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3장에서 신앙의인의 진리를 말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4장에서는 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린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그것이 실증되었다고 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창12:2)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75세였다고 말합니다.
보통의 여행이 아닙니다. 그때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결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어떤 하나님의 약속도 실현되지 않은 채 10년이나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흔들렸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디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나이다”(창15:2) 라고 드디어 아브라함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창15:6)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때가 되고 진정한 의미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거래해서 축복이라는 보수를 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은 우리 신앙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3절, 창15:6)
우리 신앙의 원류, 신앙의 원천이 여기에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5절)
신앙의인에 관해서는 움직여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불신앙한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 이것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다윗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6절)
유대인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이 신앙의 아버지라면 다윗은 메시아의 원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강력한 왕으로서의 다윗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7절입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7-8절) 라고 정말로 비참한 한 사람의 죄인으로서 다윗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32편으로부터의 인용입니다만, 회개의 시편으로서 유명한 51편과 마찬가지로 다윗이 그의 충실한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았던 죄가 발각되었을 때에 구가한 것입니다.
다윗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불륜을 하고 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실은 그것 이외에도 다웟은 평생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 다윗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의 죄의 크기에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께 향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죄를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여전히 자비하심으로 용서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석죄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만, 다윗이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나 자기 자신의 신앙의 실족함 가운데 있을 때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나 죄 가운데 괴로워하는 인간과 하나님께서는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예수님의 체포 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그 자신의 어쩔 수 없는 한심함 가운데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의 눈빛과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행실이 아닌 신앙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뭇별을 셀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없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눈 앞의 현실로부터 밖으로 끌어내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을 보여 주십니다. 이렇게도 풍요로운 것이 당신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약속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도 신앙이 흔들릴 때, 또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 그때야말로 하나님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를 믿는 사람으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년간 이방인 사회에서 살면서 이방인들의 풍습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만, 거기서부터 그의 신앙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기까지의 20년간은 말하자면 구도자로서 걸음을 떼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구도자로서의 행보 속에서 때로는 하나님을 의심하여 신앙이 흔들리면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진정한 신앙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 신앙 때문에 아브라함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증명으로서 할례의 표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할례를 대신하는 것이 세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증명으로서 세례를 받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게 아닙니다. 세례는 구원을 받은 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실은 세례를 받았는지 아닌지 보다 그 전에 우리가 하나님으로 우리의 신앙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걱정될지도 모릅니다. 과연 나의 신앙이 하나님께 인정받았을까 걱정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인” 이라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것을 믿을 뿐입니다. 지금은 잘 몰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약속인 은혜가 넘치는 말씀으로 오늘 이 예배에 초대받았습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이사야 46:3-4)
