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에서 바울은 우선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말만 들으면 아주 아름다운 말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사랑에 거짓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거짓이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위선과 사랑은 본래 결부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하냐면 교회의 현실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위선이 섞인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9-10절) 라고 사랑이라는 것을 악이나 선과 관련시켜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악을 미워하는 일 없이 선에서 벗어나서는 사랑이 있을 수가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이나 선이라는 윤리적인 사항과 사랑을 분리해서 생각해 버립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거짓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악이라도 행하는 그런 일들이 아름다운 말로 묘사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말하는 사랑의 본질은 흔히 센티멘털한 것이지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정감적인 것도 기분적인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사랑과 윤리가 분리되기 쉽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정감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와 결합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분이시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선을 행한다는 것은 지난주 읽은 12장 2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분별하고 걸을 때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며 정말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때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이 있을 때에 우리는 서로 우애하고 존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공동체를 존중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혈족으로서의 부모 자식 관계나 가족 관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반면 교회라는 공동체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 또한 하나님께 주어진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족처럼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주어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동체라는 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서로 상대방에 대한 존경이라는 것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은 그 문장을 읽어 보면 성미가 괄괄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단과는 철저하게 싸웠고 교회 안의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엄하게 대했습니다. 확실히 악을 미워하고 선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바울이 구한 사랑, 그것이야말로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을 관철할 때 거짓에 대하여 철저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겉으로 사람들을 달콤하게 하거나 화목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그럴 것입니다. 이런 엄하고 거짓 없는 사랑을 철저히 하는 사람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 힘들어합니다. 언제나 잔소리가 많고 생트집을 잡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움을 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반대로 바울이 인내심도 없고 인정이 많지 않게 보입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어디까지나 주 예수님의 사랑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따르는 사랑입니다. 그래도 많은 인간에게 있어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역시 어려운 것입니다.
어렵기 때문에 바울은 더욱 말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1-13절)
정감적인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게을리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노력하는 게 아니라 열심을 품는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힘으로 힘쓰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거짓이 없는 사랑을 완수하는 것은 도저히 못합니다. 형제애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을 행하는 것과 결합되고 있다고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랑의 실천이라는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기 위해서는 역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렵기 때문에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없으면 인간은 거짓없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완수하려면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강해지지 않으면 인간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사랑할 때 거기에는 저절로 기도가 따르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사랑을 실천해 갈 때, 그래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도 밖에도 싸움이 있습니다. 배신이 있고 박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2000년 전의 성서 시대만이 아닙니다. 현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있을 때 저절로 고난이나 박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로써 거짓 없는 사랑을 실천하려고 할 때 악과 대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 “너희들을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14절) 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14절 이후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마찬가지로 악을 미워하면서 그 악을 행하는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가운데서도 우리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가르침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19절)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20절) 라고 합니다.
17절에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만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현실에 터무니없는 인간의 악을 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갚지 않은 분이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모든 악을 인수하셨습니다. 우리의 악에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오직 혼자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복수를 받으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미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 다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는 이미 끝났습니다. 우리 자신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은 십자가의 그리스도께로 향한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수를 면한 우리는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이 없는 사랑을 완수하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역시 이것은 어렵습니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짓이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까요? 충분히 실천했다고 가슴을 펴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저를 포함해서 여기 단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도합시다. 기도 안에서, 십자가를 향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속에서 바울이 권하는 사랑의 실천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는 사람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교제하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일 없이 선을 행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이 완전한 사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사랑이 부족한 우리의 사랑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을 더하게 하시기를 기도해 갑시다.
