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드벤트 둘째주일에 주어진 말씀은 마가복음 13장의 말씀입니다만, 소망을 가지고 기쁨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때로는 어울리지 않은 말씀 같기도 합니다.
24절입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4-25절) 그리고 32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2-33절).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끝, 종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맞이하는 기대와 즐거움, 소망이라는 우리의 감각과는 다릅니다.
교회의 달력으로는 이 어드벤트부터 새로운 일년이 시작됩니다. 어드벤트를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향한 대비를 함께 하고자 하니 마음도 조금 밝고 흥겨워지고 있습니다. 그런 변화가 우리에게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오늘 주어진 말씀이 종말의 메시지인 것일까요?
종말이라고 하면 이 세상의 끝 같은 것을 상상합니다만, “종말”이란 구원이 도래한다는 것이며 새로운 구원의 때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도래란 그리스도의 도래를 말합니다. 26절입니다.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26절)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온다”는 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만, 종말에 인자(구세주)가 온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때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이며 그것이 바로 어드벤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대비의 때인 어드벤트를 우리는 어떻게 대비하고 보내야 할까요? 그것을 오늘의 말씀으로부터 듣고자 합니다.
오늘의 말씀 속에 “깨어 있으라” 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 계속되는 말씀으로서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33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깨어 있으라” 라는 말은 어드벤트를 보내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12월 들어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하여 일루미네이션이나 다양한 장식이 되어 있어 특별한 한때처럼 생각됩니다. 거리 전체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됩니다만, 그럴 때 들려오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깨어 있으라” 는 것입니다.
어드벤트에 들어가면서 교회 컬러도 보라색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 보라색은 회개를 나타내는 색으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계절 사순절에도 이용됩니다. 보라색은 회개의 색이라는 것은 어드벤트가 회개할 때라는 것입니다.
물론 즐거운 쇼핑이나 맛있는 별식을 눈앞에 두고 설레는 것이 좋겠지만, 크리스마스를 기다릴 때에 주님의 뜻을 따른 적당한 마음가짐은 회개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윽고 맞이하는 구세주는 육체를 걸치셨습니다. 그것도 작은 육체의 생명입니다. 이 작은 구세주가 이윽고 성장하셔서 그 후에 걸으신 생애를 “깨어 있으라” 라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생각해 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는 화려함도 빛도 이 세상의 힘도 없었습니다. 그 구세주의 모습은 오히려 초라하고 눈에 띄지 않으며 연약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 속에는 진정한 구세주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세주로서 계시는 것입니다. 화려함 속에는 진정한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 고 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서 잘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를 생각해 내십시오. 우선 예수님의 탄생을 들었던 사람은 누가복음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점성가 박사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함께 깨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목자들은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주의 천사가 곁에 다가와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고 누가복음에 쓰여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징표였습니다.
또 점성가의 박사들은 밤이 깊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조용해지고 있을 때 밤하늘을 바라보고 연구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박사들에게 별이 앞서 인도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꿈으로 신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징표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이야기에는 직접 깨어 있으라는 말은 없습니다만, 이러한 등장 인물을 통해서도 “깨어 있다” 는 것이 구세주를 맞이하는 조건으로서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사람들입니다.
한편, 목자들이나 박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들은 헤롯이나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불안이나 우려를 느꼈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이나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는 이 징표는 불안과 우려를 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자기들의 세계의 끝을 가리키는 종말의 징표로서 받아들였고, 불안과 우려를 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천사가 말을 거는 일은 없었습니다. 혹은 말을 걸고 있어도 그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구원의 때가 아니라 항상 자기 안에 말을 걸어 오는 새로운 때를 알려 주는 목소리에 구원을 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드벤트, 즉 새로울 때의 시작이 알려졌습니다. 또한 크리스마스, 즉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징표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목자들처럼 직접적인 징표가 주어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박사들과 가까운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또 어떤 믿는 자를 통해서 우리 자신 속에 징표가 주어졌습니다. 그 징표로 말미암아 구유의 예수님을 구세주로서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연약함 속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찾아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순순히 기뻐하고자 합니다.
또, 이 어드벤트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실 구원의 완성의 때를 믿음을 가지고 고대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말씀을 통하여 주어지는 내면의 징표를 어떤 때라도 깨어 있으면서 듣고, 살펴 보도록 합시다.
2022年12月4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28編 8~9節
〇讃 頌 讃頌歌 32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16 (待降節 ②)
〇讃 頌 讃頌歌 105
〇聖書奉読 マルコ福音書(마가복음) 13章 24~37節
〇説 教 「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깨어 있으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78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2月 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 マルコ 13章24~37節
今日、アドベントの第二主日に与えられた御言葉は、マルコによる福音書13章の御言葉ですが、希望をもって喜びのクリスマスを迎える時としては、ふさわしくない御言葉のようにも思えます。
24節です。「それらの日には、このような苦難の後、太陽は暗くなり、月は光を放たず、星は空から落ち、天体は揺り動かされる。」(24-25節) それから32節です。「その日、その時は、だれも知らない。天使たちも子も知らない。父だけがご存じである。気をつけて、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その時がいつなのか、あなたがたには分からないからである。」(32-33節)
これらのイエスさまの御言葉は、この世の終わり、終末に関するメッセージです。クリスマスの喜びの時を迎える期待と楽しみ、希望といった私たちの感覚とは違います。
教会の暦ではこのアドベントから新しい一年が始まります。アドベントを迎えて、ここから御子イエス・キリストの御降誕への備えをみんなでしましょうと、心も少し華やいでいます。そのような変化が私たちには起こっています。それなのに、なぜ、今日、与えられた御言葉が終末のメッセージなのか?
