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로마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만, 지난 주까지의 부분이 이 편지의 첫인사입니다. 그러나 그 서두 인사말에서 바울은 이미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확신 부분을 언급했습니다. 지난 주의 1장 16~17절은 바로 로마서의 주제인 “사람은 신앙에 의해(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력하게 선언하는데, 오늘 말씀으로 인해 드디어 이 로마서의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바울은 로마서 본론에 들어가 먼저 인간의 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8~20절까지 바울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계속 논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모든 죄가 여기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니”(18절) 라고 말합니다. 이 18절의 그리스어 원문은 조금 어순이 다릅니다. 먼저 첫번째 나타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 번역과 한국어 번역의 성서에는 이 말이 마지막에 있고, 문법상의 차이로 어쩔 수 없습니다만, 원문과는 미묘하게 그 강조점이나 앞 절과의 관계가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나타난다”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은 앞 절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쓰여 있습니다만,이 의가 나타난다와 똑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원래 “덮개를 벗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숨겨져 있었던 것의 덮개가 벗겨지고 보이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것은 즉 구약 성서에서 덮개로 덮여 있었던 하나님의 의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덮개로 덮여 있어서 숨겨져 있었던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분명히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죄인에게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 즉 우리 죄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베일도 그 덮개가 제거되어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9절) 라고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이 19절의 마지막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실은 이 보이셨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로마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복음이 분명히 나타난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말입니다.(3:21, 16:26)
즉 이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을 알 만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며 복음 그대로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은 20절 이후에도 열거됩니다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 인하여 나타나는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20절)이고, 이것은 구약 시대부터 덮개로 씌우지 않고 창세로부터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2-23절) 라고 이렇게 우상 숭배에 빠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만, 인간은 인간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위조한 것입니다. 아니, 그 이하의 형상인 새나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것의 형태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두 가지의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 로마서의 본론이 우선 죄의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바울의 시대에는 지금의 성경 같은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성경은 없고 구약 성서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록 집 같은 것이 있고 사회자가 그것을 봉독해서 누군가가 그것을 해설(설교)하는 형태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사도들,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편지가 도착한 경우도 사회자가 예배 때에 모인 성도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하고 나누었습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이 바울의 편지도 교회의 성도들 앞에서 읽었습니다. 그 때의 모습을 좀 상상해 보십시오. 인사가 끝나고 편지의 내용에 들어가자마자 장황하게 인간의 죄를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우상 숭배부터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 숭배로부터 진정한 하나님께 되돌아온 신앙자였습니다. 모처럼 우상으로부터 살아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께 되돌아온 성도들에게 어째서 다시 꺼내도록 우상 숭배의 죄를 지적할까요?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께 되돌아와도 아직 우상 숭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께 되돌아오고 세례를 받아 구원받는다고 해도 우상의 유혹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우상이 성도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세력을 떨치려고 합니다. 돌이나 나무로 만든 가짜 신 정도라면 귀엽습니다만, 재산이나 지위나 명성, 이성,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건물조차 우상이 됩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상 숭배로부터 되돌아온 사람에게야말로 우상 숭배의 죄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상의 거리에서 전도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히로시마든 우상 숭배의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에 대해서 민감해지지 않으면 어느새 교회 안으로조차 이 세상의 우상이 몰래 숨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것은 처음에 말했습니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인하여 구약의 덮개가 벗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사랑인 우리 인간의 구원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베일도 벗겨진 것입니다. 구약 성서에서도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불신앙인 백성들에게 진노를 내리시고 몇 번이나 벌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철저하게 멸망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에도 대답이 나오지 않은 채 구약 성서는 닫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그 하나님의 진노의 덮개가 제거되어 명확하게 나타났다고 로마서는 말합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진노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니”(18절)
이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구약에서는 아직 회답이 주어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진노,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응답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약 성서 전체를 총괄하여 이스라엘에서는 전멸할 만한 하나님의 진노의 대한 결론입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지금도 하나님의 노여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해피엔드라고 하나님의 진노가 없어진 게 아닙니다. 세상 끝까지 십자가에 하나님의 노여움이 집약되어 있고 그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탕감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하나님의 진노는 세상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죄인이 저지르는 죄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 괴로움은 과연 어느 정도의 것이었을까요?
