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10장 20절에서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가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10:20) 고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몇 백 년이나 하나님을 찾아 온 백성이 아닌 이방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늘의 11장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1절) 라는 물음으로부터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하나님께 버림받았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은 분명 구원은 이스라엘 밖으로 퍼져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신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그 증거로서 이스라엘인이며 베냐민 지파인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의 한 예로서 선지자 엘리야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단교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혼자 싸워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당시의 이스라엘왕인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의 미움을 받고 목숨을 위협받았습니다. 그처럼 대담하고 힘차게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운 엘리야였지만 마음이 약해지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단순히 엘리야의 신앙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넘치고 남을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쳐 버립니다. 인간인 이상 육체적인 피로와 영적인 피로가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리야는 고독을 느꼈습니다. 자기 혼자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약해집니다. 믿음이 강하고, 또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 괜찮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니까 혼자라도 괜찮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그래도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워줄 사람을 인간은 필요로 하는 법입니다. 그런 고독감에 시달리다 “나만 남았다”고 느끼면서 엘리야는 절망한 것입니다.
그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주었다”(4절) 고 대답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느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에게는 놀라움이자 기쁨이었습니다.
어디에도 신앙이 없는 것 같은 세상,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자신만이 남겨져 있는 것 같은 세상에, 사실은 축복받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남겨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남은 자 ”들을 마련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가혹한 체험을 바탕으로 회자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동포들이 채찍을 맞고 감옥에 갇히고 모욕을 당하는데, 자기 혼자만 고독하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동포에게서 구원을 결코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구원해 주셨고, 그리고 수는 적지만 이스라엘인의 그리스도인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절)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크리스천은 정말로 소수파입니다. 특히 지방으로 가면 갈 수록 고독감, 고립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 현실 문제로서 남아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절) 고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라는 문제입니다.
물론 신앙의 눈을 뜬다고 해도 이 세상적인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결정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금방 이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헤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기준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이 있는지 없는지입니다. 현재의 바알은 부나 명성으로 그 형태를 교묘히 바꿔가면서 우리를 우상 숭배로 유인합니다. 표면상은 크리스천이면서도 실제로는 바알에게 무릎을 굽히고 있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면서 그 이상으로 소중한 것을 소유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 중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좀처럼 자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6절에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못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행위가 인정되어 선택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닌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받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번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우상의 유혹에 승리하여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만나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몇 번이나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실패를 거듭해 온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한 번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에 포함되어 지금 승리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 가운데 구원받을 근거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기 때문에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 말씀 마지막 부분에는 구원으로부터 일단 거부된 이스라엘이 우둔해졌다는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우둔해졌다는 말은 9장에도 나오는 구절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더 완악하게 되고 완고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8절)
어째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을까요? 9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탈출을 거절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된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만, 바로 자신이 완악해졌다면 이해가 가지만 하나님께서 완악해지셨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너무 희박하거나 반항적이거나, 제멋대로일 때, 잠시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한국어로는 “혼미한 심령”, 즉 마음이 흔들려 흐트러져 있다는 뜻인데, 그런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 중심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고집할 때에 인간은 완악해집니다. 스스로는 영리하고 성실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함정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9절과 10절은 시편 69편의 다윗의 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이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때 풍성한 식탁에 둘러앉아 있어도 그것이 오히려 함정이 되어 벌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우둔해진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거기에도 곧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은 미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신 자들 가르키는데, 그것은 바울도 그랬습니다. 또 바로 우리 자신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이윽고 은혜를 깨닫게 되어 가는 법입니다. 그러한 기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것이 2000년 이상에 걸친 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 일어나 온 것입니다. 이 히로시마 교회 안에서도 계속 일어나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입니다.
