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 말씀은 총독 빌라도에 의한 예수님의 재판 장면입니다만, 28~32절은 대제사장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총독 빌라도의 대화가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고,각각 자기의 입장을 지키려고 하는 제멋대로인 인간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관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예수님의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이니 로마와는 관계 없다고 즉 자기와는 관계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라고 말로는 얘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돌로 친다”라고 하는, 말하자면 린치와 같은 방법으로 유대인들은 죄를 범한 자들을 죽여 온 사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본보기로 십자가형으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자기들은 로마에게 반항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어필할 수도 있고, 자기들의 손도 더럽히지 않게 된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생각이 있는 가운데 총독 빌라도에 의한 로마 재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첫째로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4절) 라고 반대로 되물었습니다. “스스로 하는 말이냐” 라고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대하여 책임의 소재를 뚜렷하게 하라고 캐물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황급히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상자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5절)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화는 전혀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둘러싸고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절) 라고 빌라도에게 타일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10장14절) 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 양은 내 음성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진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도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진리에 속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끝까지 자기의 입장을 지키는 것으로 시종일관하여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그 때문에 이 재판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38-39절) 라고 예수님께 아무 죄도 없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최종적인 판단을 유대인들에게 밀어 넘겨 준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었습니다.
빌라도뿐만 아닙니다. 이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것이 아니니라” 라는 말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바로 자기가 속한 이 세상의 일, 회사의 일 , 이웃의 일, 한국의 일, 일본의 일, 세계 정세이며, 현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과 현실의 세계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으로 보이면서도 하나님의 일은 현실의 생활에도 미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현실이 이 세계의 현실로 되는 것입니다.
32절에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여기에도 하나님의 하신 일이 역사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처음부터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십자가가 아니면 안되었습니다. 스데반처럼 같이 돌로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또 세례 요한처럼 목이 베여 죽는 것도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는 모세 시대의 광야에서 들린 놋뱀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쓰여 있습니다. 그 놋뱀처럼 내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들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리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유도해서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들리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인 예수님께서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즉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만큼 우리의 죄는 무겁다는 것입니다.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안이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진실한 의미로 자신의 죄도 죄사함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도 없는 것입니다.
민수기에 의하면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 반역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분노로 보낸 불뱀들에 물려서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물린 사람들은 연달아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만든 못뱀을 장대 위에 다니 그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린 것입니다. (민수기21장 참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장대 위에 단 놋뱀과 같이 사람들 위에 들리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본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코로나화 가운데 있으면서, 어쩌면 우리의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질문 받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조금씩 상황이 좋아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앞날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심판과 시험은 다릅니다. 지금의 코로나화는 심판이 아니라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지금이야말로 수난절에 시험을 당하신 수난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를 쳐다 봐야 합니다. 옛날에 광야에서 쓰러진 사람들이 오직 모세가 든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죽지 않아도 되었던 것 처럼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를 쳐다봐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시며,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 진리는 냉혹한 사실도 아니고 무미건조한 난해한 이론도 아닙니다. 사랑과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절대적 힘을 가졌던 저 대로마제국도 쓰러졌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또 새로운 감염증도 천변지이도 일어납니다. 우리 발 밑의 대지조차 흔들립니다. 지면을 보아도 주변을 보아도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쳐다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확실한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극복하지 못하는 시험이 없다는 그 확신이 그리스도의 빛과 함께 십자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 2021年 3月 1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真理とは何か?」 ヨハネによる福音書 18章 28~40節
