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드벤트 둘째 주일입니다. 어드벤트 크랜츠의 두번째 양초에도 불이 켜졌습니다. 오늘, 켜진 촛불은 평화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자, 그럼 이번 주도 지난 주에 이어 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린 아브라함을 통해서 어드벤트의 신앙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의 말씀으로 주님이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신앙의 여행을 떠난 아브라함은 곧 애굽으로 이동해서 큰 실수를 하거나(창12:10-20), 큰 분쟁에 말려들거나(창13:1-14:16) 하는 끔직한 일을 겪으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에 그려져 있는 장면입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
이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2-3절)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손이 아직도 주어지지 않은 사실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이 언급한 상속자에 대한 절차는 그가 태어난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의 관습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태어난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에 있었던 관습에 따랐던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있어도 심리적으로는 거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4절) 라고 이 세상의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관습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때 이 세상의 관례에 따라 상속자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신앙에 의하여 상속자를 정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 하나님께서는 불신앙인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5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우선 하나님의 힘입니다. 하늘도 별도 주님이신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 시대에는 마을에 등불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밤이 되면 하늘 전체에 빛나는 별들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하심으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별들을 도저히 헤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헤아려 셀 수조차 없는 사람이 어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심할 수 있었을까요? 왜 약한 인간의 힘이나 관습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힘을 주시하지 않는 것일까요? 여기에 불신앙의 원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6절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절)
불신앙이었던 아브라함이 이제 신앙자로 바뀌었습니다. 이 장면은 이 세상의 관습에 얽매여 우왕좌왕하고 있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아브라함이 우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이 신앙으로 이끌어 주신 것은 주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곧 “신앙 의인”이라고 일컽는 진리입니다. 즉 신앙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근거가 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선언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전혀 옳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 점에서 옳다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의인입니다. 그 밖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오직 신앙만이 있으면 구원받는다, 이것이 성경을 관철하는 진리이며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은 어드벤트 둘째 주일입니다만, 오늘의 말씀으로부터 어드벤트의 신앙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1절에 있는 “나는 너의 방패요” 라는 주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말씀이 여기서 처음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실은 창세기에서는 여기뿐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사용되는 것은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모세 오경이라고 불리는 다섯 개 서적의 마지막에 있는 신명기이고,게다가 그 마지막 부분에 있는 모세의 고별 설교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신 33:29), 이것이 지상에서 말한 모세의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하나님의 백성이자 이스라엘 최초의 사람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나는 네 방패요” 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에 의해 이때 이해된 것도 고백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이해된 것은 그 수백 년 후의 일이며,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서 모세 오경의 맨 마지막에 모세의 입을 통해서 신앙 고백을 한 것이었습니다. 즉 “주는 우리 방패이시다” 이것은 모세 오경의 신앙 고백의 서론이자 결론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신앙이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의 선언이 있다, 그 선언이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사람은 긴 세월에 걸쳐 신앙의 걸음을 계속해야 겨우 하나님께 회답할 수 있다, 그 때 그것이 신앙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실로 신앙 고백이란 몇 대에 걸쳐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이며, 신앙 계승으로 고백하게 된 신앙의 말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싶으냐 하면, 주님을 대망하는 어드벤트의 신앙이라는 것은 단지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이후 신앙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수백 년의 긴 세월 동안 찾아낸 “주님께서는 내 방패시라”라는 이 신앙을 지금의 우리가 계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그 신앙은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개를 숙이고 지상의 가능성과 관습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의 가능성과 말씀에 눈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에 선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여기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걸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헤매는 자입니다. 고민하는 자입니다. 스스로 실패할 뿐만 아니라, 주위의 상황에 우왕좌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어서야 하나님 “어째서 그러십니까?” 라고 한탄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의 외침을 하나님으로 향했을 때 “하늘을 우러러보라” 라는 이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을 우러러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의 가능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섭시다. 이것이 주님을 대망하는 어드벤트의 신앙입니다.
