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0-31절)
이와 같이 사도행전은 마지막으로 바울의 소식을 간단하게 적고 끝납니다. 사도행전은 지금까지 파란 많은 복음 선교의 기록을 보여 왔습니다. 그런데도 로마에서의 전도는 최초로 로마에 사는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과 아까 읽은 로마에서의 모습을 짧게 이야기할 뿐입니다. 정말로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실은 그 부족함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세 가지 말씀드리고 이 사도행전의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번째는 바울의 소식에 대해서입니다. 여기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바울의 지상에서의 걸음은 나머지 2년 동안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2년 뒤에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을 때에는 이것을 기록한 누가는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바울의 순교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용감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그 바울의 순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 않으며, 그 후에 기록된 다른 신약성서에도 일절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해 가는 모습을 그린 사도행전, 그리고 그 후의 복음 선교에 있어서 바울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필요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살았느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을 받은 교회는 박해의 검에 둘러싸여 내일 어찌될지 모르는 목숨을 드러내고 복음 선교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그 죽은 모습까지 잘 알려진 순교자 바울이 풍전 등화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가르치더라”, 이 전도자의 삶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교회는 이 모습에 더 분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에 있어서, 그리고 이것을 기록한 누가나 이것을 주어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천국은 지극히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바울도, 그 후 교회에서 하늘로 옮겨진 순교자들도 결코 먼 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지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같은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으며, 단지 사는 모습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그들은 당연히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의 교회는 어떻게 죽었느냐고 상심하고 고개 숙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소망에 불타 하늘을 우러러보았던 것입니다. 이 경우 바울의 순교 기록 등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무리로부터 하늘의 고향으로 가신 형제 자매가 어떻게 지금 살고 있는가 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십니까? 드디어 그들과 다시 만날 소망에 가슴 설레고 있으십니까? 천국은 가까울까요? 이것이 진정한 신앙자만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며 기쁨일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 절 직전에서 이사야의 소명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는 것과의 관계입니다.
구약 시대, 이사야가 언급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26절), 이것이 이 사도행전의 에필로그에 놓여 있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이후 새로운 복음 선교의 막이 열릴 때 이 말씀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분발하여 선지자로서 이제부터 파견되는 그 때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사야의 이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을까요?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26-27절)
이사야는 이러한 백성들의 품으로 보내졌습니다.
우리의 복음 선교 또한 이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행전은 막 끝나가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 선교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 사도행전의 속편은 그 후의 교회에 맡겨졌고, 지금 우리는 그 최전선에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즉, 복음 선교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이 완고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에필로그는 우리의 복음 선교의 프롤로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과 열정을 가지고 복음 선교를 섬깁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완고한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거칠 것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31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1절)
실은 이 절의 그리스어의 본문을 읽으면, 순서가 조금 달라서 “담대하게 거침없이” 이것이 마지막에 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말씀은 “거침없이” 이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금 바울은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죄수이므로 활동 범위마저 제한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도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그 완고한 백성들에게 보내어집니다. 오히려 거칠 것 투성이가 아닐까요? 그래도 “거침없이” 라고 이렇게 사도행전은 지금 간단하게 끝이 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사도행전을 다 읽는 우리에게는 이미 그 해답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복음 선교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라고 약속하고 사도 행전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에 거침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약함 속에 복음 선교를 가두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선교에 마이너스 요소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일년 반 동안, 우리에게는 많은 곤란이 주어졌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고통받았고 시련과 슬픔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복음 선교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그 고난 속에서도 성령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전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그 일주일 후에는 강림절에 들어갑니다. 현재 코로나의 감염이 조금은 진정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감사절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감사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 고난 속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거침없이” 이처럼 마음을 찌르는 말이 또 있을까요?
감사절, 그리고 강림절에,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가지고, 우리는 구세주를 대망하면서 복음 선교를 섬기고 있습니다. 완악한 이 세상에 내보내어져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곤란이 있겠지요. 그러나 “거침없이” 라고 말씀이 약속할 때, 이 세상의 어둠조차도 소망의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도행전 전체를 관철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빛입니다.
