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더라도 눈 앞의 현실 가운데 여러 어려움에 빠져 괴로워하여 신앙조차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 속에도 많은 결점이나 약함도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 기도하라, 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몸소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괴로워했고 전도 여행 일정을 여러 번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곧바로 방문한다, 곧 가겠다 ”고 약속해 놓고 그러지 못해서 교회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오해를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전도 여행 자체도 많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자기 자신이 안고 있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는 현실적으로는 축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9절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19절) 피조물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에 둘러싸여 나타나고 새로운 하늘과 땅이 창조되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같이 우리도 한숨과 함께 이 소망이 실현되는 것을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2-23절)
여기서 바울은 “함께 탄식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모두 다 탄식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여러 동물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탄식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더이상 아픔도 걱정도 없고 괴로움도 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똑같이 탄식하면서 자기 인생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탄식”을 “낳음의 괴로움”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낳음의 괴로움”, 그것은 단순한 괴로움이 아닙니다. 대단한 고통입니다만, 그 앞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소망의 탄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탄식은 소망을 가져온다, 소망으로 바뀐다, 그래서 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래의 소망, 이 괴로움이 소망으로 바뀐다고 말해도 실제로는 이 “탄식”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울만 해도 병에 시달리고 또 박해에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는 어쩔 도리가 없고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태어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문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성경에는 교회에 써 보낸 바울의 편지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바울의 전도가 막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찌할 도리 없이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편지가 지금 성경에 기록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신앙을 전하게 되리라고는 바울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리고 괴로움 가운데 탄식하면서 써 보낸 말들로 교회 사람들이 실망 가운데 용기를 얻었고 탄식하면서 걷는 사도 바울과 탄식을 함께 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이는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지금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닙니다. 현시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고대하는 것이야말로 소망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소망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결코 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걸을 때, 이 세상에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종말의 소망을 믿고 그것을 고대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고아 같은 마음이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을 때, 이제 기도하는 것조차 할 수 없을 때, 성령께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탄식으로 우리를 중재해 주십니다. 기도할 수 없는 우리 대신 우리의 말로 할 수 없는 마음을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전해주십니다.
우리는 고아처럼 고독으로 가는 정처없이 어찌할 바를 몰라도 성령의 중재 때문에 위로받는 것입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다시 소망을 믿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우리 인생을 직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직물은 날실과 씨실로 무늬를 짜 넣어 갑니다. 그 직물 속에 짜 넣고 있는 것이 우리의 나날입니다. 직물을 짜고 있는 사람은 그게 어떤 무늬가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인 우리는 어떤 무늬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나날에는 밝은 날도 있고 어두운 날도 있습니다. 왜 여기서 이런 새까만 실이 짜 넣어지고 있는지 그 때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덤불같은 회색이 아니라 더 밝은 블루의 실이라면 좋겠다, 선명한 붉은 실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짜고 계시는 직물의 아름다움에 싫다고 생각한 검은 실도 회색의 실도 하나님의 직물의 아름다운 무늬에 꼭 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의 실이 모두 다 아름답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나날의 고생이나 슬픔이 조금도 쓸데없지 않고 그 모든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아름답게 짜이고 완성을 위하여 필요했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탄식하고 괴로워하면서 걸어 갈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재받으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도 안에서 변해 갑니다. 그것을 믿으면서 이 일주일도 살아 갑시다.