2021年11月28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28編 6~9節
〇讃 頌 讃頌歌 101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創世記(창세기) 15章1~6節
〇説 教 「天を仰げ ~アドベントの信仰~
(하늘을 우러러보라 ~아드벤트의 신앙~)」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00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12月 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天を仰げ~アドベントの信仰~」 創世記 15章 1~6節
今日は、アドベント第二主日です。アドベント・クランツの二本目のロウソクにも火が灯されました。今日、灯されたロウソク火は、平和を表しております。クリスマスの平和が、皆さまと皆さまのご家族にもたらされますよう、お祈りいたします。
さて、今週も、先週に引き続き、信仰の父と呼ばれたアブラハムを通して、アドベントの信仰について、共に学びたいと思います。
先週の御言葉で、主なる神さまの約束に従って信仰の旅に出たアブラハムは、そのすぐ後エジプトに移動し大失敗をしたり(創12:10~20)、大きな争いに巻き込まれたり(創13:1~14:16)、と散々な目に会いながら歩んでいました。そのアブラハムに主なる神さまが再び現れたのが、今日の聖書で描かれている場面です。
主なる神さまが幻の中で語りかけられました。1節、「恐れるな、アブラムよ。わたしはあなたの盾である。あなたの受ける報いは非常に大きいであろう。」(15:1)
この語りかけにアブラムはこう答えております。2節、「わが神、主よ。わたしに何をくださるというのですか。わたしには子供がありません。家を継ぐのはダマスコのエリエゼルです。御覧のとおり、あなたはわたしに子孫を与えてくださいませんでしたから、家の僕が跡を継ぐことになっています。」(2~3節)
このように、アブラムは約束の子孫が未だに与えられていない事実を訴えました。しかし、実は、「家の僕が跡を継ぐことになっています」と、アブラハムが口にした跡継ぎについての手続きは、彼の生まれ故郷であるメソポタミアの慣習であったのです。アブラムは、生まれ故郷と父の家を離れたにもかかわらず、依然としてそこにあった慣習に従って歩んでいたのです。物理的に父の家を離れていても、心理的にはそこにとどまっていたわけです。それは、不信仰であったからです。
ですから、主なる神さまは、「その者があなたの跡を継ぐのではなく、あなたから生まれる者が跡を継ぐ」(4節)と、この世の慣習でなくて、ご自身の御心を示されたのです。これはこの世の慣習で理解するのではなく、信仰によって受け取るしかないものだからです。アブラハムは、この時、この世のしきたりに従って跡継ぎを見出しました。しかし、主なる神さまは信仰による跡継ぎを見出すことを求めておられるのです。
そして、ここで主なる神さまは、不信仰なアブラムに、「天を仰いで、星を数えることができるなら、数えてみるがよい。あなたの子孫はこのようになる」(5節)と言われました。
ここで示されていることは、まず神さまの力です。天も星も主なる神さまの被造物です。この時代、町の灯りなどありませんから、夜になると、空全体に輝く星を見ることが出来たでしょう。その全てが神さまの創造の御業によって輝いているのです。
もう一つは人間の弱さです。アブラハムは、その星を数えることなど出来なかったでしょう。空の星を数えることさえできない者が、どうして、それを創造された神さまを疑うことが出来たでしょうか。どうして、弱い人間の力や慣習ばかり意識して、神さまの力に目を留めないのでしょうか。ここに不信仰の原点があります。
さて、この神さまの問いかけに対するアブラハムの反応が、6節にあります。「アブラムは主を信じた。主はそれを彼の義と認められた。」(6節)
不信仰であったアブラハムが、今信仰者に変えられました。この場面は、この世の慣習に縛られ、右往左往していたアブラハムが、神さまの言葉によって、その束縛から解放された瞬間と言えます。
しかし、それは決してアブラハムが優秀だったからではありません。この信仰に導いてくださったのは、主なる神さまであったのです。これは、やがて「信仰義認」といわれる真理です。すなわち、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という神さまの約束の根拠になった非常に重要な御言葉であります。
義というのは、神さまの前で正しい、と宣言されることです。しかし、アブラハムは、神さまの前に全然正しくありませんでした。むしろ不信仰でした。それでも、神さまの御言葉、神さまの約束を信じた、その一点で正しい、と認めていただいたのです。これが信仰義認なのです。他に何もなくてもいいのです。ただ信仰さえあれば救われる、これが聖書を貫く真理であり、これが福音です。
今日は、アドベント第二主日ですが、今日の御言葉からアドベントの信仰について、二つお話ししたいと思います。
まず一つ目は、1節にあります「わたしはあなたの盾である」という、主なる神さまの宣言です。聖書でこの言葉は、ここで初めて使われていますが、実は、創世記ではここだけなのです。そして、次に使われるのは、創世記から始まるモーセ五書と呼ばれている五つの書物の最後にあります申命記で、しかも、その最後の部分にあります、モーセの告別説教の最後の言葉なのです。「主はあなたを助ける盾」(申33:29)、これが地上で語ったモーセの最後の言葉になったのです。
すなわち、こういうことなのです。神の民イスラエルの最初の人であるアブラハムに与えられた「わたしはあなたの盾である」という神さまの御言葉は、アブラムによってこの時、理解されたのでも、告白されたのでもないのです。これが本当に理解されたのは、その数百年も後のことであり、アブラハム、イサク、ヤコブ、そして出エジプトの出来事を通して、モーセ五書の最後の最後に、モーセの口を通して信仰告白されたもの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主は我が盾である。」これは、モーセ五書の信仰告白の序論であり結論なのです。
皆さん、人の信仰があって、神さまとの関係が作られるというのではないのです。まず、神さまの宣言がある、その宣言が人に与えられる。そして、人は、長い年月をかけて信仰の歩みを続けてようやく神さま回答できる、その時それが信仰告白となるわけです。
実に、信仰告白とは、何代にもわたって変わらぬ神さまの恩恵の賜物であり、信仰の継承によって生み出される信仰の言葉なのです。
