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안디옥 교회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도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라고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을 믿는 신앙으로 구원받는다”라고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분명히 그들의 가르침과 바울들의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 그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서는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참조)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위해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교회 최초의 공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의 결과 바울과 바나바들이 가르친 복음은 다른 사도들이나 장로들이 믿는 신앙과 똑같은 것이라고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일어난 혼란을 한시라도 빨리 진정시키기 위하여 이 회의의 결정 사항을 편지에 적어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지니고 교회에 가서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사자를 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사바라 불리우는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저 편지를 건네주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교회 사람들을 만나서 편지의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 내용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 부분입니다. 28절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28~29절)
이 편지의 내용은 지난 주 읽은 야고보가 예루살렘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에 따라 쓰여진 것입니다. “이 요긴한 것들”이라는 금지 사항은 지난 주도 설명한 것 같이 율법을 대신하는 규칙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유대인들을 실족시키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구원에 관해 필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이 야고보의 의견이었습니다.
단, 이 편지의 내용에는 특징적인 서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우리는・・・ 옳은 줄 알았노니” 라고 써 있는 점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회의를 통해서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 사항은 성령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듣고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은 기뻐했다고 합니다. 31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31절)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 사항은 그저 문서만의 통달, 사무 절차로서 행해진 게 아니라 충분한 신앙적인 교제 안에서 이 결정이 전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혼란스럽고 상처 입은 사람들도 있었던 안디옥 교회를 격려하여 굳건하게 하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교리적인 것들을 애매하게 하면 안되지만, 그저 그것을 무조건 떠맡기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아픔이나 슬픔을 배려하면서 신앙의 사항으로서 정성스럽게 전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올바름은 사랑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로서 올바름과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끼리 올바름만을 내세워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도 때때로 있습니다. 거기서 내세운 올바름이 하나님에 있는 올바름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대로 생각하는 올바름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비난이 많은 사회입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른 인간을 철저히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올바름은 엄격한 측면도 몰론 있고 인간에게 회개를 강요할 때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을 살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풍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안디옥의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랑이 넘치는 소식에 격려받았습니다. 이 격려라는 말은 하나님에 의한 위로, 격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들에게 전해진 것은 단순히 논쟁에 승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마음이 물을 얻은 것과 같은 풍부함이며 힘이 다한 다리와 허리가 기운을 내어 일어서게 하는 것 같은 힘입니다.
그리고 정식적인 통달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와 실라와 영적인 교제를 했습니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즉 유대와 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실라, 그리고 안디옥 사람들이 교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교제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름받고 하나님을 구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격려 아래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격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거기에 진실한 힘의 근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웃 사람과의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인내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름받고 하나님을 구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광야 속에 늘 오아시스 같은 풍부함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조달한 물이나 음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 자신께서 주시는 물이나 생명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의료 종사자에 대한 코로나19의 백신 접종을 시작했습니다. 이제서야 겨우 감염 종식의 길이 보이게는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심각한 상황은 계속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또 거기에 하나님의 물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래 지금까지 당연히 해 온 교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직도 대면으로 교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이전과 같은 교제는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입니다.
