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0-12절)
그렇다해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바울의 이 말은 너무 과격하게 들리고 혹독하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새삼스럽게 완벽하다고도 훌륭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나름대로 결점이나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고 자각하면서 때로는 나는 안 되겠구나라며 침울해 맥이 빠지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사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우리가 죄인이라며 우리에게는 좋은 점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단지 여기서 조금 주의해야 하는 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9절)는 말입니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죄를 많이 범했다고는 바울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죄 아래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죄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죄 아래”에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는 “죄의 노예이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신들이 이렇게 나쁜 짓을 했다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죄와 인간의 관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가끔은 안 된다고 낙담하면서, 반성하면서, 다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본질이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반성하고 마음을 고쳐먹으면 되는 그런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죄 위에 서서 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 아래에 있는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부름으로서 시편 14편을 읽었습니다. 바울은 10~18절에 시편 14편을 포함한 당시의 사람들이 자주 듣던 구약 성서의 말씀을 조합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10-11절)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의 시대에 성경 학자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연구해서 성경 내용은 잘 알면서도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을 구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통렬한 말입니다. 바로 한탄의 말입니다.
구약 성서 시대의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한탄과 똑같은 한탄이 이 말 속에 있습니다. 이 한탄은 당시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의 한탄이기도 합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2절) 이것도 엄격한 말입니다. 그래도 죄인이라고 말해도 “무익하다”고까지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썩어도 준치”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일본의 속담이라면 “썩어도 도미” 가 되겠습니다. 아무리 우리를 죄인이라고 해도 우리는 한편으론 자신이 “썩어도 도미”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썩은 도미”만큼 취급하기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확실히 자기에게는 안 되는 부분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썩어도 도미” 라고 정색하고 나서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만일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고 해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역시 인간은 “쓸모없는 것” 이었습니다. 인간은 죄 아래에 있는 한 허무한 존재인 것입니다. 죄 아래에 있는 한 취급하기 어렵고, 무익한 것입니다.
13절에는 그 허무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은 인간이 말로 죄를 범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그 행동의 모양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는 바라지 않은 비참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합니다.
14절입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4-18절)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자신에게 편한대로 제멋대로인 욕망을 위하여 주위의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세계의 비참함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 아래에 있는 죄의 노예인 한 인간은 비참한 길을 걷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을 멸망하시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라고 주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여기지 않는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의 비참함을 보시고 주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동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냥 불쌍하다고 동정하신 게 아닙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이 여기신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양은 헤맵니다. 무리로부터 떨어진 양은 그 습성으로 결국 길가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의 12절에 “다 치우쳐” 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모두 다 길을 잃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에게 한없는 하나님의 자비가 쏟아졌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어찌할 수도 없는 인간을 위해서 주 예수님께서 그 죄를 속죄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죄 아래에 있던 사람이 죄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다른 면에서 말하자면 이미 자기 자신의 힘으로 올바르게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힘껏 자기 스스로 어떻게든 자신을 올바르게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비탈길을 열심히 페달을 밟아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주 예수님 없이 스스로 자기를 바르게 하고 살아 가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가파른 비탈길을 자전거로 영원히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괴롭고 앞이 보이지 않는 골이기 때문에 때로는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평상시 살아갈 때 우리는 그런 일을 의식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작은 올바름의 에너지로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힘든 생활 방식으로부터 해방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페달을 밟아서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가도 결국 우리는 모두 다 길을 잃습니다. 그런 지칠 대로 지칠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진정한 자유의 길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길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탈진 언덕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걸을 때 언덕길은 낮아지고 그 걸음이 가볍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아래에서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비탈진 언덕길을 걸을 때도 몸도 마음도 가볍고 기쁨이 넘칩니다. 아멘.
