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평강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샬롬(평안하라)”에서 온 말인데 일반적으로 “안녕하세요” 정도의 인사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일련의 그 일들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평소의 일상적인 인사말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코로나로 인해 서로 만나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나누는 극히 당연한 일상, 즉 당연한 인간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거리를 잃어버려 많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주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죽음, 게다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스승을 잃어버렸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이나 죄 많음을 깨닫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토록 예수님께 사랑받았는데 그런 예수님을 버렸다, 배신해 버렸다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 얼굴을 대할 수가 없다, 이런 우리들은 제자로 불리울 자격이 없다며 침울해져 있었습니다. 마음의 문도 닫고 집안에 빗장도 걸어둔 채 불안 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강할지어다” “안녕하느냐” 라고 말을 걸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이나 분노의 말이 아니라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아주 일상의 말을 거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아직도 평상시의 관계를 갖고 계셔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평상시의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우리는 이 코로나화 속에서 질리도록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십자가와 부활의 일 역시도 그것이 관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도 처음 그 사람이 예수님이신 줄 몰랐다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고 했는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의 목소리나 모습은 변한게 아니니까 바로 알아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라고 평소와 다름없이 부르셨습니다. 그 때야 비로소 마리아는 예수님이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 “마리아”와 “랍오니”라는 것은 친하게 서로 부른다는 의미로, 부활의 예수님께서 스스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만나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마리아”와 “랍오니”라는 평소 일상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 그 관계라는 것은 이전과 똑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17절입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은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가 이전과는 달라져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마리아”와 “랍오니”라는 호칭으로 불리운 것을 보면 평소의 일상이 회복된 것 같으면서도 실은 그 관계는 변한 것입니다. 랍오니와 제자로서 지낸 이전의 나날이 그대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녕하세요” 라고 주고받는 말이 같아서 한편으론 똑같은 평상시가 돌아온 것 처럼 보여도 결코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속죄의 역사를 마치시고 이제부터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라고 불린 이전의 예수님과 다른 것입니다. 구세주, 심판의 주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받으시는 주 예수님과의 만남은 만남을 갖게 된 사람에게는 새로운 일상으로 인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꼐서는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이르니라”(17절)
새로운 일상이란 새 사명을 부여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녕하세요” 라는 평소와 같은 일상중에 우리는 예수님께 새 사명을 받는 것입니다. 남성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여느 때와 같이 인사하셨다고 하더라도 이 때까지의 나날이 그대로 반복되는 게 아닙니다. 21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제자들은 파견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상속에서 우리도 쓰임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딘가 먼 곳으로 간다거나 전혀 다른 새로운 장소로 가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어제와 똑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께 쓰여질 때, 그것은 새로운 일상이 됩니다. 만나는 사람, 향해 가는 곳은 별로 나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 비로소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전혀 다른 곳, 다른 사람들과의 날들이 시작되는 경우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로 파견될 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는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2~23절)
