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입니다.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축복받고자 예수님 계신 곳으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야단을 치며 꾸짖어 쫓아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노하시어 제자들을 몹시 꾸짖으시고 어린 아이들을 불러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 올리고 손을 두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자들은 이들을 쫓아 보내려고 했을까요? 제자들은 어린 아이의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차갑기만한 인간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느 때 같으면 오히려 솔선해서 아이들을 불러들여 예수님께서 기도해 주시도록 배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때 마음에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살해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중대한 예고를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넘치시고 다정하신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제자들의 이해를 초월한 예고입니다. 그것을 제자들은 어떻게 이해하면 될지 몰랐던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긴장감이 제자들 사이에 생기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부모와 자식들이 와글와글 찾아왔던 것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살해당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태평하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거야?” 라고 초조해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에게 신경 쓰실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는 방해된다, 다 저리로 가라 ”고 쫓아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달랐습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14절) 라고 말씀하시며 어린 아이들을 안아 올려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여기서 “노하셨다”는 말은 격렬한 분개, 성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격렬한 감정으로 화를 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 위에서 괴로워하면서 죽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이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에 대해서 심한 분노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이 평화로울 때는 사랑스럽다고 소중히 여기지만, 어른들이 마음의 여유를 잃으면 짐이 된다고 방해꾼 취급을 받게 되어 버립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의 제자들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유, 어떤 상황이든 아이들이 축복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히 해야 한다고 강하게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크게 화를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들의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아니, 어린 아이들이라도 우리 어른이 갖고 있는 죄도 제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도 다툼이 끊이지 않는 매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고 “이러한 자의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층 더 말씀을 이어가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5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입학 시험과 같이 좋은 성적을 올려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게 해 준다고 내미는 은혜를 감사하게 받는 것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성적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면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안 됩니다. 수행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면 의지가 약한 사람은 안 됩니다. 많은 기부를 해야 한다면 가난한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러나 내밀어 준 손에 무심히 몸을 맡길 수 있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려고 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오직 고맙게 받는 것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라도 구원받는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아하는 과자가 있어서 그 과자를 주겠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기꺼이 손을 뻗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여러가지 많은 생각을 합니다. “뭔가 답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을 나에게 주는 그 의도는 무엇일까?”,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 받는 것이 값비싼 것, 매우 가치 있는 것일수록 손을 뻗기를 주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자기들보다 뛰어난 것을 질투해서 자기들과 전혀 다른 신앙에 서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그 죄를 자신의 몸에 도맡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심판에 복종하셔서 우리에게 용서의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믿는 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은혜를 오직 고맙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생각, 행동 따위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저 기꺼이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신앙이 이해되지 않고 무력한 어린 아이들이 멀리하려고 하는 광경에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과 분노를 느끼신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시인인 야기 주키치가 노래한 “신을 부르다” 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왜 앙앙 앙앙 우는 거지? 정말로 시끄러워. 앙앙 앙앙 앙앙 앙앙. 아냐, 시끄럽지 않아. 시끄럽지 않아. 그건 부르고 있는 거야. 부르고 있는 거라니까.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거야. 다들 저렇게 불러 봐. 저렇게 집요하게 불러보라고.”
“시끄러워. 어지간히 하고 이제 그만 울음을 그쳐 줘” 라고 우는 자식을 진절머리 내면서도 야기 주키치는 “아니 기다려. 저건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거야. 정말 멋지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감동이 시인 야기 주키치에게 이런 노래를 읊게 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상냥하신 예수님을 정말 좋아합니다. 기도하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기도할 수 없게 된 어른들이 아이들의 단순한 기도의 마음을 소중히 자랄 수 없게 해 버립니다. 신앙의 중요성을 낮게 보고 교회에 가는 것보다 공부하라고 말하며 멀어지게 해 버립니다. 아이들이 예수님의 팔에 안겨 풍요로운 축복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을지, 그것은 주위의 우리 어른들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가족 여러분, 손을 내밀어 주시는 예수님께 우리 자녀들, 우리 손자들을 맡기십시오.그리하여 주님의 넘치는 축복과 사랑 가운데 자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지켜봅시다.