2022年3月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4編 1, 5~6節
〇讃 頌 讃頌歌 273(1, 3, 5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3章 9~18節
〇説 教 「あなたは正しいですか?(당신은 올바릅니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39(1, 2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3月 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あなたは正しいですか?」 ローマ書 3章 9~18節
「正しい者はいない。一人もいない。 悟る者もなく、/神を探し求める者もいない。 皆迷い、だれもかれも役に立たない者となった。善を行う者はいない。ただの一人もいない。」(10-12節)
それにしても、「正しい者は一人もいない。一人もいない」というパウロのこの言葉は、とても過激に聞こえますし、厳しく感じます。何よりも救いがないように思います。私たちは、自分がことさら完璧だとも立派だとも思ってはおりません。いやむしろ、それなりに欠点や足りないところは多々あると自覚しながら、時には、ああ自分はダメだなあと落ち込みながら、それでも、がんばって社会生活をしています。それなのに、教会では罪人と言われるし、私たちには優れた点が全くないと言います。そこまで言われる必要があるのでしょうか。
ただ、ここで少し注意をしたいのは、「ユダヤ人もギリシャ人も皆、罪の下にあるのです」(9節)という言葉です。ユダヤ人もギリシャ人も罪をたくさん犯しましたとは、パウロは言っていないのです。「罪の下にあ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これは何かと言いますと、「罪に支配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決して「罪の上に」あるのではないのです。「罪の下」にあるのです。パウロ自身が別のところで語っている「罪の奴隷だ」ということです。パウロはあなたがたはこんなに悪いことをしたと、ここで語っているのではなく、罪と人間の関係性を語っています。
私たちは頑張って生きています。時々だめだと落ち込みながら、反省しながら、やり直しながら生きています。しかし、罪の本質というのは、人間が自分でどうにかできるという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人間が反省して心をいれかえてやり直したらいい、そういう生易しい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人間が罪の上に立って罪をコントロールでき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罪の下にある私たちは、自分で自分の罪をどうにもできません。
礼拝の招きの言葉として、詩編14編をお読みしました。パウロは10~18節において詩編14編を含む、当時の人々が良く耳にしていた旧約聖書の御言葉を組み合わせて、罪の下にある人間の姿を説明しています。それを象徴的に表しているのが「正しい者はいない。ひとりもいない。悟る者もなく、神を探し求める者もいない」(10-11節)ということです。
ユダヤ人は神さまの御言葉をゆだねられていました。イエスさまやパウロの時代、聖書学者はたくさんいました。しかし、聖書の言葉を研究し、聖書の内容はよくよく知っていても、本当の意味で神さまを求めている人はいないのだという痛烈な言葉です。嘆きの言葉です。
旧約聖書の時代のイザヤやエレミヤをはじめとした預言者の嘆きと同じ嘆きが、この言葉の中にあります。この嘆きは、当時のイスラエルだけではなく、今日でも、罪の下にある人間の嘆きでもあります。
「皆迷い、だれもかれも役に立たない者となった。善を行う者はいない。ただの一人もいない。」(12節) これも厳しい言葉です。ただ、罪人だと言っても、「役に立たない」とまでは言われたくないとも思います。
「腐っても鯛」という諺がありますが、私たちは自分のことを鯛と思っている節があります。私たちは罪人だと言われても、どこかで「腐っても鯛」だと思っているのです。実は、この「腐った鯛」ほど扱いにくいものはないのです。確かに、自分にはダメなところはあるかもしれない、でも「腐っても鯛だ」と居直っているのが人間の現実なのです。仮にどんなに素晴らしい人間としても、イエス・キリストへの信仰を抜きにした神さまとの関係においては、やはり、人間は「役に立たないもの」だったのです。人間は罪の下にある限り、虚しい存在なのです。罪の下にある限り扱いにくく、役に立たないのです。
13節からは、その虚しい人間の有様が描かれています。13節14節では、人間が言葉において罪を犯すことを語っています。それから15節ではその行いの有様です。その結果、人間はみずからは望んでいない悲惨の道を歩くのだと語られています。
14節です。「口は、呪いと苦味で満ち、足は血を流すのに速く、その道には破壊と悲惨がある。彼らは平和の道を知らない。彼らの目には神への畏れがない。」(14-18節)
罪の下にある人間は、自分の都合の良い勝手な欲望のために、まわりのものを利用しようとします。そこから世界の悲惨が生み出されます。神さまを畏れない、罪の下にある、罪の奴隷である限り、人間は悲惨な道を歩んでしまうのです。
それだからと言って神さまは、神さまを畏れない人間を滅ぼそうとは考えられませんでした。マタイによる福音書の9章36節に「群衆が飼い主のいない羊のように弱り果て、打ちひしがれているのを見て、深く憐れまれた」と、主イエスさまのご様子が描かれています。神さまを神さまとも思わない、罪の下にある人間の悲惨を見て、なお主イエスさまは憐れまれました。同情されました。それは単に、ああかわいそうにという同情ではありません。内蔵がよじられるの思いをされたのです。飼い主のない羊は、迷います。群れから離れた羊は、その習性から、やがて野垂れ死にするのです。今日の聖書箇所の12節に「皆迷い」とありますが、罪の下にある人間は皆道に迷うのです。
しかし、その人間に、限りない神さまの憐みが注がれました。自分で自分の罪を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人間のために主イエスさまがその罪を贖ってくださいました。主イエスの十字架によって私たちは罪の奴隷から解放されました。罪の下にあった者が罪から解放されたのです。
罪の奴隷から解放されたということは、別の面から言えば、もう自分自身の力で正しくある必要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精一杯、自分自身でどうにか自分を正しくしようと頑張ってきました。
それはとてもしんどいことです。急な坂道を一生懸命自転車をこいで上るようなことです。私たちも主イエスさまなしで、自分で自分を正しくして生きて行こうとするのは、とんでもなく急な坂道を自転車で永遠と上っていくようなものです。それは大変辛く、先の見えないゴールですから、時に空しく感じるのは、当然なことです。
普段、生きていく時、私たちはそんなことを意識しないのかもしれません。でも自分のちっぽけな正しさのエネルギーで一生懸命ペダルをこいで生きていく、そのたいへんな生き方から解放されなさいと聖書は語っているのです。一生懸命ペダルをこいで坂を上がっても、結局、皆道に迷うのです。そんな弱り果てるようなところから神さまは自由になりなさい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自分では自分の罪をどうしようも出来ないこと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して、神さまに全てを委ねて、主イエス・キリストと共に歩むのです。そこから本当の自由の道が与えられるです。
キリストと共に歩む道にもまったく困難がないわけではありません。坂道もあります。でも、キリストと歩む時、坂は低くされ、その歩む足は軽くされるのです。
皆さん、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ゆえに、私たちは罪の下から、罪の奴隷から解放されました。だからこそ、坂道を歩む時も、心も体も軽く喜びにあふれるのです。アーメン。
【2022년 3월 6일 주일예배(요약판)】
“당신은 올바릅니까?” 로마서 3장 9~18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0-12절)
그렇다해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바울의 이 말은 너무 과격하게 들리고 혹독하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새삼스럽게 완벽하다고도 훌륭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나름대로 결점이나 부족한 점이 많이 있다고 자각하면서 때로는 나는 안 되겠구나라며 침울해 맥이 빠지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사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우리가 죄인이라며 우리에게는 좋은 점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단지 여기서 조금 주의해야 하는 것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9절)는 말입니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죄를 많이 범했다고는 바울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죄 아래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면 “죄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죄 아래”에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는 “죄의 노예이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신들이 이렇게 나쁜 짓을 했다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죄와 인간의 관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가끔은 안 된다고 낙담하면서, 반성하면서, 다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본질이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반성하고 마음을 고쳐먹으면 되는 그런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죄 위에 서서 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 아래에 있는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부름으로서 시편 14편을 읽었습니다. 