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오늘의 성경 말씀 가운데,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있어서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실족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서에서는 나쁜 사람들이며 융통성이 없고 사람을 심판하는 차가운 사람들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율법의 의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면서도 의에 이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행동함으로 의해 의의 율법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구세주를 고대했을 터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딪히는 돌”이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사야 8장 14절과 28장 16절을 조합하여 인용하면서 33절에서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 라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시온, 즉 예루살렘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설마 나사렛 예수가 그들이 대망하던 약속의 구세주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구세주를 고대한 이스라엘은 그 구세주에게 완전히 부딪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부딪칠 돌에 부딪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단 것으로 인류의 구원이 실현되고, 이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실망하지 않는 놀라운 사태가 시작되고, 의를 구하지 않았던 이방인이 의를 얻게 됩니다.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율법을 준수하고 있다고 착각하여, 예수님을 죽이고 점점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남겨진 이방인들은, 죄인의 친구 십자가의 예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점점 구원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즉, 주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는, 민족적인 잣대로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가 아니라, 믿는지 믿지 않는지라는 한가지 요소에 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믿으면 민족이나 성별 혹은 신분 같은 것과는 일절 상관없이 하나님의 긍휼을 그대로 받고 구원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는데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의를 추구한 것도 아닌데 의롭다고 평가받은 염치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들의 신앙에 있어서 자신의 행동이 올바른지 어떤지에 대한 것으로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오직 주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으로 인해 구원받았기 때문에, 언제나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행하심이나 마음에 따르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실패하거나 그야말로 의심하거나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올바른지 어떤지 걱정하기 전에, 주 예수님의 구원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하게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의 행동이 모두 다 올바르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평범하게 생각하면 누구나 자기들의 행동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성실한 사람들은 오로지 정의만을 요구했습니다.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율법을 세분화하여 자신들이 어떻게든 지킬 수 있도록 섬세한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세밀해지면 세밀해질수록 하나님께서 본래 율법을 주신 그 목적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대망한 구세주가 오셨음에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우리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실현된 것입니다.
단지 이 주님이신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을 모르는 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근원인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실족한 것은 그 행동에 대한 열정이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10장 2절에서 말합니다.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게 아니라 다만 일방적으로 주어진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자신들의 올바른 행동에 기준을 두고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실족합니다. 십자가의 속죄를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도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릅니다. 자신의 올바름이 기준일 때 우리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우리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실족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때때로 우리도 자신의 행동이나 가치에 얽매여 생각해 버립니다. 나에게 사랑받을 조건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미 주어졌는데도 우리는 행동함에 있어서 때때로 사랑을 요구합니다. 이미 사랑이 주어진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려고 해서 지쳐 갑니다. 반대로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좋다는 태도도 “올바른 지식”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참으로 이해했을 때, 인간은 그 때야 비로소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올바른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려고 하는 삶의 태도로 바꿔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은 아무래도 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크리스천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실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나약함이나 교제 안에서 실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의 길에는 십자가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약함의 상징, 어리석음의 상징, 불명예스럽기 그지없는 징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세상의 힘이나 이 세상의 논리로 혹은 나의 형편과 사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반드시 실족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실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의 주님께, 그리고 거기로부터 초래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돌아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다가 실족하는 자가 아니라, 되돌아오는 것으로 인해 구원받는 자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십자가를 우러러보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약속된 소망을 가지고, 비록 죄를 범할지라도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부딪히는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야말로 비로소 우리의 방패, 우리의 디딤돌이자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2022年7月31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28章 16節