이것은 죄의 용서와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교회는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단순히 제자들의 모임만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 쓰임받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그리고 그 파견되는 공동체에는 죄의 용서와 심판의 권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의 판단이나 힘으로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심판하거나 용서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권능이 주어진 공동체의 일로서 죄사함과 심판이 집행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도나 선교라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이좋게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을 받고 죄의 용서와 심판의 권능을 집행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 죄사함에 사람들을 부르는 것, 용서받고 새롭게 사는 길을 보이는 것이 전도이며 선교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고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된 평안이 주어집니다. 흔들리지 않는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부조리한 일이나 한심한 자기 자신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도 있지요. 또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마음을 닫아 버릴 때가 있지요. 그러나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으로 그리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문을 열어 새 사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의 인생은 일반적은 의미로서의 “평화” “평안” 가운데 살아간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곤란한 길을 그들은 걸어간 것입니다. 박해나 곤궁 가운데를 그들은 나아갔습니다. 그 후도 그들은 다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그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닦이지 않을 눈물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편 126편 시인의 말씀처럼 “눈물을 흘리며 시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는 것”입니다. 울며 나가는 자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시126:5~6)
여러분, 우리도 인생여정에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납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눈물이 닦여지게 될 것입니다. 내일이 어떤 날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날,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린다 해도 우리의 눈물은 닦이어 두려움은 평안으로 변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2021年 4月 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あなたがたに平和があるように」 ヨハネ 20章 11~23節
復活された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現れて「あなたがたに平和があるように」と言われました。この平和という言葉は、ヘブライ語の「シャローム(平安あれ)」から来ている言葉で、一般的な「ごきげんよう」とか、「おはよう」とかの挨拶の言葉です。イエスさまは、まるで逮捕から十字架の出来事がなかったかのように、ごく普通に日常の中の挨拶の言葉を弟子たちに語られたのです。これは、今、コロナ禍の中で、普通の日常、「おはよう」とか「ごきげんよう」と普通に会ってあいさつを交わす、ごく当たり前の日常、つまり当たり前の人間関係、人と人の間の近しい距離が失われ、多くの不安、恐れがある私たちにとって、イエスさまのこの言葉は、とても大きな意味を持つものだと思うのです。
弟子たちにとって、イエスさまの死、しかも十字架の死というのは、とてもショックな出来事でした。それは単に愛する師(先生)を失ったということに留まらず、この十字架を通して、自分の弱さや罪深さを思い知るに至ったからです。自分たちはあれほどイエスさまに愛されたのに、そのイエスさまを見捨ててしまった、裏切ってしまった。弟子たちは罪責の念に押しつぶされそうになっていたのです。
もうイエスさまに顔向けが出来ない、こんな自分たちは弟子と呼ばれる資格がない、と心沈んでいたわけです。心を閉ざし、家の扉の鍵も閉めて、不安の中におりました。そこに復活なさったイエスさまが現れて、「平安あれ」「おはよう」と声をかけて下さ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裁きや怒りの言葉ではなく、何もなかったかのように、ごく日常の言葉をお掛けになられました。それはイエスさまが弟子たちとごく普通の関係をもってくださったということです。このごく普通の関係というものがどれほどの価値があるものなのか、私たちは、このコロナ禍の中でいやというほど知らされていますが、十字架と復活の出来事においても、それは鍵となるものです。
ところで、マグダラのマリアは、イエスさまと出会っても最初それがイエスさまだと分からなかったと聖書には記されております。園丁だと思ってしまったようですが、不思議な話です。だって、イエスさまの声やお姿が変わってい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から、すぐに分かってもおかしくありません。
そこで、イエスさまは「マリア」と、いつもと変わらないの呼び掛けをされました。その時になってようやくマリアはイエスさまだと分かったのです。この「マリア」「ラボニ(先生)」という親しい呼び掛け合いがなされたというのは、復活のイエスさま御自身から私たち一人一人の名前を呼んで出会って下さるからこそ、私たちは復活の主と出会うことが出来る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また、「マリア」「ラボニ」という日常の中での関係が回復されてこそ、イエスさまと出会うことが出来るということです。ただ、その関係というのは、以前と全く同じ関係ではないんですね。17節です。「わたしにすがりつくのはよしなさい。まだ父のもとへ上っていないのだから。」
この言葉は、イエスさまとマリアの関係が以前とは変わったことを示しております。マリアにとって、「マリア」「ラボニ」と呼び合うかつての日常が回復されたようでありながら、実は、その関係は変わったのです。先生と弟子として過ごした昔の日々がそっくり戻ってきたのではないのです。「平安あれ」「おはよう」と交わす言葉は同じでも、一見、同じ日常が戻ってきたようでも、同じではないのです。十字架による罪の贖いの業を終えられ、これから、天に昇り、父の栄光を受けられるイエスさまは、ナザレの人と呼ばれたかつてのイエスさまと違うのです。救い主、裁き主としての栄光を得られるのです。その栄光を受けられる主イエスさまとの出会いは、出会った者にとって新しい日常へ招かれることでありました。
イエスさまはマリアに言われました。17節、「わたしの兄弟たちのところへ行って、こう言いなさい」と。
