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반문하면 안 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석연치 않은 생각을 마음에 숨기고 억지로 억누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시는 것을 우리가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불만을 품는 것은 그야말로 말대꾸이며, 그 마음을 억누르려고 하는 자세도 소극적인 말대꾸입니다. 우리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려고 납득시키지 말고 하나님께 더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것은 왜 그런거지요?” 라고 묻는 자세는 말대꾸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한 자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1절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실 때에도 자유롭게 하나님의 주권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귀히 쓰시고 또 어떤 사람은 천히 쓰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역시 하나님께서는 불공평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에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을 주시고 나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다든지, 나는 고생만 하고 있는데, 저 사람은 계속해서 평안한 나날을 주셨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이야기로서 생각하자면 거기에는 더 큰 뜻이 있습니다.
이단이라고 불리는 종교는 성경 말씀을 자기들에게 형편이 좋은 부분만을 골라서, 그것을 강조해서 가르칩니다. 그 종교의 가르침의 단편만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성경 말씀을 하고 있는 것 같고 기독교 답게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비유로서 “토기장이가 만든 토기의 만듦새가 나쁘면 깨고 버리지요. 그것과 똑같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보고 만듦새가 나쁘면 깨지고 버림을 받는 거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에서는 똑같이 토기의 비유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론이 전혀 다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버림을 받는다, 멸망한다는 공포심을 부추기는 이야기로서 토기의 비유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 마지막 구절에 소돔이나 고모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만, 틀림없이 우리도 소돔과 고모라의 마을처럼 멸망되는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서 처음에 창조하실 때에 만들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비유하자면 만듦새가 나쁜 토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구원받았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토기 자체의 만듦새가 좋고 나쁨과는 일절 상관없고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긍휼과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듦새가 좋든 나쁘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긍휼과 사랑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22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2-24절)
공포심 때문에 신앙으로 세뇌되어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말하는 것이 본래의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칫하면 신흥 종교처럼 바울의 말을 해석해 버립니다. 만듦새가 나쁘면 버림을 받는다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의 근원에 있는 것은 역시 인간 중심의 사고입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을 자신 측에 두고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자기 자신을 판단하여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고 느끼고 스스로 자신을 심판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나는 깨지고 버림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마음 한 켠에서 느끼고 맙니다. 즉 “어째서 나는 이런 일을 겪게 되는 것이냐”고 하나님께 말대꾸하는 마음도, 그것과는 반대로 “나는 깨지고 버림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두려워하는 마음도, 모두 인간 중심의 가치관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하심을 신뢰할 수 없을 때, 불만이나 공포가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바울은 25절 이후에서 구약 성서의 호세아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호세아 2장 23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25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본래는 분노의 그릇으로서 깨져야만 하는 토기와 같은 인간을 긍휼히 여겨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라는 것은, 호세아의 간음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거역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나쁜 여자와 결혼하라, 그리고 그 여자의 아이들을 받아들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터무니없는 것을 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관대함과 인내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의 시대, 하나님께 거역했던 이스라엘은 음란한 여자 그 자체였습니다. 또 자신의 가치관을 절대시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 이외의 것을 신으로 삼고 있고 있는 현대의 인간들도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보면 음란한 여자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음란한 여자를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남편처럼 하나님께서는 행동하셨습니다.
또, 이사야 10장 22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27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본래는 구원받을 것이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했음에도 “남은 자”를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남은 자”란 본래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그 “남은 자”가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남은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며 이방인입니다. 원래 처음에는 선택받지 못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원래 선택받지 못했던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넘쳐 흘러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자유로운 선택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남은 자”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도 또한 넘쳐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인간 중심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 속에 교회도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그릇으로서 서 있습니다. 그 교회에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그릇으로서 쓰여지는 것입니다.
