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이 로마서의 추신 부분에서 바울의 복음 전도를 도와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온 세상이 주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한다, 즉 온 세상 사람들이 주 안에서 교제하며 서로 사랑한다는 환상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인사는 21절 이후,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인사에 이어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이 편지는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 말씀 17~20절 부분은 원래라면 필요 없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문맥의 통일성을 흐트러뜨리더라도 17~20절을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이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17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17절)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즉 이는 거짓 교사들을 말하는데, 바울은 마지막에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성가신 것은 그리스도인처럼 가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1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8절)
먼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고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욕망을 섬기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섬기고 있다 ”는 말은 원래 “노예이다” 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배” 라고 하는 것은 욕망을 말합니다. 욕망의 노예라면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면 오히려 귀엽습니다만, 거짓 교사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노예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가시고 귀찮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탄의 상투 수단입니다. (고후11:13-15 참조)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교도나 무신론자도 아니고 이단도 아닙니다. 실로 그것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을 가장한 사탄의 일꾼, 그것을 가장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복음 선교에 목숨을 바친 바울의 시각이었습니다. (사도20:29-30 참조)
또 이 거짓 교사들이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따위는 금방 눈치채고, “뭐야, 그런 수에는 넘어가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것은 단순한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아첨하는 말”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은 원래는 “아름다운 말”이라는 의미로 오히려 축복의 말이었습니다. 축복의 말, 즉 때로는 성경 말씀까지 이용하고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고 있다는 그것이 거짓 교사의 실태였던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말씀하신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성경의 말씀까지 이용하고 믿는 자들을 속이기 때문에 거짓 교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것이 19절입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19절)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아직, 로마의 신도들은 거짓 교사의 먹이는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실은 사탄의 타깃이 되는 것은 이 로마교회와 같은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교회로부터 공격을 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께 순종한다 해도 그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라고 할 때, 그것은 그대로 “사탄은 바로 근처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사탄이 거짓 교사를 사용하여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바울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고요. “선한 데 지혜롭고”의 “지혜롭다”는 말은 지혜가 있다, 아니면 똑똑하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선에 대해서는 지혜를 가지도록 해라, 즉 모든 선한 일에 통하라, 주 예수님께 도움이 되도록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한 데 미련하다”는 이 “미련하다”는 말은 단순하다든가 순진하다든가 하는 뜻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잔꾀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14:20 참조)
그러나 실로 이 세상은 그 정반대가 아닐까요?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다”가 아니라 선한 데에는 너무 미련하고 잔꾀만 판칩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고, 차별이 그치지 않고, 격차 사회가 생깁니다.
약한 자는 괴롭히고 강한 자는 판을 친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변해 보인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이 구조에 뭔가 덧칠을 해서 보이지 않게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이 사탄 지배의 끝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것이 20절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0절)
단지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라고 바울은 말합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어떨까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실은 바울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사탄이 우리 믿는 자의 평화를 빼앗고 있다”, 그것이 바울이 보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속히”라는 말은 속도를 나타내는 말로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2000년이 지나도 우리가 보고 있는 경치는 똑같습니다. 선한 데 미련하고 잔꾀만이 판을 치면서 세상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현실 속에서 “속히”라는 신앙, 거기에 계속 서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보이는 현실이 달라도 거기에도 하나님의 선한 지배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속히”, 곧 오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요구되는 신앙은 이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고 모든 선한 일에 예민함으로 주님을 섬기면서 주 예수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 생각하는 자가 됩시다.
그때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이 말씀이야말로 진정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신앙에 계속 섰습니다.
