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버이 주일인데 고대 그리스어로 부모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스톨게 stοργή(storgḗ)”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스톨게는 가족애를 나타내는 말로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자주 사용되었다고 합니다만, 성경 속에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흔히 쓰이는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에로스 έρως(eros)”와 “필리아 fιλίa(phil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로스는 열정적인 사랑을 말하며 주로 남녀의 사랑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또 필리아는 우정이나 우애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의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어느 것도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스톨게” “에로스” “필리아” 이 사랑들은 모두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가치를 전혀 묻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가치없는 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무상의 사랑을 “아가페 aγάpη(agápe)”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 “아가페”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에 의해 일어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매력 같은 상대방의 가치에 따라서 일어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에 의해 야기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8, 16절)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지는 사랑입니다.
요한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사랑에 앞서 있음을 강조합니다. 10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10절)
우리 상식으로는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 즉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제물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견되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어주시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이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심상치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목숨이 십자가 위에 바쳐졌다는 것은 정말 심상치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형태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해주신 것조차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성경 상식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사랑인 셈인데, 이 상식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는 자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상식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요한은 7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 따윈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받은 우리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성령의 힘에 의해 사랑하는 자로 바뀝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 바꾸는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서로 사랑하는 자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창조적인 사랑은 가치를 창출하는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사43:4)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가치 있는 자, 사랑받아야 하는 자, 사랑받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졌습니다. 그것을 믿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전도라는 것은 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는 성령이 주시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라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증명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심판 받을 때에 구원받을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18절)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이 죄인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이란 철저하게 상대방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존재를 긍정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면 된다고 하고,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과 다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가치를 묻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가 있든 거기에 “있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존재를 긍정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런 사랑입니다.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남겨두고 한 마리를 찾는 양치기의 모습에서 이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눅15장)
어디까지 가도 “있다”는 것, 그 존재 자체가 긍정되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신앙에 두려움이란 없습니다. 설령 걱정이 되어 잠을 못 이루는 밤을 보내는 일이 있었다 해도 자신의 존재 자체가 긍정되고 있다면 걱정을 하지 않게 된다기보다는 걱정을 하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걱정하는 나라는 존재를 그대로 사랑해 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든든한 일일까요? 얼마나 큰 위로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읍시다. 이 사랑에서 힘을 얻어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2023年5月14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43章 4~5節
〇讃 頌 讃頌歌 2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98 (父母の主日)
〇讃 頌 讃頌歌 299
〇聖書奉読 ヨハネの手紙一(요한일서) 4章 7~21節
〇説 教 「ここに愛があります(여기에 사상이 있습니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1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5月 1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ここに愛があります」ヨハネの手紙一 4章7~21節
今日はオボイ主日(父母の主日)ですが、古代ギリシャ語で「父母の愛」を表す言葉として、「ストルゲー・στοργή(storgḗ)」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このストルゲーは家族愛を表す言葉で、古代ギリシャ語ではよく使われていたそうです。聖書の中にはほとんど出て来ません。聖書の中でよく使われている「愛」を表す単語として、「エロスέρωςeros(eros)」と「フィリアφιλίαphilia(philia)」」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エロス」は情熱的な愛ということで、主に男女の愛を表す時に使われます。また、「フィリア」は友情・友愛を表します。
しかし、十字架によって示された「神さまの愛」を表すには、どれも適当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なぜなら、「ストルゲー」「エロス」「ファリア」、これらの愛はどれも自分にとって価値あるものに対する愛だったからです。
神さまが人を愛する愛というのは、相手の価値を全く問わない愛です。この価値なき者への愛という、神さまの普遍の愛、無償の愛を「アガペーαγάπη(agápe)」という言葉で表しました。
この「アガペー」に示された神さまの愛は、対象によって起される愛ではありません。「エロス」の愛などは、愛する対象の美しさや魅力といった相手の価値によって引き起こされる愛ですね。しかし、神さまの愛は対象によって引き起こされる愛ではないのです。「神は愛なり」(4:8,16)といわれる神さまからあふれ出る愛なのです。
ヨハネはこの神さまの愛が私たちの愛に先立っていることを強調します。10節です。「わたしたちが神を愛したのではなく、神がわたしたちを愛して、…」(4:10)
私たちの常識では、信仰というものは私たちが神さまを信じる、すなわち愛することから始まると考えます。でも、聖書には、私たちの信仰というものは、神さまが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ということから始まるのだと、主張しているのです。
しかも、私たちが神さまに愛されたというのは、私たちの罪を贖ういけにえとして御子イエス・キリストが遣わされ、私たちの罪を赦すために十字架にお架かりなって死んでくださったとヨハネは言うのです。
私たちの罪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る神さまの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がおいでになるという、この神さまの愛は、決して尋常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ここで言われている罪というのは、神さまへの背信、裏切り、不信仰を意味します。それにもかかわらず、不信仰なる者のために神さまの独り子であるイエスさまの命が十字架の上にささげられたということは、本当に尋常なことではないことは、すぐに分かるかと思います。
それが、神さまの私たちに対する愛の形なのです。しかも、私たちが、そのようにしてくださいとお願いし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実は、多くの人間が自分たちのために、そうしてくださったことすら知らないのです。
