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17-20절)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무엇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는지를 말하고 있고, 그 율법이 주어진 유대인의 이방인에 대한 역할, 또 책임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주어진 사람의 책임으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할 책임이 있음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율법을 가지는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지적은 참으로 통렬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적질하느냐”(21-22절)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4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유대인에 대한 비판은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 그리스도인에 대한 비판입니다. 17절로부터의 말씀을 율법이라는 말을 그리스도로,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말을 그리스도인으로 바꿔서 읽어 보세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네가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어떻습니까? 이 말씀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하는 야유의 말이 아닐까요?
율법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 백성의 증거였습니다. 그것은 즉 율법은 구약 시대의 복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은 실현되고 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는다. 이것이 “신약” 이며, 새로운 계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기치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로 바뀐 것입니다.
율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은혜가 넘치는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은 신약 시대로 바뀌면서 훨씬 더 위대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가 되어도 죄인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구약의 유대인의 죄를 반복하는 똑같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4절) 지금 우리의 교회도 이 말씀과는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25절부터 유대인과 할례 관계에서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역사적으로 최초의 계약의 증거입니다. 실은 율법보다 몇백 년도 전에 주어진 계약의 증거이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종교적 민족적 심볼이었습니다.
그 중요한 할례에 대해서 바울은 26절에서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6-27절) 라고 할례를 받고 있는 것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자랑이자 두 가지 중요한 심볼이었던 할례와 율법이 하필이면 이번에는 그들을 심판하기 위한 “직접 증거” 로 바뀌는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에게 이 이상의 야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진정한 유대인과 진정한 할례를 29절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9절)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라고 말하는 할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례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베풀어진 할례인 세례가 진정한 할례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6~28 참조)
그러면 아까 17절에서 율법을 그리스도로, 그리고 유대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바꿔서 읽어 보았습니다만, 이번에는 28절에서 유대인을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할례를 세례로 바꿔서 읽어 보십시오. “무릇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세례가 세례가 아니니라”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회개를 강요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기쁨 가운데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 기쁨이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고 주위의 훌륭한 신앙인이 있는 것을 보면 나만 죄스러워집니다. 하지만 실로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진정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이것에 대해서 두 가지 사항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진정한 세례라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은 29절에 있듯이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할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세례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진정한 세례의 근거나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같은 진리를 고린도후서 3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3장 6절)
우리는 몸에 새긴 의례의 흔적이나 보증서 같은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영”으로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구원이 보증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성령의 힘에 의해 약속된 것입니다.
바울은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세례는 죄에 죽어 있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살아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숨, 생명의 숨을 불어 새로운 생명에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아무리 낮게 평가해도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빼앗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멸망할 수 없는 생명 속에 살아 숨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혼에 의해 마음에 베풀어진 할례, 진정한 할례이고 그것이 진정한 세례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진정한 유대인이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29절에서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칭찬이라는 말은 그대로 “찬송한다”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실은 이 “찬송한다”고 번역되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원래 유대인의 이름의 유래는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인 야곱의 열두 명의 형제인 유다, 이 유다의 자손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실은 이 유다라는 이름에는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창29장 35절) 라고 쓰여 있듯이 “주님을 찬송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그 이름의 의미인 “주님을 찬송한다”는 중요한 역할을 잊어버리고 할례의 증거나 율법 준수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 표면적 할례라는 것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고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은 주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진정한 세례를 받은 자라는 가장 좋은 증거는 주님을 찬송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 이 찬송이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심각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약하다거나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장소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주의 예배에서 힘껏 주님을 찬송하고 있는지 어떤지,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진정한 세례의 바로미터입니다.
