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는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안디옥 교회에서 그 전도 보고를 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그에 이어 두 사도가 오랫동안 안디옥 교회에 체류하다보니 하나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유대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라고 가르치기 시작해서 바울이나 바나바와 격렬히 논쟁하여 대립했습니다. 이 대립은 안디옥 교회에 있어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 사람을 파견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그 판단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른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지금까지의 전도 보고를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해 주셨고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해 주신 것을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듣고 있던 바리새파중에서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이 문제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예루살렘 회의이며, 교회 역사가 시작되고 행해진 첫 공회의가 됩니다.
이 회의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의견을 말했습니다. 격론이 잠시 계속된 것 같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일어난 게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7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7~9절)
베드로 자신도 이전에는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에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인도하심으로 로마군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와 그 가족을 구원으로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시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사도행전 10장)
이 체험을 통해서 베드로는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체험한 이 일을 배경으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유대인인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할례를 받아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구원하지 못했던 것을 어찌 이방인들에게 떠맡기느냐? 그것은 이상한 주장에 불과하다고 베드로는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그들이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11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격렬한 논쟁이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안디옥 교회에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라고 주장한 사람들의 후원자가 되어 있다고 생각된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외로 야고보는 여기서 먼저 발언한 베드로의 의견에 동의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그 동의의 근거로서 구약성서의 예언이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16절,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16~18절)
이것은 구약성서 아모스 9장 11~12절의 그리스어 번역 성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한 번 끊긴 다윗의 왕권을 하나님으로 회복할 것, 그리고 그 왕권 아래에 이방인을 포함한 사람들이 모아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구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을 받아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중에는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 예언에 의거하여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9절) 예루살렘 회의는 이 야고보의 발언을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에게 할례나 모세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즉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밖에 요구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20절)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있는 유대인들을 실족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면 안되는 것과 동시에 유대인들도 실족하게 하면 안된다. 서로가 공존하기 위해 각자가 배려하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결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구원받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각자가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확인되어 각지의 교회로 전해졌습니다.
원래 신앙에 의한 것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이 신앙을 갖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에 추종해 가는 판단이 늦은 것입니다. 바리새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구원의 조건에 할례까지 요구했습니다. 즉 판단을 잘못해 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10절)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나 힘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더 다른 것까지 요구한다는 제멋대로의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할례까지 요구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데가 있는 줄 압니다. 늘 하나님께 뭔가 플러스 알파를 구하곤 합니다. 지금 저렇게 해달라거나, 성경에 쓰여 있는 것 같은 기적을 보여달라거나, 내 가까이에 있는 저 사람을 어떻게 해 달라거나 등의 여러 가지를 구합니다. 