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잘려 나갔고,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 주어졌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편 유대인들은 지금은 구원으로부터 떠나 있지만 완전히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는 한층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25절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라고 시간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순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다는 것은 이방인 전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으로 정해진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8절에 “복음으로 말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28절) 라고 쓰여 있듯이 지금은 하나님과 적대하는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상실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말미암아” 라는 것은 이방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며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반대로 지금은 하나님과 적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상들로 말미암아” 라는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그들의 아득한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적인 의미에서의 ‘조상의 신앙에 의해 자손이 번영한다’는 그런 선조 신앙이 아닙니다. 원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이스라엘의 조상들도 결코 훌륭한 신앙자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각각 죄를 짓고 결점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그들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에 대해서 축복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현시점에서는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않은 이스라엘이 머지않아 구원받으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29절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지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은 현대를 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든든한 말씀입니다. 지금 이방인인 우리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그 풍부한 은사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그 은사와 부르심은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때에 이번에는 이방인에게서 구원을 거두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취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취소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일까 하고 우리는 생각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떠나 버린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신앙도 그렇게 자신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바울은 이 말을 말하기 전에 26절에서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26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 59장 20절로부터의 인용입니다만, 조금 말이 다릅니다. 이사야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59:20)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죄사하심을 받는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로마서는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다”고 쓰여 있듯이 인간의 회개라는 행위가 구원의 전제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경건하지 않고 하나님께 마음을 열지 않아 죄 속에 있는 인간의 죄를 없애 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은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몇 번이나 자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집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그 순종하지 않는 상태로부터 빠져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심판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가운데 그 불순종한 인간에게, 이 나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의 성경 말씀 모두에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25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 “신비”라는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 “신비”라는 것은 하나님의 감춰진 계획입니다. 또 이것은 우리 인간이 수업을 하거나 깨닫거나 해서 “닫힌 것”을 스스로 열어 가야 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신비, 하나님의 감춰진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완전히 하나님의 감춰진 계획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시점에서 알려져 있는 것은 아련하고 부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직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이 취소되지 않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 하나님의 계획은 복음으로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33절에서 직접적인 인용은 아니지만, 분명히 욥기의 내용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올바른 사람이었던 욥이 불합리하게도 자녀와 재산 전부를 빼앗기고 자기 자신도 심한 병에 걸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왜 욥이 참혹한 꼴을 당하여야 했는지 거기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욥 자신도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고 하나님께 이의 제기를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나는 나쁘지 않다”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그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그 대답은 전체적으로 매우 긴 것입니다만, 쉽게 말하자면 34~35절에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과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합리한 불행 속에 있는 욥에 대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은 더더욱 불합리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과의 대화로 인해 욥은 눈이 떠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얻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함 속에서 욥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욥처럼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것은 도저히 파악하지 못합니다만, 기도를 통해서 그때 그때에 하나님의 계획의 훌륭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류 전체의 구원이라는 것과 동시에 나 자신의 구원,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굉장한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훌륭함을 찬송하며 이 한주간도 살아 갑시다.
