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유대인들의 죄에 대해 즉 십자가 밑에서 사람을 심판한다는 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의 행함과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올바른 심판을 하시고 각 사람의 행동에 따라 보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6절) 그것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고,”(9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10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11절)
그런데 여기서 신경이 쓰이는 것은 9절의 “악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그리고 10절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인과응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을 인과응보에 기인한 권선징악이라는 것이라면 알기 쉽습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선을 행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사람이 불합리한 괴로움을 떠맡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악을 자행하는 사람이 영광과 명예를 가지고 있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바울은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9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9절)
여기에 성경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인 슈케(ψυχή)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여기서 바울은 겉보기의 번영이나 성공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영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즉 이것은 인과응보의 원리도 권선징악도 아니고 그것을 초월한 것입니다. 영혼이란 하나님과 죄인이 맞닿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번창하고 또 성공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면 그의 그 가장 밑바닥에 있는 영혼은 평생 고통과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적으로 아무리 불행하게 보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으면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그의 영혼에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울 자신이 모든 고난을 당하여(고린도후서 11:23-28), 그 가운데서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그의 영혼에 넘쳐 있는 현실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인과응보와 같은 사상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상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오늘날 고난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도 그 증인입니다. 그들도 바울과 함께 이 성경 말씀이 진리임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9, 10절) 라고 반복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을 행하는 사람”이 자기들이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이방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늘 나라는 선민의 유대인인 자기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고 그렇게 우쭐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자만심이 뿌리부터 뒤집히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12절부터 율법을 가지고 있거나 없거나 하는 시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을 죄인이라고 멸시했습니다. 자기들은 모세의 율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올바르고, 이방인들은 그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 그들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제 그것도 뒤집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대인의 기준이나 그들의 척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12절) 라고 이렇게 율법을 갖고 있다,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의 입장에 서서 그 율법주의에 맞서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리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14-15절)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성경 말씀을 몰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불완전해도 반드시 양심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부모를 공경할 때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이 없어도 율법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 알면 안 되는 것은 그 양심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갖지 않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돌연 불의의 사고로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또 우리의 가족이나 소중한 친구 중에서도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 날에 어떻게 될까? 아무래도 우리는 그게 궁금합니다.
그것에 바울이 대답한 것이 16절입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16절)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납득되지 않는 분도 계실지도 모릅니다. 단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을 갖지 않는 이방인이든 율법을 부여받은 유대인이든 하나님께서는 평등하게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중에서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생애를 마감해 갔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된다고 성경은 약속하는 것입니다. 멸망하는 자도 그리스도와는 무관하게는 멸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공평하다고 생각되거나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날에는 그것이 공평한 빛 속에 놓여져, 모든 사람이 납득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올바른 심판에 압도당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불공평한 일 투성이입니다. 진정한 공평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우리를 진정한 공평함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의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성경의 회답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라고 서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하면, 그리스도의 심판 또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멸망을 향해 가는 우리를 찾아 구원해 주시고, 평생 함께 걸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판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공평하고 자애로운 심판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죄인인 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어떻게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죄가 뚜렷이 드러나고 때로는 실족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심판의 주님으로 우리를 공평하게 심판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든 십자가의 주를 따르려고 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족한 것, 울면서 죄사함을 기도한 것,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신 심판의 주님께서 구세주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애로움이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2022年2月1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Ⅰテモテ(디모데전서) 6章 11~12節
〇讃 頌 讃頌歌 286(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2章 6~16節
〇説 教 「キリストの裁きとは?(하그리스도의 심판이란 ?)」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49(1, 2, 4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2月 1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キリストの裁きとは?」 ローマ書 2章 6~16節
先週は、ユダヤ人の罪について、すなわち、十字架の下で人を裁くという罪についてお話ししました。今日の御言葉は、私たちの行いと神さまの裁きについて語られております。
かの日には、神さまの正しい裁きがなされ、それぞれの行いによって、神さまは報いて下さるということです。(6節) それは、「すべて悪を行うものには、苦しみと悩みが下り」(9節)、「すべて善を行う者には、栄光と誉れと平和が与えられる」(10節)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それはユダヤ人であれ、ギリシア人であれ、関係がありません。(11節)
ここで、気になるのが、9節の「悪を行う者には、苦しみと悩み」、そして10節の「善を行う者には栄光と誉れと平和」が与えられると言われているところです。
これは因果応報のことを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これを院が応報に基づく勧善懲悪ということであれば、分かりやすいのですが、果たしてそうでしょうか?
実際は、そうではないでしょう。私たちは、立派なキリスト者が苦しんでいる姿を何度見てきました。善を行っているとしか思えないような人が理不尽な苦しみを背負っているといることがあります。逆に、悪を行っている人が、栄光と誉れを受けているということもあります。これは一体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 パウロはここで何を言いたいのでしょうか?
