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시간에는 이방인의 죄, 즉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2장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라고 바울은 강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인간의 죄의 핵심 부분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상 숭배와는 무관하며, 1장 후반부에 언급되어 있던 우상 숭배가 가져오는 여러 가지의 죄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2절과 3절에서 이렇게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3절)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말씀드린 것 같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는 구경꾼들이 모여 비웃으면서 십자가의 주님께 욕설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 구경꾼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인 이상으로 심각한 죄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3절)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을 흘겨보고 터무니없는 자들이라고 심판하면서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며 이렇게 시치미를 떼지만 그 본인이 그와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주님께 욕설을 퍼붓고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 죄인의 모습이라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에 대한 모독은 괜찮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죄인끼리 서로 심판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주 예수님을 매도한 자는 용서받습니다. 우리로 향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 다 예수님으로 향하여 십자가 아래에 있는 자에게는 죄사함만이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며 이웃을 심판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십자가의 주님께 용서받은 자의 죄를 찾아내서 이웃이나 형제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떠들까요? 십자가 아래의 그 누구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을 어떻게 사람이 심판할 수 있을까요?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라고 묻는 것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구원이 실현된 후에도 이것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4절과 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4-5절)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으로 우리를 심판하지 말고 구원받도록 청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의 날이자 구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관계없이 사람을 재판한다는 그 죄가 여기서 지적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판한는 자는 누구일까요? 여기에서는 자기들을 제쳐놓고 이방인을 심판하는 유대인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도 이방인들을 죄인 취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고 일방적인 은총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고 하나님 나라의 축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심판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심판하고 형제조차 심판합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의 모습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끝없이 서로 심판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들입니다. 유대인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모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탕감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망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지 않고 형제의 사소한 일에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느새 심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주위를 살펴보고 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또한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렇게 남을 심판하는 우리에게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3절)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 이 로마서의 중심적인 사신이며, 이것이야말로 복음입니다. 로마서의 테마인 신앙 의인이란 달리 표현을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심판하면서 실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정죄하여도 그것을 뒤엎어 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실은 이 “정죄한다”는 말은 이 로마서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한 번 더 나옵니다. 그것이 8장 34절의 말씀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8:34)
누군가가 나를 정죄하여도 또 자기 자신을 정죄하여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다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이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나의 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죄사함을 확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을까” 라며 바울과 함께 우리도 환희의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6절) 이 약속입니다. 우리는 죄로 정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예배 부름의 말씀인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내게 주실 것”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이 오늘 말씀에서 “보응”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응이란 “의의 면류관”입니다. 그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라고 하는 이 약속이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 세상적으로는 완전히 무력하고 멸시당하면서도 십자가 주님의 복음 선교를 계속한 바울과 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보응은 의의 면류관입니다. 더이상 우리에게 심판은 심판이 아닙니다. 의의 면류관을 받는 날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육체의 죽음도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승리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영원한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받는 날인 것입니다.