新しい日常とは新しい使命を与えられることでもあります。「平安あれ」「おはよう」という普通のような日常にありながら、私たちはイエスさまから新しい使命を与えられるのです。男性の弟子たちもそうでした。「平安があるように」といつものように挨拶をされたからといって、これまでの日々がそのまま繰り返されるのではありません。21節、「父がわたしをお遣わしになっ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遣わす。」
弟子たちは遣わされるのです。新しい日常において私たちも遣わされるのです。それはどこか遠いところに行くとか、まったく新しい場所へ行くとかと言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昨日と同じ場所で同じことをするのであったとしても、神さまに遣わされる時、それは新しい日常になります。出会う人、向かう場所は変わり映えしなくとも、神さまから使命を与えられるとき、それは新しくされるのです。
また、逆に、まったく違う場所、違う人々との日々が始まる場合であったとしても、それが神さまに遣わされる時、「平和があるように」と言われる復活の主イエスさまと出会ったものは、恐れる必要はないのです。
そしてまた、イエスさまは22節でこのように言われております。「聖霊を受けなさい。だれの罪でも、あなたがたが赦せば、その罪は赦される。だれの罪でも、あなたがたが赦さなければ、赦されないまま残る。」(22~23節)
これは罪の赦しと裁きについて語られています。聖霊を受けて、教会が立ちあがるのです。そしてその教会は、単なる、弟子たちの集まりではありません。聖霊を受けて遣わされる者たちの共同体です。そしてその遣わされる共同体には罪の赦しと裁きの権限が与えられるのです。それは人間が人間の判断や力で、誰かを罪に定めたり、裁いたり、赦す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聖霊によって権能を与えられた共同体の働きとして、罪の赦し、裁きが執行されるのです。
教会の伝道や宣教の働きというのは、単に教会に人を集めるための活動ではありません。教会は、仲良くお茶を飲んでおしゃべりするコミュニティを形成するところではないのです。教会は聖霊を受けて、罪の赦しと裁きの権能を執行する共同体なのです。その罪の赦しに人を招くこと、赦されて新しく生きる道を示すことが伝道であり宣教です。人間にとって最も重要なことは神さまの前で、罪を赦され、罪から解放されることです。そこに本当の平安が与えられます。揺るがない喜びが与えられるのです。
私たちも、弟子たちのように、不条理な出来事や自分のふがいなさのために、涙を流す時があるでしょう。また、未来への不安や恐れで心を閉ざしてしまう時があるでしょう。しかし、復活の主イエスさまは「あなたがたに平和があるように」と、私たち言って下さるのです。
弟子たちは、この言葉のゆえに、そして聖霊をいただいたゆえに、扉を開いて、新しい使命に生きる者とされました。それからの彼らの人生は、一般的な意味での、「平和」「平安」ではけっしてありませんでした。むしろ、困難な道を彼らは歩んで行ったのです。迫害や困窮の中を彼らは歩みました。この後も、彼らは再び涙を流すことがありました。恐れを感じることもありました。しかし、もはや復活の主イエスさまと出会う前の彼らではなかったのです。彼らは知っていたのです。ぬぐわれない涙はないことを。詩編126編の詩人の言葉にあるように、「涙と共に種を撒く人は/喜びの歌と共に借り入れる」のです。泣きながら出て行った人は喜びの歌を歌いながら帰ってくるのです。(詩126:5-6)弟子たちは知らされました、取りされられない恐れはないことを。
皆さん、私たちも人生の途上、復活の主イエスさまと出会います。聖霊によってイエスさまの言葉を知らされます。そして涙をぬぐわれるのです。恐れを取り去られるのです。明日はどのような日か私たちには分かりません。しかしどのような日であっても、どんな未来がきても、私たちの涙は取り去られ、恐れは平安へと変えられるのです。
復活の主は、今日も私たちに「あなた方に平安があるように」と呼び掛けて下さっております。
【2021년 4월 4일 주일예배(요약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장 11~23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평강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샬롬(평안하라)”에서 온 말인데 일반적으로 “안녕하세요” 정도의 인사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체포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일련의 그 일들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평소의 일상적인 인사말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코로나로 인해 서로 만나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나누는 극히 당연한 일상, 즉 당연한 인간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거리를 잃어버려 많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주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죽음, 게다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은 너무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스승을 잃어버렸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이나 죄 많음을 깨닫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토록 예수님께 사랑받았는데 그런 예수님을 버렸다, 배신해 버렸다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 얼굴을 대할 수가 없다, 이런 우리들은 제자로 불리울 자격이 없다며 침울해져 있었습니다. 마음의 문도 닫고 집안에 빗장도 걸어둔 채 불안 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강할지어다” “안녕하느냐” 라고 말을 걸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이나 분노의 말이 아니라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아주 일상의 말을 거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아직도 평상시의 관계를 갖고 계셔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평상시의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우리는 이 코로나화 속에서 질리도록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십자가와 부활의 일 역시도 그것이 관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도 처음 그 사람이 예수님이신 줄 몰랐다고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고 했는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의 목소리나 모습은 변한게 아니니까 바로 알아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라고 평소와 다름없이 부르셨습니다. 