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8장에는 바빌론 유수에서 귀환하고 얼마 동안 지나간 후,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행해진 예배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 이하에 구체적인 이때의 예배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에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낭독한 성경 말씀을 에스라를 섬기는 레위 사람들이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낭독한 율법서는 히브리어였습니다. 바빌론 유수의 기간이 70년 정도 있었기에 귀환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오랜 이방 생활로 인해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통용되던 아람어만을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태어났을 때부터 바빌론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구사했기에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수의 백성들이었습니다만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 이라는 강한 민족 의식을 가지고 신앙을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힘들게 성전을 재건하여 지금 성전 앞에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요한 성경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서는 이스라엘의 신앙이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해서 그들의 신앙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지금 재건된 성전 앞에 서 있습니다만 그것은 신앙을 가지고 서 있었다기보다는 강한 민족 의식을 가지고 서 있었던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번역된 성경의 내용을 듣고 그것을 이해하자마자 그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고 있었습니다.”(9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해주는 레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뜻을 해석했다”는 것은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낭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레위 사람들이 설교한 것입니다.
그 설교는 말씀을 통해 그들이 처한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나라가 멸망되었는지, 어쩌다가 죄수의 백성으로 전락했는지, 왜 유수에서 해방되었는지, 즉 진정한 자신들의 모습이 설교를 통해서 제시된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모두 다 울었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의 죄의 크기를 새삼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눈이 열렸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를 통곡했다는 의미입니다.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이란 허울 뿐이고, 실체는 배신의 백성임을 새삼 알게 된 그들은 그때 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즉시 에스라들은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이날은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한 성일”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날의 주인이시며 지금 그들은 다름 아닌 주님께 초대받고 있으니 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에스라들은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을 기쁘게 축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주일을 성스럽게 보낸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마다 이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내는 방법이 다양합니다만, 각각 그것이 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주일이 일주일중에서 가장 즐거운 날이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주일을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을까요?
주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일주일중에서 가장 좋고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기쁨에 넘치는, 그것도 주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조차도 빨리 일요일이 오기를 고대하는 날이 주님의 날일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 힘이 없는 것은 이 기쁨이 부족하기 때문 아닐까요? 주일이 어느새 의무로 바뀌어 있지는 않을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가 말한 대로 행동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12절) 그것은 “그들이 그 읽어 들려준 말을 밝히 앎이라”(12절) 고 쓰여 있습니다.
그들은 들려준 말씀을 이해했을 때 그 죄의 무게에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씀을 이해했을 때 기쁨 또한 컸던 것입니다. 이 동시에 일어나는 비탄과 기쁨을 합쳐서 회개라고 말합니다. 형식적인 민족 의식뿐 이미 그 실체조차 의심스러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회개를 통해 새로운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경 말씀은 두 가지의 점에서 이 회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룬 말씀입니다.
첫번째, 오늘의 성경 말씀에 “모든 백성”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1절, 3절, 5절, 6절, 9절, 11절)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1절) 라는 상태가 회개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회, 교회입니다. 우리는 따로따로 지금 교회에 초대받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매주 주일에 이 교회에서, 그리고 교회에 모일 수 없는 분들은 인터넷 예배로 우리는 모두 다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몸인 것처럼 주님 앞에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고민과 불안, 걱정과 슬픔이 있습니다. 죄가 있고 더러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의 모체인 교회입니다. 나는 죄가 많다든가, 부끄럽다든가, 그런 이유로 교회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많은 죄와 수치를 안고 있는 죄인 이기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다름 아닌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께서는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인이 하나가 되어서 형성된 상처투성이의 몸입니다. 그 상처투성이인 몸에 복음이 전해지고 회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 회개의 장소에 모인 이상, 반드시 큰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비참한 상태로 모인 장면이었습니다.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그것은 이름뿐이고,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조차 통역 없이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율법의 의미조차도 모르는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가서 좋은 고기를 먹고 달콤한 음료를 마시라고 예배에서 얘기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째서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었을까요? 그것은 자기들의 모습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비참한 죄인, 배은망덕한 배신자들이 현실에 눈이 열리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참한 죄인이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초대받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 때, 자기의 모습은 이미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식탁에 초대한 게 올곧은 바른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죄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배에 초대받았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복음 2장 17절)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도, 예수님께 초대받은 죄인들도, 마시고 먹고 죄까지 용서받은 옹색하기 그지없는 몰염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다를 바 없이 똑같습니다.
