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1장 1절에 나오는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가지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이 성경 말씀은 구약 성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부분으로서 아주 유명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이 예언은 약 700년의 시간이 지나 성취됩니다.
이 예언이 회자되던 시대는 앗수르라는 강대국이 주변의 나라들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을 했고 아마도 이때 북왕국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남왕국은 가까스로 앗수르에 종속하는 형태로 그 국가로서의 체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당시 앗수르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서 주변 국가는 얌전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앗수르의 강대함 때문에 그 지역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의 평화”라는 외관상 세계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이사야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평화를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평화를 말했던 것입니다. 우선 오늘의 성경말씀의 서두에 “이새의 줄기에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 “줄기”라고 하는 것은“잘린 그루터기”를 말합니다. 이새의 줄기는 일단 절삭되는 것을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어린가지가 자라기 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럭저럭 국가로서 유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잘려나갈 날이 온다는 것을 이사야는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때 영화를 자랑했던 다윗 왕, 그리고 솔로몬 왕으로부터 이어진 이 나라는 폐허가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겨진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평화의 왕이 태어난다, 그것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그루터기로부터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잘려나간 그루터기로부터 작은 싹이 돋아난다는 아주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그러나 싹이기 때문에 정말로 작은 것입니다. 싹이 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 싹이 자라 뿌리가 퍼져 갑니다. 뿌리이기 때문에 땅 속에 있고 그 모습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이윽고 나오는 어린가지가 주 예수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 예수야말로 평화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수가 하나님의 평화를 만들어 낸다고 말합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2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주 예수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영을 받고 왕이 되십니다. 진정한 지혜를 가진 분이 되십니다. 그 지혜의 근원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올바른 심판을 하는 왕입니다. 5절까지의 평화의 왕,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주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의 마음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6절부터 전해지고 있는 그 왕이 만들어 내는 평화는 우리의 눈에는 마치 동화와 같은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6절), 이런 일은 현실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6절부터의 세계는 창세기에서 이야기한 천지창조의 시대와 다름없는 것으로서 세계가 다시 만들어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에 있어서 이 세상을 좋은 것으로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창조된 그 세계는 “보시기에 심히 좋더라”(창1:31)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심히 좋았던 세계가 망가진 것은 죄가 이 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심히 좋았던 세계는 죄 때문에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심히 좋은 세계로서 이 세계가 다시 만들어진다. 그 다시 만들어진 세계를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산다”고 하는 그 날까지 이 어둡고 평화가 없는 세계에서 인내를 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그것은 확실히 반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죄로 인하여 망가진 세상에서 전쟁을 무서워하며 부조리를 견디며 살아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새의 줄기인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오신 것입니다. 2000년 전에. 