何が言いたいのか言いますと、主を待ち望むアドベントの信仰というのは、単に自分が主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というだけではなくて、アブラハム以後、信仰者たちが神さまとの関わりの中で、何百年もの長い年月をかけて見い出した「主は我が盾」というこの信仰を、今の私たちが継承す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それから二つ目、その信仰は「天を仰ぐ」こと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主なる神さまは、「天を仰げ」とアブラハムに言われました。どうしてでしょうか。アブラハムがうつむいていたからです。恐れと不安にうつむいていたからです。うつむくのではなくて、天を仰げ、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うつむいて、地上の可能性と慣習に縛られるのではなく、天を仰いで、神さまの可能性と御言葉に目を向けることです。この世の可能性ではなくて、神さまの可能性に立つ、これが信仰なのです。そして、ここにこそ、私たちキリスト者の歩みがあるはずです。
それでもなお、私たちは疑う者であります。迷う者であります。思い悩む者であります。自ら失敗するだけでなくて、周りの状況に右往左往する者であります。そして、挙句の果てに、行き詰まり、神さまどうしてですか、と嘆く者であります。しかし、その魂の叫びを神さまに向けた時、「天を仰げ」この御言葉が与えられるのです。
皆さん、天を仰ごうではありませんか、天を仰ぎ、神さまの可能性と神さまの御言葉に立とうではありませんか。これが主を待ち望むアドベントの信仰です。
【2021년 12월 5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늘을 우러러보라 ~어드벤트의 신앙~” 창세기 15장 1~6절
오늘은 어드벤트 둘째 주일입니다. 어드벤트 크랜츠의 두번째 양초에도 불이 켜졌습니다. 오늘, 켜진 촛불은 평화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자, 그럼 이번 주도 지난 주에 이어 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린 아브라함을 통해서 어드벤트의 신앙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의 말씀으로 주님이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신앙의 여행을 떠난 아브라함은 곧 애굽으로 이동해서 큰 실수를 하거나(창12:10-20), 큰 분쟁에 말려들거나(창13:1-14:16) 하는 끔직한 일을 겪으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에 그려져 있는 장면입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5:1)
이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2-3절)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손이 아직도 주어지지 않은 사실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이 언급한 상속자에 대한 절차는 그가 태어난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의 관습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태어난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에 있었던 관습에 따랐던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있어도 심리적으로는 거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4절) 라고 이 세상의 관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관습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때 이 세상의 관례에 따라 상속자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신앙에 의하여 상속자를 정할 것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 하나님께서는 불신앙인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5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우선 하나님의 힘입니다. 하늘도 별도 주님이신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 시대에는 마을에 등불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밤이 되면 하늘 전체에 빛나는 별들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하심으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별들을 도저히 헤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헤아려 셀 수조차 없는 사람이 어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심할 수 있었을까요? 왜 약한 인간의 힘이나 관습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힘을 주시하지 않는 것일까요? 여기에 불신앙의 원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6절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6절)
