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제자들은 죄사함을 받았다고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두가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절망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라고 생각했습니다. 히어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궁지에 몰리셔도 마지막엔 대역전하셔서 적을 혼내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악인의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갚는 일 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살해당해 버렸습니다. 죽으면 아무런 소망도 없다고 여긴 그들은 절망 상태였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들의 최악의 실수로 인한 절망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실패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배신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엉터리 재판에서 사형당하려고 할 때 “너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 라고 추궁당하자 “아니, 나는 예수 따위 모른다. 아무 관계도 없다. 함께 하지 말라”고 리더인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그것은 최악의 실패입니다. 그런 일을 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제자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이미 살아 있을 자격이 없다는 절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요일의 십자가 후, 일요일에 어쩌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 부활절입니다.
이것으로 조금 전의 절망 중 하나는 해결의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즉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의 악의 힘과 죽음을 모두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을 모두 다 깨고 부활하셨다고 본인이 말씀하신 대로 구세주이신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절망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시더라도 자기들은 그 예수님을 배신했다, 제자 실격이다, 인간 실격이다, 이제 다 틀렸다라고, 그런 구렁텅이에 있던 제자들을 회복시킨 것이 부활의 예수님과의 만남이고, 예수님의 말씀,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들은 구렁텅이에서 재기하고 다시 사는 힘을 얻었을까요? 구렁텅이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 성경말씀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것은 하나뿐입니다. 한가지를 세 번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라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성하고 있느냐?” “회개하고 있느냐?” 라고도 묻지 않으십니다. 나를 믿느냐고도 묻지 않으십니다. 또 나를 따르느냐고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런 것은 전부 다 실패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그것을 충분히 깨닫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꾸짖거나 반성을 시켜도 그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랑하느냐?” 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아슬아슬한 상태에 있을 때,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토대가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더이상은 안 되겠다고 할 때라도 사람은 사랑을 토대로 다시 일어서서 살 수 있습니다. 신앙도 깨져 버리고 따라 갈 자신이 없어도 사랑이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사랑한다고 할 때 성경의 원어인 그리스어로는 사랑을 나타내는 데 세 가지의 말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실은 사랑에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가족이나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을 그리스어로는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take만의 사랑, give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서로 좋은 것을 서로 주는 give and take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리스어로는 필리아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우정의 사랑입니다. 자기를 내어 주고 받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랑은 가족을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대가를 원하지 않고 기꺼이 자기를 주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그리스어로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자기를 주는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give만의 사랑, 죄다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이 말의 주고받음에 지금 말씀드린 사랑을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는 유명한 부분입니다.
먼저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give만의 사랑, 죄다 주는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야, 나는 십자가에 못박힐 만큼 너를 죄다 베푸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했단다. 너도 똑같이 자신을 다 내어놓고 죄다 주는 완전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베드로는 “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필리아는 give and take의 사랑입니다. “예수님,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완전한 사랑은 없습니다. 단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완전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간신히 불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최대한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합니다” 라고 답한 것입니다.
두번째,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번 더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라고 같은 말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도 첫번째와 똑같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는 답할 수 없고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번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번에는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을 베드로의 말에 맞추어 바꾸셨습니다. 예수님 자신께서 베드로의 레벨까지 내려와 주셨습니다. “베드로,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뜻입니다. “너의 최대한 노력으로 충분하다” 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으십니다. 이 예수님 자신께서 내려오시고 사랑해 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일어설 힘을 얻어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정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한번이 아니라 세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게다가 베드로에게 통하도록 자기를 낮추시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세번의 질문이 베드로의 배신의 상처를 치유했습니다.