그러나 이 2000년간 엄청난 비참함이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세계대전도 원폭도 테러도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도 있었습니다. 홀로코스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종말로 확실히 향하는 하나님의 현실이 이 세계에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은 마지막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파멸의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완전히 다시 만드실 때입니다. 그 전에 세상에는 온갖 고난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리고 우리의 나날에도 고난과 곤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 이미 이사야가 말하는 평화는 실현되고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 가운데 틀림없이 한 가지인 그리스도의 평화는 싹트고 있습니다. 그 평화는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평화입니다. 평화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적도 사랑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숭고한 이념을 말한 말씀이 아닙니다.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노력해서 실천해야 하는 노력 항목도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적으로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적인 인간을 사랑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도 사랑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이제 우리에게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결코 적을 사랑할 수 없고 사랑에 있어서 무력한 우리들 위에도 평화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힘은 미치고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평화의 기적은 지금 이때의 지상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 차별의 역사 중에서 공민권 운동의 리더였던 킹 목사님은 암살되는 직전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전도에 곤란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는 산의 정상에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저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오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셨고 정상에서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갈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하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약속의 땅에 도달할 것입니다. 오늘 밤 저는 행복합니다. 걱정도 두려움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재림의 영광을 이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여행을 해 온 모세가 말년에 하나님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용서받지 못합니다만 느보 산 위에서 약속의 땅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신명기를 바탕으로 한 말입니다. (신명기32:48이하) 킹 목사님은 길을 가다가 암살당했습니다. 모세처럼 자신은 약속 땅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았다고 암살 전날 밤 말한 것입니다. 킹 목사는 약속의 땅을 그리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그 날을 신앙으로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종말의 비전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주 그리스도의 힘으로 말미암아 산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에서 보면 킹 목사님은 길 도중에 쓰러진 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킹 목사님을 통해서 일하신 그리스도의 힘은 이 지상에 평화의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미 평화의 주 그리스도의 힘은 미치고 있습니다. 사랑에 있어서 무력할 우리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나날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을 쏟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022年8月14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申命記(신명기) 33章 29節
〇讃 頌 讃頌歌 550(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イザヤ書(이사야) 11章 1~10節
〇説 教 「平和を実現する人(평화를 실현하는 사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21(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8月 1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平和を実現する人」 イザヤ書 11章1~10節
イザヤ書の11章1節に出て来ますエッサイはダビデ王の父親です。エッサイの株からひとつの芽が萌えいでて、さらにその根からひとつの若枝が育つ、と。そして、その若枝こそがイエス・キリストなのだとイザヤは語ります。この聖書箇所は、旧約聖書の中でもイエス・キリスト預言がされている箇所として、たいへん有名なものの一つです。この預言は、約七百年の時を経て、成就します。
