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구원의 은혜가 좌절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이방인으로 옮겨진 것입니다만, 바울은 그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구원을 이스라엘이 시기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 품으로 되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14절)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세계 선교라는 것은 그 근저의 동포 이스라엘의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3절에서 이방인 선교와 이스라엘의 구원과의 관계를 비유를 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계약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이것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그리고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이삭, 야곱이라는 조상들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거룩한즉”, 그 자손인 “떡덩이”와 “가지”에 비유하고 있는 이스라엘도 거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여기서 틀려서는 안 되는 것은 이 거룩한 것은 결코 윤리적인 의미로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거룩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거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께 선택받았다, 그 이유만으로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하나님께 선택받았다, 그 때문에 그 자손인 이스라엘도 거룩한 자와 다름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타락한다해도 하나님의 계약은 무효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7절에는 감람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만, 감람나무(올리브 나무)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손수 공들여 기르신 감람나무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약으로 말미암아 서 있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감람나무의 나뭇가지가 썩어 버린 것입니다. 농부인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썩은 가지를 잘라내어 돌감람나무(야생 올리브)인 이방인을 접붙이기하셨습니다. 이방인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계약하신 하나님 계약에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 양분(말씀과 성령)을 풍부하게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받은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번 말씀드리는 것 같은데, 여기에 이방인이 구원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7-18절)
여러분, 우리는 돌감람나무입니다. 아무 공적도 없고 구원받을 가치 하나조차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으신 구원의 계약에 접붙이기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두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로 말미암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절) 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21절에는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절) 라고 준엄한 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이 우리에게 대해서도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대해서도 이방인인 우리에게 대해서도 용서해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용서하지 않으신 상대가 누구였느냐면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였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분노를 모두 예수님께 향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베어지게 되신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어진 이상 우리에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 즉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 그대로를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이렇게까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22절) 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의로 이를 포기해서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엄하심은 우리에게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면 달콤한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내고 민중의 지지를 얻은 구약 시대의 가짜 선지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탄의 함정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 없이 은혜만을 구하는 것은 겉치레 신앙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22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주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이미 2장에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2장 4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같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2:4)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하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무른다”는 것은 우리가 우선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머무른다”고 말하면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무른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회개하는 행위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회개는 필연적으로 그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실제의 신앙 생활 속에서 실현해 가는 좋은 행위입니다. 이들은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이며, 바꿔 말하자면 회개의 신앙 생활의 결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자비”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이 로마서에서 “자애” 혹은 “인자하심”이라고 번역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자애가 우리의 좋은 행위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약한 자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이 새로운 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즉 새로운 삶의 연속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이것도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모두 다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 이것들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구원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모두 다 실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불완전이라도 마치 이것들 모두 다 행하고 있는 것같이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고 천국으로 가는 포상까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우리를 충실한 사람으로 간주하시어 믿고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2022年9月4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52編 10(8)~11(9)節
