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가 쓰여진 기원전 1세기 말에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불렸던 열두 부족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대(가나안) 땅을 잃고 로마 제국의 광대한 영내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흩어진 곳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스라엘 핏줄이 아니라 주 예수님을 믿은 자만이 진정한 이스라엘 열두 부족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세계 각지에 생겨 나고 있던 그리스도 교회를 향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도 주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이 새로운 이스라엘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편지는 바로 우리에게 쓰여진 편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먼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 라고 말합니다.
편지 첫머리부터 갑자기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영문 모를 소리를 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으로 여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시험이잖아요. 확실히 우리들 인생에는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에 우리는 가능한 한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진심이고, 괴로움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이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 시험이라고 번역된 말은 유혹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고통이나 어려움을 만나면 그때 우리는 푸념하고 싶어집니다. 누군가에게 화풀이하고 싶어집니다. 때로는 마음이 부러져 절망할 것 같습니다. 괴로움과 어려움은 우리를 그런 삶의 태도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삶을 유혹하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시험’으로 인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삶에 있어서의 괴로움이나 어려움의 의미를 알 때입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시련”(3절), 즉 신앙이 시험받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지, 아니면 의심하는지 우리의 신앙이 시험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추궁당하는 것은 괴로움이나 어려움과 같은 인생 역풍의 때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요동칩니다. 괴로워하여 고민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고뇌 때문에 하나님까지 의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6절)이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쳤을 때 항구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바람과 파도에 배는 흔들립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떠내려가거나 가라앉지 않도록 항구에 로프로 연결하여 단단히 고정합니다. 그런데 이게 바다 위라면 어떻게 될까요? 바람과 파도에 흔들려서 어디까지 떠내려갈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전복되어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배와 같습니다. 바람과 파도에 흔들립니다. 인생의 폭풍에 시달리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흔들림이 있어도 아무것도 없는 해상에서 요동치는 것과 항구 안에서 요동치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삶의 안정감이 다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은 이 항구와도 같은 것입니다. 마음이 고뇌로 흔들린다 하더라도 절망은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꺾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구에 연결되어 지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이 정한다는 것입니다. 8절에 있는 “두 마음을 품어” 라는 것은 인생의 풍파에 마음이 동요하고 괴로워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항구가 없는 상태, 신앙에 의해 지켜지고 지탱받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굵고 끓어지지 않는 밧줄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정함이”(8절)이 있습니다. 정함이란 인생이 흔들리지 않는 것,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려도 가라앉지 않는다. 지진이 일어나도 쓰러지지 않는다. 괴로워하며 고민해도 소망을 잃지 않는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 그것이 “정함”이라는 것입니다.