終末と言いますと、この世の終わりみたいなことを想像しますが、「終末」とは救いが到来するということで、新しい救いの時が始ま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終末の到来とは、キリストの到来のことです。26節です。「そのとき、人の子が大いなる力と栄光を帯びて雲に乗ってくるのを、人々は見る。」(26節)
「力と栄光を帯びて、雲に乗って」という部分が具体的にどういうことかはわかりませんが、終わりのときに人の子(救い主)は来るのだとイエスさまは言うのです。終わりの時がキリストが来られる時であり、それがアドベントなのです。
御子イエス・キリストを迎えるための備えの時であるアドベントを、私たちはどのように備え、過ごすべきなのでしょうか? それを今日の御言葉から聞きたいと思います。
今日の御言葉の中に「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言葉が三度も繰り返して出てきます。そして、それに続く言葉として、「その時がいつなのか、あなたがたには分からないからである」(33節)となっています。
この「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御言葉は、アドベントの時を過ごす私たちに警鐘を鳴らしているのです。12月に入り、本格的にクリスマスシーズンを迎え、イルミネーションとか様々な飾り付けがなされていて、特別な一時のように思えます。街全体がクリスマスをお祝いしているようにも見えます。世界中がイエス・キリストに注目していると思えてきますが、そんな時に、聞こえてくるイエスさまの声が、「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ことなのです。
アドベントに入り教会カラーも紫になりました。キリスト教では紫という色は悔い改めを表す色で、これはイエス・キリストの受難の季節、四旬節にも用いられます。紫は悔い改めの色、ということはアドベントが悔い改めの時なのだということです。
勿論、楽しいショッピングやおいしいご馳走を目の前にして心躍るほうがいいに決まっているのですが、クリスマスを待つ時の主の御心に沿ったふさわしい心構えというのは、悔い改めの心を忘れ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それに加えて希望を持つのです。
私たちがまもなくお迎えする救い主は肉をまといました。それも小さな肉のいのちです。この小さな救い主がやがて大きくなって、その後たどった生涯のことを、「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主の言葉から思い起こさなければなりません。イエス・キリストの生涯には、華やかさも輝きもこの世の力もありませんでした。救い主のお姿というのは、むしろみすぼらしく目立たず、弱々しかったのです。
けれども、その姿の中にこそ、真の救い主がいるのです。私たち一人一人の救い主としているのです。華やかさの中には真の救いはないのです。だから、「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のです。目を覚まして、しっかりと見なさい、と。
皆さん、クリスマスの出来事を思い起こして下さい。まず、イエスさまの誕生が告げられたのは、ルカによる福音書では、羊飼いたちです。そして、マタイによる福音書では、占星術の学者たちです。この人たちはともに目を覚ましていた人たちです。
羊飼い達は野宿をしながら夜通し羊の番をしていました。その時に主の天使が近づき、主の栄光が周りを照らしたとルカによる福音書にはあります。それが彼らに与えられたしるしでした。
また、占星術の学者たちは、夜が更けて他の人々が寝静まっている時に星空を眺め、研究をしていた人たちです。この学者たちに星が先立って進み、そして夢でお告げがあったのです。それが彼らに与えられたしるしです。
ですから、クリスマス物語には、直接、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ということは言われていませんが、これらの登場人物を通しても「目を覚ましている」ことが、救い主を迎える条件として象徴的に示されています。そして、そのような彼らが、初めにイエス・キリストに会ったのです。彼らこそクリスマスを迎えたのです。
一方、羊飼いたちや学者たちと同じようにイエスさまの誕生の知らせを聞いたヘロデやエルサレムの人々は不安や恐れを感じたと福音書に記されています。ヘロデやエルサレムの人々にとっては、このしるしは不安と恐れを抱かせるものでした。彼らにとっては、これは文字通り、自分たちの世界の終わりのしるしとして受け取り、そして、不安と恐れを抱いたのです。彼らに天使が語りかけ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あるいは語りかけていても、彼らがそれに気づくことがなかったのかも知れません。私たちはいつか来る救いの時ではなく、常に自分の内に語りかけてくる新しい時への声に救いを求めたいと思います。
皆さん、私たちにはアドベント、すなわち新しい時の始まりが知らせれました。また、クリスマス、すなわち新しい救いの時代が与えられております。私たちにもしるしが与えられました。私たちは羊飼いたちのように直接的なしるしが与えられたわけではないでしょう。学者たちと近いもの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聖書の御言葉を通して、また、ある信仰者を通して、私たち自身の内にしるしが与えられました。そのしるしによって、私たちは飼い葉桶の幼子を救い主として信じました。イエスさまのその弱々しさの中に、私たち自身の救いを見い出したのです。皆さん、この恵みを素直に喜びたいと思います。
また、このアドベントの時に、主が再び来られる救いの完成の時を信仰を持って待ち望みたいと思います。
皆さん、これからも、御言葉を通して与えられる内なるしるしを、いかなる時も目を覚まして、聞き、見て行きましょう。
【2022년 12월 4일 주일예배(요약판)】
“깨어 있으라” 마가복음 13장 24~37절
오늘, 어드벤트 둘째주일에 주어진 말씀은 마가복음 13장의 말씀입니다만, 소망을 가지고 기쁨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때로는 어울리지 않은 말씀 같기도 합니다.