2022年8月28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9章 28~30節
〇讃 頌 讃頌歌 572(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1章 1~10節
〇説 教 「救いの恵み(구원의 은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20(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8月 2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救いの恵み」 ローマ書 11章 1~10節
パウロが10章20節で「わたしはわたしを探さなかった者たちに見いだされ、わたしを尋ねなかった者たちに自分を現した」(10:20)と、イザヤ書の御言葉を語っているように、何百年も神さまを求めてきた民ではなく、異邦人に神さまはその救いを与えられました。それを受けて、今日の11章では、「では、尋ねよう。神は御自分の民を退けられたのであろうか」(1節)という問いから話をはじめています。
「イスラエルは完全に神から見捨てられたのか?」「けっしてそうではない。」パウロは、確かに救いはイスラエルの外に広がったけれども、神さまはイスラエルをお見捨てになったわけではないと語っています。まず、その証拠に、ベニヤミン族のイスラエル人であるこの私が救われていると語ります。
そして、パウロはイスラエルが見捨てられていないことの例として預言者エリアのことを上げて説明しています。エリヤは異教のバアルの預言者450人と一人で戦って歴史的勝利をおさめました。しかし、エリアは当時のイスラエル王であるアハブの妻であるイゼベルから憎まれ命を狙われます。あれほど大胆に力強くバアルの預言者たちと戦ったエリヤでありましたが、弱気になり、恐れを覚えます。
それは単純にエリヤの信仰が弱かった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エリヤは十分すぎるぐらいの信仰を持って神さまの栄光を現わすために戦ったのです。しかし、彼は疲れてしまったのです。人間である以上肉体的な疲れや霊的な疲れは出て来ます。そして、何よりエリアは孤独を感じていたのです。自分はたった一人で戦っている、そう考える時、人間は誰でも弱くなります。信仰が強ければ、また、神さまを信じていれば、大丈夫だ。神さまがついておられるんだから一人でも大丈夫だ、というのは真実ではあるのですが、それでも共に祈り、共に闘う人を人間は必要とするのです。そんな孤独感にさいなまれ「わたしだけが残った」とエリアは絶望したのです。
そのエリヤに対して、神さまは「バアルにひざまずかなかった七千人を自分のために残しておいた」(4節)と答えられました。エリヤは自分一人だけだと思っていたのですが、そうではなかったのです。それはエリヤにとって驚きであり喜びでした。
どこにも信仰がないような世の中、誰も彼も神さまから遠のいているように見え、自分だけが取り残されているような世界に、実は祝福されたたくさんの人々が今自分の目には見えないけれど神さまが残してくださっている。神さまがこの「残りの者」を用意して下さっているのです。
これはパウロ自身の苛酷な体験から語られている言葉なのです。イスラエルの同胞から鞭打たれ牢に入れられ侮辱され、自分だけが孤独にキリストを伝えているように見えながらも、神さまは同胞から救いを決して取り去ってはおられないということです。何よりも神さまは自分を救ってくださった。そして、数は少ないながらイスラエル人のキリスト者も起こされている。パウロはそこに神さまのイスラエルへの愛を見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パウロは「同じように、現に今も、恵みによって選ばれた者が残っています」(5節)と喜びを持って語っているのです。
日本ではクリスチャンというのは、まことに少数派です。特に、地方に行けば行くほど孤独感、孤立感というものを感じてしまうというのが現実問題としてあります。だからこそ、私たちにとって大切なことは、ここでパウロが言いますように「現に今も、恵みによって選ばれた者が残っています」(5節)と言えるか、言えないか、ということです。
勿論、信仰の目を開いてみても、この世的な事実が変わ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でも、信仰の目で見るならば、それが決定的な問題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は、すぐにこの世の基準で神さまの御業を測ろうとします。でも、聖書はそのような基準に興味を示していないのです。大切なのは、そこに、バアルにひざまずかなかった七千人がいるかいないかです。現在のバアルは、富であったり、名声であったり、その形を巧妙に変えながら、私たちを偶像崇拝へと誘います。建前上はクリスチャンであっても、実際バアルに膝をかがめている者は非常に多いのです。キリストを礼拝しながら、それ以上に大切なものを所有し崇拝してい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バアルにひざまずかなかった七千人に含まれているでしょうか。なかなか自信が持てません。でも、ここで大事なことは、私たちが「恵みによって選ばれた者」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6節に「もしそれが恵みによるとすれば、行いにはよりません」とあります。皆さん、良いでしょうか。これがとても大切なことなのです。
それは私たちが「バアルにひざまずかなかった」という行いが認められて選ばれたのではないのです。もしそうであれば、恵みはもはや恵みではなくなるわけです。私たちは、恵みによって選ばれ、バアルにひざまずかなかった、とされた者なのです。私たちの中で、一度もバアルにひざまずかなかった者など一人もおりません。この世のあらゆる偶像の誘惑に勝利して信仰の道を歩んでいる者がいたら一度お会いしたいくらいです。私たちは幾度もバアルに跪き、失敗を重ねてきた弱い者であるのです。
しかし、たった一人だけ、一度もバアルにひざまずかなかった方がおられます。それが十字架の主イエス・キリストです。私たちは、この十字架のキリストのゆえに、バアルにひざまずかなかった七千人に加えられ、今勝利の道を歩んでいるのです。これが救いの恵みです。私たちの内に救われる根拠が一つもないのに救われるから恵みなのです。
そして、今日の聖書箇所の最後の部分には、救いからいったん退けられたイスラエルがかたくなにされたということが語られています。かたくなということは9章でも出てきた言葉です。信じない者はなおいっそうかたくなにされるのです。「神は、彼らに鈍い心、見えない目、聞こえない耳を与えられた。」(8節)
なぜ、神さまがそのようなことをされるのでしょうか。9章ではイスラエルの民のエジプト脱出を拒んだエジプト王のファラオの心がかたくなにされたことが語られましたが、ファラオ自身がかたくなになったのなら分りますが、神がかたくなにされるというのは理解しがたい事がらです。今日の聖書箇所でも同様です。
人間の側の神さまへの思いがあまりに希薄であったり、反抗的であったり、身勝手である時、ひととき神さまはその心をかたくなにされます。「鈍い心」、韓国語では혼미한 심령となっています。昏迷している、心が迷い乱れているいうことですが、そういう心を与えられるのです。
神さまの恵みを恵みとして受け取れない、あくまでも自分中心で自分の行いに固執している時、人間はかたくなにされるのです。自分では賢いつもりでまじめなつもりで、結局自分自身で自分の罠に陥っていくのです。9-10節は、詩編69編のダビデの詩を引用していますが、人間が自分を誇るとき豊かな食卓を囲んでいてもそれがむしろ罠になり罰となるということです。
しかし、そのかたくなな者も、それで神さまから捨てておかれるわけではないのです。そこにもやがて神さまの恵みの計画は及ぶのです。まさに神さまからかたくなにされているような者、それはパウロもそうでした。また、私たち自身もそうでした。
しかし、そのような人が、やがて恵みに気づかされていくのです。そのような奇跡が起こるのです。それが2000年以上にわたる教会の歴史の中で起こり続けてきたのです。この広島教会の中でも起こり続けてきました。そして、これからも起こり続けることなのです。まさに神さまの恵みの奇跡です。
【2022년 8월 28일 주일예배(요약판)】
“구원의 은혜” 로마서 11장 1~10절
바울이 10장 20절에서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가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10:20) 고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몇 백 년이나 하나님을 찾아 온 백성이 아닌 이방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늘의 11장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1절) 라는 물음으로부터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하나님께 버림받았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은 분명 구원은 이스라엘 밖으로 퍼져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신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선 그 증거로서 이스라엘인이며 베냐민 지파인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이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의 한 예로서 선지자 엘리야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단교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혼자 싸워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당시의 이스라엘왕인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의 미움을 받고 목숨을 위협받았습니다. 그처럼 대담하고 힘차게 바알의 선지자들과 싸운 엘리야였지만 마음이 약해지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단순히 엘리야의 신앙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넘치고 남을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쳐 버립니다. 인간인 이상 육체적인 피로와 영적인 피로가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리야는 고독을 느꼈습니다. 자기 혼자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약해집니다. 믿음이 강하고, 또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 괜찮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니까 혼자라도 괜찮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그래도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워줄 사람을 인간은 필요로 하는 법입니다. 그런 고독감에 시달리다 “나만 남았다”고 느끼면서 엘리야는 절망한 것입니다.