2022年2月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Ⅱテモテ(디모데후서) 1章 7節
〇讃 頌 讃頌歌 280(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2章 1~11節
〇説 教 「神の報い(하나님의 보응)」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84(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2月 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報い」 ローマ書 2章 1~11節
前回、異邦人の罪、すなわち偶像崇拝の罪についてお話ししました。そして、この2章に入って、パウロはユダヤ人の罪について語っております。
まず、1節です。「だから、すべて人を裁く者よ、弁解の余地はない。あなたは、他人を裁きながら、実は自分自身を罪に定めている。あなたも人を裁いて、同じことをしているからです。」(1節)
「だから、すべて人を裁く者よ」と、パウロは強い口調で語り始めています。まさに人間の罪の核心部分に入ったからです。
ユダヤ人たちは主なる神さまを信仰しているがゆえに、偶像崇拝とは無関係であり、1章後半で述べられていた偶像崇拝がもたらす様々な罪とは無関係であると思っておりました。ところが、パウロはユダヤ人たちに異邦人と同じ罪を犯してい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
パウロは、2節3節でこう続けています。「神はこのようなことを行う者を正しくお裁きになると、わたしたちは知っています。このようなことをする者を裁きながら、自分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者よ、あなたは、神の裁きを逃れられると思うのですか。」(2-3節)
主イエスさまは私たち罪人のすべての罪を背負って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り、それゆえに、私たちの罪は赦されました。しかし、前回お話ししましたように、主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下には見物人や野次馬が集まり、あざ笑いながら、十字架の主に罵声を浴びせかけていました。その見物人や野次馬というのは、異邦人たち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他でもないユダヤ人たちであったのです。ここには、異邦人以上に深刻な罪人がいることがわかります。それが、「このようなことをする者を裁きながら、自分でも同じことをしている者」(3節)ということです。罪を犯しているような人を横目で見て、とんでもない連中だ、と裁きながら、自分には無関係だ、とこのようにしらを切る。しかし、その本人が同じことを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この十字架の主に罵声を浴びせかけていたのは、まさに私たち罪人の姿だと、前回、お話ししました。しかし、主イエスさまに対する冒瀆はいいのです。何を言っても赦されるのです。それが福音です。しかし、この主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下で、罪人同士で裁きあっているのは赦されないということを私たちは忘れてはなりません。
「十字架につけよ」、と主イエスさまを罵倒した者は赦されます。私たちに向けられるはずの神さまの裁きが、全てイエスさまに向けられ、十字架の下にいる者には、罪の赦しだけが向けられているからです。しかし、「十字架につけよ」と隣人を裁く者は赦されないのです。どうして、この十字架の主に赦された者の罪を探し出して、今度は隣人や兄弟を十字架につけようと騒ぐのでしょうか。十字架の下の誰にそんな資格があるでしょうか。神さまが赦したものをどうして人が裁くことが出来るでしょうか。
「あなたは、神の裁きを逃れられると思うのですか」と問われているのは、そのような者たちなのです。そして、十字架の救いが実現した後も、これを続けていたのがユダヤ人たちであったのです。
そして、パウロは4節5節でこ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あるいは、神の憐れみがあなたを悔い改めに導くことも知らないで、その豊かな慈愛と寛容と忍耐とを軽んじるのですか。あなたは、かたくなで心を改めようとせず、神の怒りを自分のために蓄えています。この怒りは、神が正しい裁きを行われる怒りの日に現れるでしょう。」(4-5節)
神さまは「慈愛と寛容と忍耐」をもって、私たちを裁くことなく、救いに与るようにと招いていて下さる、それがまさに、恵みの時、救いの日であるわけです。
それなのに、主イエスさまの十字架とは無関係に、人を裁く、その罪がここで指摘されているのです。
それでは、「裁く」のは、誰でしょうか。ここでは自分たちを棚に上げて異邦人を裁くユダヤ人の姿が浮き彫りにされました。ユダヤ人は、自分たちが神の御子を十字架につけておきながら、異邦人を罪人扱いしていたのです。
では、私たちキリスト者はどうでしょうか。私たちは、神さまに選ばれ、一方的な恩恵によって罪許され、救われ、永遠の命が約束され、神の国の祝福の中で生きています。しかし、私たちは、人を裁く者でもあります。隣人を裁き兄弟まで裁く、これが、私たちの現実の姿です。十字架の下で延々と裁きあっている、それが私たちです。ユダヤ人の姿は、私の姿なのです。
せっかくキリストが私たちの罪を帳消しにしてくださったのに、それを台無しにしようとしているのです。自分自身の罪には気づかずに、兄弟の些細なことが気になって仕方がない。いつの間にか裁いている。神さまの立場に立って周りを見ている。それが私たちです。私たちもまた「他人を裁きながら、実は自分自身を罪に定めている」罪人なのです。
だから、パウロはそのように人を裁く私たちに「あなたは、神の裁きを逃れられると思うのですか」(3節)と問うているのです。
しかし、皆さん、それでもなお、「神の裁きを逃れられる」ことを約束するのが、このローマ書の中心使信であり、これこそが福音なのです。ローマ書のテーマであります信仰義認というのは、言い方を変えれば、「神の裁きを逃れられる福音」ということです。
私たちは、他人を裁きながら、実は自分自身を罪に定めている罪人です。しかし、たとえ、私たちが自分自身を罪に定めていても、それを覆してくださる方がおられるのです。
実は、この「罪に定めている」という言葉は、このローマ書のクライマックス部分で、もう一度出てきます。それが8章34節の御言葉です。「だれがわたしたちを罪に定めることができましょう。死んだ方、否、むしろ、復活させられた方であるキリスト・イエスが、神の右に座っていて、わたしたちのために執り成してくださるのです。」(8:34)
誰かが、私を罪に定めても、また、自分自身を罪に定めていても、それでもなお、「キリスト・イエスが、神の右に座っていて、わたしたちのために執り成してくださる」、この約束は取り消されないのです。一番私の弱さをご存知である主イエスが私を執り成し、赦しを確定してくださるのです。それゆえに、「だれがわたしたちを罪に定めることができましょう」と、パウロと共に私たちも歓喜の声をあげることが赦されるのです。
そればかりではありません。6節です。「神はおのおのの行いに従ってお報いになります。」(6節) この約束です。私たちは、罪に定められないばかりか、神の報いが授けられるのです。
今日の招きの言葉でありますテモテの手紙二4章8節に「今や、義の栄冠を受けるばかりです。正しい審判者である主が、かの日にそれをわたしに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しかし、わたしだけでなく、主が来られるのをひたすら待ち望む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います」(Ⅱテモテ4:8)とあります。
日本語訳ではわかりにくいのですが、「授けてくださる」と訳されている言葉が、今日の御言葉で「報い」と訳されている言葉と同じ言葉です。神の報いとは、「義の栄冠」のことです。それはパウロだけでなく、「主が来られるのをひたすら待ち望む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います」という、この約束が私たちにも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この世的には全く無力で、蔑まれながら来る日も来る日も十字架の主の福音宣教を続けたパウロや、主イエスさまの再臨を待ち望む私たちキリスト者にとって神の報いは義の栄冠なのです。もはや、私たちにとって裁きは裁きではありません。義の栄冠をいただく日です。もはや、私たちにとって、肉体の死も単なる死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勝利の瞬間なのです。そして、それは永遠の喜びに迎い入れられる想像もできない天の国の祝福に与る日なのです。
【2022년 2월 6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보응” 로마서 2장 1~11절