〇讃 頌 讃頌歌 538(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로마서) 9章 30節~10章4節
〇説 教 「失望に終わらない(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36(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7月 3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失望に終わらない」 ローマ書 9章30~10章4節
パウロは今日の御言葉の中で、人間に救いをもたらしたはずの主イエス・キリストが人間にとって「つまずきの石、妨げの岩」となっていると言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につまずいた代表格が福音書に出てくるファリサイ派や律法学者たちです。彼らは福音書においては悪役で、石頭で、人を裁き、冷たい人々だと感じられます。しかし、実際は、まじめな人々だったのです。ひたすら律法の義を求めていたのです。
彼らが律法を守りながらも、義に達す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のは、彼らが行いによって義の律法に達せられると考えていたからと語ります。これが救い主を待ち望んでいたはずの神の民イスラエルの大きな過ちであったのです。
では、この「つまずきの石」とは何でしょうか。パウロは、イザヤ書8章14節と28章16節を組み合わせて引用しながら33節で、「『見よ、わたしはシオンに、つまずきの石、妨げの岩を置く。これを信じる者は、失望することがない』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と語っています。
言うまでもなく、この「つまずきの石」というのが、主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です。イザヤ書の預言通り、主なる神さまは、御子イエスキリストをシオン、すなわちエルサレムに遣わしました。ところが、エルサレムは、よもやナザレのイエスが、彼らの待ちに待った約束の救い主であるなどとは微塵も思わず十字架につけて殺してしまいました。救い主を待ち望んだイスラエルはその救い主に見事につまずいたのです。ところがイスラエルが、つまずきの石につまずき、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つけたことで、人類の救いが実現し、この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を信じる者は、失望することがない、という驚くべき事態が始まり、義を求めなかった異邦人が、義を得たのです。
一方、イスラエルの人々は自分たちの行いを正当化し、律法を遵守していると勘違いして、イエスさまを殺し、どんどん救いから離れていきました。しかし、取り残された異邦人は、罪人の友十字架のイエスさまに頼るしかなかったので、どんどん救いに近づいていったわけです。すなわち、主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後、神の民であるかないかは、民族的な枠組みのユダヤ人か異邦人かではなくて、信じるか信じないか、というこの一点にかかっているわけです。
そして、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を信じるのであれば、民族や性別、或いは身分のようなものとは一切無関係に神さまの憐れみをそのまま受けて救いの中に入れられるのです。私たちも、かつては神の民ではなかったのに、ただ神さまの憐れみにより、神の民とされたのです。私たちは別に義を追い求めたわけでもないのに、義とされた虫のいい連中なの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は自分たちの信仰において、自分の行いが正しいかどうかということで萎縮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勿論、私たちはただ主の愛と赦しによって救われたのですから、いつも感謝の思いから、イエスさまの行い、またイエスさまの思いに沿った行動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も、時には失敗したり、それこそ疑ったりするのが私たちです。ですから、私たちの行いがすべて正しいのかどうなのかと心配する前に、主イエスさまの救いを信じ、すべてを神さまに委ねて、謙遜に生きて行くしかなのです。
そもそも、私たちの行いがすべて正しいなどと誰がいえるでしょうか。普通に考えたら、誰でも自分たちの行いには限界があることは分かるはずです。
それなのに、イスラエルの真面目な人々は、ひたすら正しさを求めました。自分たちの限界を認めたくないがゆえに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律法を細分化し、自分たちが何とか守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細かなルールを作りました。それが細かくなればなるほど、神さまが本来、律法を与えたその目的からは遠く離れてしまいます。
そのために、イスラエルの人々が待望した救い主が来られたのに、それに気づくことが出来ないのです。人間の救いは、私たちには計り知れない神さまの御計画によって、全く気が付かないうちに実現したわけです。
ただ、この主なる神さまの御業は、神の愛、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示される愛を知らない限り、理解することが出来ないのです。自分の行いに基盤を置いている限り、キリストの愛は見えてきません。キリストの愛の源である十字架を理解出来ないのです。
パウロはイスラエルがつまずいたのはその行いにおける熱心さが「正しい認識に基づくもの」ではなかったからだと10章2節で語ります。「正しい認識」というのは、神さまの愛が自らの行いによって与えられるのではなく、ただ一方的に与えられるものであるという認識にほかなりません。
それは現代に生きる私たちにもあてはまります。自分たちの正しさ、行動に基準を置いている限り、イエス・キリストを理解できません。つまずきます。十字架の贖いのことを頭では理解していても本当のキリストの愛はわかりません。自分の正しさが基準であるとき、私たちは十字架を理解出来ないのです。
教会に集う私たちは、イエスさまのことを聞いて知っています。だからキリストにつまずいていないと感じますが、往々にして私たちもまた自分の行動や価値に縛られて考えてしまいます。自分の側に愛される条件が必要だと感じてしまいます。キリストの愛はすでに与えられているのに、私たちは行動において往々にして愛を求めるのです。すでに愛が与えられていることを認識出来ず、立派なクリスチャンになろうとして、疲れていきます。逆に、すでに愛されているのだから何をしても良いのだという態度も「正しい認識」に基づいた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の無条件の愛を本当に知った時、人間はその時にこそ、正しい行いが出来るようになるからです。
パウロが10章4節で「キリストは律法の目標であります」と言っているのは、そういうことです。神さまの愛をすでにいただいていることを正しく認識した時、私たちは本当の意味で正しい者として生きていくことが出来ます。神さまの愛の光の中で、神さまの愛に応えようとする生き方に変えられていきます。
しかし、人間の認識はどうしても弱いものです。神さまの愛を正しく認識できなくなります。そのためにクリスチャンと言っても、主イエス・キリストに躓く者がいます。或いは、キリストの身体である教会の弱さや、交わりの中で躓く方もいらっしゃいます。いずれにしても、大切なのは、私たちの救いの道には十字架が立ってい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弱さの象徴、愚かさの象徴、不名誉極まりない印、それが十字架です。この十字架のもとで、神の国は完成に向かっ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この世の力や、この世の論理で、或いは私の都合で十字架を仰ぐ時、必ず躓きます。主イエス・キリストに躓くのです。
だからこそ、私たちはいつも十字架の主に、また、そこからもたらされた神さまの愛に立ち帰る必要があるのです。私たちは、行いで救われようと躓くのではなく、立ち帰ることによって救われる 者なのです。
私たちは、信仰の目で十字架を見上げ、御言葉によって約束された希望を持ちながら、たとえ罪を犯したとしても悔い改めて、主イエス・キリストに立ち帰るのです。その時、つまずきの石、妨げの岩こそが、我がやぐら、我が盾となるのです。
【2022년 7월 31일 주일예배(요약판)】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로마서 9장 30~10장 4절