2021年11月14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이사야) 6章 9~10節
〇讃 頌 讃頌歌 446(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8章23~31節
〇説 教 「何の妨げもなく(거침없이)」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91(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11月 1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何の妨げもなく」 使徒言行録 28章 23~31節
約一年半、読み続けてきた使徒言行録は、今日で最終回となります。
「パウロは、自費で借りた家に丸二年間住んで、訪問する者はだれかれとなく歓迎し、全く自由に何の妨げもなく、神の国を宣べ伝え、主イエス・キリストについて教え続けた。」(30-31節)
このように、使徒言行録は、最後に、パウロの消息を簡単に記して終わっております。使徒言行録は、今まで波乱に富んだ福音宣教の記録を示してきました。それなのに、ローマでの伝道は、最初にローマに住む「おもだったユダヤ人たち」に語った内容と、先程のローマでの様子を短く語るだけです。本当に物足りなさを感じます。しかし、実は、その物足りなさが非常に重要なのです。
そのことを三つの点から申し上げて、この使徒言行録の説教を終わりたいと思います。
まず一つ目は、パウロの消息についてです。ここに、「パウロは、自費で借りた家に丸二年間住んで」、とあります。これは言い換えるとパウロの地上での歩みは残り二年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
パウロは、この二年後に殉教した、と伝えられております。この使徒言行録が書かれた時には、これを書いたルカは勿論、キリスト者であるなら、誰でもパウロの殉教のことをよく知っていたはずです。それは、勇ましく雄々しい死であったと思います。しかし、使徒言行録はそのパウロの殉教について記録しておりませんし、その後書かれた、他の新約聖書にも一切記されておりません。それは、どうしてでしょうか。
それは、不要だからです。福音が、地の果てまで響き渡って行く姿を描く使徒言行録、そしてその後の福音宣教にとって、パウロがいかに死んだか、という情報は必要なかったのです。むしろ、どのように生きたかが必要であったのです。
この使徒言行録を受け取った教会は、迫害の剣に囲まれ、明日をも知らぬ命にさらされて福音宣教に仕えていたのです。そんな彼らに、その死に様まで良く知られている殉教者パウロが、風前の灯火ともいえる状態で、最後まで「神の国を宣べ伝え、主イエス・キリストについて教え続けた」、この伝道者の生き方が示されたのです。教会は、この姿に奮い立ったでしょう。
しかし、それだけ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もっと大切なのは、使徒言行録にとって、そして、これを記したルカや、これを与えられたキリスト者にとって、天国は極めて近かっ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地上に残された者にとって、パウロも、その後教会から天に移された殉教者も、決して遠い世界に行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のです。彼らは、もはや地上には見えないが、非常に近くにいる、同じ神の国で生きている、ただ生き方が変わっただけであると、彼らは、当然のようにそう信じていたのです。ですから、最初期の教会は、どうやって死んだか、と胸を痛めてうつむくのではなくて、むしろ、どうやって今生きているのか、その希望に燃えて天を仰いだのです。その場合、パウロの殉教の記録など、もはや必要ないのです。
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私たちの群れから、天の故郷に行った兄弟姉妹が、どうやって今生きているのか、と天を仰いでいますでしょうか。やがて彼らと再開する希望に胸を躍らせていますでしょうか。天国は近いでしょうか。これが真の信仰者だけに与えられる特権であり、喜びのはずです。
