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중에는 바울의 앞으로의 전도 계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전도지로서 에스파냐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서쪽 에스파냐(스페인)로의 전도를 생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에스파냐는 당시 서쪽의 끝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시 1:8)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에스파냐의 전도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전도의 성과로서 또 지금까지의 전도 여행의 집대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방인 교회로부터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이번에는 로마로 가는 것을 단념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그 용건이 끝나면 로마로 가겠다며 로마에 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편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폭행을 당해 체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이 세상의 신분으로서는 자유인이 아니라 죄수로서 걷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로마로는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계획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29절) 여기에 바울의 마음이 슬프도록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의 말씀에서 어린 아이 같은 신앙으로 순진하게 장래의 꿈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만, 실제로 로마는 어디까지나 복음 선교의 통과점이며, 땅 끝인 아득히 먼 저쪽의 에스파냐를 목적지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통과점이었던 로마가 그의 복음 선교의 종점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 아래 죄인으로서 처형되었다는 것이 아마도 역사적으로는 사실입니다. 즉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쓰여 있는 바울의 계획은 모조리 꿈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마지막에 집필되었습니다. 세번의 전도 여행을 거듭한 바울은 그 신앙이 정점에 달했고 신앙적 통찰도 뛰어났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로마서가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바울이 말씀과 기도에 이끌려 신앙의 눈으로 장래를 전망한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방인 전도의 성과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낸 후 당신들이 있는 곳을 거쳐 에스파냐에 가겠다”고 바울이 설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길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체포되어 죄수로서 이 세상의 지배자에게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마지막으로는 로마에서 그 생애를 마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죽는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취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노고로부터 해방되어 하늘의 축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충분하다, 잘 일했다, 자 눈물을 닦고 하늘 나라에서 휴식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거기가 반환점입니다. 게다가 어둠으로부터 빛으로의, 괴로움으로부터 기쁨으로의, 죄로부터 영광으로의 반환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이상 비록 나의 계획이 모두 덧없이 사라지고 남들의 눈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는 듯이 보이더라도 아직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계획일수록, 간절한 소원일수록, 열심히 계속 기도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기도하여도 실현되지 않는 소원은 있습니다. 꿈으로 끝내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살고 있는 것에는 무엇 하나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조금 전의 29절에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에 대한 헌금이 잘 전달되었다는 기쁨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함께 서로 기뻐합시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축복에 채워지고” 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 자신이 축복 속에 푹 싸여 있다는 이미지입니다.
오늘의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서 창세기 12장 1~3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여행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 축복은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축복이 전 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너는 복이 된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축복은 먼저 이스라엘로 퍼졌고 그리스도의 도래 후에는 이스라엘의 테두리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렀습니다.
예전에 아브라함은 축복의 원천으로 여겨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 요셉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꼭 자기가 원했던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은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의 걸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또한 축복에 푹 싸여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란 하나님의 축복이 채워지면서 하나님과 함께 여행을 해 가는 인생입니다. 그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는 더 느끼면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직소 퍼즐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한 개씩 퍼즐 조각을 끼워 가지만 완성까지는 아직 멀었고 어떤 그림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예상치 못한 일도 생깁니다. 이럴 리가 없다고 여겨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 속에서 우리는 각각 그리스도의 축복에 채워지고 걸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축복으로 채워져 있는 감각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괴로운 일만 있는 날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는 분명히 깨달을 수 없어도 우리도 또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축복의 원천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축복이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말든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가운데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2年11月1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創世記(창세기) 2章 6~8節
