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21절)
침식을 함께 해 온 제자들과의 공동체에 분명히 금이 가고 있는 것, 이 공동체가 이미 파국을 향하고 있는 것을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침착하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있어서 식사라는 것은 중요한 교제의 자리인데 그 중요한 교제의 자리가 깨지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침착하게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혼을 내려거나 쫓아내려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의 교제를 관철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사랑의 교제 가운데에서 유다는 배신을 했습니다만, 어째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삼년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희망이나 꿈을 예수님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따라 가도 자기의 희망이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만, 유다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자기야말로 예수님께 배신당했다, 자기의 희망을 망가지게 하였다는 그런 마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배신으로 움직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를 판 배신자로서 신약성서 중 가장 악인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이 배신의 마음은 다른 제자들의 마음에도 응어리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라고 최후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나는 아니지요” 라고 하나씩 하나씩 말했다는 것이 쓰여 있습니다. 유다 이외의 제자들은 물론 이 시점에서 배신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예수님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십자가의 장면에서는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유다 뿐만 아닙니다.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결국 배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불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이 신앙 공동체는 그런 모임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최후 만찬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특별한 신앙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는 인간, 자기의 생각이 통하지 않으면 떠나가 버리는 인간, 표면적으로는 신앙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상대를 속이는 것 같은 인간, 그런 인간들이 모여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신앙 공동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이 신앙 공동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여러 조직이나 공동체와 하등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배신하는 자, 자기 중심적인 자, 속이는 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을 씻어 주시고 식탁의 중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사랑을 쏟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 이 신앙 공동체는 이 세상 다른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감사하며 그 사랑을 오직 감사하여 받아들이면 그갓만으로도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주인이 객인을 대접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시는 사랑의 행위를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바쳐 주시는 바로 그 순간에 유다는 배신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을 쏟으십니다. 인간에게는 그 사랑을 받을 자유도 거부할 자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때, 사탄에게 지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 그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도 없는 죄의 어둠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떡 한 조각을 받은 유다는 곧 떠나갔습니다. “밤이러라” 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상징적인 말입니다. 유다는 어둠 속으로 떠나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빛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빛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한 자는 어둠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자는 어둠으로 잘못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말씀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최후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담한 행동이라고 생각되지만, 당시의 유대에서 그것은 인간 관계의 친밀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제자는 십자가 때도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부활 때도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들어서 맨 처음에 무덤에 달려간 것도 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즉 이 제자는 늘 예수님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제자를 “그가 사랑하시는 자” 라고 요한복음에 쓰여 있는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 라는 것은 뭔가 특별히 예수님의 총애를 받았다거나 특별히 신앙이 뛰어났다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곁에 있었던 제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예수님 곁에 있는 자가 사랑받는 것입니다. 더 말하자면,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받는 자가 더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여 떠나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떠날 때 인간은 어둠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 받을 수 있는 은혜, 축복, 위로에서 떨어지고 어둡고 설벌한 어둠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조금 의문을 가진 부분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어째서 “불행하게 되는 길을 가지 말라, 어둠에 떨어져 버리니까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 라고 말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몇 가지 생각되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을 자유를 인정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의 의사로 곁에 머무르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억지로 속박하려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최후까지 유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의거하면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신한 후에도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처럼 돌아올 수는 있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심한 고뇌로 상심이 가득할지라도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유다를 보냈습니다.배신을 당하고 또 당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큰 사랑으로 유다를 배웅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편으론 어쩌면 유다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곁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 아래 머무릅시다. 그 때, 우리의 나날은 빛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많은 우리들 그대로인 채로여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풍부한 빛 가운데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 2021年 2月 2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暗闇の中へ迷い出ないために」 ヨハネ 13章 21~30節
「イエスはこう話し終えると、心を騒がせ、断言され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あなたがたのうちの一人がわたしを裏切ろうとしている。』」(21節)
寝食を共にしてきた弟子の共同体に明らかにひびが入っていること、この共同体がすでに破局に向かっていることを食事の席でイエスさまは断言されました。イエスさまはそれを冷静におっしゃ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心を騒がせて」おっしゃったのです。聖書において食事というのは重要な交わりの場であるわけですが、その大切な交わりの場が壊れようとしてい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当然冷静ではいられないのです。それでもイエスさまはユダを叱ろうとも、追い出そうともされておりません。どこまでも愛の交わりを貫こうとしておられるのです。
そのようなイエスさまの愛の交わりの中で、ユダは裏切るわけですが、どうしてユダはイエスさまを裏切ったのでしょうか?
