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족이나 사회나 그 밖의 여러 가지 것에 대하여 다양한 의무를 지고 책임을 다하며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 죄에 지배된 몸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에 짓눌릴 뻔하면서도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를 지배하는 법칙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육신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니라 영을 따라 걷는 날들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2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를 지배하는 법칙이 바뀌고, 육신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닌 성령에 따라 걷는 날들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다만, 성령에 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현실적인 생활이 바뀌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의 양육비가 들지 않게 된다거나, 주택 담보 대출이 없어지게 된다거나, 잔업이 줄어들지만 수입은 늘어난다거나, 혹은 연금 액수가 늘어나거나, 싫은 인간 관계가 없어지거나, 간호의 부담이 줄어들거나 같은 그런 일은 보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기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바라는 것이 단순히 이루어진다는 이른바 이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에 따라 걷는 삶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역사 하심으로서 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나날에 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성령으로 가르쳐 주시면서 걷는다는 것입니다. 이전과 똑같이 힘든 나날이지만 매일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다, 그것이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지금까지 짊어진 의무, 책임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 라는 말씀이 바로 진실함을 알게 되는 것이 “성령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조금 정신적으로 편하게 해 준다든가 그런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확실히 현실의 나날 속에서 의무를 지고 살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멍에를 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것들을 자기 혼자 이를 악물고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짊어져 주십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해방됩니다.
원래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야말로 “죄의 법칙”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죄의 법칙”에 살고 있었을 때, 우리의 책임은 무겁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맺어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죄의 성질을 가진 몸에 지배되지 않는 것입니다.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었던 육신의 몸도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부활시켜 주신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살려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물론 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고 있을 때도, 침울해지고 아무것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도, 이미 끝장이라고 웅크리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역사해 주십니다. 성령에 따라 걸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자기 혼자만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때라도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최종적으로 책임져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성령에 따라 걸을 때에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나날들은 획기적으로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바꿔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굉장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4-15절)
그리스도께 구원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하나님의 영혼을 받고 있는 자는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들으면 조금 위화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예수님과 형제가 되다니 송구스럽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해도 여전히 우리는 죄를 저지르고 실패도 합니다. 이런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자기를 혹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이미 성령을 주었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간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시는 성령을 모욕하고 있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속에 계시는 성령을 더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해도 자기 속에 계시는 성령을 아, 여기에 계신다고 명확히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령을 굳이 의식적으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진정시켜 성령께서 주어지고 있는 것을 믿고 의식할 때에 확실히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정말로 나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고 있는 것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양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자식은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양된 양자이더라도 그 법적인 권리는 친자식과 조금도 차이는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동등한 사람으로서 취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굉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똑같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나님께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다”(이자야 43:4) 라고 이사야에 쓰여 있습니다만, 죄로 인하여 망가지고 하나님께 반항하던 인간에게 “내 눈에 너는 보배롭고 존귀하니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응석받이가 아닙니다. 단순한 칠칠치 못한 인간의 부모와는 다릅니다. 죄의 심판을 배경으로 한 사랑입니다. 자신의 독생자의 피를 흘리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와 동등한 상속권, 그리고 장래의 영광까지 주어졌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이 한주간도 걸어갑시다.