2022年6月2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14章 16~18節
〇讃 頌 讃頌歌 369(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8章 18~30節
〇説 教 「聖霊が万事を益となるように共に働いて下さる
(성령께서 모든 것을 합하여 이루시느니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52(全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6月 2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聖霊が共に働いて下さる」 ローマ書 8章 18~30節
私たちは信仰を持っていたとしても、目の前の現実の中で様々な困難を抱え、悩み苦しみ、信仰さえ揺れ動く時があります。私たち自身の中にもたくさんの欠点や弱さもあります。どんな時にも神さまに感謝しなさい、祈りなさいということは分かっています。でも、感謝することも祈ることも出来ない時もあるのです。パウロはそのことを身をもって良く分かっていました。
パウロは持病を抱えていました。そのために苦しみ、伝道旅行の予定を何度も変更せざるを得ませんでした。「すぐに訪問する、間もなく行く」と約束しておきながら、それが出来ず、教会員たちに失望を与えることもありました。そのためにパウロは誤解を受けることもあったのです。伝道旅行自体も多くの困難があります。それに加え、自分自身が抱える困難もありました。パウロの伝道というのは、現実的には、祝福とは遠く離れたものであったのです。
しかし、パウロはこのような困難を抱えているのは何も私たちだけではないと言います。19節です。「被造物は、神の子たちの現れるのを切に待ち望んでいます。」(19節) 被造物世界全体が、神さまの子どもたちが栄光に包まれて現れ新しい天と地が創造される日を待ち望んでいるのです。それと同様に私たちも、ため息とともにこの希望が実現するのを待ち続けています。
それから22節です。「被造物がすべて今日まで、共にうめき、共に産みの苦しみを味わっていることを、わたしたちは知っています。被造物だけでなく、“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わたしたちも、神の子とされること、つまり、体の贖われることを、心の中でうめきながら待ち望んでいます。」(22-23節)
ここでパウロは「共にうめく」という表現を用いていますが、皆、うめいているのです。人間ももろもろの動物も、この世界のすべてがうめきの中にあるというのです。そして、キリストによって救われるキリスト者も同じです。主に救われた者は、もはや痛みもなく、悩みもなく、困難もなく生き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やはり同じように、うめきながら自分の人生の道を歩んでいます。
でも、パウロはこの「うめき」を「産みの苦しみ」と言い換えています。「産みの苦しみ」、それは単なる苦しみではありません。大変な苦痛ではありますが、その先に新しい生命が生まれて来るという「希望のうめき」なのです。ですからパウロは24節で、「わたしたちは、このような希望によって救われているのです。見えるものに対する希望は希望ではありません。現に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なお望むでしょうか。わたしたちは、目に見え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なら、忍耐して待ち望むのです」(24節)と言っているのです。うめきは希望をもたらす、希望に変わる、だから忍耐できるのだ、と言うのです。
将来の希望、この苦しみが希望に変わるとは言っても、実際にこの「うめき」というのは耐えがたいものがあります。パウロにしても、病に悩み、また、迫害に苦しみ、自分ではどうにも出来ずにただうめく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パウロがただうめくしかない所で、生まれたものがあります。それは、訪問できないから、仕方なく、教会へ手紙を書き送ったのです。聖書には教会へ書き送ったパウロの手紙が多く残されていますが、それはパウロの伝道が行き詰まってしまったからです。どうしようもなく、手紙を書くしかありませんでした。その手紙が今、聖書に残され、多くの人の心を動かし、信仰を伝えることになろうとは、パウロは想像もしていなかったでしょう。しかし、道を閉ざされれば、別の道を開いてくださるのが神さまの道なのです。そして、痛みの中、うめきながら書き送った言葉によって、教会の人々が失望の中で勇気づけられ、このうめきつつ歩む使徒パウロと、うめきを共にしたのです。
主イエス・キリストの救いによって私たちは神の子とされました。今、私たちは、神さまの栄光に包まれる救いの完成を待っておりますが、それは今は目に見えている現実ではありません。現時点では、見えないものです。その見えないものを待ち望むことこそが希望なのだとパウロは語ります。
しかし、その希望を信じて生きていくということは、見えないものにすべてをかけていく生き方ですから、決して楽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に従って歩む時、この世には苦しみがあります。終わりの日の希望を信じ、それを待ち望みながらもなお、私たちは孤児のような心になることもあります。
私たちがどうしようもない時、もう祈ることすら出来ないような時、聖霊は、父なる神さまに向かって、うめきをもって私たちのことを執り成して下さるのです。祈れない私たちの代わりに私たちの言葉にならない思いを父なる神さまにに伝えて下さるのです。
私たちは孤児のように孤独で、行くあてもなく途方に暮れていても、聖霊の執り成しのゆえに慰められるのです。絶望しないのです。再び希望を信じて立ち上が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28節に「神を愛する者たち、つまり、御計画に従って召された者たちには、万事が益となるように共に働くということを、わたしたちは知っています。」(28節)とあります。
ある牧師は、私たちの人生を織物に譬えてます。織物は縦糸と横糸で模様を織り込んでいきます。その織物の中に織り込まれているのが私たちの日々なのです。織物をしている人にはどのような模様が出来るかは分かっています。でも、糸である私たちにはどのような模様になるのか分からないのです。わたしたちの日々には明るい日もあれば暗い日もあります。なぜここでこんな真っ黒の糸が織り込まれているのか、その時には私たちには分りません。こんなどぶのような灰色ではなく、もっと明るいブルーの糸があったらいい、鮮やかな赤い糸であったらいい、そう思う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ある時、気づくのです。神さまがおられている織物の美しさに。嫌だなと思った黒い糸も、灰色の糸も、神さまの織物の美しい模様に必要なものだったことに気づくのです。私たちのすべての人生の糸がすべてが美しく共に働いていたことに気づかされます。
私たちの日々の苦労や悲しみが一ミリたりとも無駄ではなく、それらすべてが神さまの御計画の中で、美しく織り込まれ、完成のために必要であったことを知らされます。私たち万事が益となるように共に働くことを知らされながら、イエス・キリストに似た者とされていくのです。私たちがキリストに似た者になろうとするのではなく、呻きながら痛みながら歩んでいく時、聖霊によって執り成していただきながら生きていく時、神さまご自身が私たちを変えて下さるのです。聖霊ご自身の祈りの中で変えられていきます。そのことを信じながらこの一週間も生きていきましょう。
【2022년 6월 26일 주일예배(요약판)】
“성령께서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