여러분, 우리의 죄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탕감되었다고는 할지라도 우리의 죄가 사라진 게 아닙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지금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괴로워하면서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지적 받을수록 십자가의 속죄의 크기,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복음입니다.
2022年1月1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9編 2, 15節
〇讃 頌 讃頌歌 268(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章 18~23節
〇説 教 「神の贖いの大きさ(하나님의 속죄 크기)」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90(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2年 1月 16日 主日礼拝説教】
「神の贖いの大きさ」 ローマ書 1章 18~23節
今年に入って、ローマ書を読み始めていますが、先週までの部分がこの手紙の冒頭挨拶となっております。しかし、その冒頭挨拶で、パウロはすでにキリスト教信仰の重要な確信部分に触れておりました。先週の1章16~17節は、まさにローマ書の主題である「人は信仰によって(信仰のみで)救われる」ということを力強く宣言するわけですが、今日の御言葉からいよいよこのローマ書の本論に入って行きます。
パウロはローマ書の本論に入り、まず、人間の罪について語っております。18~20節までに、パウロはこれでもかというくらいに人間の罪について論じ続けるのです。まさに人間のあらゆる罪がここで述べられております。
まず、パウロは「不義によって真理の働きを妨げる人間のあらゆる不信心と不義に対して、神は天から怒りを現されます」(18節)と語ります。この18節のギリシャ語原文は、少し語順が違っております。まず、最初に「現されます」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日本語訳と韓国語訳の聖書では、この言葉が最後に来ていて、文法上の違いで仕方がないことですが、原文とは微妙にその強調点とか前の節との関係が少し違うものになってしまっています。この「現されます」、と訳されている言葉は、前の17節の「福音には、神の義が啓示されています」とあります「啓示されています」と全く同じ言葉です。
そして、この言葉は、もともと「覆いを取り除く」という意味があります。隠されていたものの覆いが取り除かれて、見えるようになることをあらわす言葉です。「福音には、神の義が啓示されている」それはつまり旧約聖書で覆いがかけられていた神の義が、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によって取り除かれたということですね。旧約聖書では、神の義に関して、覆いがかかっていて隠されていたものが、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によってはっきりと示されたの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すなわち、私たち罪人に無罪宣告が下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によって神の義、すなわち私たち罪人の救いだけではなくて、同時に神さまの怒りのベールもその覆いが取り除かれて明らかにされ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その上で、「なぜなら、神について知りうる事柄は、彼らにも明らかだからです。神がそれを示されたのです」(19節)と、パウロは続けます。この19節の最後の、「神がそれを示されたのです」、実は、この示すという言葉が大切なのです。この言葉は、ローマ書において、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によって福音が明らかに示されたことを宣言するために使われる言葉なのです。(3:21, 16:26)
すなわち、この「神がそれを示された」「神について知りうる事柄」、それは他でもない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であり福音そのものです。
さらに「神について知りうる事柄」は、20節以降でも列挙されますが、これらは、神さまが造られた被造物によって示される、「目に見えない神の性質、つまり神の永遠の力」(20節)であって、これは、旧約時代から覆いなどかからずに、世界が造られたときから全ての人が理解できる神についての知識です。
しかし、それにもかかわらず、人間は「自分では知恵があると吹聴しながら愚かになり、滅びることのない神の栄光を、滅び去る人間や鳥や獣や這うものなどに似せた像と取り替えたのです」(22-23節)と、このように偶像崇拝に陥ったのです。
神さまは、神のかたちに人間を造られましたが、人間は、人間のかたちに神さまを偽造したのです。いいえ、それ以下のかたちである、鳥や獣や這うもののかたちにすり替えたのです。
今日の御言葉は、2つの大切なことを教えています。
まず一つ目は、このローマ書の本論が、まず罪の問題から始まった、という事実です。
このパウロの時代、今の聖書のようなに皆が読めるような聖書はなく、旧約聖書やイエスさまが語られた語録集のようなものがあって、司会者がそれを朗読し、誰かがそれを解説(説教)する形で礼拝が守られました。また、使徒たち、教会の指導者たちから手紙が届いた場合も、司会者が礼拝の時に集まった信徒たちの前で、大きな声で朗読して分かち合っていたのです。
ローマ書のこのパウロの手紙も教会の信徒の前で読まれました。その時の様子をちょっと想像してみて下さい。あいさつが終わり手紙の内容に入ったと思ったら、延々と人間の罪が語られるわけですね。そして、真っ先に偶像崇拝から指摘されているのです。
このローマ教会の信徒たちは、偶像崇拝から真の神に立ち帰った信仰者ばかりでした。せっかく偶像から生ける真の神さまに立ち帰った信徒たちに、どうして蒸し返すように偶像崇拝の罪を指摘するのでしょうか。
それは真の神さまに立ち帰ってもまだ偶像崇拝と無関係ではないからです。聖書の神さまに立ち帰って、洗礼を受けて救われても、偶像の誘惑が弱まることはありません。むしろ、あらゆる偶像が信徒だけでなく教会の中でも幅を利かせようとします。石や木でこしらえた偽りの神くらいなら可愛いのですが、財産や、地位や名声、異性、とあらゆるものが偶像になり得ます。教会の建物でさえ偶像になります。救われたからといって安心してはならないのです。むしろ、偶像崇拝から立ち帰った者にこそ、偶像崇拝の罪が語られるべきなのです。それは、偶像の町で伝道を続けているからです。ローマであれ、私たちの遣わされておりますこの広島であれ、偶像崇拝の都なのです。ですから、偶像崇拝について敏感にならなければ、いつの間にか教会の中にさえこの世の偶像が忍び込んでくるのです。
そして、二つ目、これは最初に言いましたが、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によって、旧約の覆いが取り除かれた、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それは神の義、神の愛であります私たち人間の救いだけではなくて、同時に神の怒りのベールも剥されたのです。旧約聖書でも確かに神さまは不信仰な民に怒りを下され、何度も懲らしめられました。しかし、神さまは、それでも尚、イスラエルを憐れみ、徹底的に滅ぼ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神さまの救いと同様に神さまの怒りにも答えが出されないまま旧約聖書は閉じているのです。