2022年6月1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43章 4~5節
〇讃 頌 讃頌歌 262(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8章 1~17節
〇説 教 「あなたも神の子です(당신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85(全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6月 1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あなたも神の子です」ローマ書 8章 1~17節
私たちは生きていく上で、家族や社会やその他もろもろのものに対して、様々な義務を負い、責任を果たして生きています。パウロは13節で、「肉に従って生きるなら、あなたがたは死にます」と語っています。
人間は、まだキリストを知らなかった時、罪に支配された体に対しての義務を果たしていました。そして、死に向かっていました。もちろんまじめに生きてきたのです。時に、あまりの重荷でおしつぶされそうになりながら、一生懸命生きてきました。
しかし今や、私たちを支配している法則が変わりました。私たちは肉への義務を果たすのではなく、霊に従って歩む日々に生きているのです。それが2節で言われていることです。「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命をもたらす霊の法則が、罪と死との法則からあなたがたを解放したからです。」(2節)
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今や、私たちを支配している法則が変わりました。私たちは肉への義務を果たすのではなく、霊に従って歩む日々に生きているのです。それがキリストによって救われた者の生き方です。
ただ、霊に従う生き方をしていたら、現実的な生活が変わるのかと言います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子供の養育費がかからなくなるのか、住宅ローンが無くなるのか、残業が減るけど収入が増えるのか、年金額が増えるのか、いやな人間関係がなくなるのか、介護の負担が減るのか、そういうことは通常はありません。もちろん、奇跡はあります。しかしそれは人間の願うことが単純に叶う、いわゆるご利益のようなものとしてはないのです。
パウロが言う霊に従って歩む生き方というのは、すべてを神さまの働きとして見ながら生きていく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の日々に働かれる神さまの働きを、キリストによって結ばれたときに与えらえた霊によって教えていただきながら歩むということです。かつてと同じように大変な毎日だけど、毎日のすべてのことが神さまの導きの中にある、それが見えてくるよう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そのとき、私たちはこれまで負ってきた義務、責任を神さまにゆだねて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す。
イエスさまがおっしゃった「疲れた者、重荷を負った者は、だれでもわたしのもとへ来なさい。休ませてあげよう」(マタイ11:28)という言葉がまさに真実であることを知らされるのが「霊の法則」に従って歩む生き方です。
これは単にちょっと精神的に楽にしてあげるとかそう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は確かに現実の日々の中で義務を負っています。責任を負っています。イエスさまの言葉で言えばくびきを負っています。これまではそれらを自分一人が歯を食いしばって担っていると考えていました。でもそうではないのです。神さまが共に担っ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それが分かったとき、私たちは解放されます。
そもそも人間は、自分で自分の体をどうしようも出来なかったのです。やりたいことをできず、やりたくないことをやらざるをえない状態でした。それこそ「罪の法則」の中に生きていたのです。「罪の法則」に生きていた時、私たちの責任は重く、どうしようも出来ない状態でした。それが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解放されたのです。キリストと結ばれて生きていくならば、私たちは罪の性質を持った体に支配されないのです。
11節に「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た方の霊が、あなたがたの内に宿っているなら、キリスト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た方は、あなたがたの内に宿っているその霊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はずの体をも生かしてくださるでしょう」(11節)とあります。それまでは心の願うことをやることのできなかった肉の体をもイエスさまを私たちに遣わし復活させてくださった神さまが生かしてくださるのです。生かしてくださるために神さまは働いておられます。私たちももちろん働きます。しかし私たちが寝ている時も、落ち込んで何も手につかない時も、もうおしまいだとうずくまっている時も、なお神さまは働いてくださいます。霊に従って歩む時、そのことが分ってきます。すべてを自分で責任を取らねばならないと思っていたけれども、そうではないんだと安心ができます。私たちの人生は自分一人の人生ではないのです。神さまがどんな時にも共におられます。
皆さん、私たちの人生に、最終的に責任を負ってくださるのは神さまなのです。そのことが、霊に従って歩む時、私たちは少しずつ分かっていきます。そのとき、私たちの日々は画期的に変わってきます。神さまが変えてくださるのです。
さらにパウロは素晴らしいことを語っております。14節です。「神の霊によって導かれる者は皆、神の子なのです。あなたがたは、人を奴隷として再び恐れに陥れる霊ではなく、神の子とする霊を受けたのです。この霊によってわたしたちは、『アッバ、父よ』と呼ぶのです。」(14-15節)
キリストに救われ、キリストと共に歩み、神さまの霊をいただいているものは皆「神の子」なのです。私たちが「神の子」と言われると、少し違和感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神の子はイエス・キリストです。自分がイエスさまと兄弟となるなんて、恐れ多いと思ってしまいます。実際、神さまを信じていると言っても、依然として私たちは罪を犯しますし、失敗もします。こんなことで「神の子」と言えるのかと思っても仕方ありません。
しかし、問題は私たちが自分のことを、あるいは、他の人のことを、どう思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がどのように思っていたとしても、神さまの方が、「あなたにすでに霊を与えた」「あなたは神の子なのだ」と、みなし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が、自分が神の子なんてとんでもない、と思ったとしたら、それは神さまが私たちの内に与えておられる霊を侮辱し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るのです。
私たちはもっと自分のうちにおられる聖霊を意識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は言っても、自分の中におられる聖霊を、あ、ここにおられると明確に意識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それでも、私たちは聖霊をあえて意識的に意識するのです。私たちが心を鎮め、霊が与えられていることを信じて、意識をする時、確かに聖霊が私たちを導かれることを感じ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なるのです。まことに自分に働いてくださる神さまの霊を感じることが出来ます。
そして、それと同様に、私たちが「神の子」とされていることも、素直に受け入れていくのです。本当に自分は「神の子」なのだと意識をするのです。
この「神の子」というのは、厳密には養子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の実子はキリストおひとりです。しかし、私たちが養子であったとしても、その法的な権利は実子と何ら変わりはないのです。
つまり、神さまは私たちをキリストと同等の者として扱って下さるということです。これは考えようによってはおそるべきことで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同じ神さまの相続人として神さまから招かれているのです。
「わたしの目にあなたは価高く、貴い」(イザヤ43:4)とイザヤ書にありますが、罪によって壊れ、神さまに反抗していた人間に対して、なお、「わたしの目にあなたは価高く、貴く、わたしはあなたを愛する」とおっしゃる神さまの愛はとてつもないものです。
それは単なる甘やかしではありません。ただのだらしない人間の親とは違うのです。罪の裁きを背景にした愛です。御自身の御子の血を流す愛でした。愛のゆえ、御子にして神さまなるキリストを十字架にかけられました。そして今や、私たちにはキリストと同等の相続権、そして将来の栄光まで与えられました。その神さまの愛と恵みを感謝しながら神さまの子ども、神さまの相続人として、この一週間も歩みたいと思います。
【2022년 6월 19일 주일예배(요약판)】
“당신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로마서 8장 1~17절