이사야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생애가 아름답게 구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의심이 많고 불신실할까요? 그것에 비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십니까? 신앙의인이 뒤집히지 않는 것은 오직 이 주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 주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2022年3月20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46章 3~4節
〇讃 頌 讃頌歌 287(1, 2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4章 1~12節
〇説 教 「信仰が義と認められた最初の人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최초의 사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03(1, 2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3月 2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信仰が義と認められた最初の人」 ローマ書 4章1~12節
パウロは3章において信仰義認の真理を語っておりましたが、この4章において、信仰の父と呼ばれたアブラハムによってそれが実証されていると語っております。
創世記12章を見ますと、アブラハムが「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にし/あなたを祝福し、… 祝福の源となるように。」(創12:1-2)という神さまの言葉に従って故郷を離れ、旅立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その時、アブラハムは75歳であったと言います。普通の旅ではありません。それまでの自分の人生を捨てて、神さまの御言葉に従う決心であったわけですね。
しかし、何ら神さまの約束が実現しないまま10年以上も過ぎました。アブラハムの信仰は揺らぎました。「わが神、主よ。わたしに何をくださるというのですか。わたしには子供がありません。家を継ぐのはダマスコのエリエゼルです。」(創15:2)と、ついにアブラハムの不満が爆発しました。
そのアブラハムを神さまは外に連れ出して、このようにおっしゃったのです。「天を仰いで、星を数えることができるなら、数えてみるがよい。… 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創15:5)
この時、アブラハムがどうしたのかと言いますと、「アブラハムは主を信じた」(創15:6)と、聖書には記されています。アブラハムはこの時になって、本当の意味で主なる神さまを信じました。つまり、神さまと取引して、祝福という報酬を求めるのではなくて、神さまの恵みとして与えられる「神さまの約束」をアブラハムは信じたのです。それ故に「信仰の父」と呼ばれるのです。そのアブラハムは私たちの信仰の父でもあります。「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主はそれを彼の義と認められた。」(3節・創15:6)
私たちの信仰の源流、信仰の源泉がここにあるのです。5節をご覧下さい。「しかし、不信心な者を義とされる方を信じる人は、働きがなくても、そ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ます。」(5節)
信仰義認に関しては、働きはいらないのです。ただ、不信心な者を義とされる方を信じる、これだけで義と認められる、だから恵みなのです。
それからパウロはこのアブラハムに加えて、ダビデのことについても語っています。6節です。「同じようにダビデも、行いによらずに神から義と認められた人の幸いを、次のようにたたえています。」(6節)
ユダヤ人にとって、アブラハムが信仰の父でありましたら、ダビデは、メシアの原型でありました。しかし、パウロはここで力強い王さまとしてのダビデを語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7節です。「不法が赦され、罪を覆い隠された人々は、幸いである。主から罪があると見なされない人は、幸いである。」(7-8節)と、何とも惨めな一人の罪人としてダビデを登場させています。これは詩編32編からの引用ですが、悔い改めの詩編として有名な51編と同じく、ダビデが彼の忠実な家来であるウリアの妻バトシェバを奪った罪が発覚した時に謳ったものである、と言われています。
ダビデは取り返しのつかない罪を犯しました。不倫をし、王という権力を利用して殺人まで犯しました。実は、それ以外にもダビデは生涯神さまの前で罪を犯したのです。そんなダビデは自分が罪人であることをよくよく知っている人でもありました。それでもダビデは、自分の罪の大きさにおののきつつも、神さまに向かいました。そうしてダビデは神さまがその罪を裁かれる方ではなく、なおも憐みをもって赦してくださる方であることを知ったのです。
「主から罪があると見なされない人は、幸いである。」(8節)とあります。私たちの罪を神さまが数えられないのは、キリストのゆえですが、ダビデやアブラハムの姿を見る時、神さまへの不信や自分自身の信仰のつまずきの中で、人間はむしろ神さまと出会うことが分かります。信じられない人間や罪の中で苦しむ人間と神さまは出会ってくださるのです。
主イエスさまの弟子であったペトロもそうでした。イエスさまを見捨てて逃げた、イエスさまの逮捕の後、三度もイエスさまを知らないと言った、その自分のどうしようもないふがいなさ、情けなさの中で、ペトロはイエスさまの愛のまなざしと出会いました。そして、復活のキリストと出会ったのです。行いではなく信仰によって義としてくださる方と出会いました。
私たちも神さまと出会います。神さまの方から出会ってくださいます。そして、信じる者としてくださいます。アブラハムを外に連れ出し星を数えて見よとおっしゃった神さまは、信じることの出来ない私たちにもまた、目の前の現実から外に連れ出し、神さまの恵みの約束を見せてくださいます。こんなにも豊かなものがあなたに与えられるのだという約束を私たちに見せてくださいます。
私たちもまた信仰が揺らぐ時、自分の弱さに気づく時、その時こそ神さまと出会います。神さまが出会ってくださいます。神さまご自身が、私たちを信じる者として下さるのです。
アブラハムは75年間異邦人社会に暮らし、異邦人たちの風習に従って生きてきました。その彼が神さまによって見いだされて、神さまの御言葉に従い、旅に出たわけですが、そこから、彼の信仰生活が始まったと言えます。そして、割礼を受けるまでの20年間は、言ってみれば求道者として歩みであったのです。その求道者としての歩みの中で、時には神さまを疑い、信仰が揺らぎながらも、アブラハムは神さまの約束を信じる真の信仰が与えられたのです。その信仰ゆえにアブラハムは義とされたのです。そして、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た証しとして割礼の印を受けました。
私たちにとって、割礼に代わるものが洗礼になるかと思います。私たちは神さまの救いを受けた証しとして洗礼を受けます。救いを受けるために洗礼を受けるのではないのです。洗礼は、救いを受けた証しな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にとって重要なのは、実は洗礼を受けたか、どうかよりも、その前に、私たちが神さまによって私たちの信仰が義と認められるか、どうかなのです。
そう言われると心配になるかと思います。果たして自分の信仰は神さまに認められたのだろうか、と心配になるかと思うんですが、大丈夫です。なぜなら、「信仰義認」というのは、罪人を救う神さまの一方的な恵みによるものだからです。私たちはただそのことを信じるだけです。今はよく分からなくても、神さまの約束の御言葉を信じるのです。
私たちはまさに、その神さまの約束である恵み溢れる御言葉で今日この礼拝に招かれました。
「わたしに聞け、ヤコブの家よ、イスラエルの家の残りの者よ、共に。あなたたちは生まれた時から負われ、胎を出た時から担われてきた。同じように、わたしはあなたたちの老いる日まで白髪になるまで、背負って行こう。わたしはあなたたちを造った。わたしが担い、背負い、救い出す。」(イザヤ46:3-4)
イザヤ書には神さまの約束と私たちの生涯が美しく謳われています。私たちは何と疑い深く不誠実なのでしょうか。それに対し、何と神さまは真実で憐れみ深いのでしょうか。信仰義認が覆らないのは、ただこの主の憐れみと愛が変わらないからです。私たちの信仰が支えられているのは、この主の憐れみと愛によるものなのです。
皆さん、これからも十字架の主を仰ぎながら、主と共に歩んでいきましょう。
【2022년 3월 20일 주일예배(요약판)】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최초의 사람” 로마서 4장 1~12절
바울은 3장에서 신앙의인의 진리를 말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4장에서는 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린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그것이 실증되었다고 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창12:2)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고향을 떠나 여행길에 오른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75세였다고 말합니다.
