로 사는 것, 그 삶의 방식에 영광을 느끼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처사에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자랑할까요? 또 어떨 때에 자신을 낮게 평가하고 열등감을 가질까요?
우리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때에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자랑합니다. 재산을 가지고 있다.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학력을 가지고 있다. 명예를 가지고 있다. 권력을 가지고 있다.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럴 때에 자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또,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할 때에 자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일에서 성공한다. 공부나 스포츠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다. 남을 돕거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하지 않는 것을 한다. 그럴 때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하지 못할 때는 나를 낮게 평가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열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사람은 가지고 있든 없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주어지고 살게 되어 거기에 “있다”는 존재 자체와 그 생명 자체에 큰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 가치이며 그것을 깨닫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그 자체에 큰 기쁨과 영광을 느끼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는 삶의 방식이야말로, 때로는 높아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거나 혹은 낮아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화초처럼 시들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변하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함께 걸어갑시다.
2023年6月2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40章 6~8節
〇讃 頌 讃頌歌 4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29 (詩編65編)
〇讃 頌 讃頌歌 366
〇聖書奉読 ヤコブの手紙(야고보서) 1章 9~11節
〇説 教 「信仰における誇り(믿음의 자랑)」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6月 2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信仰における誇り」 ヤコブの手紙 1章 9~11節
聖書の舞台であるパレスチナは、雨の降る時期と降らない時期とがはっきりと分かれています。雨が降ると、それまでは何も生えていなかった不毛の地面に、芽が出て、草が伸び、一面に美しい花が咲き乱れます。けれども、雨が途絶え、東南のアラビア砂漠の方から「熱風」が吹きつけると、地を覆っていた草花が一夜にして枯れてしまうのです。
パレスチナに住む人々は、そのことを経験として知っていました。ヤコブもそのことを知る一人として、手紙の中に書いています。
11節です。「日が昇り熱風が吹きつけると、草は枯れ、花は散り、その美しさは失せてしまいます」(11節)
ここで、ヤコブは草花のことを問題に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人の人生、人の生き方を問題にしています。
10節「富んでいる者は草花のように滅び去るからです。」(10節)そして、11節「同じように、富んでいる者も、人生の半ばで消えうせるのです。」(11節)
富んでいることを誇りにしていると、それはパレスチナの草花のように一夜にして滅び去り、頼るものを失ってしまうことを警告してい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健康にしろ、財産にしろ、友情にしろ、家庭にしろ、たくさんそういう大切なものを持って、またそういった大切なものに支えられて生きています。ただ、これらのものは永遠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突然、失ってしまうことがあるのです。
勿論、財産(富)に価値がないと言うのではありません。地位や名誉、健康や友情、家庭が大切ではないと言うのでもありません。むしろ、それは私たちにとって価値のある、大切なものです。私たちは、これらのものを求めて生きています。求めること自体は何も悪いことではありません。
ただ、これらのものは失ってしまうことがあるのです。失った時に、これらのものに自分の人生をかけて、一番頼りにして生きていたら、絶望してしまいます。生きる力を失ってしまうのです。だからこそ、失うことのないもの、消え去ることのないものを、人生で一番大切なものとして求め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私たちの人生で一番大切なものとは何でしょうか? それは失うことのないもの、消え去ることのないものと言えますが、それは自分の人生において大切なものを失ってしまい、挫折してしまった自分を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る心であるのです。
このような心は、“自分の力で生きている”という生き方では養われません。“神さまが私の人生の主になって、自分は従う者になる”という生き方をすることによって、この心は養われます。すなわち、神さまの御言葉を信じて受け入れる信仰によって養われるのです。
ヤコブは、神さまの御言葉として、こう書いています。9節です。「貧しい兄弟は、自分が高められることを誇りに思いなさい。また、富んでいる者は、自分が低くされることを誇りに思いなさい。」(9節)
当時、貧しいか富んでいるかというのは、社会的ステータス、身分と結びついていました。ローマ帝国は奴隷制社会でしたので、富んでいる者と言えば、貴族や市民権を持つ自由人でしたし、貧しい者と言えば、奴隷、もしくは奴隷状態であったのです。社会的身分と経済的貧富の現実、それが人間の値打ちを測る物差しのようになっていました。
ところが、教会においては、そうではない価値観が教えられました。社会的身分と経済的貧富の現実に関係なく、人は神に愛されている存在として、等しく神の子であり、主イエスの兄弟姉妹であり、新たにやって来る神の国の相続者であると語られました。
だから、社会的に見下げられていた貧しい人々は、神の目から見れば、神の子として高められる。反対に、社会的に高く評価され敬われた富んでいる者は、神の子として低くされたのです。そうして、人間として、私たちは神さまの前に等しい者とされたのです。
そのため、奴隷や身分の低い者、貧しい人々が喜びを見いだして、数多く教会に集まりましたし、また、身分の高い、富んでいる人でも、その教えに謙遜の美徳や人としての本来的な生き方を感じた者は信仰の道に入りました。実際に、奴隷でありながら教会では教える立場にいる教師がおり、その奴隷の主人が一信者であり、その教えを聞くというようなケースもあったそうです。当時の社会では考えられない現実でした。
それにしても、自分が高められるのを誇りに思う、というのはまだ分かりますが、自分が低くされることを誇りに思う、というのは、私たちには分かりにくい感覚であるかも知れません。
「誇りに思う」というのは、自慢す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光栄に思う、喜ぶといった気持です。だから、身分の低い人が神の子として高められたからと言っても、それを自慢するようなことではないのです。それは、高められるにしろ低くされるにしろ、人間の本来的な価値観を発見したことに対する深い喜びなのです。それこそ、“人生で一番大切なもの”を見つけた喜びなのです。神さまに愛され、神さまに生かされる人間として生きる。その生き方に光栄を感じる、神の子として生かしてくださる神さまの計らいに喜びを感じることなのです。
私たちは、どんな時に自分を高く評価し、誇るでしょうか。また、どんな時に自分を低く評価し、劣等感を持つでしょうか。
私たちは、何かを“持っている”時に自分を高く評価し、誇ります。財産を持っている。地位を持っている。学歴を持っている。名誉を持っている。権力を持っている。能力を持っている。そういう時に自分を高く評価します。
また、何かが“できる”時に自分を高く評価します。仕事で成功する。勉強やスポーツで良い成績を取る。人を助けたり、社会に役立つようなことをする。他の人ができないこと、しないことをする。そういう時に自分を誇ります。
そして反対に、そういったものを持っていない時、できない時は、自分を低く評価し、自信を失い、劣等感を感じるのです。しかし、それは私たち人間が本来持っている値打ちではないのです。
人は、持っているかいないか、できるかできないかに関わらず、神さまから命を与えられ、生かされて、そこに“在る”という存在そのものに、命そのものに大きな価値があり、意味があるのです。それが人間の本来的な価値であり、そのことに目覚めて生きることが、神の子として生き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神さまに愛されて“ここに在る”。そのことに大きな喜びと光栄を、人生で一番大切なものを見いだしている生き方が、高められることを誇りに思い、あるいは低くされることを誇りに思う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この信仰は、草花のように枯れ、消え失せてしまう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永遠に変わらず、消え失せないものです。皆さん、この変わらないもの、消え失せないものを目指して共に歩んでいきましょう。
【2023년 6월 25일 주일예배(요약판)】
“믿음의 자랑” 야고보서 1장 9~11절