우리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족이나 사회나 그 밖의 여러 가지 것에 대하여 다양한 의무를 지고 책임을 다하며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13절에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 죄에 지배된 몸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에 짓눌릴 뻔하면서도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를 지배하는 법칙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육신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니라 영을 따라 걷는 날들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2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를 지배하는 법칙이 바뀌고, 육신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게 아닌 성령에 따라 걷는 날들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다만, 성령에 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현실적인 생활이 바뀌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의 양육비가 들지 않게 된다거나, 주택 담보 대출이 없어지게 된다거나, 잔업이 줄어들지만 수입은 늘어난다거나, 혹은 연금 액수가 늘어나거나, 싫은 인간 관계가 없어지거나, 간호의 부담이 줄어들거나 같은 그런 일은 보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기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바라는 것이 단순히 이루어진다는 이른바 이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성령에 따라 걷는 삶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역사 하심으로서 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나날에 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성령으로 가르쳐 주시면서 걷는다는 것입니다. 이전과 똑같이 힘든 나날이지만 매일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다, 그것이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지금까지 짊어진 의무, 책임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 라는 말씀이 바로 진실함을 알게 되는 것이 “성령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조금 정신적으로 편하게 해 준다든가 그런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확실히 현실의 나날 속에서 의무를 지고 살고 있습니다.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멍에를 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것들을 자기 혼자 이를 악물고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짊어져 주십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해방됩니다.
원래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야말로 “죄의 법칙”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죄의 법칙”에 살고 있었을 때, 우리의 책임은 무겁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맺어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죄의 성질을 가진 몸에 지배되지 않는 것입니다.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1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었던 육신의 몸도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부활시켜 주신 하나님께서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살려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물론 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고 있을 때도, 침울해지고 아무것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도, 이미 끝장이라고 웅크리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역사해 주십니다. 성령에 따라 걸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자기 혼자만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떤 때라도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을 최종적으로 책임져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성령에 따라 걸을 때에 우리는 조금씩 알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나날들은 획기적으로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바꿔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바울은 굉장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4-15절)
그리스도께 구원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하나님의 영혼을 받고 있는 자는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들으면 조금 위화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내가 예수님과 형제가 되다니 송구스럽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해도 여전히 우리는 죄를 저지르고 실패도 합니다. 이런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자기를 혹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이미 성령을 주었다”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간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시는 성령을 모욕하고 있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속에 계시는 성령을 더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해도 자기 속에 계시는 성령을 아, 여기에 계신다고 명확히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령을 굳이 의식적으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진정시켜 성령께서 주어지고 있는 것을 믿고 의식할 때에 확실히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정말로 나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고 있는 것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양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친자식은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양된 양자이더라도 그 법적인 권리는 친자식과 조금도 차이는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동등한 사람으로서 취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굉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똑같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하나님께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다”(이자야 43:4) 라고 이사야에 쓰여 있습니다만, 죄로 인하여 망가지고 하나님께 반항하던 인간에게 “내 눈에 너는 보배롭고 존귀하니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응석받이가 아닙니다. 단순한 칠칠치 못한 인간의 부모와는 다릅니다. 죄의 심판을 배경으로 한 사랑입니다. 자신의 독생자의 피를 흘리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와 동등한 상속권, 그리고 장래의 영광까지 주어졌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이 한주간도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