보통의 여행이 아닙니다. 그때까지의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결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어떤 하나님의 약속도 실현되지 않은 채 10년이나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흔들렸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디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나이다”(창15:2) 라고 드디어 아브라함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이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창15:6)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때가 되고 진정한 의미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거래해서 축복이라는 보수를 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은 우리 신앙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3절, 창15:6)
우리 신앙의 원류, 신앙의 원천이 여기에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5절)
신앙의인에 관해서는 움직여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불신앙한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 이것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다윗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6절)
유대인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이 신앙의 아버지라면 다윗은 메시아의 원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강력한 왕으로서의 다윗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7절입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7-8절) 라고 정말로 비참한 한 사람의 죄인으로서 다윗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32편으로부터의 인용입니다만, 회개의 시편으로서 유명한 51편과 마찬가지로 다윗이 그의 충실한 신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았던 죄가 발각되었을 때에 구가한 것입니다.
다윗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불륜을 하고 왕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실은 그것 이외에도 다웟은 평생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 다윗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의 죄의 크기에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께 향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죄를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여전히 자비하심으로 용서해 주시는 분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석죄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만, 다윗이나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나 자기 자신의 신앙의 실족함 가운데 있을 때 인간은 오히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나 죄 가운데 괴로워하는 인간과 하나님께서는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예수님의 체포 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그 자신의 어쩔 수 없는 한심함 가운데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의 눈빛과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났던 것입니다. 행실이 아닌 신앙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뭇별을 셀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믿을 수 없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눈 앞의 현실로부터 밖으로 끌어내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을 보여 주십니다. 이렇게도 풍요로운 것이 당신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약속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도 신앙이 흔들릴 때, 또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을 때, 그때야말로 하나님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를 믿는 사람으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년간 이방인 사회에서 살면서 이방인들의 풍습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 발견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만, 거기서부터 그의 신앙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기까지의 20년간은 말하자면 구도자로서 걸음을 떼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 구도자로서의 행보 속에서 때로는 하나님을 의심하여 신앙이 흔들리면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진정한 신앙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 신앙 때문에 아브라함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증명으로서 할례의 표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할례를 대신하는 것이 세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증명으로서 세례를 받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게 아닙니다. 세례는 구원을 받은 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실은 세례를 받았는지 아닌지 보다 그 전에 우리가 하나님으로 우리의 신앙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걱정될지도 모릅니다. 과연 나의 신앙이 하나님께 인정받았을까 걱정됩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인” 이라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것을 믿을 뿐입니다. 지금은 잘 몰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약속인 은혜가 넘치는 말씀으로 오늘 이 예배에 초대받았습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이사야 46:3-4)
이사야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생애가 아름답게 구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의심이 많고 불신실할까요? 그것에 비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십니까? 신앙의인이 뒤집히지 않는 것은 오직 이 주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이 주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 걸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