마시고 먹고 죄까지 용서받은 참으로 염치없는 죄인, 그것이 우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되돌아온다,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공적도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돌아갈 때 거기에는 용서가 보증되어 있습니다. 이 자비에만 의지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주 여호와를 기뻐한다는 것은 맑고 올바라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매주 죄를 거듭하여 더럽혀져도 교회에 초대된 우리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예배를 통해 바뀌어 이 세상에 나아가는 것, 주의 성일에 나와 근심치 말고 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 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2022年1月30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ルコ(마가복음) 2章 17節
〇讃 頌 讃頌歌 285(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ネヘミヤ記(느헤미야) 8章 1~12節
〇説 教 「主を喜ぶということ(주님을 기뻐한다는 것)」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04(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月 30日 主日礼拝説教】
「主を喜ぶということ」 ネヘミヤ記 8章 1~12節
ネヘミヤ記8章には、バビロン捕囚から帰還してしばらくたった後、エルサレム神殿の前で行われた礼拝の様子が記されています。
8節以下に具体的なこの時の礼拝メッセージが記録されておりますが、ここに「彼らは神の律法の書を翻訳し」(8節)とあります。祭司エズラが行った聖書朗読を、エズラに仕えるレビ人たちが翻訳したということです。エズラが朗読した律法の書はヘブライ語でした。バビロン捕囚の期間は70年ほどありましたから、帰還した人々の多くは、外国で生まれた人々です。生まれた時からバビロンの公用語であるアラム語を話しており、母国語のヘブライ語がよくわからなかったのです。
彼らは、捕囚の民ではありましたが、「神の民ユダヤ人」という強い民族意識をもって、信仰を継承しておりました。だからこそ、彼らは苦労しながらも、神殿を再建し、今、神殿の前に集まっていたのです。ところが、彼らは、肝心な聖書の御言葉、神さまの御言葉を直接聞くことが出来なったわけです。神の御言葉に立つイスラエルの信仰であるはずの彼らの信仰は形式的なものになっていたのです。彼らは今、再建された神殿の前に立っているわけですが、それは信仰をもって立っていたというより、強い民族意識をもって立っていたに過ぎなかったのです。神の言葉である聖書がわからないというのは、そういうことです。
それが、翻訳された聖書の内容を聞いて、それを理解したとたんに彼らに大きな変化が現れました。「民は皆、律法の言葉を聞いて泣いていた」(9節)のです。ここで大切なのは、「律法の説明に当たったレビ人」がいたということです。「律法の説明」というのは、御言葉の解き明かしです。つまり、説教です。エズラが読み上げた神の言葉をレビ人たちが説教したのです。
その説教は、御言葉から、彼らがおかれている現実を説明するものでした。どうして国が滅ぼされたのか、どうして捕囚の民に転落したのか、どうして、捕囚から解放されたのか、すなわち、本当の自分たちの姿が御言葉の解き明かしによって提示されたのです。
その時、彼らは全員泣いたのです。堕落したイスラエルの罪の大きさを改めて認識し、それにもかかわらずにイスラエルの民たちを見捨てることなく導かれる神さまの大きな恵みに目が開かれたのです。神の民ユダヤ人とは名ばかりで、実体は背信の民であった、裏切り者であった、恩知らずであった、そのことを改めて知った彼らは、その時、泣くしかなかったのです。
しかし、すかさず、エズラたちは、「今日は、あなたたちの神、主にささげられた聖なる日だ。嘆いたり、泣いたりしてはならない。」と忠告します。この日は、「主にささげられた聖なる日」、主の日なのです。主がこの日の主人であり、今彼らは、他でもないこの主に招かれている、だから泣く必要はないのです。さらにエズラたちは、悲しむどころか、むしろ「行って良い肉を食べ、甘い飲み物を飲みなさい」、と続けます。そして、これが、主を喜び祝うことである、とさえ言うのです。
キリスト者の間でも、主の日を聖く過ごす、という理解に幅がありますから、色々な過ごし方がありますが、それぞれ、それが主を喜び祝うことであるのなら、それで良いのだと思います。
ただ、主の日が一週間で一番楽しい日であることが大切です。主の日をキリスト者が喜んでいなければ、どうして伝道ができるでしょうか。
主の日は、特別な日です。一週間で一番おいしいものを食べて、一番おいしいものを飲んで、喜びにあふれる、それも主を喜ぶことです。早く日曜日にならないかな、と子どもたちさえも思えるような日が主の日のはずです。今、教会に元気がないのは、この喜びが足りない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主の日がいつの間にか義務に変わっていないでしょうか。
さて、イスラエルの民たちは、言われたとおりに行動しました。「民は皆、帰って、食べたり飲んだりし、備えのない者と分かち合い、大いに喜び祝った」(12節)のです。それは、「教えられたことを理解したからである」(12節)、とあります。
彼らは、教えられたことを理解した時、その罪の重さに、嘆きました、しかし、同じく、教えられたことを理解した時、喜び祝ったのです。この同時に起こる嘆きと喜びをまとめて、悔い改めと申します。形式ばかりの民族意識だけで、もはやその実体さえ怪しかったイスラエルの民たちは、今、悔い改めによって、新しい歩みを始めたのです。
それゆえ、今日の御言葉は、二つの点で、この悔い改めを実に具体的に描いた御言葉です。
一つ目、今日の御言葉で「民は皆、」という言葉が何度も繰り返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1節、3節、5節、6節、9節、11節)。これが非常に大切です。「民は皆、一人の人のようになった」(1節)、という状態が悔い改めの母体となったということだからです。これが神の集会、教会なのです。私たちはバラバラに今教会に招かれ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毎週主の日この教会で、そして教会に集えない方は、インターネット礼拝によって私たちは、皆主の前に立っている、あたかも一つの身体であるかのように主の御前に招かれているのです。