2022年9月2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コリント一(고린도전서) 13章 2~3節
〇讃 頌 讃頌歌 299(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2章 9~21節
〇説 教 「偽りのない愛(거짓이 없는 사랑)」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53(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9月 2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偽りのない愛」 ローマ書 12章 9~21節
今日の御言葉の中で、パウロはまず、「愛には偽り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と勧めております。言葉だけを聞きますと、とても美しい言葉です。でも、反対に言えば、愛に偽りがあるってことになりますね。偽りのある愛というのもがあるのでしょうか? 偽善と愛というのは、本来結びつかないはずです。なぜ、パウロがこのようなことを言うのかと言いますと、教会の現実を見ていたからです。教会の中に偽善の混じった愛というものが存在したのです。
そこでパウロは「悪を憎み、善から離れず、兄弟愛をもって互いに愛し、尊敬をもって互いに相手を優れた者と思いなさい」(9-10節)と、愛というものを悪や善と関連づけて語っています。つまり、悪を憎むことなく、善から離れてしまっては、愛はあり得ない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
私たちは、悪とか善という倫理的なことがらと愛を切り離して考えてしまいます。愛するゆえの嘘、愛する人のためなら悪だって行う、そういうことが、美しい言葉で語られがちです。しかし、そこで語られている愛の本質は往々にしてセンチメンタルなものであって、聖書で語られる愛とは違うのです。
聖書で語られる愛は情感的なもの、気分的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人間の世界では愛と倫理が切り離されてしまいがちですが、聖書の語る愛は情感的なものではなく倫理と結びつきます。なぜなら、神さまは正しい方、義なる方であるからです。
そもそも善をなすということは先週お読みした12章2節にある「何が神の御心であるか」をわきまえて生きるということです。聖書における愛は神さまの御心と結びついているのです。神さまの御心をわきまえて歩む時、悪を憎み、善から離れず、まことに愛し合う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す。そのとき、愛には偽りがないのです。
偽りのない愛があるとき「尊敬をもって互いに相手を優れた者と思う」(10節)ことができます。同時に、これは神さまによって与えらえた共同体を尊重するということでもあります。私たちは血族としての親子関係、家族関係を自分で選択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で、教会という共同体には選択の自由があります。しかし、この共同体もまた神さまに与えられた神の家族なのです。だから私たちは家族のように仲良く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と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に与えられた、神さまが造られた共同体ということを尊重した態度をとり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そのとき、互いに相手への尊敬というものがおのずと生じるのです。
ところで、パウロという人は文章を読んでいますと、かなり気性の激しい人だったように思われます。異端とは徹底的に戦いましたし、教会の中の共同体を乱す者にはきわめてきびしく接しました。まさに悪を憎み、善から離れませんでした。そのパウロが求めた愛、それこそ偽りのない愛なのです。偽りのない愛を貫く時、偽りに対して徹底した態度をとらざるを得ないのです。
パウロの言う愛は、表面的に、人々を甘い気持ちにしたり、和やかにする種類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ですから、パウロを嫌う人たちも多かったのです。実際そうでしょう。こんな厳しい、偽りのない愛を徹底した人が共同体の中にいたら、煙たがられます。いつも口うるさく、無理難題を押しつけるわけですから、ある意味、嫌われて当然です。逆に、パウロの方が、忍耐強くなくて、情け深くないのではないか? そこに愛はあるのか?と思われても仕方ありません。
しかし、パウロの言う愛は、どこまでも主イエスさまの愛に根ざしているのです。それはセンチメンタルな愛ではなく、神さまの御心に従う愛なのです。それでも、多くの人間にとってパウロの語る愛はやはり困難なことです。
困難だからこそ、パウロはなお語ります。「怠らず励み、霊に燃えて、主に仕えなさい。希望をもって喜び、苦難を耐え忍び、たゆまず祈りなさい。」(11-12節)
情感的な愛ではないからこそ、私たちは怠らず励むのです。しかし、自分で努力するのではなく、霊に燃えるのです。つまり、聖霊によって、神さまの力によって燃やしていただくのです。自分の力で偽りのない愛を全うすることは到底できません。兄弟愛を持つことはできません。そして、愛は神さまの御心を行うことと結びついていると、先程申し上げましたが、愛の実践という神さまの御業に仕えるためには、やはり祈りが必要なのです。困難だからこそ、祈りを必要とするのです。絶え間ない祈りがなくては、人間は偽りのない愛を実践が出来ないのです。愛を全うするには祈りが必要です。祈りによって強められなければ、人間は人を愛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そして、逆に愛するとき、そこにはおのずと祈りが伴うのです。
祈りつつ愛の実践をしていくとき、それでもなお、キリスト者には困難があります。共同体の内にも外にも戦いがあります。裏切りがあり、迫害があります。これは2000年前の聖書の時代だけではありません。現代における私たちの教会も、同じです。この世界にキリスト者としてあるとき、おのずと苦難や迫害があります。ですから、私たちが祈りをもって偽りのない愛を実践しようとするとき、悪と対峙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とき、「あなたがた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祝福を祈りなさい」(14節)と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す。
14節以降の御言葉は、イエスさまが語られた「敵を愛しなさい」という言葉と同様、悪を憎みながら、その悪をなす人間を憎んで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が語られています。これは聖書の中でも、私たちが最も困難と感じられる教えでもあります。「愛する人たち、自分で復讐せず、神の怒りに任せなさい」(19節)とパウロは言います。そしてまた「あなたの敵が飢えていたら食べさせ、渇いていたら飲ませよ。」(20節)とあります。
17節で「だれに対しても悪に悪を返さず、すべての人の前で善をおこなうように心がけなさい」(17節)とパウロは語ります。でも、それは自分だけ損をするような気がいたします。
しかし、現実に、とてつもない人間の悪を受け取って、それでも投げ返されなかった方がおられます。それがイエス・キリストです。十字架において、私たち人間すべての悪を引き取られました。私たちの悪に悪を返さずただお一人背負われました。そして、父なる神さまの復讐をお受けになりました。父なる神さまは悪を憎まれる方です。その神さまの憎しみをイエス・キリストはすべてお受けになりました。十字架によって私たち自身への神さまの復讐は既に終わっています。私たち自身の悪への神さまの憎しみは十字架のキリストに向けられたのです。
この十字架のキリストのゆえに、神さまからの復讐を免れさ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は、悪をなす者へ悪を返さないのです。私たちが偽りのない愛を全うしようと、キリストの十字架を思っていても、やはりこれは難しいことです。難しいことのゆえに、一層の祈りが必要な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偽りのない愛を実践しているでしょうか? 十分に実践できたと胸をはれる方はおそらく私を含めておられないでしょう。だからこそ、なお祈りましょう。祈りの内に、十字架へと向かわれるためにこの世界に来られたキリストを覚えましょう。
今日の御言葉の中で、パウロが勧めている愛の実践は、主イエス・キリストがなされたことです。イエスさまは泣く人と共に泣かれました。身分の低い人々と交わられました。悪に悪を返すことなく善を行われ、善をもって悪に勝たれました。
この完全な愛なる方、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御前に、自分の足らなさを悔い改め、祈りつつ、愛に欠けた私たちの愛に、キリストの愛を、真の愛を、増し加えて頂けるよう、祈っていきましょう。
【2022년 9월 25일 주일예배(요약판)】
“거짓이 없는 사랑” 로마서 12장 9~21절
오늘의 말씀에서 바울은 우선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말만 들으면 아주 아름다운 말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사랑에 거짓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거짓이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위선과 사랑은 본래 결부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하냐면 교회의 현실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위선이 섞인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9-10절) 라고 사랑이라는 것을 악이나 선과 관련시켜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악을 미워하는 일 없이 선에서 벗어나서는 사랑이 있을 수가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이나 선이라는 윤리적인 사항과 사랑을 분리해서 생각해 버립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거짓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악이라도 행하는 그런 일들이 아름다운 말로 묘사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말하는 사랑의 본질은 흔히 센티멘털한 것이지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정감적인 것도 기분적인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사랑과 윤리가 분리되기 쉽지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정감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와 결합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올바른 분이시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선을 행한다는 것은 지난주 읽은 12장 2절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분별하고 걸을 때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며 정말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때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이 있을 때에 우리는 서로 우애하고 존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공동체를 존중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혈족으로서의 부모 자식 관계나 가족 관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없습니다. 