조용하게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듣습니다. 거기에 진실한 하나님의 위로와 속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그리고 올해도 예년과 같은 직접적인 교제는 갖지 못할지라도 더욱더 서로가 이웃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깊게 하며 공동체로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34절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만, 그리스어 성경의 다른 사본에는 실라가 안디옥에 머물렀다고 쓰여 있습니다. 혼란과 분열에 빠진 안디옥 교회였습니다만 새로운 사람들과의 교제가 주어지고 새롭게 선교자가 가입한 것입니다. 이 실라는 앞으로 바울의 새 전도 여행에도 동행하는 멤버가 됩니다. 잠시 시련 속에 있었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출발을 한 것입니다.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는 것이 아니라, 안디옥 교회는 새롭게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의 시련이 지나면 새롭게 출발합니다. 아니, 벌써 우리는 새롭게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새 소망이 주어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 2021年 2月 2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励ましに満ちた言葉によってて」使徒言行録 15章22~35節
パウロとバルナバが第一回伝道旅行から帰ってきた時、アンティオキア教会で大きな混乱が生じました。なぜなら、アンティオキア教会でエルサレム教会から来た者たちが「異邦人であってもモーセの律法に従って割礼を受けなければ救われない」と、教え始めたからです。パウロたちは「ユダヤ人であろうと、異邦人であろうと、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のみ救われる」と教えておりましたが、明らかに彼らの教えはパウロたちの教えとは違っていました。それで、エルサレム教会とアンティオキア教会では教えが違うのかと大きな問題となったわけです。(ガラテヤ2章11節参照)
アンティオキア教会はパウロとバルナバをエルサレム教会に派遣し、この問題に対する解決を求めました。そうして、エルサレム教会に使徒たちと長老たちが集まり、教会で最初の公会議が開かれました。その会議の結果、パウロとバルナバたちが教えた福音は他の使徒たちや長老たちが信じる信仰と全く同じであると言う事が確認されました。
それから、教会に起こった混乱を一刻も早く静めるためにこの会議の決定事項を手紙に書き記して送ることにしました。そしてその手紙を携えて教会に赴き、その内容を説明することができる使者を選んだのです。それがバルサバと呼ばれるユダとシラスの二人の人物でした。
この二人は、単に手紙を渡すだけでなく、直接教会の人々と会って、手紙の内容を説明したのです。この内容の最も大切な要点は次の箇所です。28節、「聖霊とわたしたちは、次の必要な事柄以外、一切あなたがたに重荷を負わせないことに決めました。すなわち、偶像に献げられたものと、血と、絞め殺した動物の肉と、みだらな行いとを避けることです。以上を慎めばよいのです。健康を祈ります。」(28~29節)
この手紙の内容は、先週読みました、ヤコブがエルサレム会議で発言した内容に沿って書かれたものです。「次の必要な事柄」というこの禁止事項は、先週も説明したように、律法に代わる掟ではなく、律法を守るユダヤ人たちを躓かせないための配慮です。救いに関わる必要な事柄ではありません。それがヤコブの意見でした。
ただ、この手紙の内容には、特徴的な書き方があります。それは「聖霊とわたしたちは・・・決めました」と言っている点です。使徒たちは自分たちの会議を通して聖霊が働いてくださったと言う確信を持っていたのです。そしてその決定事項は聖霊が自分たちに命じられたものであると受け取ったのです。
エルサレム会議で決まった内容を読み、アンティオキア教会の人々は喜んだと言います。31節、「彼らはそれを読み、励ましに満ちた決定を知って喜んだ。」(31節)
エルサレム会議の決定事項は、単に、文書だけの通達、事務手続きとして行われたのではなく、豊かな信仰的な交わりの中でこの決定は伝えられたのです。これは、混乱し、傷ついた人々もいたであろうアンティオキアの教会を力づける意味もありました。教会は教理的なことがらを曖昧にしてはなりませんが、ただそれを、頭ごなしに押し付けるのではないのです。人間の痛みや悲しみに心を配りながら、信仰の事項として丁寧に伝えていくのです。
神さまの正しさは、愛と矛盾しません。神さまは十字架において、正しさと愛を示されました。そして、それは人間同士においてもそうです。しかし、人間同士においては、正しさをむやみに振りかざして人を傷つけることが往々にしてあります。そこで振りかざされる正しさが、神さまにある正しさではなく、人間が勝手に考える正しさだからです。愛のない正しさだからです。現代は、バッシングの多い社会です。少しでも間違いを犯した人間を徹底的に批判をします。しかし、神さまから来る正しさは厳しい側面ももちろんあり、人間に悔い改めを迫るものでありますが、同時に人間を活かすものです。人間の命を豊かにするものです。愛へと人間を導くものです。
アンティオキアの異邦人たちは、エルサレムからの愛に満ちた知らせに励まされました。この励ましという言葉は、神さまによる慰め、力づけという意味を持ちます。彼らに伝えられたのは、単に論争に勝利したということではなく、干からびた心が水を得るような豊かさであり、力尽きた足腰がしゃんとされ立たされるような力です。
そして正式な通達を聞くのみならず、エルサレムから来たユダとシラスと霊的な交わりをしました。「ユダとシラスは預言する者でもあった」とあります。つまりユダとシラスは神さまの御言葉を語ったのです。神さまの御言葉を通して、エルサレムから来たユダとシラス、そしてアンティオキアの人々は交わったのです。神さまを信じる者の交わりの中心には神さまの言葉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
神さまに招かれて、神さまを求めて生きるということは、神さまの励ましのもとに生きる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の励ましは、神さまの御言葉によって与えられます。神さまの御言葉によって私たちは、生ける神さまイエス・キリストと出会います。そこに本当の力の根源があります。そしてまた、隣人との交わりがあります。
私たちは、人間的な努力や忍耐で人生を生き抜くことは可能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神さまに招かれ神を求めて生きるというということは、人生の荒れ野の中に、たえずオアシスのような豊かさが与え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自分で調達した水や食料で生き抜くことは可能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神さまを求める者は、神さまご自身から注がれる水や命の糧によって生かされるのです。
ところで、医療従事者に対する新型コロナウィルスのワクチン接種が始まりました。ようやく感染終息への道が見えてきましたが、まだまだ深刻な状況は続きます。このような状態がいつまで続くのか正直わかりません。
しかしまたそこに神さまの問いかけがあるようにも思います。本来、これまで当たり前のように行ってきた交わりが、私たちにとってどれほど重要なものであったのか?改めて思い知ることが出来ました。今はまだ、対面による交わりというものがなかなか難しい状況ですが、しかしなお、私たちは御言葉によって神さまの励ましの言葉を聞きたいと思います。これからは今までのような交わりが出来なくなるのかも知れませんが、でも私たちは神さまの御言葉をいっそう聞くのです。
静かに耳をすまして聞きます。御言葉を通して聞きます。そこに本当の神さまの慰め、罪からの救いを与えてくださった神さまの恵みを見ます。そして、今年も例年のような直接的な交わりは持て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なおそれぞれに隣人を思いながら祈りを深め、共同体として歩んで行くのです。
聖書には34節が記されておりませんが、ギリシャ語聖書の写本によっては、シラスがアンティオキアにとどま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混乱と分裂に陥ったアンティオキアの教会でしたが、新たな人々との交わりが与えられ、新たに新しい宣教者が増し加えられたのです。このシラスは、これから後の、パウロの新たな宣教旅行にも同行するメンバーとなるのです。ひととき試練の中にあった教会が、くすしき神さまの恵みによって新しい出発をするのです。ようやく元の平静を取り戻したというのではなく、アンティオキア教会は新しく歩み出したのです。
私たちも神さまの恵みの内に、今の試練の後に、新しく出発をします。いえ、すでに私たちは新しく歩み出したのです。なぜなら、神さまを求める者には、必ず新しい希望が与えられるからです。アーメン。
【2021년 2월 21일 주일예배(요약판)】
“위로가 넘치는 말로” 사도행전 15장 22~35절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안디옥 교회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이방인이라도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라고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들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 그리스도을 믿는 신앙으로 구원받는다”라고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분명히 그들의 가르침과 바울들의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 그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서는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참조)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위해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교회 최초의 공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의 결과 바울과 바나바들이 가르친 복음은 다른 사도들이나 장로들이 믿는 신앙과 똑같은 것이라고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일어난 혼란을 한시라도 빨리 진정시키기 위하여 이 회의의 결정 사항을 편지에 적어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지니고 교회에 가서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사자를 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사바라 불리우는 유다와 실라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저 편지를 건네주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교회 사람들을 만나서 편지의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 내용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 부분입니다. 28절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28~29절)