2022年2月20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ガラテヤ(갈라디아서) 3章 26~28節
〇讃 頌 讃頌歌 267(1, 2, 5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2章 17~29節
〇説 教 「真のキリスト者、真の洗礼(진정한 그리스도인, 진정한 세례)」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45(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2月 2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真のキリスト者、真の洗礼」ローマ書 2章 17~29節
今日の御言葉は、律法と割礼の観点から、ユダヤ人の罪について語られております。
「ところで、あなたはユダヤ人と名乗り、律法に頼り、神を誇りとし、その御心を知り、律法によって教えられて何をなすべきかをわきまえています。また、律法の中に、知識と真理が具体的に示されていると考え、盲人の案内者、闇の中にいる者の光、無知な者の導き手、未熟な者の教師であると自負しています。」(17-20節)
ここで、パウロは律法が何のためにユダヤ人に与えられたのかを語っており、その律法が与えられたユダヤ人の異邦人に対する対する役割、また責任が指摘されています。パウロは律法が与えられた者の責任として、神さまを知らない異邦人たちに神さまの教えを伝える責任があることをここで指摘してるのです。
それゆえに、律法を持つユダヤ人に対するパウロの指摘は真に痛烈です。「それならば、あなたは他人には教えながら、自分には教えないのですか。『盗むな』と説きながら、盗むのですか。『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姦淫を行うのですか。偶像を忌み嫌いながら、神殿を荒らすのですか。」(21-22節)
律法を教えるはずのユダヤ人が、律法をことごとく破っているのです。それゆえ最終的には、「あなたたちのせいで、神の名は異邦人の中で汚されている」(24節)と、パウロは語っております。
このパウロのユダヤ人に対する批判は、ユダヤ人たちだけの問題ではありません。これは、今の私たちキリスト者に対する批判でもあるのです。17節からの御言葉を、律法のところをキリスト、そしてユダヤ人のところをキリスト者、と読み換えて読んでみて下さい。「ところで、あなたはキリスト者と名乗り、キリストに頼り、神を誇りとし、その御心を知り、キリストによって教えられて何をなすべきかをわきまえています。」
いかがでしょうか。この言葉が、今の私たちにとって皮肉の言葉になっていないでしょうか。
律法は旧約時代の神の民のしるしでありました。それはつまり律法は旧約時代の福音であった、と言えます。では、新約の福音とは何でしょうか。そうです。キリストです。旧約の律法を十字架のイエスキリストが完成してくださり、キリストによって律法は実現し、この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で救われる、これが「新約」であり、新しい契約です。神の民の旗印は、律法からキリストに変わったのです。
律法とは比較できないほど恩恵にあふれた福音でありますイエス・キリストが与えられたのです。福音は、新約時代に変わり、はるかに偉大なものに変わりました。しかし、新約時代になっても罪人の姿は何も変わっていないのです。私たちは依然と旧約のユダヤ人の罪を繰り返す同じ罪人にすぎないのです。「あなたたちのせいで、神の名は異邦人の中で汚されている。」(24節) 今、私たちの教会もこの御言葉と無関係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
それからパウロは、25節からユダヤ人と割礼の関係における罪を指摘しています。
割礼は、神の選びの民であるイスラエルにとって、歴史的に最初の契約のしるしです。実は、律法よりも何百年も前に与えられた契約のしるしであり、ユダヤ人たちにとって、何よりも大切な宗教的民族的シンボルであったのです。
その大切な割礼に対してパウロは26節で、「割礼を受けていない者が、律法の要求を実行すれば、割礼を受けていなくても、受けた者と見なされるのではないですか。そして、体に割礼を受けていなくても律法を守る者が、あなたを裁くでしょう」(26-27節)と、割礼を受けていることよりも、律法を守ることがどれほど重要なことであるかを語っております。そればかりか、ユダヤ人の誇りであり、2つのかけがえのないシンボルであった割礼と律法が、こともあろうに今度は彼らを裁くための「直接証拠」に変わるのです。ユダヤ人にとってこれ以上の皮肉はなかったでしょう。
そこでパウロは、真のユダヤ人と真の割礼について29節で規定しています。「内面がユダヤ人である者こそ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霊”によって心に施された割礼こそ割礼なのです。」(29節)
「文字ではなく“霊”によって心に施された割礼」とは何でしょうか。それは洗礼のことです。「“霊”によって心に施された割礼」であります洗礼が、真の割礼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ガラテヤ3:26~28参照)
では、先程、17節で律法のところをキリスト、そしてユダヤ人のところをキリスト者、と読み換えて読んでみましたが、今度は、28節でユダヤ人をキリスト者、そして割礼のところを洗礼と読み替えてみて下さい。「外見上のキリスト者がキリスト者ではなく、また、肉に施された外見上の洗礼が洗礼ではありません。」
いかがでしょうか。私たちに悔い改めを迫る御言葉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は喜びの中で洗礼を授かりました。しかし、いつの間にかその喜びが過去のことのように思え、周りの立派な信仰者がいるのを見ますと、自分だけが罪深く思えてしまいます。でも、実にこれが私たちの信仰生活の現実かと思います。
