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절)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무익한 사람인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거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치고 있는지, 실은 우리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바울은 이 뒤에 체계적으로 자세히 설명해 갑니다.
그 최초에 바울은 “그런데 이제는”(21절) 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이제” 란 도대체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때 “지금 이제” 라는 것입니다.
이 “이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 때까지 인간은 죄의 노예였습니다. 어둠 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어둠이 빛 가운데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에 우리가 범한 죄는 모두 다 빛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부끄러운 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빛에 비춰지고 그것조차도 빛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라는 것은 이것을 확신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6~14절)
이미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빛에 비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의 은혜로서 신앙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신앙 생활에서의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27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절)
“행위의 법”은 신앙을 자신의 행동 을 통해 높이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반드시 사람을 심판합니다. 남이나 자신의 결점을 들추어 내고 때로는 자기 혐오에 빠져 버립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눈에 보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 라고 쓰여 있듯이 신앙은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주어진 사랑의 계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서 율법이라는 종이에 쓰여진 계명은 보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는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성령에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실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뭔가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든가 생활이 풍부해졌다든가 그런 것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보면 불행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고 그 은혜로 힘차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 은혜는 어디까지나 신앙에 의해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육안으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비해서 자신의 행위는 보입니다. 그래서 바로 자신의 행위를 문제로 삼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사로잡힙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력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으냐 라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성실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보다 자신의 행위를 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성실한 불신앙” 때문에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가라테야 3장 1절)
물론 갈라디아의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의 성도들은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보고 회개해서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20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똑같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성경이 말할 때 지금 우리 바로 눈 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분명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자랑한다”는 말을 빈번히 사용합니다. 신약 성서 중에서 이 말이 60번 정도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 바울이 54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만큼 십자가의 주님을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한 신앙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젊었을 때, “행위의 법”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무렵의 바울은 “행위의 법”의 화신이었습니다. 그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행위의 법”으로부터 “믿음의 법”에 사는 사람으로 바꿔진 것입니다. “행위의 법”과 “믿음의 법”이란 바울의 삶 그 자체이자 그의 회개의 백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평생을 이 회개 속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의 다메섹 도상을 떠올리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저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그것들만 언제나 신경을 쓰고 비교하며,“행위의 법”에 조종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나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 발견되었을 때 “믿음의 법”에 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알고, 그 자유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다메섹 도상을 생각나게 하는 바울의 말을 읽으며 마치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31절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1장 26~31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법입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함께 십자가의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여행을 계속해 갑시다.
