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0년 9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퓨리턴(청교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 그들에게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거의 없어 굶주림과 추위와 병으로 반수가 죽었습니다. 이윽고 봄이 오고, 원주민 인디언으로부터 종자를 받아 농사를 가르쳤습니다. 그 해 가을, 풍부한 수확을 거둔 그들은 허술한 통나무 집 교회에 모여 수확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힘들었던 인내의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작은 종자의 싹을 틔우시고, 태양을 빛내고, 비를 내리고, 성장시켜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마음으로부터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도와준 인디언들을 부르고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11월의 네번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로서 축하합니다.
퓨리턴의 사람들은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함께 온 동료의 절반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끔찍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보통이라면 하나님께 원망이나 괴로움의 한마디라도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한 자기들의 노력을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이란 수확을 위해서 수고한 자기들의 노력을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Thanksgiving Day에는 수확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6편은 시편 135편과 함께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시입니다. 이 136편의 특징은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말씀이 중심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이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 말로 “헤세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은혜를 뜻하는 말입니다만, 구약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바빌론 유수 이후에 작사되어 유월절 축제에서 불렸습니다. 바빌론 유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가장 멀다고 생각되는 가운데 이 노래는 만들어져 불려져 온 것입니다.
136편은 우선 1~3절에서는 세줄을 감사의 노래로 시작하고, 4~9절에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감사하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10~15절에서는 출애굽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감사하라고 노래합니다. 다음에 16절에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신 것에 감사하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17~2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두에 서서 역사해 주셨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헤세드)이 얼마나 컸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 말씀인 23~25절에서는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된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우선 23절입니다만,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라는 것은 싸움의 고투 끝에 패하고 나라를 잃어 드디어 외국의 죄수로 된 것을 기억하고, 그 굴욕의 날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그 하나님께서 드디어 성전 재건으로 인도해 주심을 상기하고, 또 25절에서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오랫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갈 양식을 계속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6절에 다시 한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을 잊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약의 역사를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시편 136편의 의미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을 해야만 비로소 정말로 알 수 있는 것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21절과 22절에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라고 했습니다만, 지금 현재의 우리의 기업이라는 것은 직장이나 일이 됩니다. 그러나 그 기업을 코로나로 인해 잃게 된 사람들이 많이 계십니다.
또, 23절에는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라고 했습니다만, 코로나 속에서 한층 더 격차 사회가 진행되어, 사회에서 잊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감사하는 기분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불리기 시작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죄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하나님께 감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미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현실에 한탄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그리고 지금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해 주시는지를 상기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셔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을 상기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신앙이 지켜지고 성전 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미국의 시인 윌콕스는 범선을 보면서 노래 불렀습니다. “똑같은 바람이 불어도 어떤 배는 서쪽으로, 어떤 배는 동쪽으로 간다. 그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돛을 다는 방식에 따라 방향을 결정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주위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다” 라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다고 생각되는 고난이나 시련이 닥쳤을 때, 거기서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난과 시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쓰러지지 않는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 괴롭고 힘든 상황에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힘든 일 뿐일까? 하나님은 괴로운 일만 주셨을까?” 라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러한 역설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살아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의 예배부름으로 신명기 11장 13~15절을 읽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11:13-15)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풍부한 수확을 얻게 해 주십니다. 이전에 퓨리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 인도해 주시는 것을 믿고, 그것을 마음의 지주로 삼아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수확 감사를 축하하면서 새로운 길을 걸어 갔습니다. 곤란의 연속으로 불안과 비참함이 다가오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믿고 나아갔습니다. 실패해도 상관없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이끌어 주신다는 확신이 그들의 힘든 여행을 은혜로운 풍족한 여행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수확을 앞두고 기도와 찬미를 함께 한 퓨리턴의 신앙을 따르고 싶습니다.