로마서 8장 18~30절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더라도 눈 앞의 현실 가운데 여러 어려움에 빠져 괴로워하여 신앙조차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 속에도 많은 결점이나 약함도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 기도하라, 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몸소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지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괴로워했고 전도 여행 일정을 여러 번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곧바로 방문한다, 곧 가겠다 ”고 약속해 놓고 그러지 못해서 교회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오해를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전도 여행 자체도 많은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자기 자신이 안고 있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는 현실적으로는 축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어려움을 안고 있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19절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19절) 피조물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에 둘러싸여 나타나고 새로운 하늘과 땅이 창조되는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같이 우리도 한숨과 함께 이 소망이 실현되는 것을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절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22-23절)
여기서 바울은 “함께 탄식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모두 다 탄식하고 있습니다. 인간도 여러 동물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탄식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더이상 아픔도 걱정도 없고 괴로움도 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똑같이 탄식하면서 자기 인생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탄식”을 “낳음의 괴로움”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낳음의 괴로움”, 그것은 단순한 괴로움이 아닙니다. 대단한 고통입니다만, 그 앞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소망의 탄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24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4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탄식은 소망을 가져온다, 소망으로 바뀐다, 그래서 참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래의 소망, 이 괴로움이 소망으로 바뀐다고 말해도 실제로는 이 “탄식”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바울만 해도 병에 시달리고 또 박해에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는 어쩔 도리가 없고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태어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문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성경에는 교회에 써 보낸 바울의 편지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바울의 전도가 막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찌할 도리 없이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편지가 지금 성경에 기록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신앙을 전하게 되리라고는 바울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길입니다. 그리고 괴로움 가운데 탄식하면서 써 보낸 말들로 교회 사람들이 실망 가운데 용기를 얻었고 탄식하면서 걷는 사도 바울과 탄식을 함께 한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이는 구원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지금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닙니다. 현시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고대하는 것이야말로 소망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소망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결코 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걸을 때, 이 세상에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종말의 소망을 믿고 그것을 고대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고아 같은 마음이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을 때, 이제 기도하는 것조차 할 수 없을 때, 성령께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탄식으로 우리를 중재해 주십니다. 기도할 수 없는 우리 대신 우리의 말로 할 수 없는 마음을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전해주십니다.
우리는 고아처럼 고독으로 가는 정처없이 어찌할 바를 몰라도 성령의 중재 때문에 위로받는 것입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다시 소망을 믿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우리 인생을 직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직물은 날실과 씨실로 무늬를 짜 넣어 갑니다. 그 직물 속에 짜 넣고 있는 것이 우리의 나날입니다. 직물을 짜고 있는 사람은 그게 어떤 무늬가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인 우리는 어떤 무늬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나날에는 밝은 날도 있고 어두운 날도 있습니다. 왜 여기서 이런 새까만 실이 짜 넣어지고 있는지 그 때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덤불같은 회색이 아니라 더 밝은 블루의 실이라면 좋겠다, 선명한 붉은 실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짜고 계시는 직물의 아름다움에 싫다고 생각한 검은 실도 회색의 실도 하나님의 직물의 아름다운 무늬에 꼭 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의 실이 모두 다 아름답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나날의 고생이나 슬픔이 조금도 쓸데없지 않고 그 모든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아름답게 짜이고 완성을 위하여 필요했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탄식하고 괴로워하면서 걸어 갈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재받으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도 안에서 변해 갑니다. 그것을 믿으면서 이 일주일도 살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