24절입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4-25절) 그리고 32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2-33절).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의 끝, 종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맞이하는 기대와 즐거움, 소망이라는 우리의 감각과는 다릅니다.
교회의 달력으로는 이 어드벤트부터 새로운 일년이 시작됩니다. 어드벤트를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향한 대비를 함께 하고자 하니 마음도 조금 밝고 흥겨워지고 있습니다. 그런 변화가 우리에게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오늘 주어진 말씀이 종말의 메시지인 것일까요?
종말이라고 하면 이 세상의 끝 같은 것을 상상합니다만, “종말”이란 구원이 도래한다는 것이며 새로운 구원의 때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도래란 그리스도의 도래를 말합니다. 26절입니다.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26절)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온다”는 부분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만, 종말에 인자(구세주)가 온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때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이며 그것이 바로 어드벤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대비의 때인 어드벤트를 우리는 어떻게 대비하고 보내야 할까요? 그것을 오늘의 말씀으로부터 듣고자 합니다.
오늘의 말씀 속에 “깨어 있으라” 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 계속되는 말씀으로서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33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깨어 있으라” 라는 말은 어드벤트를 보내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12월 들어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하여 일루미네이션이나 다양한 장식이 되어 있어 특별한 한때처럼 생각됩니다. 거리 전체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됩니다만, 그럴 때 들려오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깨어 있으라” 는 것입니다.
어드벤트에 들어가면서 교회 컬러도 보라색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 보라색은 회개를 나타내는 색으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계절 사순절에도 이용됩니다. 보라색은 회개의 색이라는 것은 어드벤트가 회개할 때라는 것입니다.
물론 즐거운 쇼핑이나 맛있는 별식을 눈앞에 두고 설레는 것이 좋겠지만, 크리스마스를 기다릴 때에 주님의 뜻을 따른 적당한 마음가짐은 회개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윽고 맞이하는 구세주는 육체를 걸치셨습니다. 그것도 작은 육체의 생명입니다. 이 작은 구세주가 이윽고 성장하셔서 그 후에 걸으신 생애를 “깨어 있으라” 라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생각해 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는 화려함도 빛도 이 세상의 힘도 없었습니다. 그 구세주의 모습은 오히려 초라하고 눈에 띄지 않으며 연약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 속에는 진정한 구세주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세주로서 계시는 것입니다. 화려함 속에는 진정한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 고 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서 잘 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를 생각해 내십시오. 우선 예수님의 탄생을 들었던 사람은 누가복음에서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점성가 박사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함께 깨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목자들은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주의 천사가 곁에 다가와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었다고 누가복음에 쓰여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징표였습니다.
또 점성가의 박사들은 밤이 깊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조용해지고 있을 때 밤하늘을 바라보고 연구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박사들에게 별이 앞서 인도하여 갔습니다. 그리고 꿈으로 신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징표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이야기에는 직접 깨어 있으라는 말은 없습니다만, 이러한 등장 인물을 통해서도 “깨어 있다” 는 것이 구세주를 맞이하는 조건으로서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최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사람들입니다.
한편, 목자들이나 박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들은 헤롯이나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불안이나 우려를 느꼈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이나 예루살렘의 사람들에게는 이 징표는 불안과 우려를 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자기들의 세계의 끝을 가리키는 종말의 징표로서 받아들였고, 불안과 우려를 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천사가 말을 거는 일은 없었습니다. 혹은 말을 걸고 있어도 그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구원의 때가 아니라 항상 자기 안에 말을 걸어 오는 새로운 때를 알려 주는 목소리에 구원을 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어드벤트, 즉 새로울 때의 시작이 알려졌습니다. 또한 크리스마스, 즉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징표가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목자들처럼 직접적인 징표가 주어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박사들과 가까운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또 어떤 믿는 자를 통해서 우리 자신 속에 징표가 주어졌습니다. 그 징표로 말미암아 구유의 예수님을 구세주로서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연약함 속에 우리 자신의 구원을 찾아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순순히 기뻐하고자 합니다.
또, 이 어드벤트 때 주님께서 다시 오실 구원의 완성의 때를 믿음을 가지고 고대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말씀을 통하여 주어지는 내면의 징표를 어떤 때라도 깨어 있으면서 듣고, 살펴 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