〇讃 頌 讃頌歌 328(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1章 11~24節
〇説 教 「万民を救われる神(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04(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9月 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万人を救われる神」 ローマ書 11章 11~24節
イスラエルの救いの恵みが、つまずいたイスラエルに代わり異邦人へと移されたわけですが、パウロはそれも神さまの救いの御計画の中にあるのだと言います。異邦人の救いをイスラエルがねたみ、もう一度神さまの御元に立ち帰るようにさせるために神さまは異邦人を救われるのだと言うのです。
13節で「わたしは異邦人のための使徒であるので、自分の務めを光栄に思います」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が、それも「何とかして自分の同胞にねたみを起こさせ、その幾人かでも救いたい」(14節)と思っているからです。パウロの世界宣教というのは、その根底の同胞イスラエルの救いがあるのです。それが神さまの御計画だと信じているわけですね。
その上で、パウロは13節から異邦人宣教とイスラエルの救いとの関係を譬えを用いながら説明しています。
16節をご覧下さい。「麦の初穂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練り粉全体もそうであり、根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枝もそうです。」これは神さまがイスラエルに与えてくださった契約のことを言っています。ここに「麦の初穂」と「根」とありますが、これはイスラエルの祖先であるアブラハム、そして、それに続くイサク、ヤコブ、と言った父祖たちのことを意味します。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が、「聖なるものであれば」、その子孫である「練り粉」「枝」に譬えているイスラエルも聖なる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ただ、ここで間違えてはならないのは、この聖なるものというのは、決して倫理的な意味で聖いと言われてい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聖書的に「聖なる」というのは、人間の聖さではなくて、神さまの聖さなのです。聖なる神さまに選ばれた、ただそれだけが理由で聖なるものであるのです。ですから、ここは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と言ったイスラエルの祖先が神さまに選ばれた、だから、その子孫であるイスラエルも聖なる者に他ならない、そう言う意味なのです。イスラエルがいかに堕落しようが、神の契約は無効にはならないからです。
17節にはオリーブの木の譬え話が出て来ますが、オリーブというのは、イスラエルにとって特別な意味を持っています。イスラエルというのは、まさに神さまが手塩に掛けて育てたオリーブの木であったのです。それが神の契約によって立っているイスラエルでした。しかし、その大切なオリーブの木の枝が、腐ってしまったのです。農夫である神さまは仕方なく、腐った枝を切り落とし、そこに、野生のオリーブである異邦人を接ぎ木しました。異邦人は、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と結ばれた神さまの契約につながれたわけですから、その養分(御言葉と御霊)を豊かに受け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これが、異邦人が神の民に加えられ救われた姿なのです。
皆さん、何度も言うようですが、ここに異邦人が救われる理由など一つもないのです。ただただ神さまの恵みであるわけです。だからパウロは異邦人キリスト者に警告しています。「しかし、ある枝が折り取られ、野生のオリーブであるあなたが、その代わりに接ぎ木され、根から豊かな養分を受けるようになったからといって、折り取られた枝に対して誇ってはなりません。誇ったところで、あなたが根を支えているのではなく、根があなたを支えているのです。」(17-18節)
皆さん、私たちは、野生のオリーブです。何の功もなく、救われる価値の一つさえない異邦人です。しかし、神さまは私たちを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と結ばれた救いの契約に接ぎ木してくださいました。それは全て主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贖いによる恵みなのです。だから、「思い上がってはなりません。むしろ恐れなさい。」(20節)とパウロは私たちに忠告しています。
21節には「神が自然に生えた枝を容赦されなかったとすれば、恐らくあなたを容赦されないでしょう。」と厳しい言葉が続いています。イスラエルに対して容赦しなかったわけですから、私たちに対してもその可能性があるわけですね。
神さまは、イスラエルに対しても異邦人である私たちに対しても容赦されないのです。しかし、最も容赦しなかった相手は誰だったかと言いますと、それは、神さまの御子であるキリストであったのです。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8章32節に「わたしたちすべてのために、その御子をさえ惜しまず死に渡された方は、御子と一緒にすべてのものをわたしたちに賜らないはずがありましょうか。」(8:32)とありました。神さまは御自分の怒りをすべてイエスさまに向け、裁かれました。イエスさまは私たちの代わりに切り取られたのです。そのキリストの十字架が与えられた以上、私たちに、「御子と一緒にすべてのもの」、すなわち永遠の命と神の国そのものを「賜らないはずがありましょうか」と、ここまで約束されているのです。
「だから、神の慈しみと厳しさを考えなさい」(22節)というのは、そういうことです。それなのに、私たちが故意にこれを放棄し、この神さまの憐れみにとどまらないのなら、神さまの厳しさは私たちに向けられるのです。実は、神さまの愛ばかりを強調しますと、甘い神さまの像を作り上げて民衆の支持を得た旧約時代の偽預言者と何ら変わらないものになってしまいます。昔も今も、私たち信仰者が最も警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サタンの罠です。主に従うことなく、恵みだけを求めるのは、見せかけの信仰です。ここでパウロが「神の慈しみにとどまる」(22節)と言っているのは、主に従うということです。
パウロはこのことについて既に2章で語っておりました。2章4節にこうあります。「あるいは、神の憐れみがあなたを悔い改めに導くことも知らないで、その豊かな慈愛と寛容と忍耐とを軽んじるのですか。」(2:4) 「神の憐れみ」が私たちを悔い改めへと導くのです。ですから、「神の慈しみにとどまる」というのは、私たちがまず具体的に悔い改めることから始まります。「とどまる」、と言いますとじっと動かないように思えてしまいますが、逆なのです。「神の慈しみにとどまる」ことは、積極的に悔い改めるという行為を生み出すのです。
そればかりではありません。悔い改めは、必然的にその果実を生み出します。「これに対して、霊の結ぶ実は愛であり、喜び、平和、寛容、親切、善意、誠実、柔和、節制です。これらを禁じる掟はありません。」(ガラテヤ書5:22、23)
これは、キリスト者が実際の信仰生活の中で実現していく善き業のことです。これらは、聖霊の結ぶ実であり、言い換えますと悔い改めの信仰生活の実り、と言って良いでしょう。ここで「親切」と訳されている言葉、これが「慈愛」、或いは「慈しみ」、とローマ書の方では訳されている言葉です。
ここで驚くべきことは、神さまの憐れみから私たちに注がれた慈愛が、私たちの善き業の一つに数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こんな弱い者が、愛、喜び、平和、寛容、親切、善意、誠実、柔和、節制、この新しい生活に目を向けることがいつも許されている。キリスト教信仰とは、すなわち新しい生活の連続であるのです。
私たちはこの新しい生活に目を向けることが許されているのです。これも福音です。この福音を私たちも噛みしめたいのです。勿論、これをすべて行うことが出来る人などいないでしょう。また、これが出来ないからといって、救われないわけ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イエスさまがこれをすべて実現してくださったから、私たちは不完全であっても、あたかもこれをすべて行っているかのように、永遠の命が約束され、天国に行くご褒美まで用意されているのです。神さまは、これほどまでに私たちを忠実な者とみなして、信用して遣わ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だからこそ、この神さまの憐れみに目を止め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2022년 9월 4일 주일예배(요약판)】
“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로마서 11장 11~24절