ユダは他の弟子たちと同じように、この三年半の間、イエスさまに従って来ました。それは自分の希望や自分の夢をイエスさまに託したからです。しかし、この人について行っても自分の希望や夢が叶いそうにないように思い始めたのです。ユダはイエス・キリストを裏切りましたが、ユダからしたらむしろ自分こそイエスさまに裏切られた、希望をつぶされた、そういう思いもあったのです。この思いが裏切りへと彼を突き動かしました。
イスカリオテのユダはキリストを売った裏切り者として、ある意味、新約聖書中最大の悪人のように感じられますが、しかし、この裏切りの思いは、他の弟子たちの心にもくすぶっていたのです。マルコによる福音書やマタイによる福音書では、「この中に裏切る者がいる」と最後の晩餐の場面でイエスさまがおっしゃった時、弟子たちが「まさかわたしのことでは」と代わる代わる言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ユダ以外の弟子たちはもちろんこの時点で裏切る気持ちは持ってはおりません。しかし、このイエスさまの言葉によって自分の心の中にあるイエスさまを裏切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思いが明らかにされたのです。実際、皆さんもご存じのように、十字架の場面ではイエスさまを見捨て、裏切ってしまいます。ですから、イエスさまを裏切ったのはユダだ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ペトロも他の弟子たちも結局裏切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の愛によって招かれ、イエスさまを中心に集まったこの信仰共同体は、そのような集まりなんだとイエスさまは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いま、最後の晩餐に集っているのは、特別な信仰を持った人々ではないのです。自分の得になることばかり考える人間、自分の思いが通らなければ去って行く人間、表面では信仰的な態度を取りながら内側では相手を欺いている人間、そういう人間が集まっている、それがイエスさまの弟子たちであり、信仰共同体なのだと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
それでは、イエスさまの弟子たち、そしてこの信仰共同体というのは、この世のさまざまな組織や共同体と何ら変わらないものなのでしょうか。決して、そう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そこにはイエスさまがおられるからです。裏切る者、自己中心的な者、欺く者の中に、イエス・キリストがおられるのです。そのイエス・キリストが足を洗ってくださり、食事の中心にいてくださるのです。どうしようもない私と共にいてくださり、愛を注いでくださるのです。
だからこそ、私たちの教会、この信仰共同体は、この世のどの組織、共同体とも異なるのです。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が共にいてくださることを感謝し、その愛をただ感謝して受け取る、それだけでよいのです。
さて、イエスさまはパン切れを浸してユダにお与えになりました。これは主人が客人をもてなす行為です。そしてまたキリストがご自身をお与えになる愛の行為を象徴していました。そのまさにイエスさまが愛を捧げておられる、その瞬間にユダは裏切りました。それはユダがイエスさまの愛を拒否したことを表しております。
神さまは人間に愛を注がれます。人間にはその愛を受け取る自由も、拒否する自由もあります。そして人間は神さまからの愛を拒否する時、サタンに支配されるのです。神さまの愛を拒否し、神さまから離れる時、それは自由になるのではありません。どうしようもない罪の暗闇へと落ちてしまうのです。
イエスからパン切れを受け取ったユダはすぐに出て行きました。「夜であった」とあります。これはとても象徴的な言葉です。ユダは暗闇の中へ出て行ったのです。ヨハネによる福音書ではイエスさまは光として描かれています。その光であられるイエスさまの愛を拒否した者は暗闇へと向かうのです。神さまの愛を拒否する者は暗闇へと迷い出てしまうのです。
ところで、今日の聖書箇所に「イエスの愛しておられた者」が登場します。彼は最後の晩餐の席で、イエスさまの胸元に寄りかかったおりました。何と大胆な行動かと思われますが、当時のユダヤでは、それは人間関係の親密さを表しております。この弟子は十字架の時も、十字架の下にいたのです。復活の時も、マグダラのマリアからイエスさまの遺体が墓から取り去られていることを知らされ、最初に墓に走って行ったのも、このイエスさまが愛しておられた弟子でした。つまり、この弟子はいつもイエスさまの側にいたのです。イエスさまの側にいる弟子を「イエスの愛しておられた者」と、ヨハネによる福音書は記し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の愛しておられた者」というのは、何か特別にイエスさまの寵愛を受けたとか、特別に信仰が立派だったとか、というのではないのです。ただただイエスさまの側にいた弟子を現しているのです。逆に言えば、イエスさまの側にいる者が愛されるのです。さらに言えば、イエスさまの側でイエスさまの愛を拒否せずに受けていた者がもっとも祝福を受けるということです。
それに対して、ユダはイエスさまの愛を拒否して離れてしまいました。イエスさまから離れる時、人間は暗闇へと落ちてしまうのです。イエスさまの側に居れば頂ける恵み、祝福、慰めから離れて、暗く冷たく殺伐とした暗闇の中に生きることになるのです。
ただ、私は少し疑問に思うのです。なぜ、イエスさまは「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を、今すぐ、しなさい」(27節)と言われたのでしょうか? どうして不幸になる道へ行くな、暗闇に落ちてしまうからここにとどまれと、おっしゃら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
その理由はいくつか考えられますが、先程も言いましたように、神さまは人間が神さまの愛を受け取らない自由を認め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は人間が自分の意思でご自分のもとに留まることを望んでおられるのです。無理やり縛り付けようとはなさいません。それでも、イエスさまは最後の最後までユダにチャンスを与えようとされたのです。聖書に依れば、ユダの裏切りは、神さまのご計画の中で、定められたものでした。しかし、裏切った後でも、ペトロや他の弟子たちのように戻って来ることは出来たのです。
いずれにせよ、イエスさまは最後までユダをも愛し抜かれました。ご自身の心を激しく騒がせ、打ち震えるような思いでイエスさまはユダを送り出しました。裏切られても裏切られても愛さずにはおられない大きな愛でユダを見送られた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もまたユダの心を持っています。だからこそ、私たちはイエスさまの側にとどまり続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皆さん、イエスさまの愛のもとにとどまりましょう。その時、私たちの日々は輝きます。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輝かせて頂きます。罪深い私たちのままであったとしても、主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と共におられるゆえに、豊かに光の中で輝かされるのです。
【2021년 2월 28일 주일예배(요약판)】
“어둠 속으로 잘못 들어가 헤매지 않기 위하여”
요한복음 13장 21~30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21절)
침식을 함께 해 온 제자들과의 공동체에 분명히 금이 가고 있는 것, 이 공동체가 이미 파국을 향하고 있는 것을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침착하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있어서 식사라는 것은 중요한 교제의 자리인데 그 중요한 교제의 자리가 깨지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침착하게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혼을 내려거나 쫓아내려거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의 교제를 관철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사랑의 교제 가운데에서 유다는 배신을 했습니다만, 어째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이 삼년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희망이나 꿈을 예수님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따라 가도 자기의 희망이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만, 유다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자기야말로 예수님께 배신당했다, 자기의 희망을 망가지게 하였다는 그런 마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배신으로 움직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를 판 배신자로서 신약성서 중 가장 악인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이 배신의 마음은 다른 제자들의 마음에도 응어리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라고 최후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나는 아니지요” 라고 하나씩 하나씩 말했다는 것이 쓰여 있습니다. 