2022年3月1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コリント一(고린도전서) 1章 18節
〇讃 頌 讃頌歌 263(1, 2,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3章 19~31節
〇説 教 「十字架の主だけが私たちの誇り(십자가의 주님만이 우리의 자랑)」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88(全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3月 1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十字架の主だけが私たちの誇り」 ローマ書 3章 19~31節
「ただ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の業を通して、神の恵みにより無償で義とされるのです。」(24節)
「神の恵みにより無償で義とされる。」これがまさに福音です。私たちは罪人であり、何の役にも立たない者でありますのに、ただただ神さまの恵みによって罪赦されると言うのです。なぜ、そうなるのかと言いますと、そこに「キリスト・イエスによる贖い」すなわちイエスさまの十字架がそこにあるからです。
ここに、どれほど大きな神さまの愛と恵みが溢れているか、実は私たち人間には理解できないほどのものなのです。これが、ローマの信徒へ手紙の重要な主題です。この主題をパウロはこの後、体系的に詳しく説明していきます。
その最初に、パウロは「ところが今や」(21節)という言葉で語り始めています。この「今」とは一体いつのことを言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
勿論、十字架です。神の御子イエス・キリストがゴルゴダの丘で十字架につけられた「今」ということです。
この「今」によって、すべてが変わりました。それまで人間は罪の奴隷でした。暗闇の中を歩んでいたのです。ところが、そこに主イエス・キリストの光が差し込み、一瞬にして暗闇が光の中へと変わったのです。そうである以上、過去私たちが犯した罪は全て光とされたのです。私たちは過去に縛られてはならないのです。どのような恥ずかしい罪があったとしても、キリストの光に照らされて、それさえも光とされているからです。「光の子として歩みなさい」とは、これを確信して生きることです。(エフェソ5:6~14)
もはや私がどのような人間であるかは問題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者は、キリストの光に照らされているからです。
ところで、皆さんは自分の信仰を考える時に、どのように考えますでしょうか? 神さまの恵みとして信仰を考えていますでしょうか? それとも、信仰生活における自分の行いを考えますでしょうか? それが27節で言われていることです。「では、人の誇りはどこにあるのか。それは取り除かれました。どんな法則によってか。行いによる法則によるのか。そうれはない。信仰の法則によってです。」(27節)
「行いの法則」というのは、自分の信仰を自らの行いによって高めていこうと努力することを意味します。しかし、その努力は、必ずと言って良いほど、人を裁きます。人や自分のあら探しをし、時には自己嫌悪に陥ってしまいます。なぜ、そうなるのか言いますと、神さまの恵みは目に見えにくいからです。ヘブライ人への手紙の11章1節に「信仰とは、望んでいる事がらを確信し、見えない事実を確認することです」(ヘブライ11章1節)とありますように、信仰というのはそもそも見えないものを信じることです。
聖霊によって心に与えられた愛の戒めは見えません。それに対して律法という紙に書かれた掟は見えます。また、神さまの恵みは肉眼では見えません。聖霊により頼まなければ神さまの恵みはほんとうのところは見えません。神さまの恵みは単純に、何かの問題が解決したとか、生活が豊かになったとかということだけであらわされるものではないからです。
他人から見たら不幸としか言えないような状況の中にも神さまの恵みが注がれ、その恵みゆえに力強く生きるのが信仰者のあり方です。その恵みは、どこまでも信仰によって捉えるものなのです。神さまの恵みは肉眼にはなかなか見えないのに対して、自分の行動は見えます。だからつい自分の行動を問題にします。人間は見えることにどうしても捉えられるのです。だからと言って努力して良いクリスチャンになること自体は悪いことではないのではないか?善い行いをすることは良いことではないかと、そう思わ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それは言ってみれば「真面目な不信仰」なのです。神さまの恵みを受けることよりも自分の行動を上に置いてい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パウロはこの「真面目な不信仰」のゆえに、福音から離れていったガラテヤ教会の信徒たちにこ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ああ、物分かりの悪いガラテヤのひとたち、だれがあなたがたを惑わしたのか。目の前に、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につけられた姿ではっきり示されたではないか。」(ガラテヤ3章1節)
勿論、ガラテヤの信徒たちは、十字架につけられたイエス・キリストを直接目撃した人はおりません。しかし、ガラテヤの信徒たちは、信仰の目でそれを見て悔い改め、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を信じたのです。
それは、2000年以上もたった今も全く同じです。「ところが今や、・・神の義が示されました」と聖書が言います時、今、私たちの目の前に、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につけられた姿ではっきり示されたのです。この十字架の主イエス・キリストこそが私たちの誇るべきものなのです。
パウロはこの「誇る」という言葉を頻繁に使います。新約聖書の中で、この言葉が60回程使われておりますが、その内、実にパウロが54回も使っています。その通り、パウロほど十字架の主を誇り、キリストを自慢した信仰者はいないのです。
しかし、それは、パウロが若かりし頃、「行いの法則」に生きていたからです。キリスト者を迫害していた頃のパウロは、「行いの法則」の権化でありました。そのパウロがダマスコ途上で復活の主に出会い、「行いの法則」から、「信仰の法則」に生きる者に変えられたのです。つまり、「行いの法則」と「信仰の法則」とは、そのままパウロの人生のそのものであり、彼の悔い改めのバックボーンと言えるのです。パウロは生涯この悔い改めに生きたのです。
皆さん、それは私たちも同じなのです。今日、皆さん御自身のダマスコ途上を思い出してください。キリストに出会う前は、自分が何をしたか、あの人が何をしたか、そればかりいつも気にしていた。比較していた。「行いの法則」に操られていました。
そのような私たちが、私のダマスコ途上でキリストに見いだされた時、「信仰の法則」に生きることが許されました。本当の自由を知り、その自由に生きる者とされたのです。
最後に、私たちに私たち自身のダマスコ途上を思い起こさせますパウロの言葉をお読みして終わりたいと思います。コリントの信徒への手紙一 1章26~31節の御言葉です。
「兄弟たち、あなたがたが召されたときのことを、思い起こしてみなさい。人間的に見て知恵のある者が多かったわけではなく、能力のある者や、家柄のよい者が多かったわけでもありません。ところが、神は知恵ある者に恥をかかせるため、世の無学な者を選び、力ある者に恥をかかせるため、世の無力な者を選ばれました。また、神は地位のある者を無力な者とするため、世の無に等しい者、身分の卑しい者や見下げられている者を選ばれたのです。それは、だれ一人、神の前で誇ることが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す。神によってあなたがたはキリスト・イエスに結ばれ、このキリストは、わたしたちにとって神の知恵となり、義と聖と贖いとなられたのです。『誇る者は主を誇れ』と書いてあるとおりになるためです。」(Ⅰコリント 1章26~31節)
「誇る者は主を誇れ」。これこそが信仰の法則です。皆さん、これからも、共に十字架の主を仰ぎながら、信仰の旅を続けて行きましょう。
【2022년 3월 13일 주일예배(요약판)】
“십자가의 주님만이 우리의 자랑” 로마서 3장 19~3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절)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며 무익한 사람인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거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치고 있는지, 실은 우리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바울은 이 뒤에 체계적으로 자세히 설명해 갑니다.