때로 우리는 여러 가지 멍에를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매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시험하기를 멈추지 않고 행하는 우리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어느날 바울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과해진 “가시”가 그에게서 나가게 해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아마 지병으로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이 지병만 없다면 더욱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 12장 9절)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크신 충분한 은혜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상기하는 것입니다. 큰 은혜도 작은 은혜도 세어 가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판단 재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신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2021年 2月 1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私はこう判断します」 使徒言行録 15章 1~21節
先週は、パウロとバルナバが第一回伝道旅行から帰って来て、アンティオキア教会でその伝道報告をしたところを読みました。今日の聖書箇所はその続きですが、しばらくの間、二人はアンティオキア教会に滞在しておりましたら、一つの問題が起こったのです。
それは、ユダヤから来た人々が、「モーセの慣習に従って割礼を受けなければ、あなたがたは救われない」と教え始め、パウロやバルナバと激しく論争し、対立したんですね。 これは、アンティオキア教会において、大変な問題となったのです。アンティオキア教会では、この問題の収拾をはかるために、エルサレム教会にパウロとバルナバ、そして数名の者を派遣し、エルサレム教会の使徒たちと長老たちに、その判断を委ねることにしました。
エルサレムに着いたパウロとバルナバは、エルサレム教会でも、これまでの伝道報告をして、神さまが自分たちと共にいてくださって、多くの異邦人を救って下さったことを報告しました。ところが、それを聞いていたファリサイ派から信者になった人が数名立って、異邦人にも割礼を受けさせて、モーセの律法を守るように命じるべきだと主張したのです。エルサレム教会でも混乱が生じました。
そのため、エルサレム教会では、使徒たちや長老たちが集まり、この問題に対して協議が行われたのです。これがエルサレム会議と言われる、教会の歴史が始まって最初の公会議となります。
この会議の中で、色々な人が意見を述べました。激しい討論が暫く続いたようです。その混乱の中で立ち上がったのが、使徒ペトロでした。ペトロはこのように語りました。7節です。「兄弟たち、ご存じのとおり、ずっと以前に、神はあなたがたの間でわたしをお選びになりました。それは、異邦人が、わたしの口から福音の言葉を聞いて信じるようになるためです。人の心をお見通しになる神は、わたし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ように異邦人にも聖霊を与えて、彼らをも受け入れられたことを証明なさったのです。また、彼らの心を信仰によって清め、わたしたちと彼らとの間に何の差別をもなさいませんでした。」(7~9節)
ペトロ自身、かつては異邦人が救われることに抵抗があったのです。しかし、神さまの不思議な導きによって、ローマ軍の百人隊長であったコルネリウスとその家族を救いへと導いたことがありました。その時、神さまが異邦人にも聖霊を与えられるのを見たのです。(使徒言行録10章)
この体験を通して、ペトロは異邦人が救われることは神さまの御旨であることを悟りました。ペトロは自分が体験したこの出来事を背景にして異邦人たちが救いに与ることが出来るのは確かであると語ったのです。
そして、そもそもユダヤ人である自分たちがイエスを信じることになったのはなぜなのか。割礼を受けて、モーセの律法を守ることでは自分たちは救われることができないと知ったからではないかとペトロは語ります。それなのにどうして自分たちを救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ものを異邦人たちにも押しつけるのか。それはおかしな主張に過ぎないとペトロは語ったのです。そして、彼は「わたしたちは、主イエスの恵みによって救われると信じているのですが、これは、彼ら異邦人も同じことです」(11節)と語りました。すると、激しい討論が静かになったと言います。
そして、ユダヤから下って来て、アンティオキア教会で「モーセの慣習に従って割礼を受けなければ、あなたがたは救われない」と主張した人々の後ろ盾となっていると考えられていたイエスさまの兄弟ヤコブが語り始めました。意外にもヤコブはここで先に発言したペトロの意見に同意したのです。しかも、彼はその同意の根拠として旧約聖書の預言が異邦人の救いについて教えているのだと語ったのです。
16節、『「その後、わたしは戻って来て、/倒れたダビデの幕屋を建て直す。その破壊された所を建て直して、/元どおりにする。それは、人々のうちの残った者や、/わたしの名で呼ばれる異邦人が皆、/主を求めるようになるためだ。」昔から知らされていたことを行う主は、/こう言われる。』(16~18節)
これは旧約聖書のアモス書9章11、12節のギリシャ語訳聖書から引用したものです。この聖書箇所は、一度は絶たれたダビデの王権を神さまによって回復されること、そしてその王権の元に異邦人を含む人々が集められることを語っています。これはダビデの子孫として生まれた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実現した救いを表しております。ですから、その救いにあずかって教会に集まる人々には異邦人も含まれていると語っているのです。
それから、ヤコブはこの預言に基づいて「神に立ち帰る異邦人を悩ませてはなりません」(19節)と言っています。エルサレム会議はこのヤコブの発言を最後に「異邦人たちに割礼や、モーセ律法を守ることを求めなくてもよい」と結論づけています。つまり、救いのためにはイエス・キリストに対する信仰だけしか求められな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
そして、「ただ、偶像に供えて汚れた肉と、みだらな行いと、絞め殺した動物の肉と、血とを避けるようにと、手紙を書くべきです」とも言っています。これは、モーセの律法を守っているユダヤ人たちをつまずかせることのないように配慮すべき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つまり、異邦人を悩ませてはいけないけれども、同時にユダヤ人をも躓かせてはいけない。お互いが共存するために、それぞれが配慮しなさいという判断をしているのです。
結局、エルサレム会議での結論は、ただ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ユダヤ人も異邦人も救われる。それが神さまの御心であるということでした。そして、ユダヤ人も異邦人も躓かないように、それぞれが配慮するということでした。このことがエルサレム会議で確認され、各地の教会へと伝えられました。
そもそも、信仰によってのみ救われるということは、実は皆知っていることでした。それだからこそ、自分たちが信仰を持ち、救いを得ることが出来たわけですね。けれども私たち人間は、神さまの御心に追従していく判断が遅いのです。ファリサイ派からキリスト者になった人たちは、救いの条件に割礼まで求めました。つまり、判断を間違ってしまったわけです。
ペトロは、「なぜ今あなたがたは、先祖もわたしたちも負いきれなかった軛を、あの弟子たちの首に懸けて、神を試みようとするのですか」(10節)と指摘しています。「神を試みる」というのは、分かりやすく言いますと、神さまの恵みや力がはっきり示されているのに、それだけでは満足せず、さらに別のものまで求めるというわがままが働くことな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だけでは物足りず、割礼までも求めてしまったわけです。
私たちも似たようなところがあると思います。いつも神さまに何かプラスアルファを求めてしま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救われたはずの私たちでありますが、それなのに、プラスアルファを求めてしまう。今すぐにこうして欲しいとか、聖書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奇跡を目の前で見せて欲しいとか、私の身近にいるあの人をどうにかして欲しいとか、いろいろなことを私たちは求めます。時に私たちは、いろいろな軛を自分にも他人にかけて、神さまを試みることをしてしまうのです。
皆さん、神さまの恵みは私たちに十分に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それなのに神さまを試みることを絶えず行う私たちはどうすれば良いのでしょうか?