아직도 코로나의 불안이 남아 있습니다만, 우리는 각각 놓여진 장소에서 거기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에 감사하면서, 또, 소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2021年11月21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申命記(신명기) 11章 13~15節
〇讃 頌 讃頌歌 21(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詩編(시편) 136編 23~26節
〇説 教 「主の慈しみに感謝せよ(주님의 인자하심에 감라하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89(1, 4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11月 2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主の慈しみに感謝せよ」 詩編 136編 23~26節
1620年9月、信仰の自由を求めて、英国から米国に渡ったピューリタン(清教徒)の人たちがいました。その年の冬、彼らには食べる物も着る物もほとんどなく、飢えと寒さと病気で半数が死にました。やがて春が来て、先住民のインディアンから種子をもらい農耕を教えられました。その年の秋、豊かな収穫を与えられた彼らは、粗末な丸太小屋の教会に集まり収穫感謝の礼拝をささげました。
苦しかった忍耐の生活を振り返りつつ、「小さな種子の芽を育て、太陽を輝かし、雨を降らせ、成長させて豊かな実りをお与え下さった神さまに感謝します」と心からの祈りをささげました。そして、助けてくれたインディアンを招いて、パーティーを開きました。それが収穫感謝祭の初めだと言われています。米国では、11月の第4木曜日を収穫感謝祭(Thanksgiving Day)として祝います。
ピューリタンの人たちは、大変な苦労をしました。一緒に来た仲間の半分は死んでしまったのです。そんなひどい経験をしたにも拘らず、彼らはまず神さまに感謝したのです。普通なら、神様に恨みや辛みの一言でも言いたいところです。そして、頑張った自分たちの努力を褒めてあげたいところです。しかし、彼らは、まず神さまに感謝しました。収穫感謝祭とは、収獲のために労した自分の努力を誉めてあげ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はなく、与えられた恵みに感謝するものだということです。英語のThanksgiving Dayには収穫という言葉はありません。与えられたものに感謝する日という意味なのです。
今日、読みました詩編136編は、詩編135編と共に、歴史を支配される神さまに感謝を表す詩です。この136編の特徴は、「慈しみはとこしえに」という言葉が繰り返されていることです。「慈しみはとこしえに」、この言葉が中心主題となっています。ここで「慈しみ」と訳されている言葉は、ヘブル語で「ヘセド」という言葉です。神さまの憐れみ、恵みを意味する言葉ではありますが、旧約聖書においては、神さまの愛を表す言葉です。神さまの恵み、神さまの愛は永遠である。神さまの愛がいつまでも私たちに降り注がれる、ということです。
この詩編は、バビロン捕囚以後に作詞され、過ぎ越しの祭りで歌われました。バビロン捕囚という、神さまの恵みからもっとも遠いと思われる中で、この歌は作られ、歌われて来たのです。
136編は、まず、1~3節における三連の感謝の歌で始まり、4~9節で、創造主なる神さまを感謝せよと歌います。そして、10~15節では、出エジプトにおける神さまの御業を感謝せよと歌います。次に、16節では、カナンの地に定住するまでの荒野でのイスラエルの民を守って下さったことを感謝せよと歌います。それから、17~22節では、神さまがイスラエルの歴史の中で、実際にイスラエルの民たちの先頭に立ち、働いてくださった。その神さまの恵みと慈しみ(ヘセド)が、いかに大きかったかを歌っています。
そして、今日の御言葉である23~25節では、バビロン捕囚から解放されたことに対する感謝です。
まず、23節ですが、「低くされたわたしたちを、御心に留めた方に」とは、戦いの苦闘の果てに敗れ、国を失い、ついに外国の補囚とされたことを思い起こし、その屈辱の日々の中でも、神さまは見捨てなかったと告白しているのです。そして、24節では、その神さまが、ついに神殿再建へと導かれたことを思い起こし、また、25節では、そこに至るまでの長い間、神さまはイスラエルの民たちに生きる糧を与え続けて下さった、その恵みを感謝しております。そして最後、26節で改めて「天にいます神に感謝せよ。慈しみはとこしえに」と、イスラエルの民たちに対する神さまの慈しみ(ヘセド)を忘れないようにと、記録しているのです。
私たち、旧約の歴史を知り、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る贖いの恵み、神さまの愛を信じる者にとっては、詩編136編の意味することは、よく理解出来ます。しかし、私たちは経験して初めて、本当に知るということが、多いのも事実かと思います。
21・22節に「嗣業として与えた方に感謝せよ」とありましたが、今現在の私たちの嗣業というのは、職場や仕事が嗣業になります。でも、その嗣業が、コロナ禍によって奪われた人が多くおられます。
また、23節には「低くされたわたしたち」とありましたが、コロナ禍の中で、さらに格差社会が進み、社会から忘れ去れている人々がいることを考えますと、とても感謝する気持ちにはなれません。