이 편지의 내용은 지난 주 읽은 야고보가 예루살렘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에 따라 쓰여진 것입니다. “이 요긴한 것들”이라는 금지 사항은 지난 주도 설명한 것 같이 율법을 대신하는 규칙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유대인들을 실족시키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구원에 관해 필요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이 야고보의 의견이었습니다.
단, 이 편지의 내용에는 특징적인 서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과 우리는・・・ 옳은 줄 알았노니” 라고 써 있는 점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회의를 통해서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 사항은 성령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듣고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은 기뻐했다고 합니다. 31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31절)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 사항은 그저 문서만의 통달, 사무 절차로서 행해진 게 아니라 충분한 신앙적인 교제 안에서 이 결정이 전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혼란스럽고 상처 입은 사람들도 있었던 안디옥 교회를 격려하여 굳건하게 하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교리적인 것들을 애매하게 하면 안되지만, 그저 그것을 무조건 떠맡기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아픔이나 슬픔을 배려하면서 신앙의 사항으로서 정성스럽게 전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올바름은 사랑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로서 올바름과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끼리 올바름만을 내세워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도 때때로 있습니다. 거기서 내세운 올바름이 하나님에 있는 올바름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대로 생각하는 올바름이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비난이 많은 사회입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저지른 인간을 철저히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올바름은 엄격한 측면도 몰론 있고 인간에게 회개를 강요할 때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을 살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풍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안디옥의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랑이 넘치는 소식에 격려받았습니다. 이 격려라는 말은 하나님에 의한 위로, 격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들에게 전해진 것은 단순히 논쟁에 승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메마른 마음이 물을 얻은 것과 같은 풍부함이며 힘이 다한 다리와 허리가 기운을 내어 일어서게 하는 것 같은 힘입니다.
그리고 정식적인 통달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와 실라와 영적인 교제를 했습니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즉 유대와 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실라, 그리고 안디옥 사람들이 교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교제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름받고 하나님을 구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격려 아래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격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거기에 진실한 힘의 근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웃 사람과의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인내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름받고 하나님을 구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광야 속에 늘 오아시스 같은 풍부함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조달한 물이나 음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 자신께서 주시는 물이나 생명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 의료 종사자에 대한 코로나19의 백신 접종을 시작했습니다. 이제서야 겨우 감염 종식의 길이 보이게는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심각한 상황은 계속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또 거기에 하나님의 물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래 지금까지 당연히 해 온 교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직도 대면으로 교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이전과 같은 교제는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입니다.
조용하게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듣습니다. 거기에 진실한 하나님의 위로와 속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그리고 올해도 예년과 같은 직접적인 교제는 갖지 못할지라도 더욱더 서로가 이웃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깊게 하며 공동체로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34절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만, 그리스어 성경의 다른 사본에는 실라가 안디옥에 머물렀다고 쓰여 있습니다. 혼란과 분열에 빠진 안디옥 교회였습니다만 새로운 사람들과의 교제가 주어지고 새롭게 선교자가 가입한 것입니다. 이 실라는 앞으로 바울의 새 전도 여행에도 동행하는 멤버가 됩니다. 잠시 시련 속에 있었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출발을 한 것입니다.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는 것이 아니라, 안디옥 교회는 새롭게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의 시련이 지나면 새롭게 출발합니다. 아니, 벌써 우리는 새롭게 나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새 소망이 주어짐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