2022年7月24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ホセア書(호세아) 2章 25(23)節
〇讃 頌 讃頌歌 310(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로마서) 9章 19~29節
〇説 教 「あなたは憐れみの器です(당신은 긍휼의 그릇입니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36(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7月 2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あなたは憐れみの器です」 ローマ書 9章 19~29節
パウロは言います。「人よ、神に口答えするとは、あなたは何者か。」(20節)
神さまに口答えをしてはいけない。神さまに対し従順でなければならいと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それで、私たちは、釈然としない思いを心に秘めながら、無理やり抑えつけようとします。しかし、そういった姿勢は、ある意味、神さまへの信頼を欠いた姿勢なのです。
神さまの主権によってなさることは、私たちにはすべてを理解することが出来ません。理解できないからと言って、不満を抱くことは、それこそ口答えであり、その気持ちを抑えつけようとする姿勢も消極的な口答えなのです。私たちは納得できないことを無理やり神さまの御心に合わせようと納得させるのではなく、もっと神さまに問うべきです。これはどういうことなのか?これはどうしてですか?と神さまに問うていく姿勢は口答えではありません。あくまでも神さまへの信頼を基にした姿勢なのです。
パウロはここで、焼き物の話をしています。21節です。「焼き物師は同じ粘土から、一つを貴いことに用いる器に、一つを貴くないことに用いる器に造る権限があるのではないか。」
何を語っているのかと言いますと、神さまは私たちをお造りなることにおいても自由に、神さまの主権のうちにお造りなる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ある人は貴いことに、またある人は貴くないことに用い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
私たちは、やはり神さまは不公平だと思います。あの人にはきらきらした才能を与えて自分には何も与えてくださらないとか、私は苦労ばかりなのに、あの人はずっと平安な日々を与えられているとか考え始めます。しかし、救いの物語として考えるならば、そこにはもっともっと大きなことがあるのです。
異端と呼ばれる宗教では、聖書の言葉を自分たちに都合のよい箇所だけを選び、それを強調して教えます。その宗教の教えの断片だけを聞くと、何となく聖書の話のようで、キリスト教らしく聞こえます。でも、実際は根本的に全く違います。
例えば、神さまの言うことを聞かなかったら滅びるのだと言います。そして、その譬えとして「陶器を造る人は自分が造った陶器の出来が悪ければ、割って捨てますよね。それと同じように、私たちも神さまから見て、出来が悪ければ割られて捨てられるんです」と言うわけです。
しかし、正当なキリスト教では、同じように焼き物の譬え話をしていながら、結論が全く違うのです。今日の聖書箇所は、捨てられる、滅びるという恐怖心を煽る話として、焼き物のたとえが挙げられ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今日の聖書箇所の最後に、ソドムやゴモラという名前が出て来ますが、確かに、私たちもソドムとゴモラの町のように、滅ぼされる人間でした。神さまが良いものとして最初の創造の時に造ってくださったにも拘らず、罪のために、言ってみればできの悪い焼き物と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神さまの怒りの器となってしまいました。そんな私たちが、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憐みを受けて救われているのだとパウロは語ったのです。
それはその焼き物自体のできの良し悪しには一切関係がなく、ただただ神さまの自由な憐みによるのだと語られています。出来が良かろうが悪かろうが、キリストのゆえに、キリストを信じる者は神さまから捨てられることはない。それは神さまご自身の憐みのゆえなのだと、聖書は語っています。
それが22節です。「神はその怒りを示し、その力を知らせようとしておられたが、怒りの器として滅びることになっていた者たちを寛大な心で耐え忍ばれたとすれば、それも、憐れみの器として栄光を与えようと準備しておられた者たちに、御自分の豊かな栄光をお示しになるためであったとすれば、どうでしょう。神はわたしたちを憐れみの器として、ユダヤ人からだけでなく、異邦人の中からも召し出してくださいました。」(22-24節)
恐怖心で信仰へと洗脳していくのではなく、神さまの憐みを語るのが本来のキリスト教です。しかし、私たちはともすれば、新興宗教のようにパウロの言葉を読んでしまうのです。出来が悪ければ捨てられてしまうと恐れてしまうのです。その恐れの根源にあるのは、やはり人間中心の思いです。価値の判断基準を自分の側に置いているとき、神さまの憐みの大きさを知ることはできません。自分の価値観で自分を測って、自分はどうしようもない人間だと感じて、自分で自分を裁いてしまいます。そして、こんな私は、割られて捨てられても仕方がないと心のどこかで感じてしまうのです。つまり、「なぜ私はこんな目に遭わされるのか?」と神さまに口答えする心も、それとは反対に「私は割られて捨てられても仕方ない」と怖れる心も、いずれも人間中心の価値観から出てくるのです。神さまの主権と憐みに信頼できない時、不満やら恐怖やらが私たちの心に入り込んできます。
それから、パウロは25節以降で旧約聖書のホセア書やイザヤ書の言葉を引用しています。まず、ホセア書2章25節の御言葉を引用して「わたしは、自分の民でない者をわたしの民と呼び、愛されなかった者を愛された者と呼ぶ」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つまり、本来は怒りの器として割られるべき焼き物であった人間をも憐み、「神の子」と呼ばれるようにしてくだったと言うことです。ホセア書というのは、ホセアの姦淫の妻を下敷きに、神さまに逆らう民への神さまの愛が記されています。ホセア1章で、神さまがホセアに「行け、淫行の女をめとり、淫行による子らを受け入れよ」と言われます。他の男と関係を持つような悪い女と結婚をせよ、そしてその女の子供たちを受け入れよと神さまはおっしゃったのです。とんでもない話です。しかし、そのとんでもないことをなさったのは、神ご自身でした。あり得ないような寛大さと忍耐を持たれたのが神さまなのです。ホセアの時代、神さまに逆らっていたイスラエルは淫行の女そのものでした。また、自分の価値観を絶対として、神さまを信頼せず、神さま以外のものを神としている現代の人間もまた神さまから見たら淫行の女そのものです。しかし、そのような人間を神さまは憐れんで下さったのです。淫行の女を受け入れる愚かな夫のように、神さまはふるまわれました。
また、イザヤ書10章22節の御言葉を引用して「たとえイスラエルの子らの数が海辺の砂のようであっても、残りの者が救われる」と語っています。つまり、本来は救われるはずだったイスラエルが神さまに反逆してもなお、「残りの者」を神さまは救われるというのです。「残りの者」というのは、本来は、救いの中に入れられない人々のことです。その「残りの者」が救われているというのです。ここでパウロが残りの者として語っているのが、ユダヤ人キリスト者であり、異邦人です。そもそも最初は選ばれてはいなかった異邦人がキリストを信じて救われているのであり、神さまの救いを受け入れず、滅びるしかないイスラエルの人々の中に、キリストを信じて救われている者たちがい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もまた「残りの者」なのです。神さまの溢れる憐みゆえに、もともとは選ばれていなかった者にまで憐みが溢れ出て注がれました。神さまの憐みのゆえに、その自由な選びの中に入れられました。その「残りの者」の共同体が教会です。教会もまた溢れ出る神さまの憐みの内にあります。
ところが、この神さまの憐みは、人間中心の価値観では到底理解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神さまの自由な主権のうちに教会も立っています。神さまの憐みの器として立っています。その教会につながる私たち一人一人が、貴い器として用いられていくのです。
【2022년 7월 24일 주일예배(요약판)】
“당신은 긍휼의 그릇입니다” 로마서 9장 19~29절
바울은 말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20절)
하나님께 반문하면 안 되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석연치 않은 생각을 마음에 숨기고 억지로 억누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세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하시는 것을 우리가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불만을 품는 것은 그야말로 말대꾸이며, 그 마음을 억누르려고 하는 자세도 소극적인 말대꾸입니다. 우리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려고 납득시키지 말고 하나님께 더 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것은 왜 그런거지요?” 라고 묻는 자세는 말대꾸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한 자세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1절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실 때에도 자유롭게 하나님의 주권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귀히 쓰시고 또 어떤 사람은 천히 쓰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역시 하나님께서는 불공평하시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에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을 주시고 나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다든지, 나는 고생만 하고 있는데, 저 사람은 계속해서 평안한 나날을 주셨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이야기로서 생각하자면 거기에는 더 큰 뜻이 있습니다.