2023年1月1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コリント一(고린도전서) 13章 12節
〇讃 頌 讃頌歌 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 (詩編4編)
〇讃 頌 讃頌歌 251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手紙(로마서) 16章 17~27節
〇説 教 「信仰による従順(신앙에 의한 순종)」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16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1月 1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信仰による従順」 ローマ書 16章 17~27節
先週、この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の追伸部分において、パウロの福音伝道を助けてくれた人々の名前を列挙しながら一人一人に挨拶を送りました。そして、パウロは世界中が主イエスにおいて聖なる口づけを交わす、すなわち世界中の人々が主の交わりの中で愛し合うという幻を語っていました。
そして、その最後の挨拶は、21節以降、パウロのもとにいる人々の挨拶に続き、最後は、神さまへの讃美でこの手紙は閉じています。ですから、今日の聖書箇所の17~20節部分は、本来であれば必要のない部分です。パウロは文脈の統一性を乱しても、17~20節のことを最後に付け加えたかったのでしょう。どうしてもこれを言わざるを得ない事情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それは何かと言いますと、17節です。「兄弟たち、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あなたがたの学んだ教えに反して、不和やつまずきをもたらす人々を警戒しなさい。彼らから遠ざかりなさい。」(17節)
「不和やつまずきをもたらす人々を警戒しなさい。」つまり、偽教師たちのことを警戒せよと言っているのです。パウロは最後の最後に、偽教師たちを警戒するように勧めています。偽教師たちが、厄介なのは、キリスト者のように装っていることなのです。
パウロは偽教師たちの特徴を18節で語っています。「こういう人々は、わたしたちの主であるキリストに仕えないで、自分の腹に仕えている。そして、うまい言葉やへつらいの言葉によって純朴な人々の心を欺いているのです。」(18節)
まず、「キリストに仕えないで、自分の腹に仕えている」と言うことです。これを言い換えますならば、「自分の欲望に仕えている」と言うことです。「仕えている」という言葉は、もともとは「奴隷である」という状態を意味しています。そして、「腹」というのは、欲望のことです。欲望の奴隷であるのなら、最初からそう言う格好で登場すればまだ可愛いのですが、偽教師たちは、あたかもキリストの奴隷であるかのように装っているのです。これが厄介なのです。そして、これがサタンの常套手段です。(Ⅱコリント11章13~15節参照)
私たちキリスト者が最も警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異教徒や無神論者ではなく、異端でもないのです。実に、それは、キリスト者なのです。表面的にはキリスト者を装ったサタンの働き手、それを最も警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れが福音宣教に命をささげたパウロの視点であったのです。(使徒20:29、30参照)
また、この偽教師たちが、「うまい言葉やへつらいの言葉によって純朴な人々の心を欺いている」とパウロは言います。
「へつらいの言葉」、と訳されていますと、おべっかとかゴマすりの類のように思えて、「なーんだ、その手には乗らないぞ」、と思うような気がしますが、どうもこれはただの「へつらいの言葉」ではないのです。この「へつらいの言葉」と訳されている言葉は、もともと「美しい言葉」という意味で、むしろ祝福の言葉であったのです。祝福の言葉、つまり時には聖書の言葉まで用いて、純朴な人々の心を欺いている、それが偽教師の実態だったのです。御言葉が語られたからと言って、安心してはならない、むしろ御言葉まで用いて信仰者を欺くから偽教師なのです。
それでは、どうすれば良いのでしょうか。それが19節です。「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に知られています。だから、わたしはあなたがたのことを喜んでいます。なおその上、善にさとく、悪には疎くあることを望みます。」(19節)
「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に知られています」とパウロは言います。まだ、ローマの信徒たちは偽教師の餌食にはなっ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それで安心してはならないのです。むしろ、だから気を付け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実は、サタンのターゲットになるのは、このローマの教会のような群れだからです。サタンは自らの脅威になる教会から攻撃を仕掛けます。
ですから、私たちが今、キリストに従順であったとしても、それで安心してはならないのです。むしろ警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なぜなら、パウロが「あなたがたの従順は皆に知られています」という時、それはそのまま「サタンはすぐ近くにいるよ」ということだからです。必ずサタンが偽教師を使って攻撃して来ます。だからこそ、パウロは「善にさとく、悪には疎くあれ」と、パウロは言っているのです。
「善にさとく、悪には疎く」と。この「善にさとく」の「さとく」という言葉は、知恵のある、或いは賢い、とも訳すことが出来ます。善については知恵を持つようにしなさい。つまり、あらゆる善いことに通じていなさい、主イエスさまのお役に立てるように常に思いめぐらしなさい、と言うことです。
逆に、「悪には疎く」という、この「疎く」という言葉は、単純であるとか無邪気であるとか言う意味です。簡単に言えば、「悪知恵などい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Ⅰコリント14章20節参照)
しかし、実に、この世はその正反対ではないでしょうか。「善にさとく、悪には疎く」ではなくて、善にはめっぽう疎く、悪知恵ばかりが幅を利かせていく、だから戦争が起こり、差別が止まず、格差社会が生まれます。
弱い者は虐げられ、強い者が幅を利かす、これはいつの時代も変わっていません。もし、変わって見えるとすれば、それは何ら変わっていないこの構造に、何かの上塗りをして、見えないように隠しているだけなのです。
しかし、聖書の御言葉は、このサタンの支配の終わりを明確に示しています。それが20節です。「平和の源である神は間もなく、サタンをあなたがたの足の下で打ち砕かれるでしょう。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の恵みが、あなたがたと共にあるように。」(20節)
ただ、「平和の源である神は間もなく、サタンをあなたがたの足の下で打ち砕かれるでしょう」とパウロは言いますが、現実的にはどうでしょうか。全くそのようには見えません。実は、パウロの時代においてもそうだったのです。「サタンが、私たち信仰者の平和を奪っている」、それがパウロが見ていた現実でした。
しかし、それでもなお、「平和の源である神は間もなく」とパウロは言うのです。この「間もなく」という言葉は、速さを表す言葉で、非常に間近に迫っているという状況を表しています。
しかし、2000年経っても、私たちの見ている景色は同じです。善に疎く、悪知恵ばかりが幅を利かせて世の中は動いています。それでも、その現実の中で、「間もなく」という信仰、そこに立ち続けるのが私たちの信仰なのです。見える現実が違っても、そこにも神さまの善き支配があることを信じるのです。神さまは「間もなく」、もうすぐ来られると信じるのです。いつの時代にも求められる信仰は、これ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は、「善にさとく、悪には疎くあれ」と、あらゆる善きことに敏感になって、主に仕えながら、主イエスさまのお役に立つために思いめぐらす者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
その時、「平和の源である神は間もなく、サタンをあなたがたの足の下で打ち砕かれる」、この御言葉こそが、本当の希望となるのです。パウロはこの信仰に立ち続けました。
「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の恵みが、あなたがたと共にあるように。アーメン。」(29節)
【2023년 1월 15일 주일예배(요약판)】
“신앙에 의한 순종” 로마서 16장 17~27절