‘시련’이란 겪어내기 힘든 어려움이지만 이 시련을 통해 단련되어지는 것 입니다. 얼마나 힘이 있는지 시험하고 훈련하여 그 힘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은 우리를 시험하고 단련시켜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4절) 성장시키기 위한 ‘시련’입니다. 그런 의미를 알 때 삶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우리는 ‘인내’(3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련이 우리 신앙의 힘을 시험하고 그 힘을 키워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안다면 시련을 인내하려는 의지가 생길 것입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기”까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성장시켜 주실 기회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야고보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4절) 라고 권합니다. 그 인내심이 마음의 정함, 삶의 정함으로 되는 신앙을 기르는 것입니다. 어떨 때라도 “하나님,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나님을 믿고 맡기는 신앙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밀려옵니다. 우리 마음이 동요하고 고뇌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마음은 고뇌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싸여 안심하고 고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하고 구비하는 신앙’,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을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하면 주시리라”(5절)
이 지혜란 인생의 지혜, 삶의 지혜, 신앙의 지혜를 말합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어떻게 볼 것인가,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 견해, 받아들이는 방법을 말합니다. 괴로움은 괴로움입니다. 어려움은 그냥 어려움입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견해이며, 그러면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인내할 수 없습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은 자신의 신앙을 시험하고 단련시켜 온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의 기회라고 받아들일 때 괴로움이나 어려움과 마주하는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받아들이고 인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지혜가 어설프고 머릿속의 지식에 불과하면 만일의 경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진심으로 기도하고 구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게 오늘 야고보가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2023年6月18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ローマ書(로마서) 5章 2~5節
〇讃 頌 讃頌歌 42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27 (詩編51編)
〇讃 頌 讃頌歌 342
〇聖書奉読 ヤコブの手紙(야고보서) 1章 1~8節
〇説 教 「疑いを捨てて(의심을 버리고)」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0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6月 1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疑いを捨てて」 ヤコブの手紙 1章 1~8節
今日からヤコブの手紙を読んでいこうかと思います。
この手紙が書かれた紀元1世紀末に、旧約聖書のイスラエルの十二部族はもはや存在していません。かつて神の民イスラエルの名で呼ばれた12部族の人たちは、自分たちこそ神さまに選ばれた民族イスラエルであると、誇りを持っていました。それがユダヤ(カナン)の土地を失い、ローマ帝国の広大な領内に離散させられていました。
しかし、その離散した先で、イエスの福音を知り、イエスさまを神さまから遣わされた救い主、神の子と信じた人々がいたのです。
ヤコブは、イスラエルの血筋ではなく、主イエスを信じた者こそ本物のイスラエル12部族だ、本当の意味での神の民だと考えていたのでしょう。ヤコブは世界各地に誕生していたキリスト教会に向けて、この手紙を書いたのです。私たちも、主イエスを信じる者として、新しいイスラエルに属する者ですから、この手紙はまさに私たちに書き送られた手紙だと言えます。
さて、ヤコブはまず最初に「いろいろな試練に出会うときは、この上ない喜びと思いなさい」(2節)と言います。
手紙の冒頭から、いきなり「試練を喜びなさい」と訳が分からないことを言います。だって、喜びと思えないことが試練でしょ。確かに人生には苦難や困難がつきものです。でもそういったことに私たちはできる限り出会いたくないというのが本音ですし、苦難や困難がないことが幸福につながると考えています。
それなのに、ヤコブは「いろいろな試練に出会うときは、この上ない喜びと思いなさい」と言うのです。
この「試練」と訳された言葉は、“誘惑”とも訳すことができる言葉です。私たちは苦しみや困難に出会いますと、その時、私たちは愚痴をこぼしたくなります。誰かに、八つ当たりしたくなります。時には、心が折れて絶望しそうになります。苦しみや困難というのは、私たちをそのような人生態度へと誘惑するのです。
そのように私たちの人生を誘惑する苦しみや困難を「試練」として忍耐できるとしたら、それは人生における苦しみや困難の意味を知っている時です。