この預言が語られた時代は、アッシリアという大国が周辺の国々を牛耳っていました。イスラエルは北王国と南王国に分裂をし、恐らくこの時、北王国はアッシリアによって滅んでいたと考えられます。南王国はかろうじてアッシリアに従属する形で、その国家としての体裁を保っていました。イスラエルだけでなく、当時、アッシリアの圧倒的な軍事力によって、周辺国家はおとなしくせざるを得ませんでした。アッシリアの強大さのゆえに、その地域の均衡が保たれていたとも言えます。「アッシリアの平和」という、見かけ上、世界に平和が保たれているように見えた時代だったのです。
このような時代にあって、イザヤは人々が考えるのとはまったく異なる平和を語った人でした。それは神さまの造り出す平和を語ったのです。まず、今日の御言葉の冒頭、「エッサイの株から」とありますが、この「株」というのは「切り株」のことです。エッサイの株はいったん切り落とされることをイザヤは語っているのです。つまり若枝が育つその前に、裁きがあることをイザヤは語っています。
今は何とか国家として保っているイスラエルが切り落とされる日が来る、そのことをイザヤは語っているのです。実際、かつて栄華を誇ったダビデ王、そしてソロモン王から続いたこの国は廃墟と化します。しかしなお、イスラエルで最も大いなる王とされたダビデの子孫から平和の王が生まれる、それはダビデの父のエッサイの切り株から生まれるのだと言います。
切り落とされた株から小さな芽が萌え出でる、とても美しい比喩です。しかし、芽ですから、ほんとうに小さなものです。芽が出たことを気づかれることもないでしょう。その芽が育ち、根が広がっていく、根ですから、土の中にあり、その姿は人間の目には見えません。しかし、そこからやがて出てくる若枝が主イエスであるとイザヤは語ります。そのイエスこそが平和の王であるのだと語ります。このイエスが神の平和を作り出すのだと語ります。
「そのうえに主の霊がとどまる」とありますが、主イエスはまさに神の霊を受けて王となられます。まことの知恵を持ったお方となります。その知恵の根源はなにより「神を畏れる」ことにあります。神を畏れ、正しい裁きを行う王であります。5節までの平和の王、弱い人貧しい人を助ける主イエスの姿には私たちは心慰められます。
しかし、6節から語られている、その王の造り出す平和は、私たちの目からは、いかにもおとぎ話のようなものに見えます。「狼は小羊と共に宿り、豹は子山羊と共に伏す。子牛は若獅子と共に育ち、さい子供がそれらを導く。」このようなことは現実にはありえないことです。
6節からの世界は、創世記で語られた天地創造の時代と同様なものとして世界が造り直されることを現しています。そもそも神は天地創造において、この世界を良いものとして造られました。創世記の第1章に創造されたその世界は「見よ、それは極めて良かった」と記されています。その極めて良かった世界が壊れたのは罪が世界に入って来たからです。きわめて良かった世界は罪のために壊れてしまったのです。しかし、ふたたび、きわめて良い世界として、この世界が造り直される、その再び造り直された世界をイザヤは語っているのです。
では私たちは、「狼と小羊が共に宿る」というその日まで、この暗い、平和のない世界で忍耐をしないといけないのでしょうか?それはたしかに半分はそうです。私たちは、この罪によって壊れた世界で、戦争に怯え、不条理に耐えながら生きて行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しかし、エッサイの若枝たるキリストはすでに来られたのです。2000年前に。しかし、この2000年間、おびただしい悲惨がこの世界にありました。世界大戦も、原爆も、テロも、原発の事故もありました。ホロコーストもありました。でも、それは神の現実でもあるのです。終わりの日へと、確実に向かう神の現実がこの世界に及んでいるということです。終わりの日は最後の裁きの日です。しかし、それは破滅の日ではありません。神が再び世界を完全に造り直される時です。その時の前に、世界には苦難が満ちていくのです。それはヨハネの黙示録に語られていることです。世界に、そして私たちの日々にも苦難、困難が満ちていきます。
それでも、信仰の目で見る時、すでにイザヤの言う平和は実現しているのです。暗い世界の中に、たしかに、若枝たるキリストの平和は芽生えているのです。その平和は人間が造るの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が作り出される平和です。平和の主であるキリストは「敵を愛せ」とおっしゃいました。これがどれ程難しいことであるかは誰もが知っています。しかし、この言葉は崇高な理念を語った言葉ではありまえん。難しいかもしれないが、がんばって実践すべき努力項目でもありません。すでにキリストによって実現されたことなのです。そもそも人間は罪によって神の敵となっていました。その神の敵である人間を愛された方がイエス・キリストでした。みずからを十字架につける人々をも愛したお方でした。その愛は、いま、私たちにも注がれています。けっして敵を愛することのできない、愛において無力な私たちの上になお平和の主であるキリストの力はすでに及んでいます。そのキリストの愛のゆえに平和の奇跡はいまこのときの地上においても起きるのです。
アメリカの黒人差別の歴史の中で、公民権運動のリーダーであったキング牧師は、暗殺される直前の演説でこ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
「…前途に困難な日々が待っています。でも、もうどうでもよいのです。私は山の頂上に登ってきたのだから。皆さんと同じように、私も長生きがしたい。長生きをするのも悪くないが、今の私にはどうでもいいのです。神の意志を実現したいだけです。神は私が山に登るのを許され、私は頂上から約束の地を見たのです。私は皆さんと一緒に行けないかもしれないが、ひとつの民として私たちはきっと約束の地に到達するでしょう。今夜、私は幸せです。心配も恐れも何もない。神の再臨の栄光をこの目でみたのですから。」
これは出エジプトの民を率いて40年旅をしてきたモーセが、最晩年、神から約束の地に入ることをゆるされず、しかし、ネボ山の上から約束の地を見せていただいたと記されている申命記を下敷きにした言葉です。キング牧師は、道の途中で暗殺をされました。モーセのように自らは約束の地へはい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といえます。しかし、彼はそれを見たのだと暗殺の前夜語ったのです。(申32:48参照)
キング牧師は約束の地を、そして狼と小羊が共に宿るその日を信仰によって見ていた人でした。その終わりの日のビジョンから突き動かされた人であったと言えます。平和の主キリストの力によって突き動かされた人でした。人間の目から見たらキング牧師は道の途上で倒れた方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キング牧師を通じて働いたキリストの力はこの地上に平和の奇跡を起こしたのです。
私たちにもすでに平和の主キリストの力は及んでいます。愛において無力であるはずの私たちもまた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の日々に平和を造りだす者とされます。この世へと愛を注ぎだす者とされます。
【2022년 8월 14일 주일예배(요약판)】
“평화를 실현하는 사람” 이사야 11장 1~10절
이사야 11장 1절에 나오는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가지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이 성경 말씀은 구약 성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부분으로서 아주 유명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이 예언은 약 700년의 시간이 지나 성취됩니다.