9節をもう一度、見てみたいと思います。「すべて悪を行う者には、ユダヤ人はもとよりギリシア人にも、苦しみと悩みが下さり」(9節)
日本語の翻訳には、少し問題があって、非常に大切な言葉が抜けているんですね。それはプシュケー(ψυχή)という言葉です。この言葉は、聖書的に非常に大切な言葉で、通常は魂と訳され、息とか命とも訳される言葉です。ですから、9節を正確に訳しますと「すべて悪を行う者の魂には」となります。
ここでは、上辺の繁栄や成功を言っ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そうではなくて、魂という目に見えない部分の話なのです。つまり、これは因果応報の原理でも勧善懲悪でもなくて、それを超えるものなのです。魂とは、神さまと罪人が触れ合うところだからです。いくら繫栄していても成功していても、神さまとの関係が断絶していれば、彼のその一番根底にある魂は、生涯苦しみと悩みから解放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しかし、この世的にどんなに不幸に見えても、神さまとの関係が生きていれば、栄光と誉れと平和が彼の魂に満ち溢れているのです。
それは、他ならぬパウロ自身があらゆる苦難に遭い(Ⅱコリント11:23~28)、その只中で、栄光と誉れと平和が彼の魂に満ち溢れている現実を証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パウロはここで因果応報のような思想を語っ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思想ではなくて真理です。今日、苦難にあるキリスト者も、その証人です。彼らもパウロと共にこの御言葉が真理であることを証しているのです。
また、「ユダヤ人はもとよりギリシア人にも」(9、10節)、と繰り返されているのも重要です。当時ユダヤ人は、「善を行う者」が自分たちで、「悪を行う者」が異邦人である、と信じて疑いませんでした。天の国は選民のユダヤ人である自分たち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そう思い上がっていたのです。しかし、ここでその自惚れが根底から覆されているのです。
同様に12節から律法を持つ、持たない、という視点で、ユダヤ人と異邦人が対比されています。ユダヤ人たちは、律法を持たないがゆえに異邦人を罪人と見下していました。自分たちはモーセの律法を持っているから正しく、異邦人はそれをもっていないから罪人である、それが彼らの基準でありました。ですから、パウロは今、それもひっくり返しているわけです。
神さまの裁きは、ユダヤ人の基準や彼らの物差しとは全く違うのです。「律法を知らないで罪を犯した者は皆、この律法と関係なく滅び、また、律法の下にあって罪を犯した者は皆、律法によって裁かれます」(12節)と、このように、律法を持っている、持っていないということは全く関係がないのです。
さらにパウロは、異邦人の立場に立って、その律法主義に立ち向かっています。14節です。「たとえ律法を持たない異邦人も、律法の命じるところを自然に行えば、律法を持たなくとも、自分自身が律法なのです。」(14節)
さらにパウロは15節でこう言っています。「こういう人々は、律法の要求する事柄がその心に記されていることを示しています。」(15節)
ここでパウロが言いたいのは、御言葉を知らなくても、神さまのかたちに創られた人間には、不完全であっても必ず良心が与え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聖書を知らない者が父母を敬う時、彼らは父母を敬え、という律法を与えられていなくても、律法の通り行っているのです。しかし、間違えてはならないのは、その良心で救われ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ことです。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これしかないのです。
では、信仰を持たないで亡くなった人はどうなるのか? 突然、不慮の事故でなくなった人はどうなるのか? また、私たちの家族や大切な友人の中でも、キリストに立ち帰らない多くの方が残っております。そのような人々は、裁きの日にどうなるのか? どうしても私たちには気になります。
それにパウロが答えているのが16節です。「そのことは、神が、わたしの福音の告げるとおり、人々の隠れた事柄をキリスト・イエスを通して裁かれる日に、明らかになるでしょう。」(16節)
ここには、具体的にどうなるのかということは、語られておりません。ですから、納得されない方もおられるかもしれません。ただ、ここで言えることは、律法を持たない異邦人であれ、律法を与えられたユダヤ人であれ、神さまは等しく裁きを下されると言うことです。そして、ここで最も大切なのは、それがキリストの裁き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の家族や友人で、多くの方がキリストを信じないで生涯を終えていきました。しかし、全ての方がキリストの前に立たされる、そう聖書は約束するのです。滅びる者もキリストと無関係には滅びないのです。
この世においては、不公平であると思われたり、納得のいかないことはいくらでもあります。しかし、最後の審判の日、それが公平な光の中に置かれ、すべての者が納得するばかりか、キリストの正しい裁きに圧倒されるのです。
この世は不公平なことばかりです。真の公平さは、主イエス・キリストにしかないのです。キリストの裁きは、真の公平さをもって私たちを裁かれます。だからこそ、このキリストの裁きが、私たちの慰めとなり、希望となるのです。そして、これが最後の審判についての聖書の回答なのです。
パウロは16節で「そのことは、神が、私の福音の告げるとおり」と、前置きをしております。それはどういうことかと言いますと、キリストの裁きもまた福音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十字架で死ぬほどに私を愛し、滅びに向かって歩んでいた私を見つけ出し、救い出してくださり、生涯共に歩んでくださった主イエス・キリストが、私の裁き主だからです。これ以上に公平で、しかも慈愛に満ちた裁きが他にあるでしょうか?