유다 이외의 제자들은 물론 이 시점에서 배신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예수님을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십자가의 장면에서는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유다 뿐만 아닙니다.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결국 배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불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이 신앙 공동체는 그런 모임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최후 만찬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특별한 신앙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는 인간, 자기의 생각이 통하지 않으면 떠나가 버리는 인간, 표면적으로는 신앙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상대를 속이는 것 같은 인간, 그런 인간들이 모여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신앙 공동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이 신앙 공동체라는 것은 이 세상의 여러 조직이나 공동체와 하등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배신하는 자, 자기 중심적인 자, 속이는 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발을 씻어 주시고 식탁의 중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사랑을 쏟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 이 신앙 공동체는 이 세상 다른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와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감사하며 그 사랑을 오직 감사하여 받아들이면 그갓만으로도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떡 한 조각을 적셔서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주인이 객인을 대접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시는 사랑의 행위를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바쳐 주시는 바로 그 순간에 유다는 배신했습니다, 그것은 유다가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을 쏟으십니다. 인간에게는 그 사랑을 받을 자유도 거부할 자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 때, 사탄에게 지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날 때 그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도 없는 죄의 어둠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떡 한 조각을 받은 유다는 곧 떠나갔습니다. “밤이러라” 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상징적인 말입니다. 유다는 어둠 속으로 떠나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빛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빛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한 자는 어둠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자는 어둠으로 잘못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말씀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최후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담한 행동이라고 생각되지만, 당시의 유대에서 그것은 인간 관계의 친밀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제자는 십자가 때도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부활 때도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들어서 맨 처음에 무덤에 달려간 것도 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즉 이 제자는 늘 예수님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제자를 “그가 사랑하시는 자” 라고 요한복음에 쓰여 있는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 라는 것은 뭔가 특별히 예수님의 총애를 받았다거나 특별히 신앙이 뛰어났다거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곁에 있었던 제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예수님 곁에 있는 자가 사랑받는 것입니다. 더 말하자면,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받는 자가 더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여 떠나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떠날 때 인간은 어둠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 받을 수 있는 은혜, 축복, 위로에서 떨어지고 어둡고 설벌한 어둠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조금 의문을 가진 부분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 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어째서 “불행하게 되는 길을 가지 말라, 어둠에 떨어져 버리니까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 라고 말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몇 가지 생각되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을 자유를 인정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의 의사로 곁에 머무르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억지로 속박하려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최후까지 유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의거하면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신한 후에도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처럼 돌아올 수는 있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심한 고뇌로 상심이 가득할지라도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유다를 보냈습니다.배신을 당하고 또 당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큰 사랑으로 유다를 배웅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편으론 어쩌면 유다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곁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 아래 머무릅시다. 그 때, 우리의 나날은 빛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많은 우리들 그대로인 채로여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풍부한 빛 가운데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