苦しみや困難とは何でしょうか? それは「信仰が試されること」(3節)だとヤコブは語っています。神さまを信じるのか、それとも疑うのか、私たちの信仰が試されるのです。
私たちの信仰が問われるのは、苦しみや困難といった人生の逆風の時です。その時、私たちの心は揺れ動きます。苦しみ悩みます。そうでない人はいません。
けれども、その苦悩のために、神さままで疑うようになったら、それは「風に吹かれて揺れ動く海の波」(6節)だとヤコブは言うのです。
嵐に吹かれた時の港の様子を想像して見てください。風と波に船は揺れます。けれども、そのために流されたり、沈んだりしないように、港にロープでつなぎ、しっかりと固定します。ところが、これが海の上だったらどうなるでしょう。風と波に揺られて、どこまで流されるか分からない。あるいは転覆し、沈んでしまうかも知れません。
私たちの心は、この船のようなものです。風と波に揺れ動く。人生の嵐に苦しみ悩むのです。けれども、同じ揺れ動くのでも、何もない海上で揺れ動くのと、港の中で揺れ動くのとでは、意味が違います。人生の安定感が違います。
皆さん、神さまを信じる信仰というのは、この港のようなものなのです。心が苦悩に揺れ動くことがあっても絶望はしません。心は折れません。なぜなら、港に守られているからです。人生を導く神さまを信じているからです。
そして、それが心が定まってい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8節にある「心が定まらず」というのは、人生の波風に心が動揺し、苦しみ悩む状態を指し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人生に港がない状態、信仰によって守られ支えられていない状態を言っているのです。信仰によって神さまと、太く切れないロープでつながっているならば、私たちの心は定まっていると言えます。「生き方全体に安定」(8節)があります。安定とは、人生が揺れ動かないこと、心が動揺しないことを言うのではありません。揺れ動いても沈まない。地震が起きても倒れない。苦しみ悩んでも希望を失わない。希望の故に心が折れない。それが「安定」ということです。
「試練」とは、試して練り上げるものです。どれぐらい力があるかを試し、訓練してその力を向上させるのです。苦しみや困難は、私たちを試し、練り上げ、「完全で申し分なく、何一つ欠けたところのない人」(4節)に成長させるための「試練」なのです。そういう意味を知っている時、人生における苦しみや困難を、私たちは「忍耐」(3節)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私たちも、「試練」が私たちの信仰の力を試し、その力を伸ばして、「完全で申し分なく、何一つ欠けたところのない人」にするためのものであると知っているならば、試練を忍耐しようとする意志が生まれて来るでしょう。「この上ない喜び」とまでは、なかなかいか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神さまが自分を訓練し、成長させてくださる機会として受け止め、忍耐する思いが生まれて来るでしょう。
ヤコブは、「あくまでも忍耐しなさい」(4節)と勧めます。その忍耐が、心の安定、生き方の安定の土台となる信仰を養うのです。どんな時にも、“神さま、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と、神さまを信じて、お委ねする信仰を養うのです。
私たちの人生には、風が吹き、波が押し寄せます。私たちの心が動揺し、苦悩します。けれども、人生を導かれる神さまの大きな愛の御手にお委ねするのです。それでも私たちの心は苦悩するでしょう。しかし、神さまの愛に包まれて、安心して苦悩す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それが、完全で申し分のない信仰、何一つ欠けたところのない信仰だと思います。私たちは、そのような信仰を目指して、信仰生活を歩んでいるのです。
そのためには祈りが必要です。祈りによって与えられる「知恵」が必要です。「あなたがたの中で知恵の欠けている人がいれば、だれにでも惜しみなくとがめだてしないでお与えになる神に願いなさい。そうすれば与えられます。」(5節)
この知恵とは、人生の知恵、生き方の知恵、信仰の知恵のことです。苦しみや困難をどう見るか、試練をどう受け止めるか、その見方、受け止め方のことです。苦しみは、苦しみです。困難は、ただの困難です。それが何も持っていない人の見方であり、それでは苦しみや困難を受け入れ、忍耐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
苦しみや困難は、自分の信仰を試し、練り上げ、完全なものとするために、神さまが与えた「試練」である、機会であると受け止める時、苦しみや困難と向き合う人生態度が変わって来ます。受け入れ、忍耐するようになります。
しかし、その「知恵」が生半可な、頭の中の“知識”に過ぎなければ、いざという時、役に立ちません。だから、私たちはもっと本気で祈り求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本気で信仰生活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れが今日、ヤコブが私たちに勧めているメッセージではないでしょうか。
【2023년 6월 18일 주일예배(요약판)】
“의심을 버리고” 야고보서 1장 1~8절
오늘부터는 야고보서를 읽어보고자 합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기원전 1세기 말에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불렸던 열두 부족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대(가나안) 땅을 잃고 로마 제국의 광대한 영내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흩어진 곳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알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스라엘 핏줄이 아니라 주 예수님을 믿은 자만이 진정한 이스라엘 열두 부족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세계 각지에 생겨 나고 있던 그리스도 교회를 향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도 주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이 새로운 이스라엘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편지는 바로 우리에게 쓰여진 편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먼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 라고 말합니다.