바울은 오늘의 성경 말씀 가운데,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있어서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실족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서에서는 나쁜 사람들이며 융통성이 없고 사람을 심판하는 차가운 사람들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율법의 의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면서도 의에 이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행동함으로 의해 의의 율법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구세주를 고대했을 터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딪히는 돌”이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이사야 8장 14절과 28장 16절을 조합하여 인용하면서 33절에서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 라는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시온, 즉 예루살렘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설마 나사렛 예수가 그들이 대망하던 약속의 구세주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구세주를 고대한 이스라엘은 그 구세주에게 완전히 부딪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부딪칠 돌에 부딪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단 것으로 인류의 구원이 실현되고, 이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실망하지 않는 놀라운 사태가 시작되고, 의를 구하지 않았던 이방인이 의를 얻게 됩니다.
한편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율법을 준수하고 있다고 착각하여, 예수님을 죽이고 점점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남겨진 이방인들은, 죄인의 친구 십자가의 예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점점 구원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즉, 주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는, 민족적인 잣대로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가 아니라, 믿는지 믿지 않는지라는 한가지 요소에 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믿으면 민족이나 성별 혹은 신분 같은 것과는 일절 상관없이 하나님의 긍휼을 그대로 받고 구원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는데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의를 추구한 것도 아닌데 의롭다고 평가받은 염치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들의 신앙에 있어서 자신의 행동이 올바른지 어떤지에 대한 것으로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오직 주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으로 인해 구원받았기 때문에, 언제나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행하심이나 마음에 따르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실패하거나 그야말로 의심하거나 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올바른지 어떤지 걱정하기 전에, 주 예수님의 구원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하게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의 행동이 모두 다 올바르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평범하게 생각하면 누구나 자기들의 행동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성실한 사람들은 오로지 정의만을 요구했습니다.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율법을 세분화하여 자신들이 어떻게든 지킬 수 있도록 섬세한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세밀해지면 세밀해질수록 하나님께서 본래 율법을 주신 그 목적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대망한 구세주가 오셨음에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우리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실현된 것입니다.
단지 이 주님이신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을 모르는 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근원인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실족한 것은 그 행동에 대한 열정이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10장 2절에서 말합니다.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게 아니라 다만 일방적으로 주어진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자신들의 올바른 행동에 기준을 두고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실족합니다. 십자가의 속죄를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도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릅니다. 자신의 올바름이 기준일 때 우리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우리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실족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때때로 우리도 자신의 행동이나 가치에 얽매여 생각해 버립니다. 나에게 사랑받을 조건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미 주어졌는데도 우리는 행동함에 있어서 때때로 사랑을 요구합니다. 이미 사랑이 주어진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려고 해서 지쳐 갑니다. 반대로 이미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좋다는 태도도 “올바른 지식”에 근거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참으로 이해했을 때, 인간은 그 때야 비로소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고 있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올바른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빛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려고 하는 삶의 태도로 바꿔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은 아무래도 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크리스천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실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나약함이나 교제 안에서 실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의 길에는 십자가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약함의 상징, 어리석음의 상징, 불명예스럽기 그지없는 징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세상의 힘이나 이 세상의 논리로 혹은 나의 형편과 사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반드시 실족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실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의 주님께, 그리고 거기로부터 초래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돌아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다가 실족하는 자가 아니라, 되돌아오는 것으로 인해 구원받는 자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십자가를 우러러보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약속된 소망을 가지고, 비록 죄를 범할지라도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부딪히는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야말로 비로소 우리의 방패, 우리의 디딤돌이자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