〇讃 頌 讃頌歌 2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0 (詩編16編)
〇讃 頌 讃頌歌 543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5章 22~33節
〇説 教 「人の計画と神の計画(사람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70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1月 1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人の計画と神の御計画」 ローマ書15章22~33節
今日の御言葉の中で、パウロの今後の伝道計画が語られております。パウロは最後の伝道地としてイスパニアを考えていたようです。ローマを訪れ、そこを足掛かりとして、その西のイスパニア(スペイン)への伝道を考えていたようです。イスパニアは当時の西の果てです。パウロはまさに「あなたがたの上に聖霊が降ると、・・・地の果てに至るまで、わたしの証人となる」(使1:8)というイエスさまの御言葉に従って、イスパニアへの伝道を計画していたのです。
しかし、異邦人伝道の成果として、また、今までの伝道旅行の集大成とも言える異邦人教会からの献金をエルサレム教会へ届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のため、パウロは今回ローマへ行くことを断念し、エルサレムへ向かいます。
今回はエルサレム教会に献金を届けるためにエルサレムへと戻りますが、その用が済めばローマに行きます、とローマへ行くのを楽しみにしていることを手紙で伝えているのです。
しかし、パウロに待っていたのは、エルサレム神殿で暴行を受け、逮捕されるということでした。そこからパウロは、この世の身分としては自由人ではなくて、囚人として歩むことになったのです。確かに、ローマへ行くことは出来ました。でも、パウロの計画とは大きく違っていたのです。
「そのときには、キリストの祝福をあふれるほど持っ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に行くことになると思っています。」(29節) ここにパウロの思いが悲しいほど満ちています。
パウロは今日の御言葉の中で、幼子のような信仰で、無邪気に将来の夢を語っているように見えますが、実際には、ローマはあくまでも福音宣教の通過点であり、地の果てである遥かかなたのイスパニアを目的地としていました。
しかし、その通過点であったローマが、彼の福音宣教の終点となったのです。パウロが皇帝ネロの迫害のもと、さらし者にされ処刑されたことが、恐らく歴史的には事実です。つまり、今日の御言葉で描かれているパウロの計画は、ことごとく夢と散っているのです。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は、パウロの第三回目の伝道旅行の最後に執筆されました。三度の伝道旅行を重ねたパウロは、その信仰が頂点に達し、信仰的洞察も優れていたでしょう。それは、何よりもこの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が雄弁に語っています。そのパウロが、御言葉と祈りに導かれて、信仰の目で将来を展望した計画が、全て水の泡となったのです。
そして、それが神さまの御計画であったのです。「異邦人伝道の成果である献金をエルサレム教会に届けた後、あなたがたのところを経てイスパニアに行きます」、とパウロがワクワクしている時、神さまは、全く違う道を用意されていたのです。
それは、パウロが逮捕され、囚人としてこの世の支配者にキリストを証して、最後にはローマでその生涯を閉じる、ということでした。パウロの計画と神さまの御計画には、大きな隔たりがあったのです。
しかし、ここにも神の愛があるはずです。私たちキリスト者が死ぬということは、言い換えれば神さまが取られる、ということだからです。それはこの世の労苦から解放され、天の祝福に入ることです。「もう十分だ、良く働いた、さあ涙を拭いて天の国で憩え」、これがキリスト者の死であります。そして、そこが折り返し地点なのであります。しかも、闇から光への、苦しみから喜びへの、罪から栄光への、折り返し地点なのであります。キリスト者である以上、たとえ私の計画が全て儚く消え、人の目にむなしくこの世を去ろうとも、まだ切り札が残されている。それが神さまの御計画なのです。私たちは、大切な計画であるほど、切なる願いであるほど、熱心に祈り続けるでしょう。しかし、祈っても、祈っても、叶えられない願いはあるのです。夢と散る計画があるのです。それでも尚、私たちが、神さまの御計画に今生かされていることに、何一つ変わりはないのです。ここに真の平安があるのです。
先程の29節に「そのときには、キリストの祝福をあふれるほど持って、あなたがたのところへ行くことになると思っています。」とありました。これは単に、エルサレムへの献金が上手く届けられたという喜びのうちに、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一緒に喜び合いましょう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キリストの祝福をあふれるほど持って」というのは、「キリストの祝福に満たされて」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パウロ自身が祝福の中にすっぽりと包まれているというイメージなのです。
今日の招きの言葉として創世記12章1~3節の御言葉をお読みしました。神さまはアブラハムに「あなたは祝福の源となる」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神さまはアブラハムを祝福して旅立たせました。しかし、その神さまの大いなる恵み、祝福はアブラハム個人にとどま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アブラハムへの祝福が全世界に及んでいるのです。あなたを祝福の源とするとおっしゃった神さまの御言葉のように、アブラハムに始まった祝福はまずイスラエルへ広がり、キリストの到来ののちには、イスラエルの枠を越えて、全世界に及んだのです。
かつてアブラハムは祝福の源とされ、旅立ちました。それはアブラハムの息子のイサク、ヤコブでも同様でした。さらにその子どものヨセフもそうでした。アブラハムもイサクもヤコブもヨセフも、必ずしも自分の願っていた人生を生きたわけではなかったのです。
しかし、その歩みは神さまの祝福があふれる歩みだったのです。そして、それは私たち一人一人の人生の歩みもそうなのです。私たちもまた祝福にすっぽりと包まれているのです。その祝福は、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と復活によって与えられたものです。
私たち一人一人の人生というのは、神さまの祝福に溢れながら、神さまと共に旅をしていく人生なのです。その神さまの祝福を私たちはもっと感じながら生活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私たちの人生はジグソーパズルのようなものかもしれません。毎日一つずつパズルのパーツを置いていく、完成までは程遠く、どのような絵になるのかも分かりません。思いもかけないこともあります。こんなはずじゃなかったということもあります。しかしなお、その歩みの中で、私たちはそれぞれにキリストの祝福に満たされて歩んでいくのです。私たち自身には祝福に満たされている感覚はないかもしれません。それどころか辛いことばかりある日々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わたしたち自身にははっきりと気づけなくても、私たちもまた、アブラハムと同様、祝福の源とされているのです。パウロと同様、キリストの祝福があふれているのです。私たちが意識しようとしまいと、私たちは、神さまの祝福が溢れる中を旅しているのです。
皆さん、神さまの美しい御計画のうちに、これからも信頼して歩んで行きましょう。
【2022년 11월 13일 주일예배(요약판)】
“사람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로마서 15장 22~33절