바울은 10~18절에 시편 14편을 포함한 당시의 사람들이 자주 듣던 구약 성서의 말씀을 조합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10-11절)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의 시대에 성경 학자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연구해서 성경 내용은 잘 알면서도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을 구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통렬한 말입니다. 바로 한탄의 말입니다.
구약 성서 시대의 이사야나 예레미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의 한탄과 똑같은 한탄이 이 말 속에 있습니다. 이 한탄은 당시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의 한탄이기도 합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2절) 이것도 엄격한 말입니다. 그래도 죄인이라고 말해도 “무익하다”고까지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썩어도 준치”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일본의 속담이라면 “썩어도 도미” 가 되겠습니다. 아무리 우리를 죄인이라고 해도 우리는 한편으론 자신이 “썩어도 도미”정도는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썩은 도미”만큼 취급하기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확실히 자기에게는 안 되는 부분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썩어도 도미” 라고 정색하고 나서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만일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고 해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역시 인간은 “쓸모없는 것” 이었습니다. 인간은 죄 아래에 있는 한 허무한 존재인 것입니다. 죄 아래에 있는 한 취급하기 어렵고, 무익한 것입니다.
13절에는 그 허무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은 인간이 말로 죄를 범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그 행동의 모양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는 바라지 않은 비참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합니다.
14절입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4-18절)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자신에게 편한대로 제멋대로인 욕망을 위하여 주위의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세계의 비참함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 아래에 있는 죄의 노예인 한 인간은 비참한 길을 걷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을 멸망하시려고는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라고 주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여기지 않는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의 비참함을 보시고 주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동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냥 불쌍하다고 동정하신 게 아닙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이 여기신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양은 헤맵니다. 무리로부터 떨어진 양은 그 습성으로 결국 길가에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의 12절에 “다 치우쳐” 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모두 다 길을 잃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에게 한없는 하나님의 자비가 쏟아졌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어찌할 수도 없는 인간을 위해서 주 예수님께서 그 죄를 속죄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죄 아래에 있던 사람이 죄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다른 면에서 말하자면 이미 자기 자신의 힘으로 올바르게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힘껏 자기 스스로 어떻게든 자신을 올바르게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비탈길을 열심히 페달을 밟아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주 예수님 없이 스스로 자기를 바르게 하고 살아 가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가파른 비탈길을 자전거로 영원히 올라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괴롭고 앞이 보이지 않는 골이기 때문에 때로는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평상시 살아갈 때 우리는 그런 일을 의식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작은 올바름의 에너지로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서 살아가는 그런 힘든 생활 방식으로부터 해방되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페달을 밟아서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가도 결국 우리는 모두 다 길을 잃습니다. 그런 지칠 대로 지칠 수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진정한 자유의 길이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길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탈진 언덕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걸을 때 언덕길은 낮아지고 그 걸음이 가볍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 아래에서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비탈진 언덕길을 걸을 때도 몸도 마음도 가볍고 기쁨이 넘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