편지 첫머리부터 갑자기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영문 모를 소리를 합니다. 왜냐하면 기쁨으로 여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시험이잖아요. 확실히 우리들 인생에는 고난과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에 우리는 가능한 한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진심이고, 괴로움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이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 시험이라고 번역된 말은 유혹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고통이나 어려움을 만나면 그때 우리는 푸념하고 싶어집니다. 누군가에게 화풀이하고 싶어집니다. 때로는 마음이 부러져 절망할 것 같습니다. 괴로움과 어려움은 우리를 그런 삶의 태도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삶을 유혹하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시험’으로 인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삶에 있어서의 괴로움이나 어려움의 의미를 알 때입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시련”(3절), 즉 신앙이 시험받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지, 아니면 의심하는지 우리의 신앙이 시험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추궁당하는 것은 괴로움이나 어려움과 같은 인생 역풍의 때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요동칩니다. 괴로워하여 고민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고뇌 때문에 하나님까지 의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6절)이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쳤을 때 항구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바람과 파도에 배는 흔들립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떠내려가거나 가라앉지 않도록 항구에 로프로 연결하여 단단히 고정합니다. 그런데 이게 바다 위라면 어떻게 될까요? 바람과 파도에 흔들려서 어디까지 떠내려갈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전복되어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배와 같습니다. 바람과 파도에 흔들립니다. 인생의 폭풍에 시달리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흔들림이 있어도 아무것도 없는 해상에서 요동치는 것과 항구 안에서 요동치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삶의 안정감이 다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은 이 항구와도 같은 것입니다. 마음이 고뇌로 흔들린다 하더라도 절망은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꺾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구에 연결되어 지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음이 정한다는 것입니다. 8절에 있는 “두 마음을 품어” 라는 것은 인생의 풍파에 마음이 동요하고 괴로워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항구가 없는 상태, 신앙에 의해 지켜지고 지탱받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굵고 끓어지지 않는 밧줄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정함이”(8절)이 있습니다. 정함이란 인생이 흔들리지 않는 것,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려도 가라앉지 않는다. 지진이 일어나도 쓰러지지 않는다. 괴로워하며 고민해도 소망을 잃지 않는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 그것이 “정함”이라는 것입니다.
‘시련’이란 겪어내기 힘든 어려움이지만 이 시련을 통해 단련되어지는 것 입니다. 얼마나 힘이 있는지 시험하고 훈련하여 그 힘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은 우리를 시험하고 단련시켜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4절) 성장시키기 위한 ‘시련’입니다. 그런 의미를 알 때 삶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우리는 ‘인내’(3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련이 우리 신앙의 힘을 시험하고 그 힘을 키워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안다면 시련을 인내하려는 의지가 생길 것입니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기”까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성장시켜 주실 기회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야고보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4절) 라고 권합니다. 그 인내심이 마음의 정함, 삶의 정함으로 되는 신앙을 기르는 것입니다. 어떨 때라도 “하나님,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나님을 믿고 맡기는 신앙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바람이 불고 파도가 밀려옵니다. 우리 마음이 동요하고 고뇌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마음은 고뇌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싸여 안심하고 고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하고 구비하는 신앙’,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을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하면 주시리라”(5절)
이 지혜란 인생의 지혜, 삶의 지혜, 신앙의 지혜를 말합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어떻게 볼 것인가,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 견해, 받아들이는 방법을 말합니다. 괴로움은 괴로움입니다. 어려움은 그냥 어려움입니다. 그것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견해이며, 그러면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인내할 수 없습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은 자신의 신앙을 시험하고 단련시켜 온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의 기회라고 받아들일 때 괴로움이나 어려움과 마주하는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받아들이고 인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지혜가 어설프고 머릿속의 지식에 불과하면 만일의 경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진심으로 기도하고 구해야 합니다. 진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게 오늘 야고보가 우리에게 권하고 있는 메시지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