それから二つ目は、この節の直前で、イザヤの召命の御言葉が引用されていることとの関係です。
旧約時代、イザヤに語られた、「あなたたちは聞くには聞くが、決して理解せず、見るには見るが、決して認めない」(26節)、これがこの使徒言行録のエピローグに置かれていることが非常に重要なのです。それは、使徒言行録以降の、新しい福音宣教の幕が開ける時に、この言葉が与えられているからなのです。これは、イザヤが、奮い立って、預言者として今から遣わされる、その時に与えられた言葉です。しかし、その内容はなんとイザヤの理想とかけ離れていたことでしょう。「聞くには聞くが、決して理解せず、見るには見るが、決して認めない。この民の心は鈍り、耳は遠くなり、目は閉じてしまった。こうして、彼らは目で見ることなく、耳で聞くことなく、心で理解せず、立ち帰らない。わたしは彼らをいやさない。」(26-27節)
イザヤは、このような民のもとに遣わされたのです。
私たちの福音宣教も、これと同じであ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今、使徒言行録は、終わろうとしています。しかし、福音宣教が終わ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この使徒言行録の続編は、その後の教会に託され、今、私たちはその最前線におります。その私たちにこの御言葉が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
つまり、福音宣教とは、「聞くには聞くが、決して理解せず、見るには見るが、決して認めない」、この頑なな民のもとに福音を届け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使徒言行録のエピローグは、私たちの福音宣教のプロローグになっているのです。私たちは、希望と情熱をもって福音宣教に仕えます。しかし、そこには頑なな民が待っているのです。
しかし、3つ目、それでもなお、そこに「何の妨げもない」ということです。31節です。「全く自由に何の妨げもなく、神の国を宣べ伝え、主イエス・キリストについて教え続けた。」(31節)
実は、この節のギリシャ語の本文を読みますと、順番が少し違いまして、「全く自由に何の妨げもなく」、これが最後に来るのです。使徒言行録の最後の言葉は、「何の妨げもなく」、これなのです。
これは、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現にパウロは今鎖につながれております。囚人ですので、活動の範囲さえ制限されています。また、私たちも、「見るには見るが、決して認めない」、この頑なな民のところに遣わされます。むしろ妨げだらけ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それでもなお「何の妨げもなく」と、このように使徒言行録は、今あっさりと終わるのです。どうしてでしょうか?
今日、使徒言行録を読み終えます私たちには、もうその解答は与えられております。聖霊なる神さまが福音宣教の主だからです。だから、「何の妨げもなく」と、約束して使徒言行録は終わるのです。
それでもなお、私たちの目に妨げが映るのなら、それは私たちが、私たちの弱さの中に福音宣教を閉じ込めているだけの話なのです。妨げがあるとしたら、それは、私たちが作り出しているものなのです。なぜなら、福音宣教にマイナス要素はないからです。
この一年半の間、私たちには多くの困難が与えられました。コロナ禍で苦しみ、試練や悲しみも与えられました。しかし、それでもなお、私たちの教会が福音宣教の最前線に立っているのは、その苦難の中でも、聖霊なる神さまの導きによって、私たちが前進しているからです。
来週は、感謝節を迎えます。その一週間後には、アドベントに入ります。今のところ、コロナの感染が落ち着いている中で、感謝節が迎えられますことは、本当に感謝です。でも、この先、どうなっていくのか分かりません。また、苦難の中で、クリスマスを迎えなければならないかもしれません。そのような中にある私たちにとって、「全く自由に何の妨げもなく」、こんなに突き刺さる言葉があるでしょうか?