ある時、パウロにも切なる願いがありました。自分に課せられた「とげ」を去らせてくださいという願いです。恐らく、持病のことで苦しんでいたんでしょう。この持病さえなければ、もっと神さまの期待に応えることが出来ると考えたのでしょう。それで、一生懸命、祈り願いました。しかし返ってきた答えはこうでした。「わたしの恵みはあなたに十分である。」(Ⅱコリント 12:9) パウロの「とげ」は相変わらずそのまま続いたと思います。しかしパウロは立ち直りました。なぜなら、すでに自分に与えられている神さまの大きな恵みを思い起こしたからです。
皆さん、私たちも同じです。神さまがすでに大きな十分すぎるほどの恵みを私たち一人一人に与えてくださっております。私たちは、その恵みを思い起こすのです。大きな恵みも小さな恵みも数えていくのです。神さまが私たちにして下さったことがたくさんあるのです。それが、私たちの判断材料になります。神さまがしてくださったことから、神の御心を知り、「私はこう判断します」と言えるようになるのです。
【2021년 2월 14일 주일예배(요약판)】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사도행전 15장 1~21절
지난 주는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안디옥 교회에서 그 전도 보고를 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그에 이어 두 사도가 오랫동안 안디옥 교회에 체류하다보니 하나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유대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라고 가르치기 시작해서 바울이나 바나바와 격렬히 논쟁하여 대립했습니다. 이 대립은 안디옥 교회에 있어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 사람을 파견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그 판단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른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지금까지의 전도 보고를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해 주셨고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해 주신 것을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듣고 있던 바리새파중에서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이 문제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예루살렘 회의이며, 교회 역사가 시작되고 행해진 첫 공회의가 됩니다.
이 회의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의견을 말했습니다. 격론이 잠시 계속된 것 같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일어난 게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7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7~9절)
베드로 자신도 이전에는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에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인도하심으로 로마군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와 그 가족을 구원으로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시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사도행전 10장)
이 체험을 통해서 베드로는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체험한 이 일을 배경으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유대인인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할례를 받아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구원하지 못했던 것을 어찌 이방인들에게 떠맡기느냐? 그것은 이상한 주장에 불과하다고 베드로는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그들이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11절)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격렬한 논쟁이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안디옥 교회에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라고 주장한 사람들의 후원자가 되어 있다고 생각된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외로 야고보는 여기서 먼저 발언한 베드로의 의견에 동의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그 동의의 근거로서 구약성서의 예언이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16절,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16~18절)
이것은 구약성서 아모스 9장 11~12절의 그리스어 번역 성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성경 말씀은 한 번 끊긴 다윗의 왕권을 하나님으로 회복할 것, 그리고 그 왕권 아래에 이방인을 포함한 사람들이 모아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구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을 받아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중에는 이방인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 예언에 의거하여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9절) 예루살렘 회의는 이 야고보의 발언을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에게 할례나 모세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구하지 말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즉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밖에 요구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20절) 이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있는 유대인들을 실족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을 괴롭게 하면 안되는 것과 동시에 유대인들도 실족하게 하면 안된다. 서로가 공존하기 위해 각자가 배려하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에서의 결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구원받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각자가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회의에서 확인되어 각지의 교회로 전해졌습니다.
원래 신앙에 의한 것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이 신앙을 갖고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에 추종해 가는 판단이 늦은 것입니다. 바리새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구원의 조건에 할례까지 요구했습니다. 즉 판단을 잘못해 버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10절)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나 힘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더 다른 것까지 요구한다는 제멋대로의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할례까지 요구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데가 있는 줄 압니다. 늘 하나님께 뭔가 플러스 알파를 구하곤 합니다. 지금 저렇게 해달라거나, 성경에 쓰여 있는 것 같은 기적을 보여달라거나, 내 가까이에 있는 저 사람을 어떻게 해 달라거나 등의 여러 가지를 구합니다. 때로 우리는 여러 가지 멍에를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매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충분히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시험하기를 멈추지 않고 행하는 우리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어느날 바울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과해진 “가시”가 그에게서 나가게 해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아마 지병으로 괴로워했던 것 같습니다. 이 지병만 없다면 더욱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 12장 9절)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크신 충분한 은혜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상기하는 것입니다. 큰 은혜도 작은 은혜도 세어 가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판단 재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신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저는 이렇게 판단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