지난주, 이 로마서의 추신 부분에서 바울의 복음 전도를 도와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온 세상이 주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한다, 즉 온 세상 사람들이 주 안에서 교제하며 서로 사랑한다는 환상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인사는 21절 이후,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인사에 이어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이 편지는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 말씀 17~20절 부분은 원래라면 필요 없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문맥의 통일성을 흐트러뜨리더라도 17~20절을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건 아무래도 이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17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17절)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즉 이는 거짓 교사들을 말하는데, 바울은 마지막에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성가신 것은 그리스도인처럼 가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1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8절)
먼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고 있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욕망을 섬기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섬기고 있다 ”는 말은 원래 “노예이다” 라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배” 라고 하는 것은 욕망을 말합니다. 욕망의 노예라면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면 오히려 귀엽습니다만, 거짓 교사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노예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가시고 귀찮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탄의 상투 수단입니다. (고후11:13-15 참조)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이교도나 무신론자도 아니고 이단도 아닙니다. 실로 그것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을 가장한 사탄의 일꾼, 그것을 가장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복음 선교에 목숨을 바친 바울의 시각이었습니다. (사도20:29-30 참조)
또 이 거짓 교사들이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따위는 금방 눈치채고, “뭐야, 그런 수에는 넘어가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것은 단순한 “아첨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아첨하는 말”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은 원래는 “아름다운 말”이라는 의미로 오히려 축복의 말이었습니다. 축복의 말, 즉 때로는 성경 말씀까지 이용하고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고 있다는 그것이 거짓 교사의 실태였던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말씀하신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성경의 말씀까지 이용하고 믿는 자들을 속이기 때문에 거짓 교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것이 19절입니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19절)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아직, 로마의 신도들은 거짓 교사의 먹이는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실은 사탄의 타깃이 되는 것은 이 로마교회와 같은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교회로부터 공격을 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께 순종한다 해도 그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경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라고 할 때, 그것은 그대로 “사탄은 바로 근처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사탄이 거짓 교사를 사용하여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바울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고요. “선한 데 지혜롭고”의 “지혜롭다”는 말은 지혜가 있다, 아니면 똑똑하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선에 대해서는 지혜를 가지도록 해라, 즉 모든 선한 일에 통하라, 주 예수님께 도움이 되도록 항상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한 데 미련하다”는 이 “미련하다”는 말은 단순하다든가 순진하다든가 하는 뜻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잔꾀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고전14:20 참조)
그러나 실로 이 세상은 그 정반대가 아닐까요?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다”가 아니라 선한 데에는 너무 미련하고 잔꾀만 판칩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고, 차별이 그치지 않고, 격차 사회가 생깁니다.
약한 자는 괴롭히고 강한 자는 판을 친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변해 보인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이 구조에 뭔가 덧칠을 해서 보이지 않게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이 사탄 지배의 끝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것이 20절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0절)
단지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라고 바울은 말합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어떨까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실은 바울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사탄이 우리 믿는 자의 평화를 빼앗고 있다”, 그것이 바울이 보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속히”라는 말은 속도를 나타내는 말로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2000년이 지나도 우리가 보고 있는 경치는 똑같습니다. 선한 데 미련하고 잔꾀만이 판을 치면서 세상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현실 속에서 “속히”라는 신앙, 거기에 계속 서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보이는 현실이 달라도 거기에도 하나님의 선한 지배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속히”, 곧 오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요구되는 신앙은 이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라”고 모든 선한 일에 예민함으로 주님을 섬기면서 주 예수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 생각하는 자가 됩시다.
그때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이 말씀이야말로 진정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신앙에 계속 섰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