今日の聖書箇所は、総督ピラトにおけるイエスさまの裁判の場面ですが、28~32節は大祭司たちユダヤの宗教指導者たちと総督ピラトの対話が記されております。ここには、人間の思惑がうごめいており、それぞれの立場を守ろうとする身勝手な人間の姿が浮き彫りにされております。
ピラトは端からイエスさまと関わりたくなかったのです。それはイエスさまに関心があるなしとは関係なく、イエスさまの問題は宗教的な問題であって、ローマとは関係のない、自分とは関係のない問題と考えていたからです。
一方で、ユダヤの宗教指導者たちは、自分たちには「人を死刑にする権限がありません」と言っておりますが、決してそんなことはありません。「石打ち」という、言ってみればリンチのようなやり方で、ユダヤ人たちは罪を犯した者を殺してきた事実がありました。大祭司たちは、イエスさまを見せしめとして、十字架刑で殺したいという思惑があったのです。そして、自分たちはローマに逆らう気持ちはないのだというアピールにも使えるわけですし、自分たちの手も汚さなくて済むという考えもあったのです。このような人間の思惑の中で、総督ピラトにおけるローマ裁判が始まるわけです。
ピラトはまずイエスさまに「お前はユダヤ人の王なのか」(33節)と尋ねました。すると、イエスさまは「あなたは自分の考えで、そう言うのですか。それとも、ほかの者がわたしについて、あなたにそういったのですか」(34節)と、逆に問い返しました。「自分の考えで」と、イエスさまはピラトに対して責任の所在を明らかにするように問いただしたのです。
ピラトは慌てて、「わたしはユダヤ人なのか。お前の同胞や祭司長たちが、お前をわたしに引き渡したのだ。いったい何をしたのか」(35節)と言い返しました。
この対話は全くかみ合っていません。イエスさまは「神の国」を巡って「真理」についてお語りになっていたのです。「わたしは真理について証しするために生まれ、そのためにこの世に来た。真理に属する人は皆、わたしの声を聞く」(37節)と、ピラトに対して諭されました。
これはまさに、イエスさまがご自分のことを羊飼いであると語られたとき、「わたしの羊はわたしの声を知っている」とおっしゃったことと同じことです。真理に属さない人、つまり神さまを信じない人は、イエスさまの声が聞けないのです。ピラトもまた、羊飼いであるイエスさまの声を聞けませんでした。真理に属していなかったのです。
ピラトは最後まで自分の立場を守ることに終始し、責任を果たすことから逃げております。そのために、この裁きをも自分で判断することを避けました。ピラトはこう言っています。「わたしはあの男に何の罪も見いだせない。ところで、過越祭にはだれか一人をあなたたちに釈放するのが慣例となっている。あのユダヤ人の王を釈放してほしいか」(38-39節)と、イエスさまに何の罪もないことを認めながらも、最終的な判断をユダヤ人たちに押しつけているわけです。その結果、イエスさまの十字架刑が決まりました。
ピラトだけではありません。この世界の多くの人にとって、「わたしの国は、この世には属していない」などという言葉はどうでもいいことです。多くに人の関心事は、まさに自分が属しているこの世のこと、会社のこと、家庭のこと、ご近所のこと、日本のこと、韓国のこと、世界情勢であり、現実です。しかし、また一方で、神さまを信じていると思っている者であっても、この世のことと神さまのことを分離して考えることがあります。神さまのことは心の問題であって、現実の世界とは別のことであると考える場合があります。しかし、神さまの出来事と現実の世界は切り離されたものではないのです。別のものに見えながら、神さまの出来事は、現実の生活にも及ぶのです。むしろ神さまの現実が、この世界の現実となるのです。
32節に「それは、御自分がどのような死を遂げるかを示そうとして、イエスの言われた言葉が実現するためであった。」とあります。これは、ここにも神さまの御業が働いているの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ご自分が「十字架で死ぬのだ」と最初からおっしゃっておりました。実際、十字架で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ステファノのように石打の刑でも、洗礼者ヨハネのように首を切られるような死に方でもなく、十字架にかけられて殺されるということが重要なことだったのです。
ヨハネによる福音書3章14節にはモーセの時代の荒れ野で上げられた青銅の蛇の話をイエスさまがなさ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その蛇のように自分は上げられねばならない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まさにイエスさまは十字架の上に上げられるのです。なぜなら、十字架にイエス・キリストが上げられることが神さまの御計画だったからです。ユダヤ人たちがピラトを誘導して、結果的にユダヤ人たちの思惑通り、イエスさまは十字架におかかりになったように見えますが、実際はそれは神さまの御計画が実現されたことでした。
神さまであられるイエスさまが、みじめに罪人として十字架に上げられるのです。このことを私たちはしっかりと覚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神であるお方が、みじめなお姿で十字架におかかりになった、つまり神さまを十字架につけるほどに私たちの罪は重いということです。優しい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身代わりに十字架にかかってくださったと安易に考えてはなりません。私の罪によって神さまが十字架に架けられたのです。それが分からなければ、私たちは、本当に意味での自分の罪も、罪の赦しも分かりません。そして悔い改めもないのです。
民数記によりますと、モーセの時代、神さまに反逆した民は、神さまの怒りによって送られた炎の蛇にかまれて多くの人が倒れました。かまれた人々は次々に死んでいきました。しかし、モーセが青銅で造った蛇を竿につけて掲げ、その蛇を見上げた人々は助かったのです。(民数記21章参照)
まさに、イエス・キリストはモーセが竿に掲げた青銅の蛇のように、人びとの上に上げられました。それは、人間を救うためでした。十字架を見上げた人間が救われるためでした。
今、このコロナ禍の中にあって、私たちの生きる姿勢が問われているように思います。少しずつ状況は良くなっているようには思えますが、先の見えない怖さがあります。コリントの信徒への手紙一 10章13節に「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ような試練に遭わせることはなさらず、試練と共に、それに耐えられるよう、逃れる道を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とあります。そもそも神さまの裁きと試練は異なります。今のコロナ禍は裁きではなく試練です。だからこそ、今、神さまに信頼し、この受難節にあって、試練に遭われた受難のキリストを、今こそ覚えるのです。十字架に上げられたキリストを見上げるのです。かつて荒れ野で倒れた人々が、ただモーセが掲げた青銅の蛇を見上げさえすれば死なずにすんだように、私たちは今こそ、十字架に上げられたキリストを見上げるのです。
「真理とは何か?」それは神ご自身であり、十字架に上げられたキリストによって証しされています。その真理は冷酷な事実でもなければ、無味乾燥で難解な理屈でもありません。愛と、命へと、私たちを導くものです。イエスさまの時代、絶大な力を持っていた大ローマ帝国も倒れました。確かなものは何一つありません。世界には新たな感染症も天変地異も起こります。私たちの足元の大地ですら揺れ動きます。地面を見ても、周りを見ても確かなものはありません。だからこそ見上げるのです。十字架のキリストを見上げるのです。そこからこそ救いが来るのです。確かな平安が来るのです。乗り越えられない試練はない、その確信が、キリストの光と共に、十字架から与えられるのです。
【2021년 3월 7일 주일예배(요약판)】
“진리란 무엇이냐?” 요한복음 18장 28~40절