불신앙이었던 아브라함이 이제 신앙자로 바뀌었습니다. 이 장면은 이 세상의 관습에 얽매여 우왕좌왕하고 있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아브라함이 우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이 신앙으로 이끌어 주신 것은 주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은 곧 “신앙 의인”이라고 일컽는 진리입니다. 즉 신앙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근거가 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선언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전혀 옳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 점에서 옳다고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의인입니다. 그 밖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오직 신앙만이 있으면 구원받는다, 이것이 성경을 관철하는 진리이며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은 어드벤트 둘째 주일입니다만, 오늘의 말씀으로부터 어드벤트의 신앙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첫번째는, 1절에 있는 “나는 너의 방패요” 라는 주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말씀이 여기서 처음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실은 창세기에서는 여기뿐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사용되는 것은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모세 오경이라고 불리는 다섯 개 서적의 마지막에 있는 신명기이고,게다가 그 마지막 부분에 있는 모세의 고별 설교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신 33:29), 이것이 지상에서 말한 모세의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하나님의 백성이자 이스라엘 최초의 사람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나는 네 방패요” 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에 의해 이때 이해된 것도 고백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이해된 것은 그 수백 년 후의 일이며,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서 모세 오경의 맨 마지막에 모세의 입을 통해서 신앙 고백을 한 것이었습니다. 즉 “주는 우리 방패이시다” 이것은 모세 오경의 신앙 고백의 서론이자 결론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신앙이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의 선언이 있다, 그 선언이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사람은 긴 세월에 걸쳐 신앙의 걸음을 계속해야 겨우 하나님께 회답할 수 있다, 그 때 그것이 신앙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실로 신앙 고백이란 몇 대에 걸쳐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이며, 신앙 계승으로 고백하게 된 신앙의 말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싶으냐 하면, 주님을 대망하는 어드벤트의 신앙이라는 것은 단지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이후 신앙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수백 년의 긴 세월 동안 찾아낸 “주님께서는 내 방패시라”라는 이 신앙을 지금의 우리가 계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그 신앙은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개를 숙이고 지상의 가능성과 관습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의 가능성과 말씀에 눈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에 선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여기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걸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의심하는 사람입니다. 헤매는 자입니다. 고민하는 자입니다. 스스로 실패할 뿐만 아니라, 주위의 상황에 우왕좌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어서야 하나님 “어째서 그러십니까?” 라고 한탄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영혼의 외침을 하나님으로 향했을 때 “하늘을 우러러보라” 라는 이 말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을 우러러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나님의 가능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섭시다. 이것이 주님을 대망하는 어드벤트의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