それが今、その神の怒りの覆いが取り除かれてはっきり示された、とローマ書は言うのです。では、その神の怒りとは何でしょうか。そうです、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です。「不義によって真理の働きを妨げる人間のあらゆる不信心と不義に対して、神は天から怒りを現されます。」(18節)
この現わされた神の怒りとは、十字架なのです。旧約ではまだ回答が与えられなかった神の怒り、それは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回答されたのです。キリストの十字架は、旧約聖書全体を総括し、イスラエル全滅に値する神の怒りの結論なのです。
いいえそればかりではありません。この十字架は、今も神さまの怒りな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が復活されてめでたしめでたし、と神の怒りがなくなったわけではないのです。世の終わりまで、十字架に神の怒りが集約され、それゆえに私たちの全ての罪が帳消しにされているのです。
あのゴルゴダの丘でイエス・キリストが受けた神の怒りは、世の初めから終わりまで、私たち罪人が犯す罪の全てであったのです。その苦しみは、どれほどのものであったでしょうか。
皆さん、私たちの罪は主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よって、帳消しにされたとは言っても、私たちの罪が消えてなくなったわけ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の罪のゆえに、今も主イエス・キリストは十字架に架けられ苦しみながら血を流されているのです。私たちはこのことを決して忘れてはいけません。私たちは自身の罪を指摘されればされるほど、十字架の贖いの大きさ、神さまの愛の大きさが分かるのです。これもまた福音です。
【2022년 1월 16일 주일예배】
“하나님의 속죄 크기” 로마서 1장 18~23절
올해 들어 로마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만, 지난 주까지의 부분이 이 편지의 첫인사입니다. 그러나 그 서두 인사말에서 바울은 이미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확신 부분을 언급했습니다. 지난 주의 1장 16~17절은 바로 로마서의 주제인 “사람은 신앙에 의해(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력하게 선언하는데, 오늘 말씀으로 인해 드디어 이 로마서의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바울은 로마서 본론에 들어가 먼저 인간의 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8~20절까지 바울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계속 논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모든 죄가 여기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니”(18절) 라고 말합니다. 이 18절의 그리스어 원문은 조금 어순이 다릅니다. 먼저 첫번째 나타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 번역과 한국어 번역의 성서에는 이 말이 마지막에 있고, 문법상의 차이로 어쩔 수 없습니다만, 원문과는 미묘하게 그 강조점이나 앞 절과의 관계가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나타난다”라고 번역되고 있는 말은 앞 절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라고 쓰여 있습니다만,이 의가 나타난다와 똑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원래 “덮개를 벗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숨겨져 있었던 것의 덮개가 벗겨지고 보이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그것은 즉 구약 성서에서 덮개로 덮여 있었던 하나님의 의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제거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덮개로 덮여 있어서 숨겨져 있었던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분명히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죄인에게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 즉 우리 죄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베일도 그 덮개가 제거되어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9절) 라고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이 19절의 마지막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실은 이 보이셨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말은 로마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복음이 분명히 나타난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말입니다.(3:21, 16:26)