오늘의 성경 말씀은 총독 빌라도에 의한 예수님의 재판 장면입니다만, 28~32절은 대제사장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총독 빌라도의 대화가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고,각각 자기의 입장을 지키려고 하는 제멋대로인 인간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관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예수님의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이니 로마와는 관계 없다고 즉 자기와는 관계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라고 말로는 얘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돌로 친다”라고 하는, 말하자면 린치와 같은 방법으로 유대인들은 죄를 범한 자들을 죽여 온 사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본보기로 십자가형으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자기들은 로마에게 반항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어필할 수도 있고, 자기들의 손도 더럽히지 않게 된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생각이 있는 가운데 총독 빌라도에 의한 로마 재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첫째로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4절) 라고 반대로 되물었습니다. “스스로 하는 말이냐” 라고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대하여 책임의 소재를 뚜렷하게 하라고 캐물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황급히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상자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5절)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화는 전혀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둘러싸고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절) 라고 빌라도에게 타일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10장14절) 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 양은 내 음성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진리에 속하지 않는 사람,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도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진리에 속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끝까지 자기의 입장을 지키는 것으로 시종일관하여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쳤습니다. 그 때문에 이 재판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38-39절) 라고 예수님께 아무 죄도 없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최종적인 판단을 유대인들에게 밀어 넘겨 준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 형이 결정되었습니다.
빌라도뿐만 아닙니다. 이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것이 아니니라” 라는 말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바로 자기가 속한 이 세상의 일, 회사의 일 , 이웃의 일, 한국의 일, 일본의 일, 세계 정세이며, 현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과 현실의 세계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으로 보이면서도 하나님의 일은 현실의 생활에도 미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현실이 이 세계의 현실로 되는 것입니다.
32절에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여기에도 하나님의 하신 일이 역사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처음부터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십자가가 아니면 안되었습니다. 스데반처럼 같이 돌로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또 세례 요한처럼 목이 베여 죽는 것도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는 모세 시대의 광야에서 들린 놋뱀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쓰여 있습니다. 그 놋뱀처럼 내가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들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리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유도해서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죄인으로서 십자가에 들리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인 예수님께서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즉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만큼 우리의 죄는 무겁다는 것입니다. 다정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안이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진실한 의미로 자신의 죄도 죄사함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도 없는 것입니다.
민수기에 의하면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 반역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분노로 보낸 불뱀들에 물려서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물린 사람들은 연달아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만든 못뱀을 장대 위에 다니 그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린 것입니다. (민수기21장 참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장대 위에 단 놋뱀과 같이 사람들 위에 들리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본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코로나화 가운데 있으면서, 어쩌면 우리의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질문 받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조금씩 상황이 좋아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앞날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심판과 시험은 다릅니다. 지금의 코로나화는 심판이 아니라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여 지금이야말로 수난절에 시험을 당하신 수난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를 쳐다 봐야 합니다. 옛날에 광야에서 쓰러진 사람들이 오직 모세가 든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죽지 않아도 되었던 것 처럼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를 쳐다봐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시며,십자가에 들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 진리는 냉혹한 사실도 아니고 무미건조한 난해한 이론도 아닙니다. 사랑과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절대적 힘을 가졌던 저 대로마제국도 쓰러졌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또 새로운 감염증도 천변지이도 일어납니다. 우리 발 밑의 대지조차 흔들립니다. 지면을 보아도 주변을 보아도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쳐다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확실한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극복하지 못하는 시험이 없다는 그 확신이 그리스도의 빛과 함께 십자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