私たちはどこまでも罪人のままです。それでも私たち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下で、何とか善を行おうと努力します。でも、善を行おうと努力すればするほど、自分の罪が浮き彫りにされ、時には躓いてしまします。
しかし、主なるイエスさまは、最後の審判の時に、裁き主として、私たちを公平に裁いて下さいます。私たちが何とか十字架の主に従おうとしたこと。それでも失敗し、躓いたこと。泣きながら赦しを請い、祈ったこと。そのすべてを見ておられた裁き主が、救い主として、私たちのすべての罪を赦してくださるのです。ここに神さまの慈愛が溢れているのです。
【2022년 2월 13일 주일예배(요약판)】
“그리스도의 심판이란?” 로마서 2장 6~16절
지난 주에는 유대인들의 죄에 대해 즉 십자가 밑에서 사람을 심판한다는 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의 행함과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올바른 심판을 하시고 각 사람의 행동에 따라 보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6절) 그것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고,”(9절)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10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11절)
그런데 여기서 신경이 쓰이는 것은 9절의 “악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그리고 10절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주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인과응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을 인과응보에 기인한 권선징악이라는 것이라면 알기 쉽습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선을 행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사람이 불합리한 괴로움을 떠맡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악을 자행하는 사람이 영광과 명예를 가지고 있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바울은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9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9절)
여기에 성경적으로 아주 중요한 말인 슈케(ψυχή)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여기서 바울은 겉보기의 번영이나 성공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영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즉 이것은 인과응보의 원리도 권선징악도 아니고 그것을 초월한 것입니다. 영혼이란 하나님과 죄인이 맞닿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번창하고 또 성공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면 그의 그 가장 밑바닥에 있는 영혼은 평생 고통과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적으로 아무리 불행하게 보여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으면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그의 영혼에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울 자신이 모든 고난을 당하여(고린도후서 11:23-28), 그 가운데서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그의 영혼에 넘쳐 있는 현실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인과응보와 같은 사상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상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오늘날 고난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도 그 증인입니다. 그들도 바울과 함께 이 성경 말씀이 진리임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9, 10절) 라고 반복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선을 행하는 사람”이 자기들이고 “악을 행하는 사람”이 이방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늘 나라는 선민의 유대인인 자기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고 그렇게 우쭐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자만심이 뿌리부터 뒤집히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12절부터 율법을 가지고 있거나 없거나 하는 시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을 죄인이라고 멸시했습니다. 자기들은 모세의 율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올바르고, 이방인들은 그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 그들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제 그것도 뒤집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대인의 기준이나 그들의 척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12절) 라고 이렇게 율법을 갖고 있다,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의 입장에 서서 그 율법주의에 맞서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리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14-15절)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성경 말씀을 몰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불완전해도 반드시 양심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부모를 공경할 때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이 없어도 율법대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 알면 안 되는 것은 그 양심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을 갖지 않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돌연 불의의 사고로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또 우리의 가족이나 소중한 친구 중에서도 그리스도에게 돌아가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 날에 어떻게 될까? 아무래도 우리는 그게 궁금합니다.
그것에 바울이 대답한 것이 16절입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16절)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납득되지 않는 분도 계실지도 모릅니다. 단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을 갖지 않는 이방인이든 율법을 부여받은 유대인이든 하나님께서는 평등하게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중에서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생애를 마감해 갔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된다고 성경은 약속하는 것입니다. 멸망하는 자도 그리스도와는 무관하게는 멸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공평하다고 생각되거나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날에는 그것이 공평한 빛 속에 놓여져, 모든 사람이 납득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올바른 심판에 압도당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불공평한 일 투성이입니다. 진정한 공평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우리를 진정한 공평함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의 심판이 우리의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성경의 회답입니다.
바울은 16절에서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라고 서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하면, 그리스도의 심판 또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멸망을 향해 가는 우리를 찾아 구원해 주시고, 평생 함께 걸어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심판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공평하고 자애로운 심판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죄인인 채 그대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어떻게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죄가 뚜렷이 드러나고 때로는 실족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심판의 주님으로 우리를 공평하게 심판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든 십자가의 주를 따르려고 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족한 것, 울면서 죄사함을 기도한 것,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신 심판의 주님께서 구세주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애로움이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