이스라엘의 구원의 은혜가 좌절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이방인으로 옮겨진 것입니다만, 바울은 그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구원을 이스라엘이 시기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 품으로 되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14절)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세계 선교라는 것은 그 근저의 동포 이스라엘의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13절에서 이방인 선교와 이스라엘의 구원과의 관계를 비유를 말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신 계약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이것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그리고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이삭, 야곱이라는 조상들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거룩한즉”, 그 자손인 “떡덩이”와 “가지”에 비유하고 있는 이스라엘도 거룩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여기서 틀려서는 안 되는 것은 이 거룩한 것은 결코 윤리적인 의미로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거룩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거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께 선택받았다, 그 이유만으로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하나님께 선택받았다, 그 때문에 그 자손인 이스라엘도 거룩한 자와 다름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타락한다해도 하나님의 계약은 무효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7절에는 감람나무의 비유가 나옵니다만, 감람나무(올리브 나무)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손수 공들여 기르신 감람나무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약으로 말미암아 서 있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중한 감람나무의 나뭇가지가 썩어 버린 것입니다. 농부인 하나님께서는 할 수 없이 썩은 가지를 잘라내어 돌감람나무(야생 올리브)인 이방인을 접붙이기하셨습니다. 이방인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계약하신 하나님 계약에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 양분(말씀과 성령)을 풍부하게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받은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번 말씀드리는 것 같은데, 여기에 이방인이 구원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7-18절)
여러분, 우리는 돌감람나무입니다. 아무 공적도 없고 구원받을 가치 하나조차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으신 구원의 계약에 접붙이기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두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로 말미암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절) 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21절에는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절) 라고 준엄한 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아끼지 않으셨기 때문이 우리에게 대해서도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대해서도 이방인인 우리에게 대해서도 용서해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용서하지 않으신 상대가 누구였느냐면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였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분노를 모두 예수님께 향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베어지게 되신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어진 이상 우리에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 즉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 그대로를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이렇게까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22절) 라는 것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고의로 이를 포기해서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엄하심은 우리에게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면 달콤한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내고 민중의 지지를 얻은 구약 시대의 가짜 선지자와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탄의 함정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 없이 은혜만을 구하는 것은 겉치레 신앙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22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주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이미 2장에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2장 4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같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2:4)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하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무른다”는 것은 우리가 우선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머무른다”고 말하면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무른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회개하는 행위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회개는 필연적으로 그 열매를 만들어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장 22-23절)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실제의 신앙 생활 속에서 실현해 가는 좋은 행위입니다. 이들은 성령이 맺으시는 열매이며, 바꿔 말하자면 회개의 신앙 생활의 결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 “자비”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이 로마서에서 “자애” 혹은 “인자하심”이라고 번역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자애가 우리의 좋은 행위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약한 자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이 새로운 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즉 새로운 삶의 연속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이것도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모두 다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또, 이것들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구원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것들을 모두 다 실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불완전이라도 마치 이것들 모두 다 행하고 있는 것같이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고 천국으로 가는 포상까지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토록 우리를 충실한 사람으로 간주하시어 믿고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