2022年6月12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ルコによる福音書(마가복음) 9章 36~37節
〇讃 頌 讃頌歌 565(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マルコによる福音書(마가복음) 10章 13~16節
〇説 教 「子どもへの祝福の祈り(어린 아아들에 대한 축복 기도)」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97(全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6月 1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子どもへの祝福の祈り」 マルコ 10 章 13~16節
ある日のことです。親たちが我が子を祝福していただこうと、イエスさまのもとに子どもたちを連れて集まってきました。すると弟子たちが叱って、追い返そうとしました。それを見てイエスさまは激しく憤られて、弟子たちを叱りつけ、子どもたちを呼んで、一人一人を抱き上げて、手を置いて祝福されたのです。
では、何故、弟子たちは追い返そうとしたのでしょうか。弟子たちは子どものことなど考えない、冷たいだけの人間だったのでしょうか。
決してそうではなかったと思います。いつもだったら、むしろ率先して、子どもたちを招き入れ、イエスさまに祈ってもらうために、配慮したでしょう。でも、弟子たちはその時、心にそのような余裕などなかったのです。なぜなら、イエスさまが、エルサレムでユダヤ教の指導者たちに殺され、三日後に復活するという大変な予告を、弟子たちに繰り返し語り始められたからです。
愛に満ちた優しい救い主キリストが殺されるなど、弟子たちの理解を超えた予告です。それを弟子たちはどのように理解すれば良いのか分からなかったのです。ただならぬ緊張感が弟子たちの間に生じていました。そこへ親子たちがガヤガヤやって来たのです。
弟子たちにすれば、「イエスさまは殺される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だぞ。のん気なことを!」と、弟子たちは苛立ち、イエスさまは子どもにかまっている暇などないと思ったのでしょう。それで、「子どもは邪魔だ、あっちへ行った、行った」と追い返そうとしたのです。
でも、イエスさまは違いました。14節です。「イエスはこれを見て憤り、子供たちをわたしのところに来させなさい。妨げてはならない」(14節)と、このようにおっしゃり、子どもたちを抱き上げ、手を置いて祝福されました。
「イエスはこれを見て憤り」、「憤り」とは激しい憤慨、腹立ちを表す言葉です。幼い子どもたちが祝福から遠ざけられたことに対して、イエスさまが激しい感情で腹を立てられたと語っているのです。この時、イエスさまは御自分が十字架の上で苦しみながら死ぬことを知っていました。自分の身に危険が迫っていたのです。心の余裕などないはずです。それなのに、幼い子どもたちが祝福から遠ざけられたことに対して、激しい怒りを表されるのです。
子どもは、大人の心が平和な時は可愛らしいと大事にされますが、大人が心の余裕を失うと、手足まといだと邪魔者扱いにされてしまいます。今日の聖書の弟子たちがそのよい例です。ところがイエスさまは、どんな理由、どんな状況であろうとも、子どもたちが祝福から遠ざけられることを、見過しにはなさらなかったのです。祝福にあずかるために、神さまに近づけられることを、何はさておき一番大事に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強く願っておられました。だから、激しく憤られたのです。私たちは、このことを心に刻みつ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
イエスさまは「神の国は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であ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神の国は子どもたちのものだ、小さな子どもは純粋で汚れが無いから、無条件で天国に入れると言われたのではないのです。いいえ、子どもでも私たち大人が持っている罪深さをちゃんと持っています。子どもの世界だっていさかいが絶えない毎日です。
ですからイエスさまは、神の国が子どもたちのものだとはおっしゃらずに、「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そして、更に言葉を続けて「子どものように神の国を受け入れる人でなければ、決してそこ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15節)とおっしゃいました。イエスさまは、神の国を受け入れることの大切さを強調されたのです。
神の国は、入学試験のように、良い成績をあげて合格するものではなくて、さあ入れてあげるよと差し出される恵みを、有難く頂戴することによって入れる所だと、イエスさまはおっしゃったのです。そうです。良い成績を上げなければというのでしたら、頭の悪い者はダメです。修行を積んでなければと言うのであれば、意志の弱い者はダメです。たくさん寄付をすればというのでしたら、貧しい者はダメです。
ところが、差し伸べられた手に、無心に身を委ねることが出来る幼な子のように、神さまが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与えて下さろうとしている救いの恵みを、ただただ有難く頂戴することならば誰にでもできます。何も出来ない幼な子でも救われるとすれば、どんな人でも救われます。
どんな人でも救われる。でも、大人たちは色々なことを考えてしまうのです。大好きなお菓子があって、そのお菓子を「あげるよ」と言われれば、子どもたちは喜んで手を伸ばします。ところが、大人たちは色々なことを考えるのです。「何かお返し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はないか?」とか、「これを自分にくれるその意図は何だろうか?」とか、色々と考えるわけです。その頂くものが、高価なもの、とても価値あるものであればあるほど、手を伸ばすのに躊躇するわけですね。
イエスさまはこれからエルサレムに行き、十字架の死を遂げられます。ユダヤ教の指導者たちが、自分たちよりも優れていることを妬み、自分たちと全く違う信仰に立つ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つけようと待ち構えていました。しかしイエスさまは、人間のその罪深さを我が身に引き受けて十字架の裁きに服し、赦しの救いを与えて下さったのでした。
こうして、十字架のイエス・キリストを救い主と信じる者が救われる道が開かれました。この恵みをただ有難く受け入れる者は誰でも神の国に入れます。そこに私たちの考え、行動など関係ないのです。ただ喜んでこの恵みを受け入れるのです。ですからこの大切な信仰が理解されずに、無力な幼子たちが遠ざけられようとしている光景に、イエスさまは激しい苦痛と憤りを覚えられたのでした。