성경의 무대인 팔레스티나는 비가 오는 시기와 내리지 않는 시기가 명확히 나뉘어져 있습니다. 비가 오면 그때까지는 아무것도 나지 않았던 불모의 땅에 싹이 트고 풀이 자라며 온통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합니다. 하지만 비가 끊기고 동남쪽 아라비아 사막 쪽에서 ‘열풍’이 몰아치면 땅을 덮고 있던 화초들이 하룻밤 사이에 시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팔레스티나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도 그 사실을 아는 한 사람으로서 편지 속에 쓰고 있습니다.
11절입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11절)
여기서 야고보는 화초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인생, 사람의 삶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부한 자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10절) 그리고 11절입니다.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절)
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그것은 팔레스티나의 화초처럼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고 의지할 것을 잃어버릴 것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건강하든 재산이든 우정이든 가정이든 많은 그런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또 그런 소중한 것들에 의지해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재산(부)에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위나 명예, 건강이나 우정, 가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에게 가치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구하여 살고 있습니다. 구하는 것 자체는 아무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단, 이러한 것들은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잃었을 때, 이러한 것들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가장 의지하며 살았다면 절망하게 됩니다.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찾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잃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리고 좌절해 버린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내 힘으로 산다”는 삶의 방식으로는 길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고, 나는 따르는 자가 된다”라는 삶의 방식으로 이 마음은 길러집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신앙에 의해 길러지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낮아짐을 자랑할지니”(9-10절)
당시 가난하거나 부유한가 하는 것은 사회적 지위, 신분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노예제도 사회였기 때문에 부유한 자라고 하면 귀족이나 시민권을 가진 자유인이었고 낮은 자 즉 가난한 자라고 하면 노예 혹은 노예 상태였던 사람들입니다.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빈부의 현실,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가치관으로 가르쳤습니다.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빈부의 현실에 관계없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서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주 예수님의 형제자매이며 새로 찾아오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멸시당했던 가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로 높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존경받는 부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낮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같은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노예나 신분이 낮은 자, 가난한 자들이 기쁨을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고, 또 신분이 높고 부유한 사람들이라도 그 가르침에 겸손의 미덕이나 사람으로서의 본래적인 삶의 방식을 느낀 자는 신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실제로 노예이면서 교회에서는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교사가 있고, 그 노예의 주인이 신자로서 그 가르침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의 높음을 자랑한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운 감각일 수도 있습니다.
자랑스럽다는 것은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으로 생각한다, 기뻐한다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신분이 낮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높아졌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높이든 낮아지든 인간의 본래적인 가치관을 발견한 것에 대한 깊은 기쁨입니다. 그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한 기쁨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께 활용되는 인간으로 사는 것, 그 삶의 방식에 영광을 느끼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처사에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에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자랑할까요? 또 어떨 때에 자신을 낮게 평가하고 열등감을 가질까요?
우리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때에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자랑합니다. 재산을 가지고 있다.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학력을 가지고 있다. 명예를 가지고 있다. 권력을 가지고 있다.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럴 때에 자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또,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할 때에 자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일에서 성공한다. 공부나 스포츠에서 좋은 성적을 받는다. 남을 돕거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하지 않는 것을 한다. 그럴 때 자신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하지 못할 때는 나를 낮게 평가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열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사람은 가지고 있든 없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주어지고 살게 되어 거기에 “있다”는 존재 자체와 그 생명 자체에 큰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 가치이며 그것을 깨닫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그 자체에 큰 기쁨과 영광을 느끼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발견하는 삶의 방식이야말로, 때로는 높아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거나 혹은 낮아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화초처럼 시들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변하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함께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