그 최초에 바울은 “그런데 이제는”(21절) 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이제” 란 도대체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때 “지금 이제” 라는 것입니다.
이 “이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 때까지 인간은 죄의 노예였습니다. 어둠 속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어둠이 빛 가운데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에 우리가 범한 죄는 모두 다 빛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부끄러운 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빛에 비춰지고 그것조차도 빛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라는 것은 이것을 확신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6~14절)
이미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빛에 비춰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의 은혜로서 신앙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신앙 생활에서의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27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절)
“행위의 법”은 신앙을 자신의 행동 을 통해 높이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반드시 사람을 심판합니다. 남이나 자신의 결점을 들추어 내고 때로는 자기 혐오에 빠져 버립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눈에 보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 라고 쓰여 있듯이 신앙은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주어진 사랑의 계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서 율법이라는 종이에 쓰여진 계명은 보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는 육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성령에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실제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뭔가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든가 생활이 풍부해졌다든가 그런 것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보면 불행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고 그 은혜로 힘차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 은혜는 어디까지나 신앙에 의해서 파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육안으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비해서 자신의 행위는 보입니다. 그래서 바로 자신의 행위를 문제로 삼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사로잡힙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력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으냐 라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성실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보다 자신의 행위를 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성실한 불신앙” 때문에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간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가라테야 3장 1절)
물론 갈라디아의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의 성도들은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보고 회개해서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20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똑같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성경이 말할 때 지금 우리 바로 눈 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분명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자랑한다”는 말을 빈번히 사용합니다. 신약 성서 중에서 이 말이 60번 정도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 바울이 54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만큼 십자가의 주님을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한 신앙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젊었을 때, “행위의 법”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무렵의 바울은 “행위의 법”의 화신이었습니다. 그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행위의 법”으로부터 “믿음의 법”에 사는 사람으로 바꿔진 것입니다. “행위의 법”과 “믿음의 법”이란 바울의 삶 그 자체이자 그의 회개의 백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평생을 이 회개 속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여러분 자신의 다메섹 도상을 떠올리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저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그것들만 언제나 신경을 쓰고 비교하며,“행위의 법”에 조종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나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 발견되었을 때 “믿음의 법”에 사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알고, 그 자유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다메섹 도상을 생각나게 하는 바울의 말을 읽으며 마치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31절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린도전서 1장 26~31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법입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함께 십자가의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여행을 계속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