이단이라고 불리는 종교는 성경 말씀을 자기들에게 형편이 좋은 부분만을 골라서, 그것을 강조해서 가르칩니다. 그 종교의 가르침의 단편만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성경 말씀을 하고 있는 것 같고 기독교 답게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비유로서 “토기장이가 만든 토기의 만듦새가 나쁘면 깨고 버리지요. 그것과 똑같이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보고 만듦새가 나쁘면 깨지고 버림을 받는 거에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에서는 똑같이 토기의 비유 이야기를 하면서도 결론이 전혀 다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버림을 받는다, 멸망한다는 공포심을 부추기는 이야기로서 토기의 비유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 마지막 구절에 소돔이나 고모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만, 틀림없이 우리도 소돔과 고모라의 마을처럼 멸망되는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서 처음에 창조하실 때에 만들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비유하자면 만듦새가 나쁜 토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구원받았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토기 자체의 만듦새가 좋고 나쁨과는 일절 상관없고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긍휼과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듦새가 좋든 나쁘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긍휼과 사랑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22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22-24절)
공포심 때문에 신앙으로 세뇌되어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말하는 것이 본래의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칫하면 신흥 종교처럼 바울의 말을 해석해 버립니다. 만듦새가 나쁘면 버림을 받는다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의 근원에 있는 것은 역시 인간 중심의 사고입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을 자신 측에 두고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자기 자신을 판단하여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고 느끼고 스스로 자신을 심판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런 나는 깨지고 버림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마음 한 켠에서 느끼고 맙니다. 즉 “어째서 나는 이런 일을 겪게 되는 것이냐”고 하나님께 말대꾸하는 마음도, 그것과는 반대로 “나는 깨지고 버림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두려워하는 마음도, 모두 인간 중심의 가치관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하심을 신뢰할 수 없을 때, 불만이나 공포가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바울은 25절 이후에서 구약 성서의 호세아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호세아 2장 23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25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본래는 분노의 그릇으로서 깨져야만 하는 토기와 같은 인간을 긍휼히 여겨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라는 것은, 호세아의 간음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거역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나쁜 여자와 결혼하라, 그리고 그 여자의 아이들을 받아들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터무니없는 것을 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관대함과 인내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의 시대, 하나님께 거역했던 이스라엘은 음란한 여자 그 자체였습니다. 또 자신의 가치관을 절대시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 이외의 것을 신으로 삼고 있고 있는 현대의 인간들도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보면 음란한 여자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음란한 여자를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남편처럼 하나님께서는 행동하셨습니다.
또, 이사야 10장 22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27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본래는 구원받을 것이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했음에도 “남은 자”를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남은 자”란 본래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그 “남은 자”가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남은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며 이방인입니다. 원래 처음에는 선택받지 못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원래 선택받지 못했던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넘쳐 흘러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자유로운 선택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남은 자”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도 또한 넘쳐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인간 중심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 속에 교회도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그릇으로서 서 있습니다. 그 교회에 연결되어 있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한 그릇으로서 쓰여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