しかし、この詩編が歌い始められたイスラエルの人々の状況を思い起こさ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捕囚の民として、イスラエルの民たちは、とても神さまに感謝することは出来ない状況でした。それでもなお、彼らは神さまに感謝を献げ、讃美することを止めようとはしなかったのです。今の現状に嘆くだけではなく、過去に、神さまがいかに多くの恵みを与えて下さったか、そして、今も、この厳しい状況の中でも、神さまが私たちを愛し導いて下さっているかを、思い起こして神さまを讃美しているのです。
実際、神さまはいかなる状況の中にあっても、イスラエルの民たちと共におられ導かれたのです。その神さまの慈しみ(ヘセド)を思い起こし、主の御言葉に聞き従う者たちによってイスラエルの信仰が守られ、神殿再建へとつながっていくわけです。
米国の詩人ウィルコックスは帆船を見ながら詠いました。「全く同じ風が吹いても、ある船は西へ、ある船は東へ行く。それは風のせいではなく、帆の張りかたが行く先を決めているのだ。同じ様に私たちの人生の方向を決めているのも周りの環境ではなく、私たちの魂である」と。
神さまの恵みから遠いと思われる苦難や試練にあって、そこで何を思い、どのように歩むのかは、私たち次第なのです。そこで、神さまの恵みを思い起こしながら、感謝をもって前へと進もうとする者を神さまは祝福して下さるのです。
使徒パウロは、コリントへの信徒への手紙一10章13節で、「あなたがたを襲った試練で、人間として耐えられないようなものはなかったはずです。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ような試練に遭わせることはなさらず、試練と共に、それに耐えられるよう、逃れる道を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Ⅰコリント10:13)と言っています。
パウロがこのように言うのは、神さまが人を苦難や試練から解放することだけではなく、苦難や試練のうちに起こる出来事に打倒されない力を神さまから与えられていると信じているからです。
実際に今、辛く大変な状況です。しかし、「本当につらいことばかりなのか?」「神さまはつらいことばかりお与えになっているのか?」と、考える必要もあります。神さまを信じる者には、このような逆説を信頼できるのです。これが本当の生きた信仰なのです。
今日の招きの言葉として、申命記11章13~15節をお読みしました。「もしわたしが今日あなたたちに命じる戒めに、あなたたちがひたすら聞き従い、あなたたちの神、主を愛し、心を尽くし、魂を尽くして仕えるならば、わたしは、その季節季節に、あなたたちの土地に、秋の雨と春の雨を降らせる。あなたには穀物、新しいぶどう酒、オリーブ油の収穫がある。わたしはまた、あなたの家畜のために野に草を生えさせる。あなたは食べて満足する。」(申11:13-15)
「あなたたちの神、主を愛し、心を尽くし、魂を尽くして仕える」者に、神さまは豊かな収穫を得させて下さるのです。かつて、ピューリタンの人々は神さまが共にいて導かれることを信じて、それを心の支えにして旅を続けました。そして、収穫感謝を祝うことをしながら、新しい道を歩んで行きました。困難の連続に不安とみじめさが迫る中でも、彼らは信じて進んで行ったのです。失敗してもかまわない。主が共にいて導かれるという確信が、彼らの困難な旅を恵み豊かな旅へと変えた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もまた、神さまの恵み溢れる収穫を前に祈りと讃美を共にしたピューリタンの信仰に倣いたいと思います。
まだまだ、コロナの不安がありますが、私たちは、それぞれ置かれた場所で、そこに注がれている神さまの豊な恵みに感謝しつつ、また、希望をもって前へと歩んで行きましょう。
【2021년 11월 21일 주일예배(요약판)】
“주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라” 시편 136편 23~26절
1620년 9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퓨리턴(청교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 그들에게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거의 없어 굶주림과 추위와 병으로 반수가 죽었습니다. 이윽고 봄이 오고, 원주민 인디언으로부터 종자를 받아 농사를 가르쳤습니다. 그 해 가을, 풍부한 수확을 거둔 그들은 허술한 통나무 집 교회에 모여 수확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힘들었던 인내의 생활을 되돌아보면서 “작은 종자의 싹을 틔우시고, 태양을 빛내고, 비를 내리고, 성장시켜 풍성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마음으로부터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도와준 인디언들을 부르고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11월의 네번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로서 축하합니다.