それでもなお私たちが、真のキリスト者であり、真の洗礼を授かった者である、という根拠はどこにあるのでしょうか。最後に、このことについて二つのことを確認したいと思います。
まず一つ目ですが、真の洗礼ということについてです。
それは、29節にありますように、「文字ではなく“霊”によって心に施された割礼こそ割礼」これが真の洗礼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目に見えるあらゆるものは、真の洗礼の根拠や保証と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パウロは同じ真理をコリントの信徒への手紙3章で語っています。「神はわたしたちに、新しい契約に仕える資格、文字ではなく霊に仕える資格を与えてくださいました。文字は殺しますが、霊は生かします。」(Ⅱコリント3章6節)
私たちは、身体に刻んだ儀礼の跡や、保証書のようなもので救われ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そんなで頼りないものではなく、“霊”によって、すなわち聖霊によってその救いが保証されているのです。私たちの救いは、聖霊の力によって約束されているのです。
パウロは「霊は生かします」と語っています。これが非常に大切なのです。洗礼は、罪に死んでいた私たちが、神さまの霊によって生かされることだからです。洗礼を受けた者は、神さまの息、命の息を吹きかけられ、新しい命に生きる者なのです。
私たちが、自分自身をどのように低く評価しても、神さまの命の息が取り上げられることはないのです。私たちは、もはや滅びることがない命に生かされているのです。これが、霊”によって心に施された割礼、真の割礼であり、それが真の洗礼です。
それから二つ目は、真のユダヤ人とは何か、ということです。
29節で、最後にパウロは、「その誉れ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るのです」と、こ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この誉れという言葉は、そのまま「賛美する」、「ほめたたえる」、と訳せる言葉です。実は、この「ほめたたえる」、と訳される言葉がとても大切なのです。 もともとユダヤ人の名前の由来は、アブラハムの子、イサクの子であるヤコブの12人の兄弟でありますユダ、このユダの子孫である、ということにあります。
実は、このユダという名前には、「レアはまた身ごもって男の子を産み、『今度こそ主をほめたたえ(ヤダ)よう』と言った。そこで、その子をユダと名付けた」(創29章35節)とありますように、「主をほめたたえる」という意味があるのです。ユダヤ人は、その名前の意味である「主をほめたたえる」という大切な役割を忘れて、割礼のしるしや、律法遵守だけに目を向けていたのです。外見上のユダヤ人、外見上の割礼とは、そのような人たちのことを指していた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も同じです。洗礼を受けて新しい命をいただくのは、主をほめたたえるためなのです。私たちが真のキリスト者であり、真の受洗者である、という何よりの証は、主を賛美することにあります。
信仰生活を続けるうちに、この賛美や喜びが失われることこそが深刻なのです。自分の信仰が弱いとかいうのは、大した問題ではないのです。大切なのは、遣わされた場所で、そして何よりも毎週の礼拝で、精一杯主を賛美しているかいないか、これが真のキリスト者、真の洗礼のバロメーターなのです。
【2022년 2월 20일 주일예배(요약판)】
“진정한 그리스도인, 진정한 세례” 로마서 2장 17~29절
오늘의 성경 말씀은 율법과 할례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17-20절)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무엇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는지를 말하고 있고, 그 율법이 주어진 유대인의 이방인에 대한 역할, 또 책임이 지적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주어진 사람의 책임으로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할 책임이 있음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율법을 가지는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지적은 참으로 통렬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적질하느냐”(21-22절)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4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유대인에 대한 비판은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 그리스도인에 대한 비판입니다. 17절로부터의 말씀을 율법이라는 말을 그리스도로,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말을 그리스도인으로 바꿔서 읽어 보세요.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네가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어떻습니까? 이 말씀이 지금의 우리들에게 하는 야유의 말이 아닐까요?