이 예언이 회자되던 시대는 앗수르라는 강대국이 주변의 나라들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을 했고 아마도 이때 북왕국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남왕국은 가까스로 앗수르에 종속하는 형태로 그 국가로서의 체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당시 앗수르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서 주변 국가는 얌전하게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앗수르의 강대함 때문에 그 지역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의 평화”라는 외관상 세계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이사야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평화를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평화를 말했던 것입니다. 우선 오늘의 성경말씀의 서두에 “이새의 줄기에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 “줄기”라고 하는 것은“잘린 그루터기”를 말합니다. 이새의 줄기는 일단 절삭되는 것을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어린가지가 자라기 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럭저럭 국가로서 유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잘려나갈 날이 온다는 것을 이사야는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때 영화를 자랑했던 다윗 왕, 그리고 솔로몬 왕으로부터 이어진 이 나라는 폐허가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겨진 다윗의 자손으로부터 평화의 왕이 태어난다, 그것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그루터기로부터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잘려나간 그루터기로부터 작은 싹이 돋아난다는 아주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그러나 싹이기 때문에 정말로 작은 것입니다. 싹이 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그 싹이 자라 뿌리가 퍼져 갑니다. 뿌리이기 때문에 땅 속에 있고 그 모습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이윽고 나오는 어린가지가 주 예수라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 예수야말로 평화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수가 하나님의 평화를 만들어 낸다고 말합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2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주 예수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영을 받고 왕이 되십니다. 진정한 지혜를 가진 분이 되십니다. 그 지혜의 근원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올바른 심판을 하는 왕입니다. 5절까지의 평화의 왕,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주 예수님의 모습에 우리의 마음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6절부터 전해지고 있는 그 왕이 만들어 내는 평화는 우리의 눈에는 마치 동화와 같은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6절), 이런 일은 현실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6절부터의 세계는 창세기에서 이야기한 천지창조의 시대와 다름없는 것으로서 세계가 다시 만들어지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에 있어서 이 세상을 좋은 것으로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창조된 그 세계는 “보시기에 심히 좋더라”(창1:31)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심히 좋았던 세계가 망가진 것은 죄가 이 세계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심히 좋았던 세계는 죄 때문에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심히 좋은 세계로서 이 세계가 다시 만들어진다. 그 다시 만들어진 세계를 이사야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산다”고 하는 그 날까지 이 어둡고 평화가 없는 세계에서 인내를 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그것은 확실히 반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죄로 인하여 망가진 세상에서 전쟁을 무서워하며 부조리를 견디며 살아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새의 줄기인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오신 것입니다. 2000년 전에. 그러나 이 2000년간 엄청난 비참함이 이 세상에 있었습니다. 세계대전도 원폭도 테러도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도 있었습니다. 홀로코스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종말로 확실히 향하는 하나님의 현실이 이 세계에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말은 마지막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파멸의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완전히 다시 만드실 때입니다. 그 전에 세상에는 온갖 고난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 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리고 우리의 나날에도 고난과 곤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 이미 이사야가 말하는 평화는 실현되고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 가운데 틀림없이 한 가지인 그리스도의 평화는 싹트고 있습니다. 그 평화는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평화입니다. 평화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적도 사랑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숭고한 이념을 말한 말씀이 아닙니다.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노력해서 실천해야 하는 노력 항목도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적으로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적인 인간을 사랑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도 사랑하신 분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이제 우리에게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결코 적을 사랑할 수 없고 사랑에 있어서 무력한 우리들 위에도 평화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힘은 미치고 있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평화의 기적은 지금 이때의 지상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국의 흑인 차별의 역사 중에서 공민권 운동의 리더였던 킹 목사님은 암살되는 직전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전도에 곤란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는 산의 정상에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저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오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실현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가 산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셨고 정상에서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갈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하나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약속의 땅에 도달할 것입니다. 오늘 밤 저는 행복합니다. 걱정도 두려움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재림의 영광을 이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출애굽의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여행을 해 온 모세가 말년에 하나님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용서받지 못합니다만 느보 산 위에서 약속의 땅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신명기를 바탕으로 한 말입니다. (신명기32:48이하) 킹 목사님은 길을 가다가 암살당했습니다. 모세처럼 자신은 약속 땅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보았다고 암살 전날 밤 말한 것입니다. 킹 목사는 약속의 땅을 그리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그 날을 신앙으로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종말의 비전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주 그리스도의 힘으로 말미암아 산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에서 보면 킹 목사님은 길 도중에 쓰러진 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킹 목사님을 통해서 일하신 그리스도의 힘은 이 지상에 평화의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미 평화의 주 그리스도의 힘은 미치고 있습니다. 사랑에 있어서 무력할 우리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나날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을 쏟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