여러분,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는 사건뿐이 아닙니다. 우리도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사건입니다. 인간으로서 정말로 사는 힘을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부활절입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힘을 잃고 있을 때, 신형 코로나든, 개인적인 여러 고민이든, 실망하거나 절망 상태에 있을 때에 자리에서 일어서게 해 주시는, 살게 해 주시는 생명의 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곳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베드로는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랑의 힘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랑의 힘이 부활의 예수님으로부터 지금 우리에게도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살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라도, 실패해도, 약해도, 열등감에 잠겨도, 이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어서 “나도 힘껏 사랑합니다” 라는 마음만 있으면, 베드로들과 똑같이 고침을 받고, 용서받고, 그들이 이 후에 세계를 바꿀 만큼 힘찬 삶을 살아갔듯이, 우리도 사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2022年4月24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ガラテヤ(갈라디아서) 2章 20~21節
〇讃 頌 讃頌歌 315(1, 2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ヨハネによる福音書(요한복음) 21章 15~19節
〇説 教 「主イエスの愛に生かされて(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게 되며)」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14(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4月 2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主イエスの愛に生かされて」 ヨハネ 21章 15~19節
主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った時、弟子たちは罪が赦されたと感謝したのではありません。彼らは絶望したのです。なぜかと言うと、彼らに絶望をもたらす二つのことがあったからです。
一つは、イエスさまが死んでしまったという絶望です。イエスさまが救い主だと思っていました。ヒーローだと思っていました。だから、どんなに追い詰められても、最後は大逆転して敵をやっつけるだろうと期待してました。それなのに最後まで悪者の暴力に対して、暴力に報いることなく、十字架に殺されてしまいました。死んだら何も希望がないではないかと、彼らは絶望状態でした。
もう一つは、自分たちの最悪の失敗ゆえの絶望です。それはイエス・キリストを裏切るという失敗でした。イエスさまに従いますといったのに、裏切りました。イエスさまがデタラメな裁判で死刑にされようとするとき、「あなたもイエスの弟子でしょう」と言われて「いや、俺はイエスなんか知らない。何の関係もない。一緒にしないでくれ。」と、リーダのペトロは三回も繰り返し否定して逃げたのです。それは最悪の失敗です。そんなことをした自分が許せません。もう弟子としての資格がない。いえ、それ以上に、もう生きている資格がない、という絶望を感じていました。
ところが、金曜日の十字架の後、日曜日に何とイエスさまが復活した、お墓が空であったというのが、イースターです。
これで、先程の絶望のうち、一つは解決の手がかりを得ました。つまり、イエスさまにとって、死は終わりではなかった。むしろ、人間の悪の力と死をすべて背負って十字架に死に、それをすべて打ち破って復活したのだ、と、本人が言ってたとおり救い主だと分かったのです。
けれども、もう一つの絶望は、解決していません。イエスさまは救い主だとしても、自分たちはそのイエスさまを裏切ったのだ、弟子失格だ、人間失格だ、もう駄目だと、そういうどん底にいた弟子たちを回復させたのが、復活のイエスさまとの出会いであり、イエスさまの言葉、問いかけであったのです。
さて、どのようにして彼らはどん底から立ち直って、生きる力を得たのでしょうか?どん底のペトロにイエスさまは、どのようになさったのでしょうか?
この聖書箇所で、イエスさまがペトロにしたことは一つだけなのです。一つのことを三回繰り返して聞きました。「わたしを愛しているか」「愛しているか」「愛しているか」と。
イエスさまはペトロを叱ったりしませんでした。反省しているか、悔い改めているか、などども聞きません。私を信じているかとも聞きません。また、私に従うかとも聞きません。そういうことは全部失敗したのです。ペトロは今、そのことを十分に思い知らされて、自分自身に対して絶望しているのです。そのように絶望している人に、叱ったり、反省させたりしても、その人が生きる力にはならないのです。
だから、イエスさまは、ただ「愛しているか」とペトロに聞きました。
ぎりぎりの状態の時、もう最後だと思う時に、土台となるのは愛なのです。もう駄目だという時でも、人は愛を土台として立ち上がって生きることができます。信仰も破れ、従って行く自信がなくても、愛が手ががりとなるのです。
聖書が愛するという時、聖書の原語であるギリシャ語では、愛を表すのに三種類の言葉を使い分けています。実は愛にも色々あるのです。
自分のために家族や友を愛するのは、自己中心的な愛です。それをギリシャ語では、エロスの愛と言います。エロスの愛は、takeだけの愛、giveのない愛です。
それから、お互いに良いものを出し合うgive and takeの愛があります。それをギリシャ語では、フィリアの愛と言います。例えば、友情の愛ですね。自分を差し出し、受け取る。自分を愛するように隣人を愛するというのは、この愛ですね。
