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그런 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3절)고 했습니다. 지난주, 말씀드렸습니다만, 먹을 것 그리고 특별한 날에 관한 것으로 인해 로마 교회 안에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그것 자체는 교회 안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먹을 것에 집착하는 사람, 혹은 특별한 날에 집착하는 사람은 “신앙이 연약한 자”라고 멸시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나는 신앙이 강하다, 너는 신앙이 약하다”로 서로 심판하는 것을 바울은 간곡하게 충고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도리어 부딪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주의하라”는 말은 일본어 성경에는 “결심하라” 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 일본어 번역 쪽이 바울의 주장을 더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정적으로 모두 다 사이좋게 지냅시다, 상대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하자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판단에 의거하여 하나님 앞에서 결심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이 실제로는 아직 부자유스러운 것에 얽매여 있는 사람을 심판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배려를 가지고 서로 마주 대하여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 상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 결심이야말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 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무리인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고 나타내는 무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고 말할 때 그가 응시한 곳은 어딘가 먼 곳에 있는 이상향,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의 14장의 첫 부분부터 주목하고 강조한 것은 교회 안에서의 구체적인 신앙인끼리의 교제입니다. 구체적인 인간의 모임인 현실의 교회를 직시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서로 심판하고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는 가운데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구나.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상태가 될 수는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신앙이 “강한 사람”과 “연약한 사람”이 서로 심판하지 않고 “강한 사람”은 “연약한 사람”의 양심의 아픔에 배려하면서 기독교적인 자유를 사랑으로 나타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인 교회의 형성을 추구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나라의 징표입니다. 여기서 “의”라는 것은 “올바름”이라는 것이지만, 우리의 올바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올바름입니다. 하나님의 올바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들 죄인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여전히 죄인인 우리가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의롭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 “평강”이라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끼리의 분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평화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5장에서 이 하나님과의 사이의 평화가 우리에게 괴로움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힘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사이의 평화와 사랑이 사람들끼리의 평화와 사랑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희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평화가 주어진 사람은 기쁨으로 채워집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징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란 미간을 찌푸리며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이 생명, 이 인생을 기꺼이 사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신앙을 서로 나누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의 신앙은 이리저리 헤매기 마련입니다. 헤매면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판단으로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자신 또 남을 심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확신에 의거하여 행동하지 않고 자신의 편의대로 행동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하루라도 죄를 범하지 않는 날이 없으며 사랑하는 주여라고 말하면서 죄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나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자에게도 연약한 자에게도, 크리스천이든 크리스천이 아니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하나님의 의”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의 근저에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 업신여겨 심판하는 게 아니라 서로 도우는 가운데 함께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 것을 결심하고 살아갈 때, 우리와 이웃 그리고 공동체 안에 참 평화가 주어집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의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2022年10月2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15章 10~11節
〇讃 頌 讃頌歌 303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4章 13~23節
〇説 教 「愛に基づいて行動しよう(사랑에 의거하여 행동하자)」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53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0月 2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愛に基づいて行動しよう」 ローマ書 14章 13~23節
パウロは「従って、もう互いに裁き合わないようにしよう。むしろ、つまずきとなるものや、妨げとなるものを、兄弟の前に置かないように決心をしなさい。」(13節)と言います。先週、お話ししましたが、食べ物のこと、あるいは、特別な日のことで、ローマ教会の中で分裂が起こっていたのです。
パウロはそのこと自体は教会の中で、大きな問題ではないと捉えておりました。しかし、ほんとうに問題なのは、食べ物のことにこだわる人、あるいは特別な日にこだわる人を「信仰が弱い」と見下し、馬鹿にすることだ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した。「わたしは信仰が強い」「あなたは信仰が弱い」と互いに裁きあうことをパウロは厳しく諌めています。そして、そのことで「むしろ、つまずきとなるものや、妨げとなるものを、兄弟の前に置かないように決心をしなさい」と言っています。
つまり、情感的に皆で仲良くしましょう、相手を傷つけないようにしましょうと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信仰的な判断に基づいて、神さまの前で決心をするのだというのです。信仰において、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ほんとうの自由を得たはずの者が、実際はまだ不自由なところに囚われている人を裁くのではなく、愛の配慮をもって向かい合うべきだとパウロは言っているのです。それには信仰の上での決心がいるのです。その決心こそが愛の実践なのだ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
「神の国は、飲み食いではなく、聖霊によって与えられる義と平和と喜びなのです」(17節)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
主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者の群れである教会は、神さまをの恵みを目に見えるものとして表わし、示す群れなのです。ですからパウロが「神の国は、飲み食いではなく、聖霊によって与えられる義と平和と喜びなのです」と言った時に彼が見つめているのは、どこか遠い所にある理想郷、実際には存在しないユートピアのような神の国ではなくて、目に見える具体的な教会です。パウロがこの手紙の14章の始めから見つめ、語ってきたのは、教会における具体的な信仰者どうしの交わりのことです。具体的な人間の集りである現実の教会を見つめながら彼は「神の国は」と言っているのです。