それが、私たちに対する神さまの愛、愛し方であるのです。これが聖書の常識と言いますか、神さまのお考えであり、神さまの愛であるわけですが、この常識を自分のものとすること、神さまの自分に向けられた愛を受け入れ、信じることが、私たちの信仰なのです。
私たちは神さまに愛されている。この愛を信じるならば、私たちは他者を愛そうとする者に変えられるはずです。それが聖書の常識であるのです。そのためにヨハネは7節で「愛する者たち、互いに愛しましょう。愛は神から出るもので、愛する者は皆、神から生まれ、神を知っているからです。愛することのない者は神を知りません。神は愛だからです」(7-8節)と言っているのです。神さまの愛、アガペーの愛なんて私たちにはありません。しかし、このアガペーで愛された私たちは、それで神さまの愛を知りましたし、聖霊の力で愛する者へと変えてくださるわけですから、愛する者になろうとする。それが私たちの信仰であるのです。
神さまの愛は、愛することの出来ない人間を愛する者へと変える創造的な愛です。神さまの愛、イエスさまの愛が私たちを互いに愛し合う者へと変えるのです。この創造的な愛は、価値を生み出す愛とも言えます。「わたしの目にはあなたは価高く、貴く、わたしはあなたを愛する」(イザヤ43:4)と言われる神さまによって、私たちは価値ある者、愛されるべき者、愛されるべき神の子とされたのです。そのことを信じて、私たちは互いに愛し合っ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教会における伝道というのは、この神さまのアガペーの愛を伝えるのが伝道であるのです。神さまを信じさせるのが伝道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の愛というのは、神さまの愛に対する応答としての愛であるのです。
皆さん、愛する者は、聖霊によって注がれている愛で、イエス・キリスト新しい掟、「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という掟を守っているのです。私たちは神さまの愛によって神の子とされました。愛の神さまの子であるならば、愛することが神の子としての証明になります。神さまの掟を守っているがゆえに、当然、私たちは裁きの日に救われる確信を持つことが出来るのです。だからこそ、ヨハネは「愛には恐れがない。完全な愛は恐れを締め出します」(18節)と言うのです。
神さまは愛する価値のない、この罪人を愛してくださいました。愛とは、徹底して相手の存在を肯定することです。神さまが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というのは、まさしくその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
そして、この存在を肯定するというのは、ある事をすればよしとされ、違うことをすればだめだとされるのと違います。愛は相手の価値を問いません。どのような在り方があろうと、そこに「いる」ことが良しとされるのです。それが存在を肯定されることです。神さまの愛とは、そういう愛なのです。99匹の羊を野に残して、一匹を探す羊飼いの姿にこの愛を見ることが出来ます。(ルカ15章)
どこまで行っても「いる」ということ、その存在自体が肯定され、愛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これが神さまから愛されていることなのです。この神さまの愛を信じる信仰に、恐れなんてありません。たとえ心配で眠れない夜を過ごすようなことがあったとして、自分の存在自体が肯定されていれば、心配をしなくなるというより、心配をする自分を受け入れる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
むしろ、心配するのは当然であって、その心配する私という存在をそのまま丸ごと愛してくださるお方がおられるのです。何と心強いことでしょうか。何という慰めでしょうか。これこそ、「完全な愛は恐れを締め出す」と言うことなのです。
皆さん、私の存在を丸ごと愛してくださる神さまの愛を信じましょう。この愛に力を頂いて、互いに愛し合いましょう。
【2023년 5월 14일 주일예배(요약판)】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7~21절
오늘은 어버이 주일인데 고대 그리스어로 부모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스톨게 stοργή(storgḗ)”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스톨게는 가족애를 나타내는 말로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자주 사용되었다고 합니다만, 성경 속에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흔히 쓰이는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에로스 έρως(eros)”와 “필리아 fιλίa(phil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로스는 열정적인 사랑을 말하며 주로 남녀의 사랑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또 필리아는 우정이나 우애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의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어느 것도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스톨게” “에로스” “필리아” 이 사랑들은 모두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에 대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가치를 전혀 묻지 않는 사랑입니다. 이 가치없는 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무상의 사랑을 “아가페 aγάpη(agápe)”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 “아가페”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에 의해 일어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매력 같은 상대방의 가치에 따라서 일어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에 의해 야기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8, 16절)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지는 사랑입니다.
요한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사랑에 앞서 있음을 강조합니다. 10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10절)
우리 상식으로는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 즉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제물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견되어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어주시는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이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심상치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 불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목숨이 십자가 위에 바쳐졌다는 것은 정말 심상치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형태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해주신 것조차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성경 상식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사랑인 셈인데, 이 상식을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는 자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상식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요한은 7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 따윈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받은 우리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성령의 힘에 의해 사랑하는 자로 바뀝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 바꾸는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서로 사랑하는 자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창조적인 사랑은 가치를 창출하는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사43:4)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가치 있는 자, 사랑받아야 하는 자, 사랑받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졌습니다. 그것을 믿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전도라는 것은 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는 성령이 주시는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라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증명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심판 받을 때에 구원받을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18절)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이 죄인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이란 철저하게 상대방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존재를 긍정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하면 된다고 하고,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과 다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가치를 묻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가 있든 거기에 “있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존재를 긍정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런 사랑입니다.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남겨두고 한 마리를 찾는 양치기의 모습에서 이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눅15장)
어디까지 가도 “있다”는 것, 그 존재 자체가 긍정되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신앙에 두려움이란 없습니다. 설령 걱정이 되어 잠을 못 이루는 밤을 보내는 일이 있었다 해도 자신의 존재 자체가 긍정되고 있다면 걱정을 하지 않게 된다기보다는 걱정을 하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걱정하는 나라는 존재를 그대로 사랑해 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든든한 일일까요? 얼마나 큰 위로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읍시다. 이 사랑에서 힘을 얻어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