そして、三つ目の愛は、家族のため、友のため、隣人のため、見返りを望まず、喜んで自分を差し出す愛です。これをギリシャ語ではアガペーの愛と言います。アガペーの愛は、自分を差し出す、一方的に与えるだけの愛です。イエスさまが私たちを愛する愛は、このアガペーの愛です。giveだけの愛、与え尽くす愛なのです。
イエスさまはペトロに三回「愛しているか」と問いかけるわけですが、このやり取りに、今申し上げた愛を使い分けている有名な箇所なんです。
まず、15節でイエスさまは「アガペーの愛で愛しているか」と聞くのです。giveだけの愛、与え尽くす愛で愛しているかと聞くわけです。「ペトロよ。私は十字架に架かるほどに、あなたを与え尽くす完全なる愛で愛し抜いたのだ。あなたも同じように自分を差し出し、与え尽くす完全なる愛で私を愛するか?」と聞いたのです。それに対してペトロは「はい、アガペーの愛で愛します」とは言えませんでした。「フィリアの愛で愛しています」と答えるんです。フィリアというのは、ギブアンドテイクの愛です。「イエスさま。あなたは完全なる愛で愛して下さいました。でも、私には完全なる愛はありません。ただ、あなたから与えられる完全なる愛によってようやく不完全に愛することは出来ます。人間として精一杯の愛をもって愛します」と答えたのです。
二回目、16節で、イエスさまはもう一度ペトロに「アガペーの愛で愛しているか」と同じ言葉で聞きます。ペトロも一度目と同じように、「アガペーの愛で愛します」とは答えられず「フィリアの愛で愛しています」と答えるんです。「私は人間として精一杯の愛で愛します」と答えます。
面白いのは三回目なのです。イエスさまはペトロに今度は「フィリアの愛で愛しているか」と質問をペトロの言葉に合わせて変えるのですね。イエスさまの方からペトロのレベルまで降りてきて下さったのです。「ペトロ、それで十分だ」と言うわけでしょう。「あなたの精一杯で私は満足だ」と。
イエスさまは、私たちの不完全な愛では足りないとは言わないのです。このイエスさまの方から降りてきて愛して下さった愛によって、私たちは立ち上がる力を得ていくわけです。ペトロは三回イエスさまを否定しましたから、イエスさまも一回ではなく三回も聞いたのです。しかも、ペトロに届くように、へりくだって聞いたのです。この三回の問いかけが、ペトロの裏切りの傷を癒やしました。
皆さん、イースターというのは、イエスさまが十字架の死から復活したという出来事だけ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も死から復活する出来事なのです。人間として本当に生きる力をイエスさまから頂くのがイースターなのです。
特に、私たちが生きる力を失っている時、新型コロナにしろ、個人的な色々な悩みにしろ、失望したり絶望状態にあるときに、そこから立ち上がらせて下さる、生かして下さる、いのちの力は、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所にきて下さって、アガペーの愛で愛し抜いて下さるところで得られるのです。これを経験したペトロは、人を活かす愛の力を受けたのでした。人を活かす愛の力が、復活のイエスさまから、今、私たちにも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私たちを本当に生かすのは、イエス・キリストの復活の命です。それを私たちにもたらすものは、イエスさまの愛の力です。私たちがどんな状態でも、失敗しても、弱くても、劣等感に沈んでも、このイエスさまの完全な愛に生かされて、私も精一杯愛していますという思いさえあれば、ペトロたちと同じように癒やされて、赦されて、彼らがこの後世界を変えるほどの力強い生き方をして行ったように、私たちも使命を担って、生きる者に変えられていくのです。
【2022년 4월 24일 주일예배(요약판)】
“주 예수의 사랑으로 살게 되며” 요한복음 21장 15~19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제자들은 죄사함을 받았다고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절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두가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절망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라고 생각했습니다. 히어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궁지에 몰리셔도 마지막엔 대역전하셔서 적을 혼내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악인의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갚는 일 없이 십자가에 못박혀 살해당해 버렸습니다. 죽으면 아무런 소망도 없다고 여긴 그들은 절망 상태였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들의 최악의 실수로 인한 절망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실패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는데 배신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엉터리 재판에서 사형당하려고 할 때 “너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 라고 추궁당하자 “아니, 나는 예수 따위 모른다. 아무 관계도 없다. 함께 하지 말라”고 리더인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그것은 최악의 실패입니다. 그런 일을 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제자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이미 살아 있을 자격이 없다는 절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요일의 십자가 후, 일요일에 어쩌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 부활절입니다.