율법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 백성의 증거였습니다. 그것은 즉 율법은 구약 시대의 복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은 실현되고 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는다. 이것이 “신약” 이며, 새로운 계약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기치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로 바뀐 것입니다.
율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은혜가 넘치는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은 신약 시대로 바뀌면서 훨씬 더 위대한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가 되어도 죄인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구약의 유대인의 죄를 반복하는 똑같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24절) 지금 우리의 교회도 이 말씀과는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25절부터 유대인과 할례 관계에서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역사적으로 최초의 계약의 증거입니다. 실은 율법보다 몇백 년도 전에 주어진 계약의 증거이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종교적 민족적 심볼이었습니다.
그 중요한 할례에 대해서 바울은 26절에서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26-27절) 라고 할례를 받고 있는 것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자랑이자 두 가지 중요한 심볼이었던 할례와 율법이 하필이면 이번에는 그들을 심판하기 위한 “직접 증거” 로 바뀌는 것입니다. 아마도 유대인에게 이 이상의 야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진정한 유대인과 진정한 할례를 29절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9절)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라고 말하는 할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례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베풀어진 할례인 세례가 진정한 할례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6~28 참조)
그러면 아까 17절에서 율법을 그리스도로, 그리고 유대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바꿔서 읽어 보았습니다만, 이번에는 28절에서 유대인을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할례를 세례로 바꿔서 읽어 보십시오. “무릇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세례가 세례가 아니니라”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회개를 강요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기쁨 가운데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 기쁨이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고 주위의 훌륭한 신앙인이 있는 것을 보면 나만 죄스러워집니다. 하지만 실로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진정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이것에 대해서 두 가지 사항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진정한 세례라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것은 29절에 있듯이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할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세례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진정한 세례의 근거나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같은 진리를 고린도후서 3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린도후서 3장 6절)
우리는 몸에 새긴 의례의 흔적이나 보증서 같은 것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영”으로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구원이 보증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성령의 힘에 의해 약속된 것입니다.
바울은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세례는 죄에 죽어 있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살아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숨, 생명의 숨을 불어 새로운 생명에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아무리 낮게 평가해도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빼앗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멸망할 수 없는 생명 속에 살아 숨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혼에 의해 마음에 베풀어진 할례, 진정한 할례이고 그것이 진정한 세례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진정한 유대인이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29절에서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칭찬이라는 말은 그대로 “찬송한다”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실은 이 “찬송한다”고 번역되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원래 유대인의 이름의 유래는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인 야곱의 열두 명의 형제인 유다, 이 유다의 자손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실은 이 유다라는 이름에는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창29장 35절) 라고 쓰여 있듯이 “주님을 찬송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그 이름의 의미인 “주님을 찬송한다”는 중요한 역할을 잊어버리고 할례의 증거나 율법 준수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표면적 유대인, 표면적 할례라는 것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고 새로운 생명을 받는 것은 주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진정한 세례를 받은 자라는 가장 좋은 증거는 주님을 찬송하는 데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 이 찬송이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심각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약하다거나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장소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주의 예배에서 힘껏 주님을 찬송하고 있는지 어떤지,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진정한 세례의 바로미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