感謝節、そして、アドベントにあって、この世の暗闇の中で、心からの感謝をもって、私たちは救い主を待ち望みながら、福音宣教に仕えております。頑ななこの世に遣わされております。もちろん、そこには多くの困難があるでしょう。しかし、「何の妨げもなく」と、御言葉が約束します時、この世の暗闇さえも希望の光に満ちています。それは、この使徒言行録全体を貫くキリストの御言葉の光です。
【2021년 11월 14일 주일예배(요약판)】
“거침없이” 사도행전 28장 23~31절
약 일년 반 동안 계속 읽어 온 사도행전은 오늘로 마지막회가 됩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0-31절)
이와 같이 사도행전은 마지막으로 바울의 소식을 간단하게 적고 끝납니다. 사도행전은 지금까지 파란 많은 복음 선교의 기록을 보여 왔습니다. 그런데도 로마에서의 전도는 최초로 로마에 사는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과 아까 읽은 로마에서의 모습을 짧게 이야기할 뿐입니다. 정말로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실은 그 부족함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세 가지 말씀드리고 이 사도행전의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번째는 바울의 소식에 대해서입니다. 여기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바울의 지상에서의 걸음은 나머지 2년 동안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2년 뒤에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이 기록되었을 때에는 이것을 기록한 누가는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바울의 순교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용감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그 바울의 순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지 않으며, 그 후에 기록된 다른 신약성서에도 일절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해 가는 모습을 그린 사도행전, 그리고 그 후의 복음 선교에 있어서 바울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필요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살았느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사도행전을 받은 교회는 박해의 검에 둘러싸여 내일 어찌될지 모르는 목숨을 드러내고 복음 선교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그 죽은 모습까지 잘 알려진 순교자 바울이 풍전 등화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가르치더라”, 이 전도자의 삶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교회는 이 모습에 더 분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사도행전에 있어서, 그리고 이것을 기록한 누가나 이것을 주어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천국은 지극히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바울도, 그 후 교회에서 하늘로 옮겨진 순교자들도 결코 먼 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지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같은 하나님 나라에서 살고 있으며, 단지 사는 모습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그들은 당연히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의 교회는 어떻게 죽었느냐고 상심하고 고개 숙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소망에 불타 하늘을 우러러보았던 것입니다. 이 경우 바울의 순교 기록 등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무리로부터 하늘의 고향으로 가신 형제 자매가 어떻게 지금 살고 있는가 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십니까? 드디어 그들과 다시 만날 소망에 가슴 설레고 있으십니까? 천국은 가까울까요? 이것이 진정한 신앙자만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며 기쁨일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 절 직전에서 이사야의 소명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는 것과의 관계입니다.
구약 시대, 이사야가 언급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26절), 이것이 이 사도행전의 에필로그에 놓여 있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이후 새로운 복음 선교의 막이 열릴 때 이 말씀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분발하여 선지자로서 이제부터 파견되는 그 때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사야의 이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을까요?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26-27절)
이사야는 이러한 백성들의 품으로 보내졌습니다.
우리의 복음 선교 또한 이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행전은 막 끝나가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 선교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 사도행전의 속편은 그 후의 교회에 맡겨졌고, 지금 우리는 그 최전선에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즉, 복음 선교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이 완고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에필로그는 우리의 복음 선교의 프롤로그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과 열정을 가지고 복음 선교를 섬깁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완고한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거칠 것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31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1절)
실은 이 절의 그리스어의 본문을 읽으면, 순서가 조금 달라서 “담대하게 거침없이” 이것이 마지막에 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말씀은 “거침없이” 이것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금 바울은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죄수이므로 활동 범위마저 제한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도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그 완고한 백성들에게 보내어집니다. 오히려 거칠 것 투성이가 아닐까요? 그래도 “거침없이” 라고 이렇게 사도행전은 지금 간단하게 끝이 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사도행전을 다 읽는 우리에게는 이미 그 해답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복음 선교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라고 약속하고 사도 행전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에 거침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약함 속에 복음 선교를 가두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거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선교에 마이너스 요소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일년 반 동안, 우리에게는 많은 곤란이 주어졌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고통받았고 시련과 슬픔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복음 선교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그 고난 속에서도 성령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전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그 일주일 후에는 강림절에 들어갑니다. 현재 코로나의 감염이 조금은 진정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감사절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감사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되어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 고난 속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거침없이” 이처럼 마음을 찌르는 말이 또 있을까요?
감사절, 그리고 강림절에,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가지고, 우리는 구세주를 대망하면서 복음 선교를 섬기고 있습니다. 완악한 이 세상에 내보내어져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곤란이 있겠지요. 그러나 “거침없이” 라고 말씀이 약속할 때, 이 세상의 어둠조차도 소망의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도행전 전체를 관철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빛입니다.