信仰の詩人である八木重吉が歌った「みんなもよびな」という詩があります。
「さて あかんぼうは なぜに あんあん あんあん なくんだろう ほんとうに うるせいよ あんあん あんあん あんあん あんあん うるさかないよ うるさかないよ よんでいるんだよ よんでいるんだよ かみさまを よんでいるんだよ みんなもよびな あんなにしつっこく よびな」
「うるせいなー。いいかげんにして泣きやんでくれよ」と我が子にうんざりしながらも、八木重吉は「いや待てよ。あれは神さまを呼んでいるんだ。素晴らしいなー」と歌いました。今日の聖書が伝えるイエスさまが与えてくれる感動が、八木重吉にこのような歌を詠ませたのでしょう。
幼い子どもたちは、優しいイエスさまが大好きです。お祈りが大好きです。神さま・イエスさまを心から信じてお祈りします。ところが単純に祈れなくなった大人たちが、子どもたちの単純な祈り心を大切に育てなくしてしまいます。信仰の大切さを低くみて、教会へ行くより勉強しなさいといって、遠ざけてしまいます。子どもたちがイエスさまの腕に抱かれて、豊かな祝福に与りつつ成長できるかどうか、それは周囲の私たち大人の態度にかかっています。
愛する子どもを与えられているオモニ、アボジ、そして家族の皆さん、手を差し伸べて下さっているイエスさまに、我が子を、我が孫を差し出して、祝福を豊かに頂き続け、子どもたちを祈りながら育て、見守り続けていきましょう。
【2022년 6월 12일 주일예배(요약판)】
“어린 아이들에 대한 축복 기도” 마가복음 10장 13~16절
어느 날입니다.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축복받고자 예수님 계신 곳으로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야단을 치며 꾸짖어 쫓아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노하시어 제자들을 몹시 꾸짖으시고 어린 아이들을 불러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 올리고 손을 두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자들은 이들을 쫓아 보내려고 했을까요? 제자들은 어린 아이의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차갑기만한 인간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느 때 같으면 오히려 솔선해서 아이들을 불러들여 예수님께서 기도해 주시도록 배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때 마음에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살해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중대한 예고를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넘치시고 다정하신 구세주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제자들의 이해를 초월한 예고입니다. 그것을 제자들은 어떻게 이해하면 될지 몰랐던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긴장감이 제자들 사이에 생기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부모와 자식들이 와글와글 찾아왔던 것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살해당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태평하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거야?” 라고 초조해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에게 신경 쓰실 겨를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는 방해된다, 다 저리로 가라 ”고 쫓아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달랐습니다.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14절) 라고 말씀하시며 어린 아이들을 안아 올려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여기서 “노하셨다”는 말은 격렬한 분개, 성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격렬한 감정으로 화를 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 위에서 괴로워하면서 죽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닥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들이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에 대해서 심한 분노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이 평화로울 때는 사랑스럽다고 소중히 여기지만, 어른들이 마음의 여유를 잃으면 짐이 된다고 방해꾼 취급을 받게 되어 버립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의 제자들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유, 어떤 상황이든 아이들이 축복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을 간과하지 않으셨습니다. 