반면 교회라는 공동체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 또한 하나님께 주어진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족처럼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주어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동체라는 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서로 상대방에 대한 존경이라는 것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사람은 그 문장을 읽어 보면 성미가 괄괄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단과는 철저하게 싸웠고 교회 안의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사람에게는 지극히 엄하게 대했습니다. 확실히 악을 미워하고 선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바울이 구한 사랑, 그것이야말로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거짓이 없는 사랑을 관철할 때 거짓에 대하여 철저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겉으로 사람들을 달콤하게 하거나 화목하게 만드는 종류의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그럴 것입니다. 이런 엄하고 거짓 없는 사랑을 철저히 하는 사람이 공동체 안에 있으면 힘들어합니다. 언제나 잔소리가 많고 생트집을 잡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움을 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반대로 바울이 인내심도 없고 인정이 많지 않게 보입니다. 거기에 사랑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어디까지나 주 예수님의 사랑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따르는 사랑입니다. 그래도 많은 인간에게 있어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역시 어려운 것입니다.
어렵기 때문에 바울은 더욱 말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1-13절)
정감적인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게을리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노력하는 게 아니라 열심을 품는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힘으로 힘쓰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거짓이 없는 사랑을 완수하는 것은 도저히 못합니다. 형제애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을 행하는 것과 결합되고 있다고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랑의 실천이라는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기 위해서는 역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렵기 때문에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없으면 인간은 거짓없는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완수하려면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강해지지 않으면 인간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사랑할 때 거기에는 저절로 기도가 따르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사랑을 실천해 갈 때, 그래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도 밖에도 싸움이 있습니다. 배신이 있고 박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2000년 전의 성서 시대만이 아닙니다. 현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있을 때 저절로 고난이나 박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로써 거짓 없는 사랑을 실천하려고 할 때 악과 대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때 “너희들을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14절) 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14절 이후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마찬가지로 악을 미워하면서 그 악을 행하는 인간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가운데서도 우리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가르침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19절)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20절) 라고 합니다.
17절에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17절)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만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현실에 터무니없는 인간의 악을 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갚지 않은 분이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모든 악을 인수하셨습니다. 우리의 악에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오직 혼자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복수를 받으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미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 다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는 이미 끝났습니다. 우리 자신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은 십자가의 그리스도께로 향한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수를 면한 우리는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악으로 갚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짓이 없는 사랑을 완수하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역시 이것은 어렵습니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짓이 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까요? 충분히 실천했다고 가슴을 펴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저를 포함해서 여기 단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도합시다. 기도 안에서, 십자가를 향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속에서 바울이 권하는 사랑의 실천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는 사람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교제하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일 없이 선을 행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이 완전한 사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회개하고 기도하면서 사랑이 부족한 우리의 사랑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을 더하게 하시기를 기도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