지난시간에는 이방인의 죄, 즉 우상 숭배의 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2장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1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라고 바울은 강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인간의 죄의 핵심 부분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상 숭배와는 무관하며, 1장 후반부에 언급되어 있던 우상 숭배가 가져오는 여러 가지의 죄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2절과 3절에서 이렇게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2-3절)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말씀드린 것 같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는 구경꾼들이 모여 비웃으면서 십자가의 주님께 욕설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그 구경꾼들은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인 이상으로 심각한 죄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3절)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을 흘겨보고 터무니없는 자들이라고 심판하면서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며 이렇게 시치미를 떼지만 그 본인이 그와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주님께 욕설을 퍼붓고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 죄인의 모습이라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에 대한 모독은 괜찮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죄인끼리 서로 심판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주 예수님을 매도한 자는 용서받습니다. 우리로 향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 다 예수님으로 향하여 십자가 아래에 있는 자에게는 죄사함만이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며 이웃을 심판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십자가의 주님께 용서받은 자의 죄를 찾아내서 이웃이나 형제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떠들까요? 십자가 아래의 그 누구에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을 어떻게 사람이 심판할 수 있을까요?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라고 묻는 것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구원이 실현된 후에도 이것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4절과 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4-5절)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으로 우리를 심판하지 말고 구원받도록 청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의 날이자 구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관계없이 사람을 재판한다는 그 죄가 여기서 지적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판한는 자는 누구일까요? 여기에서는 자기들을 제쳐놓고 이방인을 심판하는 유대인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도 이방인들을 죄인 취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떨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고 일방적인 은총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고 하나님 나라의 축복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심판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심판하고 형제조차 심판합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의 모습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끝없이 서로 심판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들입니다. 유대인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모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탕감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망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깨닫지 않고 형제의 사소한 일에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느새 심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주위를 살펴보고 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또한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렇게 남을 심판하는 우리에게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3절)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 이 로마서의 중심적인 사신이며, 이것이야말로 복음입니다. 로마서의 테마인 신앙 의인이란 달리 표현을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심판하면서 실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자기 자신을 정죄하여도 그것을 뒤엎어 주시는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실은 이 “정죄한다”는 말은 이 로마서의 클라이막스 부분에 한 번 더 나옵니다. 그것이 8장 34절의 말씀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8:34)
누군가가 나를 정죄하여도 또 자기 자신을 정죄하여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다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이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나의 약함을 알고 계시는 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죄사함을 확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을까” 라며 바울과 함께 우리도 환희의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6절) 이 약속입니다. 우리는 죄로 정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예배 부름의 말씀인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내게 주실 것”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이 오늘 말씀에서 “보응”이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응이란 “의의 면류관”입니다. 그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라고 하는 이 약속이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 세상적으로는 완전히 무력하고 멸시당하면서도 십자가 주님의 복음 선교를 계속한 바울과 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보응은 의의 면류관입니다. 더이상 우리에게 심판은 심판이 아닙니다. 의의 면류관을 받는 날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육체의 죽음도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승리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영원한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하늘 나라의 축복을 받는 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