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담긴 사람의 행보가 어떤 것인지를 함께 읽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 빛 가운데 걸을 것이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이 빛 가운데 걷는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한 자들이며, 스스로 이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여도 바로 그 의사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모르는 사이에 어둠으로 행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빛 가운데 걷기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1-2절)
예수님을 “의로우신 분” “대언자” 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해도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올바르게 걸으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사랑 없음, 마음의 추함, 차가운 말 등에 마음이 아파집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여기 위로가 있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래도 너는 크리스천이냐"고 사탄이 몰아세울 때 대언자이신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변호사처럼 억지로 무죄를 얻으려고 주장하거나 정상 참작을 호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옳고,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심판 때의 그 재판을 이미지화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찾아와서 “야, 너. 그래도 크리스천이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크리스천 같은 건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어? 원래 하나님께서는 너따위 사랑하지 않아. 네가 한 짓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거야”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이건 어쩔 수 없는 인간입니다. 크리스천이란 이름뿐이고 가망이 없어요. 이제 돌봐도 소용이 없어요. 벌을 주세요. 찍소리도 못하게 해 주세요”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맞습니다” 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이렇게 변론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시여, 분명히 이 사람은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사람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 사람이 받아야 할 형벌의 전부를 맡았습니다. 이 사람의 죄는 내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무죄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죄인으로 고소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래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아니,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것처럼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것처럼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기꺼이 들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살다 보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도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기쁨이 되고 이정표가 되며 선악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올바르게 걷고 싶다는 소망이 일어나게 되고 그 소원은 생활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알다” 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기노스코” 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 이상입니다. 체험으로서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안다면 확실히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됩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바꾸면, 만약 우리의 일부분, 예를 들면 지식이라든가 감정이라든가 하는 부분이 바뀌었을 뿐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멈춘 채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들어가 있다는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6절)
14세기에 가톨릭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디비전 지침서의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개신교 교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발언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생활할 것을 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처럼 수도원에서 생활할 수는 없지만, 그 처한 환경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실 것인가를 생각하며 예수님이 걸어가신 것처럼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말씀을 걸어 주시고, 훈계를 주시는 보혜사가 계십니다. 그 보혜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라고 요한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 2023年 2月 1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たとえ罪を犯しても」 ヨハネの手紙一 2章 1~6節
先週は、キリストとの交わりに入れられた人の歩みがどのようなものであるのかを御一緒に読みました。それは「神さまと交わりを持っていると言うのなら、光の中を歩むはずだ」ということでした。今日の御言葉には、この光の中を歩む者のもう一つの姿が描かれています。
ところで、私たちは弱い者であり、自分でこうすると決断してもすぐにその意思はどこかへ行ってしまい、気づいたら闇の中を歩んでいることがあります。光の中を歩むにはふさわしい者ではありません。
でも、大丈夫です。神さまはそのことを重々承知のうえで、私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1~2節をご覧下さい。。「わたしの子たちよ、これらのことを書くのは、あなたがたが罪を犯さないようになるためです。たとえ罪を犯しても、御父のもとに弁護者、正しい方、イエス・キリストがおられます。この方こそ、わたしたちの罪、いや、私たちの罪ばかりでなく、全世界の罪を贖ういけにえです。」(1-2節)
イエスさまのことを「正しい方」「弁護者」とヨハネは言います。私たちはクリスチャンになったとしても、罪を犯さずに生きていくことはできないでしょう。正しく歩もうとすればするほど、自分の愛のなさ、心の醜さ、冷たい言葉などに心を痛めます。ですから、罪を犯さないというのは無理なのです。
しかし、ここに慰めがあります。「たとえ罪を犯しても、御父のもとに弁護者、正しい方、イエス・キリストがおられます。」
「それでもお前はクリスチャンか」と悪魔が責め立てるような時に、弁護者であるイエスさまが助けてくださる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人間の弁護士のように無理に無罪を勝ち取ろうと主張したり、情状酌量を訴えたりはなさいません。神さまの裁きは正しく、その裁きから逃れることは出来ません。そのためイエスさま御自身が、私たちの罪のために贖いのささげ物となってくださるのです。
ヨハネは裁きの時、その裁判をイメージ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神さまの前に私たちを訴える者がやって来て、「おい、おまえ。それでもクリスチャンか」と言うわけです。「もうクリスチャンなんてやめた方がいいんじゃないか。そもそも神さまはお前なんか愛していない。おまえがやったことは決して赦されないんだぞ」と訴えてくるのです。そして、裁判官である神さまに向かい、「神さま、これはどうしようもない人間です。クリスチャンとは名ばかりで、見込みがありません。もう面倒見てもしょうがないです。罰を与えてください。ギャフンと言わせてください。」と訴えるのです。
皆さんは、どのように反論出来ますでしょうか。私たちは「その通りです」としか答えようがありません。しかし、私たちの弁護者であるキリストが、裁判官である神さまにこにように弁論してくださるのです。「父よ、確かにこの人は罪を犯しました。しかし、私がこの人の代わりに十字架にかかって、この人が受けるべき刑罰のすべてを引き受けました。この人の罪はわたしが流した血によってきよめられました。だからこの人には罪はありません。この人は無罪です。だれもこの人を罪人として訴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と。
それで裁判官である神さまは、私たちに無罪を宣告されるのです。それは私たちが何かをしたからではなく、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罪のために、いえ、私たちの罪だけでなく、全世界の罪のための贖いのいけにえとなっ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