퓨리턴의 사람들은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함께 온 동료의 절반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끔찍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보통이라면 하나님께 원망이나 괴로움의 한마디라도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한 자기들의 노력을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이란 수확을 위해서 수고한 자기들의 노력을 칭찬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영어의 Thanksgiving Day에는 수확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6편은 시편 135편과 함께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시입니다. 이 136편의 특징은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 말씀이 중심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이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 말로 “헤세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은혜를 뜻하는 말입니다만, 구약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바빌론 유수 이후에 작사되어 유월절 축제에서 불렸습니다. 바빌론 유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가장 멀다고 생각되는 가운데 이 노래는 만들어져 불려져 온 것입니다.
136편은 우선 1~3절에서는 세줄을 감사의 노래로 시작하고, 4~9절에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감사하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10~15절에서는 출애굽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역사를 감사하라고 노래합니다. 다음에 16절에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신 것에 감사하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17~2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두에 서서 역사해 주셨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헤세드)이 얼마나 컸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성경 말씀인 23~25절에서는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된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우선 23절입니다만,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라는 것은 싸움의 고투 끝에 패하고 나라를 잃어 드디어 외국의 죄수로 된 것을 기억하고, 그 굴욕의 날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는 그 하나님께서 드디어 성전 재건으로 인도해 주심을 상기하고, 또 25절에서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오랫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갈 양식을 계속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26절에 다시 한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을 잊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약의 역사를 알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속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시편 136편의 의미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경험을 해야만 비로소 정말로 알 수 있는 것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21절과 22절에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라고 했습니다만, 지금 현재의 우리의 기업이라는 것은 직장이나 일이 됩니다. 그러나 그 기업을 코로나로 인해 잃게 된 사람들이 많이 계십니다.
또, 23절에는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라고 했습니다만, 코로나 속에서 한층 더 격차 사회가 진행되어, 사회에서 잊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감사하는 기분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불리기 시작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죄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하나님께 감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미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현실에 한탄할 것이 아니라, 과거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그리고 지금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해 주시는지를 상기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셔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헤세드)을 상기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들에 의해 이스라엘의 신앙이 지켜지고 성전 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미국의 시인 윌콕스는 범선을 보면서 노래 불렀습니다. “똑같은 바람이 불어도 어떤 배는 서쪽으로, 어떤 배는 동쪽으로 간다. 그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돛을 다는 방식에 따라 방향을 결정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주위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다” 라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다고 생각되는 고난이나 시련이 닥쳤을 때, 거기서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난과 시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쓰러지지 않는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 괴롭고 힘든 상황에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힘든 일 뿐일까? 하나님은 괴로운 일만 주셨을까?” 라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러한 역설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살아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의 예배부름으로 신명기 11장 13~15절을 읽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11:13-15)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풍부한 수확을 얻게 해 주십니다. 이전에 퓨리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 인도해 주시는 것을 믿고, 그것을 마음의 지주로 삼아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수확 감사를 축하하면서 새로운 길을 걸어 갔습니다. 곤란의 연속으로 불안과 비참함이 다가오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믿고 나아갔습니다. 실패해도 상관없다.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이끌어 주신다는 확신이 그들의 힘든 여행을 은혜로운 풍족한 여행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수확을 앞두고 기도와 찬미를 함께 한 퓨리턴의 신앙을 따르고 싶습니다.
아직도 코로나의 불안이 남아 있습니다만, 우리는 각각 놓여진 장소에서 거기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에 감사하면서, 또, 소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