오늘의 말씀 중에는 바울의 앞으로의 전도 계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전도지로서 에스파냐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서쪽 에스파냐(스페인)로의 전도를 생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에스파냐는 당시 서쪽의 끝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시 1:8)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에스파냐의 전도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전도의 성과로서 또 지금까지의 전도 여행의 집대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방인 교회로부터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이번에는 로마로 가는 것을 단념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그 용건이 끝나면 로마로 가겠다며 로마에 가는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편지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폭행을 당해 체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바울은 이 세상의 신분으로서는 자유인이 아니라 죄수로서 걷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로마로는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계획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29절) 여기에 바울의 마음이 슬프도록 가득 차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의 말씀에서 어린 아이 같은 신앙으로 순진하게 장래의 꿈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만, 실제로 로마는 어디까지나 복음 선교의 통과점이며, 땅 끝인 아득히 먼 저쪽의 에스파냐를 목적지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통과점이었던 로마가 그의 복음 선교의 종점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 아래 죄인으로서 처형되었다는 것이 아마도 역사적으로는 사실입니다. 즉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쓰여 있는 바울의 계획은 모조리 꿈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마지막에 집필되었습니다. 세번의 전도 여행을 거듭한 바울은 그 신앙이 정점에 달했고 신앙적 통찰도 뛰어났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로마서가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바울이 말씀과 기도에 이끌려 신앙의 눈으로 장래를 전망한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방인 전도의 성과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낸 후 당신들이 있는 곳을 거쳐 에스파냐에 가겠다”고 바울이 설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길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체포되어 죄수로서 이 세상의 지배자에게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마지막으로는 로마에서 그 생애를 마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죽는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취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노고로부터 해방되어 하늘의 축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충분하다, 잘 일했다, 자 눈물을 닦고 하늘 나라에서 휴식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거기가 반환점입니다. 게다가 어둠으로부터 빛으로의, 괴로움으로부터 기쁨으로의, 죄로부터 영광으로의 반환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이상 비록 나의 계획이 모두 덧없이 사라지고 남들의 눈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는 듯이 보이더라도 아직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계획일수록, 간절한 소원일수록, 열심히 계속 기도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기도하여도 실현되지 않는 소원은 있습니다. 꿈으로 끝내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살고 있는 것에는 무엇 하나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조금 전의 29절에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에 대한 헌금이 잘 전달되었다는 기쁨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함께 서로 기뻐합시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축복에 채워지고” 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 자신이 축복 속에 푹 싸여 있다는 이미지입니다.
오늘의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서 창세기 12장 1~3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여행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 축복은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축복이 전 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너는 복이 된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축복은 먼저 이스라엘로 퍼졌고 그리스도의 도래 후에는 이스라엘의 테두리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렀습니다.
예전에 아브라함은 축복의 원천으로 여겨져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 요셉도 그랬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꼭 자기가 원했던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은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의 걸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또한 축복에 푹 싸여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란 하나님의 축복이 채워지면서 하나님과 함께 여행을 해 가는 인생입니다. 그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는 더 느끼면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직소 퍼즐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한 개씩 퍼즐 조각을 끼워 가지만 완성까지는 아직 멀었고 어떤 그림이 되는지도 모릅니다. 예상치 못한 일도 생깁니다. 이럴 리가 없다고 여겨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 속에서 우리는 각각 그리스도의 축복에 채워지고 걸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축복으로 채워져 있는 감각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괴로운 일만 있는 날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는 분명히 깨달을 수 없어도 우리도 또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축복의 원천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축복이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말든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가운데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 가운데 앞으로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걸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