そこには多くの悩みや不安や、心配事や悲しみがある、罪があり、汚れがあります。それでもなお、招かれているのです。それが悔い改めの母体である教会なのです。私は罪深いからとか、恥ずかしいからとか、そんな理由で教会を出ていってはならないのです。むしろ、多くの罪と恥を抱えている罪人こそ招かれているのです。
他でもない、そのあなたをキリストは必要とされているのです。教会はキリストの身体、とよく言われます。しかし、それは私たち一人一人の罪人が一つになって形成された傷だらけの身体です。その傷だらけの身体に福音が語られ、悔い改めが与えられるのです。
二つ目、この悔い改めの場所に集められた以上、必ず大きな喜びを与えられて遣わされるのです。今日の御言葉は、まさにイスラエルの民たちが最も惨めな状態で集まった場面でした。バビロン捕囚から解放されたユダヤ人たちは、神の民でありながら、それは名ばかりで、肝心な神の言葉さえ通訳なしにはわからない状態でありました。律法を守るどころか、律法の意味さえ分からない始末であったのです。しかし、その彼らが行って良い肉を食べ、甘い飲み物を飲みなさいと礼拝から送り出されたのです。
彼らはどうして、律法の言葉を聞いて泣いていたのでしょうか。それは自分たちの姿だけに目を注いでいたからです。律法を守れない惨めな罪人、恩知らずの裏切り者、この現実に目が開かれ、打ち砕かれたからです。しかし、その惨めな罪人が皆、神の御前に招かれるのが礼拝なのです。その場合、自分の姿はもはや問題ではないのです。キリストだけに目を注げばよいのです。
主イエスさまが、地上を歩まれた時、食卓に招いたのは正しい人でしょうか。いいえ罪人です。
今日、私たちは、このイエスさまの御言葉で礼拝に招かれました。「医者を必要とするのは、丈夫な人ではなく病人である。わたしが来たのは、正しい人を招くためではなく、罪人を招くためである。」(マルコ2章17節)
バビロン捕囚から帰った神の民も、イエスさまに招かれた罪人たちも、飲んで食べて、罪まで許された調子のいい人たちでした。それは私たちも同じなのです。
飲んで食べて、罪まで許された調子のいい罪人、それが私たちのそのままの姿です。しかし、これが立ち帰る、悔い改め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何の功績もない私たちがキリストに帰る時、そこには赦しが保証されているのです。この憐れみだけにすがることが悔い改めなのです。
主を喜ぶ、それは、清く正しく、罪を犯さないことではありません。毎週罪を重ねて汚れて教会に招かれた私たちが、キリストに立ち帰り、悔い改めて、罪赦されて、行って良い肉を食べ、甘い飲み物を飲みなさい、と礼拝から送り出されること、これが主を喜ぶということなのです。
【2022년 1월 30일 주일예배】
“주님을 기뻐한다는 것” 느헤미야 8장 1~12절
느헤미야 8장에는 바빌론 유수에서 귀환하고 얼마 동안 지나간 후,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행해진 예배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 이하에 구체적인 이때의 예배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에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제사장 에스라가 낭독한 성경 말씀을 에스라를 섬기는 레위 사람들이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낭독한 율법서는 히브리어였습니다. 바빌론 유수의 기간이 70년 정도 있었기에 귀환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오랜 이방 생활로 인해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통용되던 아람어만을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태어났을 때부터 바빌론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구사했기에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잘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수의 백성들이었습니다만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 이라는 강한 민족 의식을 가지고 신앙을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힘들게 성전을 재건하여 지금 성전 앞에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요한 성경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서는 이스라엘의 신앙이었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해서 그들의 신앙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지금 재건된 성전 앞에 서 있습니다만 그것은 신앙을 가지고 서 있었다기보다는 강한 민족 의식을 가지고 서 있었던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른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번역된 성경의 내용을 듣고 그것을 이해하자마자 그들에게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고 있었습니다.”(9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해주는 레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뜻을 해석했다”는 것은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낭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레위 사람들이 설교한 것입니다.