それなのに、そのあなたたちが飲み食いのことでお互いに裁き合っているようでは、神さまの恵みの支配の中に生きているとは言えない。それでは神の国が目に見えるものとならない、とパウロは言っているのです。
だからこそ、パウロは信仰の「強い人」と「弱い人」が互いに裁き合うことなく、「強い人は」「弱い人」の良心の痛みに配慮をしながら、キリスト教的自由を愛として現して、神さまの業である教会の形成を追い求めるようにと勧めています。
「義と平和と喜び」この三つが、神の国の印であるのです。ここで「義」というのは、「正しさ」ということですが、私たちの正しさ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の正しさです。神さまの正しさ故に私たち罪人は裁かれる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が主イエス・キリストの贖いによって、私たちの罪が赦され、罪人のままの私たちがまるで罪がないかのように、義と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
また、「平和」というのは、単に人間同士の争いがな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との間に平和が与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この平和は神さまの愛と言い換えることも出来ます。パウロは5章で、この神さまとの間の平和が私たちに、苦しみの中でも希望を失わずに忍耐して生きる力を与えることを語っていました。この神さまとの間の平和と愛が、人間同士の平和と愛の源なのです。
そして、「喜び」というのは、神さまの恵みによって義とされ、神さまとの間に平和を与えられた者は、喜びに満たされるのです。この喜びこそ神の国の印です。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とは、眉間にしわを寄せて難しいことを考えて生き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によって与えられたこの命、この人生を喜んで生きること、それが信仰です。そして、その喜びの信仰を分かち合う場所が教会なのです。
ただ、先週も申し上げましたが、私たちの信仰というのは、あれこれ迷いがちです。迷いながらも、聖霊によって成長していくものです。それを私たちの判断によって裁く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私たちは自分も、また他の人を裁く必要がありません。私たちは、「聖霊によって与えられる義と平和と喜び」を楽しむ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確信に基づいて行動せずに、自分の都合で行動してしまう者です。そればかりか、私たちは、罪を犯さない日など一日もなく、愛する主よ、と言いながら罪を犯す者です。そのような私を主イエス・キリストは愛し救って下さいました。「義と平和と喜び」を与えて下さったのです。
だからこそ、私たちは、強い者にも弱い者にも、クリスチャンであろうとノンクリスチャンであろうと、その人のためにキリストが死んで下さったという「神の義」が、一人一人の存在の根底に与えられていることを覚えて、互いに蔑み、裁くのではなく、支え合いの中で共に生きていきたいと思う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がキリストの愛に生きることを決心して生きていく時、私たちと隣人、そして共同体の中にまことの平和が与えられます。主なる神さまがその命の力を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います。
【2022년 10월 16일 주일예배(요약판)】
“사랑에 의거하여 행동하자” 로마서 14장 13~23절
바울은 “그런 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3절)고 했습니다. 지난주, 말씀드렸습니다만, 먹을 것 그리고 특별한 날에 관한 것으로 인해 로마 교회 안에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그것 자체는 교회 안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먹을 것에 집착하는 사람, 혹은 특별한 날에 집착하는 사람은 “신앙이 연약한 자”라고 멸시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나는 신앙이 강하다, 너는 신앙이 약하다”로 서로 심판하는 것을 바울은 간곡하게 충고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도리어 부딪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주의하라”는 말은 일본어 성경에는 “결심하라” 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 일본어 번역 쪽이 바울의 주장을 더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정적으로 모두 다 사이좋게 지냅시다, 상대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하자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판단에 의거하여 하나님 앞에서 결심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이 실제로는 아직 부자유스러운 것에 얽매여 있는 사람을 심판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배려를 가지고 서로 마주 대하여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 상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 결심이야말로 사랑의 실천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 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무리인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고 나타내는 무리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고 말할 때 그가 응시한 곳은 어딘가 먼 곳에 있는 이상향,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의 14장의 첫 부분부터 주목하고 강조한 것은 교회 안에서의 구체적인 신앙인끼리의 교제입니다. 구체적인 인간의 모임인 현실의 교회를 직시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서로 심판하고 있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는 가운데 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구나.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상태가 될 수는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신앙이 “강한 사람”과 “연약한 사람”이 서로 심판하지 않고 “강한 사람”은 “연약한 사람”의 양심의 아픔에 배려하면서 기독교적인 자유를 사랑으로 나타내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인 교회의 형성을 추구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나라의 징표입니다. 여기서 “의”라는 것은 “올바름”이라는 것이지만, 우리의 올바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올바름입니다. 하나님의 올바름으로 말미암아 우리들 죄인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여전히 죄인인 우리가 마치 죄가 없는 것처럼 의롭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또 “평강”이라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끼리의 분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 평화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5장에서 이 하나님과의 사이의 평화가 우리에게 괴로움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힘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사이의 평화와 사랑이 사람들끼리의 평화와 사랑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희락”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평화가 주어진 사람은 기쁨으로 채워집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징표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란 미간을 찌푸리며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이 생명, 이 인생을 기꺼이 사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의 신앙을 서로 나누는 장소가 교회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의 신앙은 이리저리 헤매기 마련입니다. 헤매면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판단으로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자신 또 남을 심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확신에 의거하여 행동하지 않고 자신의 편의대로 행동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하루라도 죄를 범하지 않는 날이 없으며 사랑하는 주여라고 말하면서 죄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나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자에게도 연약한 자에게도, 크리스천이든 크리스천이 아니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하나님의 의”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의 근저에 주어졌다는 것을 기억하며 서로 업신여겨 심판하는 게 아니라 서로 도우는 가운데 함께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 것을 결심하고 살아갈 때, 우리와 이웃 그리고 공동체 안에 참 평화가 주어집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의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