그 때야 비로소 마리아는 예수님이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 “마리아”와 “랍오니”라는 것은 친하게 서로 부른다는 의미로, 부활의 예수님께서 스스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만나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마리아”와 “랍오니”라는 평소 일상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 그 관계라는 것은 이전과 똑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17절입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은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가 이전과는 달라져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마리아”와 “랍오니”라는 호칭으로 불리운 것을 보면 평소의 일상이 회복된 것 같으면서도 실은 그 관계는 변한 것입니다. 랍오니와 제자로서 지낸 이전의 나날이 그대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녕하세요” 라고 주고받는 말이 같아서 한편으론 똑같은 평상시가 돌아온 것 처럼 보여도 결코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속죄의 역사를 마치시고 이제부터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라고 불린 이전의 예수님과 다른 것입니다. 구세주, 심판의 주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받으시는 주 예수님과의 만남은 만남을 갖게 된 사람에게는 새로운 일상으로 인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꼐서는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이르니라”(17절)
새로운 일상이란 새 사명을 부여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녕하세요” 라는 평소와 같은 일상중에 우리는 예수님께 새 사명을 받는 것입니다. 남성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여느 때와 같이 인사하셨다고 하더라도 이 때까지의 나날이 그대로 반복되는 게 아닙니다. 21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
제자들은 파견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상속에서 우리도 쓰임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딘가 먼 곳으로 간다거나 전혀 다른 새로운 장소로 가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어제와 똑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께 쓰여질 때, 그것은 새로운 일상이 됩니다. 만나는 사람, 향해 가는 곳은 별로 나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 비로소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전혀 다른 곳, 다른 사람들과의 날들이 시작되는 경우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로 파견될 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는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2~23절)
이것은 죄의 용서와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교회는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단순히 제자들의 모임만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 쓰임받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그리고 그 파견되는 공동체에는 죄의 용서와 심판의 권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의 판단이나 힘으로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심판하거나 용서하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권능이 주어진 공동체의 일로서 죄사함과 심판이 집행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도나 선교라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이좋게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을 받고 죄의 용서와 심판의 권능을 집행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 죄사함에 사람들을 부르는 것, 용서받고 새롭게 사는 길을 보이는 것이 전도이며 선교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받고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된 평안이 주어집니다. 흔들리지 않는 기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부조리한 일이나 한심한 자기 자신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도 있지요. 또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마음을 닫아 버릴 때가 있지요. 그러나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으로 그리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문을 열어 새 사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의 인생은 일반적은 의미로서의 “평화” “평안” 가운데 살아간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곤란한 길을 그들은 걸어간 것입니다. 박해나 곤궁 가운데를 그들은 나아갔습니다. 그 후도 그들은 다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그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닦이지 않을 눈물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편 126편 시인의 말씀처럼 “눈물을 흘리며 시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는 것”입니다. 울며 나가는 자는 기쁨의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시126:5~6)
여러분, 우리도 인생여정에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만납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눈물이 닦여지게 될 것입니다. 내일이 어떤 날이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날,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린다 해도 우리의 눈물은 닦이어 두려움은 평안으로 변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