이것으로 조금 전의 절망 중 하나는 해결의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즉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의 악의 힘과 죽음을 모두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을 모두 다 깨고 부활하셨다고 본인이 말씀하신 대로 구세주이신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절망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시더라도 자기들은 그 예수님을 배신했다, 제자 실격이다, 인간 실격이다, 이제 다 틀렸다라고, 그런 구렁텅이에 있던 제자들을 회복시킨 것이 부활의 예수님과의 만남이고, 예수님의 말씀,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들은 구렁텅이에서 재기하고 다시 사는 힘을 얻었을까요? 구렁텅이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 성경말씀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것은 하나뿐입니다. 한가지를 세 번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사랑하느냐?” 라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성하고 있느냐?” “회개하고 있느냐?” 라고도 묻지 않으십니다. 나를 믿느냐고도 묻지 않으십니다. 또 나를 따르느냐고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런 것은 전부 다 실패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제 그것을 충분히 깨닫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꾸짖거나 반성을 시켜도 그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랑하느냐?” 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아슬아슬한 상태에 있을 때,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토대가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더이상은 안 되겠다고 할 때라도 사람은 사랑을 토대로 다시 일어서서 살 수 있습니다. 신앙도 깨져 버리고 따라 갈 자신이 없어도 사랑이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사랑한다고 할 때 성경의 원어인 그리스어로는 사랑을 나타내는 데 세 가지의 말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실은 사랑에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가족이나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을 그리스어로는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take만의 사랑, give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서로 좋은 것을 서로 주는 give and take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리스어로는 필리아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우정의 사랑입니다. 자기를 내어 주고 받는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랑은 가족을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대가를 원하지 않고 기꺼이 자기를 주는 사랑입니다. 이것을 그리스어로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자기를 주는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give만의 사랑, 죄다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이 말의 주고받음에 지금 말씀드린 사랑을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는 유명한 부분입니다.
먼저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give만의 사랑, 죄다 주는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야, 나는 십자가에 못박힐 만큼 너를 죄다 베푸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했단다. 너도 똑같이 자신을 다 내어놓고 죄다 주는 완전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베드로는 “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필리아는 give and take의 사랑입니다. “예수님, 주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완전한 사랑은 없습니다. 단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완전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간신히 불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최대한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합니다” 라고 답한 것입니다.
두번째,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번 더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라고 같은 말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도 첫번째와 똑같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는 답할 수 없고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번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번에는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라고 질문을 베드로의 말에 맞추어 바꾸셨습니다. 예수님 자신께서 베드로의 레벨까지 내려와 주셨습니다. “베드로,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뜻입니다. “너의 최대한 노력으로 충분하다” 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으십니다. 이 예수님 자신께서 내려오시고 사랑해 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일어설 힘을 얻어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정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한번이 아니라 세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게다가 베드로에게 통하도록 자기를 낮추시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세번의 질문이 베드로의 배신의 상처를 치유했습니다.
여러분,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했다는 사건뿐이 아닙니다. 우리도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사건입니다. 인간으로서 정말로 사는 힘을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부활절입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힘을 잃고 있을 때, 신형 코로나든, 개인적인 여러 고민이든, 실망하거나 절망 상태에 있을 때에 자리에서 일어서게 해 주시는, 살게 해 주시는 생명의 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곳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베드로는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랑의 힘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사랑의 힘이 부활의 예수님으로부터 지금 우리에게도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살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생명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라도, 실패해도, 약해도, 열등감에 잠겨도, 이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어서 “나도 힘껏 사랑합니다” 라는 마음만 있으면, 베드로들과 똑같이 고침을 받고, 용서받고, 그들이 이 후에 세계를 바꿀 만큼 힘찬 삶을 살아갔듯이, 우리도 사명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