축복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히 해야 한다고 강하게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크게 화를 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4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들의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아니, 어린 아이들이라도 우리 어른이 갖고 있는 죄도 제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도 다툼이 끊이지 않는 매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는 말씀하시지 않고 “이러한 자의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층 더 말씀을 이어가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5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입학 시험과 같이 좋은 성적을 올려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게 해 준다고 내미는 은혜를 감사하게 받는 것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성적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면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안 됩니다. 수행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면 의지가 약한 사람은 안 됩니다. 많은 기부를 해야 한다면 가난한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러나 내밀어 준 손에 무심히 몸을 맡길 수 있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려고 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오직 고맙게 받는 것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라도 구원받는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아하는 과자가 있어서 그 과자를 주겠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기꺼이 손을 뻗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여러가지 많은 생각을 합니다. “뭔가 답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을 나에게 주는 그 의도는 무엇일까?”,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 받는 것이 값비싼 것, 매우 가치 있는 것일수록 손을 뻗기를 주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자기들보다 뛰어난 것을 질투해서 자기들과 전혀 다른 신앙에 서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그 죄를 자신의 몸에 도맡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 심판에 복종하셔서 우리에게 용서의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믿는 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은혜를 오직 고맙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생각, 행동 따위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저 기꺼이 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신앙이 이해되지 않고 무력한 어린 아이들이 멀리하려고 하는 광경에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과 분노를 느끼신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시인인 야기 주키치가 노래한 “신을 부르다” 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왜 앙앙 앙앙 우는 거지? 정말로 시끄러워. 앙앙 앙앙 앙앙 앙앙. 아냐, 시끄럽지 않아. 시끄럽지 않아. 그건 부르고 있는 거야. 부르고 있는 거라니까.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거야. 다들 저렇게 불러 봐. 저렇게 집요하게 불러보라고.”
“시끄러워. 어지간히 하고 이제 그만 울음을 그쳐 줘” 라고 우는 자식을 진절머리 내면서도 야기 주키치는 “아니 기다려. 저건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거야. 정말 멋지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감동이 시인 야기 주키치에게 이런 노래를 읊게 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상냥하신 예수님을 정말 좋아합니다. 기도하는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기도할 수 없게 된 어른들이 아이들의 단순한 기도의 마음을 소중히 자랄 수 없게 해 버립니다. 신앙의 중요성을 낮게 보고 교회에 가는 것보다 공부하라고 말하며 멀어지게 해 버립니다. 아이들이 예수님의 팔에 안겨 풍요로운 축복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을지, 그것은 주위의 우리 어른들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가족 여러분, 손을 내밀어 주시는 예수님께 우리 자녀들, 우리 손자들을 맡기십시오.그리하여 주님의 넘치는 축복과 사랑 가운데 자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지켜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