2022年9月11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시편) 59章 20~21節
〇讃 頌 讃頌歌 254(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1章 25~36節
〇説 教 「取り消されない恵み(취소되지 않는 은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45(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9月 1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取り消されない恵み」 ローマ書 11章 25~36節
パウロはこれまでに、イスラエルから神さまの救いが切り取られ、その救いが異邦人に与えられている、と繰り返し語っています。しかし、パウロは一方で、ユダヤ人は今は救いから離れているが、完全に神さまから見捨てられたわけではないと語っています。
今日の聖書箇所では、さらに具体的にイスラエルの救いについて言及されています。25節には「一部のイスラエル人がかたくなになったのは、異邦人全体が救いに達するまでであり」と、時間的な神さまの救いの順序が語られています。ちなみに、異邦人全体が救いに達するというのは、異邦人全員が、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救いに定められている人々が救いに達するまでの時間ということです。そののちに全イスラエルが救われるのだと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す。
28節に「福音について言えば、イスラエル人は、あなたがたのために神に敵対していますが、神の選びについて言えば、先祖たちのお陰で神に愛されています」(28節)とあるように、今は神さまに敵対しているイスラエルであっても、神さまの愛が失われているわけではないと語られています。
「あなたがたのために」というのは異邦人キリスト者のためにということで、イスラエルは異邦人が救われるために、逆に今は神さまに敵対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ここで「先祖たちのお陰で」というのは、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といった彼らのはるかな父祖たちへの神さまの約束のゆえであって、日本的な意味での、<先祖の信仰によって子孫が繁栄する>と言ったことような先祖信仰ではありません。そもそも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といったイスラエルの父祖たち自身も、けっして素晴らしい信仰者であったとは言えません。それぞれに罪を犯し、欠点の多い人間でありました。しかし、神さまご自身が恵みによって彼らを選ばれ、イスラエルに対して祝福の約束をされました。その神さまの約束ゆえに、現時点では多くの人が救われていないイスラエルが、やがて救いに入れられるのだ、と語られています。
パウロは29節で「神の賜物と招きとは取り消されないものなのです」と語っています。つまり、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に約束された神さまの約束は取り消されないのです。ここで語られているのはイスラエルの救いですが、「神の賜物と招きとは取り消されないものなのです」と語る言葉は、現代を生きる異邦人キリスト者である私たちにとっても心強い言葉です。いま、異邦人である私たちは、イスラエルの不信仰のゆえに、神さまに招かれ、その豊かな賜物をいただいています。私たちに対しても、やはりその賜物と招きは取り消されないのです。今後、神さまの御計画によって、イスラエルが救われることになった時に、今度は異邦人から救いを取り去ろう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すでに救いを得ている者の救いは、神さまの側からは取り消されないのです。
パウロは「神の賜物と招きは取り消されない」と語っているわけですが、救われたものは決して神さまから離れない、信仰を失わないということですね。でも、本当かなあ、と私たちは思ってしまいます。なぜなら、教会から離れてしまった人たちをたくさん見てきたからです。自分の信仰もそんなに自信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では、これを私たちはどのように理解すれば良いのでしょうか。
パウロはこの言葉を語る前に、26節で「救う方がシオンから来て、ヤコブから不信仰を遠ざける」(26節)と語っています。この言葉は、イザヤ書59章20節からの引用なのですが、ちょっと言葉が違います。イザヤ書では「主は贖う者として、シオンに来られる。ヤコブのうちの罪を悔いる者のもとに来ると、主は言われる。」(イザヤ59:20)となっています。イザヤ書では罪の赦しを受ける者は悔い改めた者であるということを語っていますが、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では「ヤコブから不信仰を遠ざける」とあるように、人間の悔い改めという行為が救いの前提にあるのではなく、神さまご自身がそもそも頑なで神さまに心を開かず、罪の中にある人間の罪を取り除いてくださると語っているのです。まさに、それが恵みなのだと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す。これがパウロにとっての福音でした。
パウロは何度もうぬぼれないように、思いあがってはならないと、しつこくぐらいに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そもそも人間は誰もが神さまの前に不従順でした。そのことをパウロは32節で「すべての人を不従順の状態に閉じ込めた」と表現しています。自分の力ではその不従順な状態から抜け出すことは出来なかったのです。そのために私たちは裁かれる者でした。しかし、神さまの大いなる御計画の中で、その不従順な人間に、この私に神さまの憐れみが注がれたのです。
パウロは「秘められた計画をぜひ知ってもらいたい」(25節)と語っていますが、この「秘められた計画」というのが、私たちに対する神さまの恵みであり、福音の内容であるわけですね。この「秘められた計画」という言葉は、口語訳では奥義と訳されています。奥義といいますと、人間が修業をしたり悟ったりして「閉ざされたもの」を自分で開いていかないといけないものでありますが、しかし、今、私たちに求められているのはそう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この秘められた計画、奥義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開かれたからです。
もちろん完全に神さまの奥義を私たちは今知らされ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現時点で知らされていることはおぼろげなことであり、部分的なことです。しかし、神さまがただ憐みにより、私たちを選び救われること、そして、その賜物と招きが取り消されないことは確かなことです。そして、それゆえにその神さまの御計画は福音として知らされているのです。
パウロは33節から直接的な引用ではありませんが、明らかにヨブ記の内容を踏まえて神さまを讃美しています。ヨブ記は、正しい人であったヨブが理不尽にも子供やら財産すべてを奪われ、自分自身も酷い病にかかるという物語です。そもそもなぜヨブが酷い目に遭わなければいけなかったのか、そこに疑問をどうしてももってしまいます。ヨブ自身納得してい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ヨブは神さまに向かって叫び、神さまに異議申し立てをしたのです。ヨブは神さまに向かって、「私は悪くない」とはっきりとそう言ったのです。そのヨブに神さまは答えられました。その答えは全体としてとても長いものですが、つきつめれば34~35節にパウロが引用していることです。神さまは神さまである、人間には神さまの心はわか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理不尽な不幸の中にあるヨブに対して、その神さまの言いようはさらに理不尽にも感じます。しかし、その神さまとの対話によってヨブは目を開かれたのです。神さまへの知識を得たのです。自分の惨めさの中で、ヨブは神さまの摂理を知ったのです。
私たちはヨブのように父なる神さまの声を直接聞くことはできません。しかし、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さまを知ることが出来ます。私たちはキリストの名によって祈る時、神さまと交わることが出来ます。もちろん神さまのすべては到底知り得ませんが、祈りを通して、折々に神さまの御計画の素晴らしさを知らされます。神さまの御計画は人類全体の救いということであると同時に、私自身の救い、私への神さまの素晴らしい計画ということでもあります。その神さまの御計画の中にある素晴らしさを賛美をしながらこの一週間も生きていきたいと願います。
【2022년 9월 11일 주일예배(요약판)】
“취소되지 않는 은혜” 로마서 11장 25~36절