그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주었다”(4절) 고 대답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느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에게는 놀라움이자 기쁨이었습니다.
어디에도 신앙이 없는 것 같은 세상,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자신만이 남겨져 있는 것 같은 세상에, 사실은 축복받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남겨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남은 자 ”들을 마련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가혹한 체험을 바탕으로 회자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동포들이 채찍을 맞고 감옥에 갇히고 모욕을 당하는데, 자기 혼자만 고독하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동포에게서 구원을 결코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구원해 주셨고, 그리고 수는 적지만 이스라엘인의 그리스도인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절)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크리스천은 정말로 소수파입니다. 특히 지방으로 가면 갈 수록 고독감, 고립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 현실 문제로서 남아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절) 고 말할 수 있는지 없는지라는 문제입니다.
물론 신앙의 눈을 뜬다고 해도 이 세상적인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결정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금방 이 세상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헤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기준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이 있는지 없는지입니다. 현재의 바알은 부나 명성으로 그 형태를 교묘히 바꿔가면서 우리를 우상 숭배로 유인합니다. 표면상은 크리스천이면서도 실제로는 바알에게 무릎을 굽히고 있는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예배하면서 그 이상으로 소중한 것을 소유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 중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좀처럼 자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6절에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못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행위가 인정되어 선택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닌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받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한 번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우상의 유혹에 승리하여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만나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몇 번이나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실패를 거듭해 온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한 번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에 포함되어 지금 승리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 가운데 구원받을 근거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기 때문에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 말씀 마지막 부분에는 구원으로부터 일단 거부된 이스라엘이 우둔해졌다는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우둔해졌다는 말은 9장에도 나오는 구절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더 완악하게 되고 완고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8절)
어째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을까요? 9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 탈출을 거절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된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만, 바로 자신이 완악해졌다면 이해가 가지만 하나님께서 완악해지셨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너무 희박하거나 반항적이거나, 제멋대로일 때, 잠시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한국어로는 “혼미한 심령”, 즉 마음이 흔들려 흐트러져 있다는 뜻인데, 그런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자기 중심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고집할 때에 인간은 완악해집니다. 스스로는 영리하고 성실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함정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9절과 10절은 시편 69편의 다윗의 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이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때 풍성한 식탁에 둘러앉아 있어도 그것이 오히려 함정이 되어 벌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우둔해진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거기에도 곧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은 미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신 자들 가르키는데, 그것은 바울도 그랬습니다. 또 바로 우리 자신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이윽고 은혜를 깨닫게 되어 가는 법입니다. 그러한 기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것이 2000년 이상에 걸친 교회의 역사 속에서 계속 일어나 온 것입니다. 이 히로시마 교회 안에서도 계속 일어나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