그 설교는 말씀을 통해 그들이 처한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나라가 멸망되었는지, 어쩌다가 죄수의 백성으로 전락했는지, 왜 유수에서 해방되었는지, 즉 진정한 자신들의 모습이 설교를 통해서 제시된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모두 다 울었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의 죄의 크기를 새삼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눈이 열렸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를 통곡했다는 의미입니다.하나님의 백성 유대인이란 허울 뿐이고, 실체는 배신의 백성임을 새삼 알게 된 그들은 그때 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즉시 에스라들은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이날은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한 성일”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날의 주인이시며 지금 그들은 다름 아닌 주님께 초대받고 있으니 울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에스라들은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님을 기쁘게 축하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주일을 성스럽게 보낸다는 것에 대해서는 저마다 이해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보내는 방법이 다양합니다만, 각각 그것이 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주일이 일주일중에서 가장 즐거운 날이라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주일을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을까요?
주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일주일중에서 가장 좋고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며, 기쁨에 넘치는, 그것도 주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조차도 빨리 일요일이 오기를 고대하는 날이 주님의 날일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 힘이 없는 것은 이 기쁨이 부족하기 때문 아닐까요? 주일이 어느새 의무로 바뀌어 있지는 않을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가 말한 대로 행동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12절) 그것은 “그들이 그 읽어 들려준 말을 밝히 앎이라”(12절) 고 쓰여 있습니다.
그들은 들려준 말씀을 이해했을 때 그 죄의 무게에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씀을 이해했을 때 기쁨 또한 컸던 것입니다. 이 동시에 일어나는 비탄과 기쁨을 합쳐서 회개라고 말합니다. 형식적인 민족 의식뿐 이미 그 실체조차 의심스러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회개를 통해 새로운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성경 말씀은 두 가지의 점에서 이 회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룬 말씀입니다.
첫번째, 오늘의 성경 말씀에 “모든 백성”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1절, 3절, 5절, 6절, 9절, 11절)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1절) 라는 상태가 회개의 모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회, 교회입니다. 우리는 따로따로 지금 교회에 초대받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매주 주일에 이 교회에서, 그리고 교회에 모일 수 없는 분들은 인터넷 예배로 우리는 모두 다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몸인 것처럼 주님 앞에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많은 고민과 불안, 걱정과 슬픔이 있습니다. 죄가 있고 더러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의 모체인 교회입니다. 나는 죄가 많다든가, 부끄럽다든가, 그런 이유로 교회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많은 죄와 수치를 안고 있는 죄인 이기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다름 아닌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께서는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인이 하나가 되어서 형성된 상처투성이의 몸입니다. 그 상처투성이인 몸에 복음이 전해지고 회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 회개의 장소에 모인 이상, 반드시 큰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비참한 상태로 모인 장면이었습니다.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그것은 이름뿐이고,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조차 통역 없이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율법을 지키기는커녕 율법의 의미조차도 모르는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가서 좋은 고기를 먹고 달콤한 음료를 마시라고 예배에서 얘기한 것입니다.
그들은 어째서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었을까요? 그것은 자기들의 모습만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비참한 죄인, 배은망덕한 배신자들이 현실에 눈이 열리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참한 죄인이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초대받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 때, 자기의 모습은 이미 아무런 문제가 아닙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식탁에 초대한 게 올곧은 바른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죄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배에 초대받았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가복음 2장 17절)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도, 예수님께 초대받은 죄인들도, 마시고 먹고 죄까지 용서받은 옹색하기 그지없는 몰염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다를 바 없이 똑같습니다.
마시고 먹고 죄까지 용서받은 참으로 염치없는 죄인, 그것이 우리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되돌아온다,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공적도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돌아갈 때 거기에는 용서가 보증되어 있습니다. 이 자비에만 의지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주 여호와를 기뻐한다는 것은 맑고 올바라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매주 죄를 거듭하여 더럽혀져도 교회에 초대된 우리들이 그리스도 앞에 나와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며 예배를 통해 바뀌어 이 세상에 나아가는 것, 주의 성일에 나와 근심치 말고 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 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