즉 이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을 알 만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며 복음 그대로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은 20절 이후에도 열거됩니다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 인하여 나타나는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20절)이고, 이것은 구약 시대부터 덮개로 씌우지 않고 창세로부터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2-23절) 라고 이렇게 우상 숭배에 빠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만, 인간은 인간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위조한 것입니다. 아니, 그 이하의 형상인 새나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것의 형태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두 가지의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 로마서의 본론이 우선 죄의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바울의 시대에는 지금의 성경 같은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성경은 없고 구약 성서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록 집 같은 것이 있고 사회자가 그것을 봉독해서 누군가가 그것을 해설(설교)하는 형태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사도들,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편지가 도착한 경우도 사회자가 예배 때에 모인 성도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하고 나누었습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이 바울의 편지도 교회의 성도들 앞에서 읽었습니다. 그 때의 모습을 좀 상상해 보십시오. 인사가 끝나고 편지의 내용에 들어가자마자 장황하게 인간의 죄를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우상 숭배부터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우상 숭배로부터 진정한 하나님께 되돌아온 신앙자였습니다. 모처럼 우상으로부터 살아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께 되돌아온 성도들에게 어째서 다시 꺼내도록 우상 숭배의 죄를 지적할까요?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께 되돌아와도 아직 우상 숭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께 되돌아오고 세례를 받아 구원받는다고 해도 우상의 유혹이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우상이 성도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세력을 떨치려고 합니다. 돌이나 나무로 만든 가짜 신 정도라면 귀엽습니다만, 재산이나 지위나 명성, 이성, 모든 것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건물조차 우상이 됩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상 숭배로부터 되돌아온 사람에게야말로 우상 숭배의 죄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상의 거리에서 전도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히로시마든 우상 숭배의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에 대해서 민감해지지 않으면 어느새 교회 안으로조차 이 세상의 우상이 몰래 숨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이것은 처음에 말했습니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인하여 구약의 덮개가 벗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사랑인 우리 인간의 구원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의 베일도 벗겨진 것입니다. 구약 성서에서도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불신앙인 백성들에게 진노를 내리시고 몇 번이나 벌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철저하게 멸망시키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에도 대답이 나오지 않은 채 구약 성서는 닫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그 하나님의 진노의 덮개가 제거되어 명확하게 나타났다고 로마서는 말합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진노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니”(18절)
이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구약에서는 아직 회답이 주어지지 않았던 하나님의 진노,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응답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약 성서 전체를 총괄하여 이스라엘에서는 전멸할 만한 하나님의 진노의 대한 결론입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지금도 하나님의 노여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해피엔드라고 하나님의 진노가 없어진 게 아닙니다. 세상 끝까지 십자가에 하나님의 노여움이 집약되어 있고 그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탕감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하나님의 진노는 세상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죄인이 저지르는 죄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 괴로움은 과연 어느 정도의 것이었을까요?
여러분, 우리의 죄는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탕감되었다고는 할지라도 우리의 죄가 사라진 게 아닙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지금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괴로워하면서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지적 받을수록 십자가의 속죄의 크기,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