だからこそ、私たちはもっともっとこのイエス・キリストを知り、信じて、イエスさまが歩まれたように私たちも歩ま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イエスさまが歩まれたように歩むということは、神さまの掟、神さまの言葉を守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が神さまを知り、神さまが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ていることを知っているならば、私たちは神さまが言われていることに喜んで聞き従うはずだからです。
神さまとの交わりの中に生きていれば、最初は何も知らなくても、神さまのことを知るようになります。神さまを知ったならば必ず変化が起こります。神さまの命令と神さまの言葉がその人の内で喜びとなり、道しるべとなり、善悪の判断の基準となります。
そして、神さまの御言葉に従って正しく歩みたいという願いが起こされ、その願いは生活全体を支配するようになるのです。この「知る」ということばは、ギリシャ語で「ギノスコー」と言いますが、これは単に頭で知る以上のことです。体験として、人格的に知る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そのように神さまを知るなら、確実に変わるのです。
そして、5節にありますように、私たちが神さまの言葉を守ることで、その人の内に神の愛が実現されます。これを分かりやすく換えますと、もし私たちの一部分、たとえば知識とか感情といった部分が変わっただけなら、神さまの愛はまだ、実現していません。途中で止まったままです。しかし、私たちが神さまの言葉に従い、誰かを愛するならば、その時、神さまの愛が具体的に実現するわけです。そして、誰かを愛した者は、神さまとの交わりの中に入れられているという確証を得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6節です。「神の内にいつもいると言う人は、イエスが歩まれたように自らも歩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
14世紀にカトリックの修道僧トマス・ア・ケンピスという人が「キリストに倣いて」という本を書きました。この書はカトリック教会において最も偉大なディヴーションの手引書の一つと言われていますが、多くのプロテスタント教会でも高く評価されています。それはイエスさまならどのように考え、どのように発言し、どのように行動するのか、ということを考えて生活することを勧めているからです。もちろん、私たちはトマス・ア・ケンピスのように修道院で生活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が、その置かれた環境の中で、イエスさまならどのように行動されるのかを考え、イエスさまが歩まれたように歩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が神さまの御言葉を守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ここに私たちの平安があります。私たちには、ことあるごとに私たちを導き、御言葉をかけて下さり、戒めを与えて下さる助け主がいてくださいます。その助け主に従って生きていく。それが罪を犯さない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であると、ヨハネは私たちに教えているのです。
【2023년 2월 12일 주일예배(요약판)】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요한 1서 2장 1~6절
지난주에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담긴 사람의 행보가 어떤 것인지를 함께 읽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 빛 가운데 걸을 것이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이 빛 가운데 걷는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한 자들이며, 스스로 이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여도 바로 그 의사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모르는 사이에 어둠으로 행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빛 가운데 걷기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1-2절)
예수님을 “의로우신 분” “대언자” 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해도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올바르게 걸으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사랑 없음, 마음의 추함, 차가운 말 등에 마음이 아파집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여기 위로가 있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래도 너는 크리스천이냐"고 사탄이 몰아세울 때 대언자이신 예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변호사처럼 억지로 무죄를 얻으려고 주장하거나 정상 참작을 호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옳고,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심판 때의 그 재판을 이미지화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소하는 자가 찾아와서 “야, 너. 그래도 크리스천이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크리스천 같은 건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어? 원래 하나님께서는 너따위 사랑하지 않아. 네가 한 짓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거야”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이건 어쩔 수 없는 인간입니다. 크리스천이란 이름뿐이고 가망이 없어요. 이제 돌봐도 소용이 없어요. 벌을 주세요. 찍소리도 못하게 해 주세요”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맞습니다” 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이렇게 변론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시여, 분명히 이 사람은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사람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 사람이 받아야 할 형벌의 전부를 맡았습니다. 이 사람의 죄는 내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무죄입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죄인으로 고소할 수 없습니다.”라고.
그래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아니,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죄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것처럼 우리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것처럼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기꺼이 들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살다 보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도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기쁨이 되고 이정표가 되며 선악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올바르게 걷고 싶다는 소망이 일어나게 되고 그 소원은 생활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알다” 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기노스코” 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 이상입니다. 체험으로서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안다면 확실히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됩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바꾸면, 만약 우리의 일부분, 예를 들면 지식이라든가 감정이라든가 하는 부분이 바뀌었을 뿐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멈춘 채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들어가 있다는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6절)
14세기에 가톨릭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디비전 지침서의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개신교 교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발언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생활할 것을 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처럼 수도원에서 생활할 수는 없지만, 그 처한 환경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실 것인가를 생각하며 예수님이 걸어가신 것처럼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마다 우리를 인도하시고, 말씀을 걸어 주시고, 훈계를 주시는 보혜사가 계십니다. 그 보혜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라고 요한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