바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잘려 나갔고,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 주어졌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편 유대인들은 지금은 구원으로부터 떠나 있지만 완전히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는 한층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 25절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라고 시간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순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다는 것은 이방인 전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으로 정해진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28절에 “복음으로 말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28절) 라고 쓰여 있듯이 지금은 하나님과 적대하는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상실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말미암아” 라는 것은 이방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며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반대로 지금은 하나님과 적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상들로 말미암아” 라는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그들의 아득한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적인 의미에서의 ‘조상의 신앙에 의해 자손이 번영한다’는 그런 선조 신앙이 아닙니다. 원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이스라엘의 조상들도 결코 훌륭한 신앙자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각각 죄를 짓고 결점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비하심으로 그들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에 대해서 축복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현시점에서는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않은 이스라엘이 머지않아 구원받으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29절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지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라는 말씀은 현대를 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든든한 말씀입니다. 지금 이방인인 우리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그 풍부한 은사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그 은사와 부르심은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이 구원받게 될 때에 이번에는 이방인에게서 구원을 거두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취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취소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일까 하고 우리는 생각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떠나 버린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신앙도 그렇게 자신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바울은 이 말을 말하기 전에 26절에서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26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 59장 20절로부터의 인용입니다만, 조금 말이 다릅니다. 이사야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59:20)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죄사하심을 받는 사람은 회개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로마서는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다”고 쓰여 있듯이 인간의 회개라는 행위가 구원의 전제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경건하지 않고 하나님께 마음을 열지 않아 죄 속에 있는 인간의 죄를 없애 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은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있어서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몇 번이나 자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집요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그 순종하지 않는 상태로부터 빠져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심판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가운데 그 불순종한 인간에게, 이 나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의 성경 말씀 모두에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25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 “신비”라는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음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 “신비”라는 것은 하나님의 감춰진 계획입니다. 또 이것은 우리 인간이 수업을 하거나 깨닫거나 해서 “닫힌 것”을 스스로 열어 가야 하는 것인데,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신비, 하나님의 감춰진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완전히 하나님의 감춰진 계획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시점에서 알려져 있는 것은 아련하고 부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직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선택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이 취소되지 않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 하나님의 계획은 복음으로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33절에서 직접적인 인용은 아니지만, 분명히 욥기의 내용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올바른 사람이었던 욥이 불합리하게도 자녀와 재산 전부를 빼앗기고 자기 자신도 심한 병에 걸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왜 욥이 참혹한 꼴을 당하여야 했는지 거기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욥 자신도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외치고 하나님께 이의 제기를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나는 나쁘지 않다”고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그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그 대답은 전체적으로 매우 긴 것입니다만, 쉽게 말하자면 34~35절에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과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합리한 불행 속에 있는 욥에 대해서 그 하나님의 말씀은 더더욱 불합리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과의 대화로 인해 욥은 눈이 떠졌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얻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함 속에서 욥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욥처럼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것은 도저히 파악하지 못합니다만, 기도를 통해서 그때 그때에 하나님의 계획의 훌륭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류 전체의 구원이라는 것과 동시에 나 자신의 구원,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굉장한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훌륭함을 찬송하며 이 한주간도 살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